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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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논리1에서 저자 김찬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존엄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찾는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동차라는 특정 상품이 우리나라의 체면의식과 맞물려, 나와 타인을 구별짓는 일종의 '차이표시 기호' 및 '자기정체성 확인의 도구'로서의 매우 강력한 상징 효과를 가지게 된다라 말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그런데, --- 이 자동차란 상품이, 그처럼 (주로 외부를 향한) 상징으로만 작용하는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이동의 편리함/신속함'을 제공하는 운송수단이라는 실질적 용도 이외에도,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하다. 그러한 통제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차내 공간 그 자체가 자족감을 준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참견이나 눈치에서 벗어나 마음껏 음악을 듣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그곳은 오붓한 휴게실이다."

- 김찬호, 「문화의 발견」중 p39, 문학과지성사, 2007.

이처럼 자동차는 작게는 '오붓한 휴게실'로 기능하기도, 아주 크게는 나(me, myself)라는 존재를 'King of the World'로 만들어주는 그 세상(world)이 되어주기도 한다라, 김찬호는 규정합니다. 그러나, 

위의 모든 규정들은, 내가 그 자동차의 주인일 때라는 상황을 전제로 할 때라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들이지요. 이 책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은, "모두가 하루쯤 출근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밤은 절반쯤 멈"(p183)추게 된다는, 그러나 김찬호가 규정한 상징들의 전제조건인 '내가 주인'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수는 없는, 그 주인들에게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잠시 빌려주기 위해 그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는 '대리기사'의 시선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일면(一面)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그 일면은 다음에 관계한다,라 저자는 책의 시작에 밝히고 있습니다... 만,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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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서적이 아닌, 그저 일 개인의 일기장스런 한 편의 에세이입니다. 당연히 어려운 내용이 들어있지도 않으며, 뭐 대단한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다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다만 ---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란게 무지하게 간절하다라 느껴졌으며, 또한 그 하고 싶은 말이란 게 참 많기도 하구나,란 느낌은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는 반복이 발산하고 있는 저자의 간절함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p7)

​이 세 마디로 정리됩니다. 이 세 마디가 의미하는 바의, 다른 표현의 버젼들이 저자의 일상과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게 바로 이 책의 내용이에요. 전 세계 남자들의 술자리에 공히 적용된다는 '기-승-전-여자 이야기'의 '깔때기 효과' 마냥, 일단 이 책은 뭔 이야기를 읽게 되건,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위 세 마디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헌데 이런 반복에서, 지겹다란 감정이 아닌, 간절함을 느꼈던 건 아마도, --- 저자가 품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하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p108)의 감정이, 오롯이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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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간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서, 「자발적 복종」중 p70, 생각정원, 2013.

대리기사의 자격으로 운전석에 앉는다는 건 결코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저자의 경험에 의하자면, 목적지와 경로, 실내의 온도, 심지어 차 속 공기의 오염도까지도, 차주인에 의해 제어당하는 상황2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위와 같은 상황은, '제어당함'이란 단어가 아닌,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포장되어 대리기사들에게 교육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 다음은 '말'의 통제다. …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pp8~9)​

………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 진다.(p34)

'투철한 서비스 정신'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관습'이란 단어와 구별지어낼 수 없게 됩니다. 대리기사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한, '제어당함'이란 상황을 급기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리고 --- 이제부터 뭔가 이야기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p10) …… ①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p36)

​①번 속 '국가 시스템'이란 단어가 영 거북스럽다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리 '자본'을 대신 넣어보기로 하지요.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디어, 특히 자본의 직접적 지배 하에 있는 미디어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우리들을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으로 훌륭하게 변신시켜 놓습니다. '발품 파는 일은 저희가 대신 하겠습니다~'란 달콤한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은 우리에게 바친 후, 이런 식당이라면, 이런 멋진 관광지라면 지금 당장 가봐야하지 않을까요?라 유혹하지요. 그리고, --- (욕 바가지로 먹을 각오쯤은 하고 써보는) 요즘 청춘들은 그 유혹에 따라 맛집탐방, 해외 유명 도시 탐방 등을 하며 젊음을 힐링합니다. 그리곤 남들이 맛있다고 꼬시는 음식을 먹는 행위와 그 장소를 힐링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 스스로의 결정이었었노라 생각하지요. 대단한 착각입니다.  

