「사회를 보는 논리」에서 저자 김찬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존엄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찾는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동차라는 특정 상품이 우리나라의 체면의식과 맞물려, 나와 타인을 구별짓는 일종의 '차이표시 기호' 및 '자기정체성 확인의 도구'로서의 매우 강력한 상징 효과를 가지게 된다라 말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 이 자동차란 상품이, 그처럼 (주로 외부를 향한) 상징으로만 작용하는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이동의 편리함/신속함'을 제공하는 운송수단이라는 실질적 용도 이외에도,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하다. 그러한 통제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차내 공간 그 자체가 자족감을 준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참견이나 눈치에서 벗어나 마음껏 음악을 듣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그곳은 오붓한 휴게실이다."
- 김찬호, 「문화의 발견」중 p39, 문학과지성사, 2007.
이처럼 자동차는 작게는 '오붓한 휴게실'로 기능하기도, 아주 크게는 나(me, myself)라는 존재를 'King of the World'로 만들어주는 그 세상(world)이 되어주기도 한다라, 김찬호는 규정합니다. 그러나,
위의 모든 규정들은, 내가 그 자동차의 주인일 때라는 상황을 전제로 할 때라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들이지요. 이 책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은, "모두가 하루쯤 출근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밤은 절반쯤 멈"(p183)추게 된다는, 그러나 김찬호가 규정한 상징들의 전제조건인 '내가 주인'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수는 없는, 그 주인들에게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잠시 빌려주기 위해 그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는 '대리기사'의 시선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일면(一面)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그 일면은 다음에 관계한다,라 저자는 책의 시작에 밝히고 있습니다... 만,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p8)
·
·
·
전문서적이 아닌, 그저 일 개인의 일기장스런 한 편의 에세이입니다. 당연히 어려운 내용이 들어있지도 않으며, 뭐 대단한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다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다만 ---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란게 무지하게 간절하다라 느껴졌으며, 또한 그 하고 싶은 말이란 게 참 많기도 하구나,란 느낌은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는 반복이 발산하고 있는 저자의 간절함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p7)
이 세 마디로 정리됩니다. 이 세 마디가 의미하는 바의, 다른 표현의 버젼들이 저자의 일상과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게 바로 이 책의 내용이에요. 전 세계 남자들의 술자리에 공히 적용된다는 '기-승-전-여자 이야기'의 '깔때기 효과' 마냥, 일단 이 책은 뭔 이야기를 읽게 되건,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위 세 마디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헌데 이런 반복에서, 지겹다란 감정이 아닌, 간절함을 느꼈던 건 아마도, --- 저자가 품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하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p108)의 감정이, 오롯이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네요.
……………………………………………………………………………………
【 대리인간 】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서, 「자발적 복종」중 p70, 생각정원, 2013.
대리기사의 자격으로 운전석에 앉는다는 건 결코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저자의 경험에 의하자면, 목적지와 경로, 실내의 온도, 심지어 차 속 공기의 오염도까지도, 차주인에 의해 제어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위와 같은 상황은, '제어당함'이란 단어가 아닌,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포장되어 대리기사들에게 교육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 다음은 '말'의 통제다. …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pp8~9)
………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p34)
'투철한 서비스 정신'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관습'이란 단어와 구별지어낼 수 없게 됩니다. 대리기사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한, '제어당함'이란 상황을 급기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리고 --- 이제부터 뭔가 이야기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p10) …… ①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②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③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p36)
①번 속 '국가 시스템'이란 단어가 영 거북스럽다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리 '자본'을 대신 넣어보기로 하지요.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디어, 특히 자본의 직접적 지배 하에 있는 미디어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우리들을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으로 훌륭하게 변신시켜 놓습니다. '발품 파는 일은 저희가 대신 하겠습니다~'란 달콤한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은 우리에게 바친 후, 이런 식당이라면, 이런 멋진 관광지라면 지금 당장 가봐야하지 않을까요?라 유혹하지요. 그리고, --- (욕 바가지로 먹을 각오쯤은 하고 써보는) 요즘 청춘들은 그 유혹에 따라 맛집탐방, 해외 유명 도시 탐방 등을 하며 젊음을 힐링합니다. 그리곤 남들이 맛있다고 꼬시는 음식을 먹는 행위와 그 장소를 힐링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 스스로의 결정이었었노라 생각하지요. 대단한 착각입니다.
고작 맛집 찾아다니는 걸로 힐링될 정도의 아픔 가지고 그 난리를 떠는 거냐?란 아재swag은 자제하겠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이 너희들의 주체적 선택의 결과이었냐란 물음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당연히,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었다라 믿고 있다라는 게, 전 정말로 한심하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자본은 진짜 무시무시한 괴물인 겁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칸트의 주장에 따르자면,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수를 사 마심에 있어, 콜라는 마실지, 물을 마실지, 아님 우유를 마실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은 일견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동조차 "복종의 실천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 갈증에 대한 복종이다"라는 겁니다. 교묘하게 우리에게 새로운 욕구를 생겨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해 내는 자본은 어느 새 가볍게 ②번과 ③번까지도 완수해 내었죠.