고작 맛집 찾아다니는 걸로 힐링될 정도의 아픔 가지고 그 난리를 떠는 거냐?란 아재swag은 자제하겠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이 너희들의 주체적 선택의 결과이었냐란 물음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당연히,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었다라 믿고 있다라는 게, 전 정말로 한심하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자본은 진짜 무시무시한 괴물인 겁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중 pp170~171, 와이즈베리, 2014.

칸트의 주장에 따르자면, 목이 말라 시원한 음료수를 사 마심에 있어, 콜라는 마실지, 물을 마실지, 아님 우유를 마실지 등등을 결정하는 것은 일견 '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동조차 "복종의 실천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내 갈증에 대한 복종이다"3라는 겁니다. 교묘하게 우리에게 새로운 욕구를 생겨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해 내는 자본은 어느 새 가볍게 ②번과 ③번까지도 완수해 내었죠.


​"이데올로기가 최고의 수준으로 성립하는 것은 명시적인 형식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내면화할 때다. …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최고 수준의 착취는 노동자처럼 착취당하는 이 스스로가 내면화한 규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착취를 가속화하는 데 있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p37~38, 웅진지식하우스, 2013.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도 세련된, 그리하여 지극히 당연하게 (="내면화한 규율") 현재의 지배적 제도가 되어 있는 자본주의는 이래서/이처럼 무섭다는 겁니다. 이처럼 너무도 강하고, 너무도 세련되었기에 어느 순간, 어디에서부턴가 이질감이랄까, 뭔가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비스무리한 게 생겨나기도 하지요.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정작 나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나는 행복할까? … 아나키즘은 그러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 내려져야하고, 내가 살아온 삶의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승우, 「아나키즘」중 p16, 책세상, 2008.  

'아나키즘'이란 단어/주의(主義)가 낯설고 거북한가요? 물론 --- 이 책의 저자가 '아나키즘'까지를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거라 추측되지만,

​우리는 순응하는 몸에 익숙해진 개인들이다. 국가/사회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둘러싼 구조와 마주하고, 주체가 되어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평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진 사회적 책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성찰이다. (pp36~37)


대리노동


분당에서 일산까지의 대리비가 4만 5천원이란 것에, 거래처의 (고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사는 비싸다라 하더군요. 전 비싼 건 아니라 생각한다라 답했었습니다. 고대 경제학과의 논리는, 아무런 자본의 투하 없이, 완전히 노동만으로 이루어진 1시간 30분 여의 가격으로 4만 5천원 너무 비싸다라는 것이었지요. 전 오직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나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일산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데 소요되는 4만 5천원을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 주장했었습니다. 누구의 주장이 좀 더 논리적인가를 떠나,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대리운전기사의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이란 점에선 이견이 없는 것이죠. 헌데 이 세상, 정확히는 이 대한민국엔 말입니다,


대리운전 기사인 나는 한없이 작은 인간이 된다. 뭐라고 답해야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하고 우선 눈치를 살핀다. 괜히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타인의 운적석, 말하자면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을의 공간'은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위축시킨다. 그래서 결국 어느 대화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간단한 문제와는 다르다. (p31)

……

주체로 명명되는 이들은 상대방의 처지를 섬세하게 고려하는 대신 소통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만을 상대의 자리에 대입하기 쉽다. 우리는 그것을 '공감 능력의 결여'라고도 부른다. …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pp34~35)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즉 '대리기사의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자체'를 (잠시라도 어쨌든) 구매하였다,라 생각하는 종자들이 너무도 많은 겁니다. 그런 종자들은 대리기사들에게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p96)라는 항변을 자아내는 것도 모자라, 함께 있는 그 공간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정의(justice)'까지도 차지하려 든다 합니다. 이것이! --- 과연 자동차라는 특정 공간 내에서 개인 대 개인간에 벌어지는 문제이기만 하겠느냐라, 저자는 묻고 있지요.

​(1) 또 하나의 대리노동

 

​"근대적인 대중교육은 바로 이러한 '길들이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제도다. …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한 노동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학교 교육으로써 길러지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이다. 바로 노동자를 훈육하는 것, 즉 길들이는 것이다. … 잘 길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이 의미하는) 지배 계급이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


- 류동민, 위의 책 pp31~34.