"이데올로기가 최고의 수준으로 성립하는 것은 명시적인 형식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내면화할 때다. …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최고 수준의 착취는 노동자처럼 착취당하는 이 스스로가 내면화한 규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착취를 가속화하는 데 있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p37~38, 웅진지식하우스, 2013.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도 세련된, 그리하여 지극히 당연하게 (="내면화한 규율") 현재의 지배적 제도가 되어 있는 자본주의는 이래서/이처럼 무섭다는 겁니다. 이처럼 너무도 강하고, 너무도 세련되었기에 어느 순간, 어디에서부턴가 이질감이랄까, 뭔가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비스무리한 게 생겨나기도 하지요.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승우, 「아나키즘」중 p16, 책세상, 2008.
'아나키즘'이란 단어/주의(主義)가 낯설고 거북한가요? 물론 --- 이 책의 저자가 '아나키즘'까지를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거라 추측되지만,
우리는 순응하는 몸에 익숙해진 개인들이다. 국가/사회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고, 주체가 되어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pp36~37)
【 대리노동 】
분당에서 일산까지의 대리비가 4만 5천원이란 것에, 거래처의 (고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사는 비싸다라 하더군요. 전 비싼 건 아니라 생각한다라 답했었습니다. 고대 경제학과의 논리는, 아무런 자본의 투하 없이, 완전히 노동만으로 이루어진 1시간 30분 여의 가격으로 4만 5천원 너무 비싸다라는 것이었지요. 전 오직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나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일산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데 소요되는 4만 5천원을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 주장했었습니다. 누구의 주장이 좀 더 논리적인가를 떠나,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대리운전기사의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이란 점에선 이견이 없는 것이죠. 헌데 이 세상, 정확히는 이 대한민국엔 말입니다,
대리운전 기사인 나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 된다. 뭐라고 답해야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하고 우선 눈치를 살핀다. 괜히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타인의 운적석, 말하자면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을의 공간'은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위축시킨다. 그래서 결국 어느 대화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간단한 문제와는 다르다. (p31)
……
주체로 명명되는 이들은 상대방의 처지를 섬세하게 고려하는 대신 소통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만을 상대의 자리에 대입하기 쉽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 능력의 결여'라고도 부른다. …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pp34~35)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즉 '대리기사의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자체'를 (잠시라도 어쨌든) 구매하였다,라 생각하는 종자들이 너무도 많은 겁니다. 그런 종자들은 대리기사들에게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p96)라는 항변을 자아내는 것도 모자라, 함께 있는 그 공간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정의(justice)'까지도 차지하려 든다 합니다. 이것이! --- 과연 자동차라는 특정 공간 내에서 개인 대 개인간에 벌어지는 문제이기만 하겠느냐라, 저자는 묻고 있지요.
(1) 또 하나의 대리노동
"근대적인 대중교육은 바로 이러한 '길들이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제도다. …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한 노동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학교 교육으로써 길러지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이다. 바로 노동자를 훈육하는 것, 즉 길들이는 것이다. … 잘 길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이 의미하는) 지배 계급이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
- 류동민, 위의 책 pp31~34.
그렇게 교육시킨다고, 그렇게 세뇌당한 인간이 된 것도 문제가 아니냐?란 질타는 존나 쎄게 뺨따구를 날리고는 왜 뺨이 빨개지느냐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길들임은 대중교육 뿐만 아니라, 자본이 동원한 온갖 모든 수단을 통해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어느 새 우리에게 주입되어지지요. 그리하여~
"영원한 을(乙)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甲)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10~11, 목수정이 쓴 <역자 서문> 중
원래 세상이 이런 거라 믿어버리는 편이 더 편해서건, 아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건, 심지어 천성이 그렇게 타고났다고 하건!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국가를 벗어나더라도, 그러한 시대의 논리를 몸에 새긴 개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들을 주저앉힌다. 하지만 그것이 대리된 욕망임은 알지 못하고 주체로서 정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p36)
대리국민은 자신들의 갑님인 국가/자본을 대신하여 다른 대리국민들과의 싸움터에 자발적으로/나도 모르는 새 동원됩니다. 그 대결에서 패자부활전이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노동은, 누군가(갑)를 대신하는 노동에 더하여, "'동류'이지만 '동료'가 될 수 없는 사이"(p181)인 또 다른 을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pp173~174) ……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또 다른 을이다. …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p183)
(2) 노동자와 분리되는 노동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호칭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겼을 때부터 나의 신체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pp52~53)
도대체 왜, 대리운전 기사의 운전능력이 아닌 그 인간 자체를 구매하였다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걸까요? 그게 그런 종자들의 개인적 인격 탓인걸까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 이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노동자의 인격과 분리되어 필요할 때 사서 쓰고 필요 없어지면 안 쓰면 그만인 일반적인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 한윤형 · 최태섭· 김정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중, 웅진지식하우스, 2011.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p96)는 종자들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노동력을 대여'하는 대리운전이라는 행위를 단지 '노동자를 고용하는 행위'로 착각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개인적 인격 차원의 문제가 아닌, 이미 우리의 머릿 속까지 완벽하게 점령하고만 자본주의의 대단한/무시무시한 위력의 한 예일 뿐이지요. 물론 여기엔 자본 이외에도 또 다른 조력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우리는 스스로 하기 어렵거나 귀찮은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대신하게 한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을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요정이다. (p241)
……
사람의 노동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가 노동자를 '요정'으로 상상하게 된 것은 기계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사한 편안함과는 별개로 기계는 사람의 노동을 은폐시키고 그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 합리와 효율성이라는 허상은 쉽게 보이고, 그 너머의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는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p242)
·
·
·
대한민국이 그토록 홀릭되어 있는 '4차 산업혁명'이란 건, 노동자와 노동 사이에 또 하나의 가림막을 추가하겠다는 자본의 선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둘을 점점 더 멀어지게 할수록,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손쉬워지겠죠. 덕분에 세상은 점점 더 편해진다고 우리를 꼬시지만, 그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선 그 전에 더 치열해진 경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란 말은 결코 명시적으로 해주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되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만수는 약하고 보기 싫기까지 한 들소였다. 곧 도태되고 말 운명이었다."
- 성석제, 「투명인간」중 pp147~148, 창비, 2014.
그나마 이제까진 노동자와 노동자의 경쟁이 부추겨졌었다라면, 이제 노동자는 기계와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자, 인간은 이 시스템에서 점점 더 보이지 않게되어 갑니다. 누군가를 '대리'하여 노동을 하되, 그 노동의 결과만이 보여져야 한다라 요구받는 것이죠.
O2O라는 새로운 시스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더욱 그 너머의 사람을 상상하기 힘들게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더욱 많은 요정이 양산될 것이고, 우리의 신체도 은밀하게 점점 투명해져 갈 것이다. (p243)
……
쓰레기와 배설물은 하루가 지나면 어디론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공간으로 밀려난 노동이 있다. 우리는 쓰레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 역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p244)
예를 들어, 이제까지의 대리운전 산업은 소비자가 매개자(coordinator)에게 전화를 하고, 매개자가 자신의 network를 통해 대리운전 공급자과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었었으나, 카카오 대리는 이 중간의 매개자를 제거시킨 모델인 겁니다. 기존에 매개자만 보유하고 있던 network를 아예 공급자 집단에게 공개시켜 버린 것이죠. 이 상황에서, 예를 들어 좀 전에 전화로 요청했던 대리운전을 취소하려면, 이전엔 매개자에게 전화를 해 약간의 미안함의 표시와 함께 취소해야 했지만, 카카오 대리 시스템에선 그냥 핸드폰의 취소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소비자는 누군가에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인간과 인간을 더 멀어지게 하며, 그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 역시 급격히 하락시켜가겠죠. 소설가의 다음 물음과 답변은, 그렇게 앞으로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되는 걸까요?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성석제, 위의 책 p364.
……………………………………………………………………………………
저자가 대리운전을 하게된 이유가, 저로서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블랙 라이크 미」나 (이 책의 말미에도 등장하는) 「노동의 배신」처럼, 그 직업 속에 뛰어들어가 직접 겪어보며 문제점을 이해해보겠다는 것인지, 단순히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거 없으면 그거나 해야지"(p21)의 '그거나'의 지위로까지 격하되어 있는 대리운전기사라는 직업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과연,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p8)
이 의문에 대한 답이 구해질 수 있을까? 혹,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게 아닐까? 가 궁금했었습니다. 어쨌든 이끌어내어진, 제가 생각하는 이에 대한 결론은,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p138)
그 자체로만 보자면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애초부터, 우리가 이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살아가게 되는 한, 저자의 의문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란 답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란 걸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
·
·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티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p214)
딱! 이 정도 수준의 위로와 조언을 담고 있다라, 저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의'이란 구절이 폄하의 의미가 아닌, '이 정도 수준의' 위로와 조언에도 대한민국이 감격한다라는 것에의, 뭐랄까 속상함? 뭐 그런 걸 담고 있지요. 암튼! --- "대리기사는 타자의 주체화를 위해 요구되는 역지사지보다 한 단계 높은 덕목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p8)란 홍세화의 글은, 먹물들의 흔한 오바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글의 초반에 적어놓은 '공간의 특수성'을 제외한다면, '대리운전'이란 노동을, 우리의 노동과 딱히 달리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 책을 읽음으로, 오히려 류동민 교수님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더욱 꼼꼼하게 읽어봐야겠다라 다짐해보게 되네요. 딱히 머리 아프지 않게, 자본주의 하의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께는 이 책 「대리사회」를 권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