​그렇게 교육시킨다고, 그렇게 세뇌당한 인간이 된 것도 문제가 아니냐?란 질타는 존나 쎄게 뺨따구를 날리고는 왜 뺨이 빨개지느냐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길들임은 대중교육 뿐만 아니라, 자본이 동원한 온갖 모든 수단을 통해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어느 새 우리에게 주입되어지지요. 그리하여~

​"영원한 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p10~11, 목수정이 쓴 <역자 서문> 중


원래 세상이 이런 거라 믿어버리는 편4이 더 편해서건, 아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건, 심지어 천성이 그렇게 타고났다고 하건!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국가를 벗어나더라도, 그러한 시대의 논리를 몸에 새긴 개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들을 주저앉힌다. 하지만 그것이 대리된 욕망임은 알지 못하고 주체로서 정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p36)

대리국민은 자신들의 갑님인 국가/자본을 대신하여 다른 대리국민들과의 싸움터에 자발적으로/나도 모르는 새 동원됩니다. 그 대결에서 패자부활전이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노동은, 누군가(갑)를 대신하는 노동에 더하여, "'동류'이지만 '동료'가 될 수 없는 사이"(p181)인 또 다른 을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pp173~174) ……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또 다른 을이다. …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p183)


(2) 노동자와 분리되는 노동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호칭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겼을 때부터 나의 신체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pp52~53) 
도대체 왜, 대리운전 기사의 운전능력이 아닌 그 인간 자체를 구매하였다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걸까요? 그게 그런 종자들의 개인적 인격 탓인걸까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 이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노동자의 인격과 분리되어 필요할 때 사서 쓰고 필요 없어지면 안 쓰면 그만인 일반적인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 한윤형 · 최태섭· 김정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중, 웅진지식하우스, 2011.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p96)는 종자들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노동력을 대여'하는 대리운전이라는 행위를 단지 '노동자를 고용하는 행위'로 착각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개인적 인격 차원의 문제가 아닌, 이미 우리의 머릿 속까지 완벽하게 점령하고만 자본주의의 대단한/무시무시한 위력의 한 예일 뿐이지요. 물론 여기엔 자본 이외에도 또 다른 조력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우리는 스스로 하기 어렵거나 귀찮은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대신하게 한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을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요정이다. (p241)

……

사람의 노동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가 노동자를 '요정'으로 상상하게 된 것은 기계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사한 편안함과는 별개로 기계는 사람의 노동을 은폐시키고 그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 합리와 효율성이라는 허상은 쉽게 보이고, 그 너머의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는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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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그토록 홀릭되어 있는 '4차 산업혁명'이란 건, 노동자와 노동 사이에 또 하나의 가림막을 추가하겠다는 자본의 선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둘을 점점 더 멀어지게 할수록,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손쉬워지겠죠.5 덕분에 세상은 점점 더 편해진다고 우리를 꼬시지만, 그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선 그 전에 더 치열해진 경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란 말은 결코 명시적으로 해주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되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만수는 약하고 보기 싫기까지 한 들소였다. 곧 도태되고 말 운명이었다."


- 성석제, 「투명인간」중 pp147~148, 창비, 2014.

그나마 이제까진 노동자와 노동자의 경쟁이 부추겨졌었다라면, 이제 노동자는 기계와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자, 인간은 이 시스템에서 점점 더 보이지 않게되어 갑니다. 누군가를 '대리'하여 노동을 하되, 그 노동의 결과만이 보여져야 한다라 요구받는 것이죠.  


O2O6라는 새로운 시스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더욱 그 너머의 사람을 상상하기 힘들게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더욱 많은 요정이 양산될 것이고, 우리의 신체도 은밀하게 점점 투명해져 갈 것이다. (p243)

……

쓰레기와 배설물은 하루가 지나면 어디론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공간으로 밀려난 노동이 있다. 우리는 쓰레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 역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p244)

예를 들어, 이제까지의 대리운전 산업은 소비자가 매개자(coordinator)에게 전화를 하고, 매개자가 자신의 network를 통해 대리운전 공급자과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었었으나, 카카오 대리는 이 중간의 매개자를 제거시킨 모델인 겁니다. 기존에 매개자만 보유하고 있던 network를 아예 공급자 집단에게 공개시켜 버린 것이죠. 이 상황에서, 예를 들어 좀 전에 전화로 요청했던 대리운전을 취소하려면, 이전엔 매개자에게 전화를 해 약간의 미안함의 표시와 함께 취소해야 했지만, 카카오 대리 시스템에선 그냥 핸드폰의 취소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합니다. 이제 소비자는 누군가에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인간과 인간을 더 멀어지게 하며, 그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 역시 급격히 하락시켜가겠죠. 소설가의 다음 물음과 답변은, 그렇게 앞으로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되는 걸까요?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성석제, 위의 책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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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대리운전을 하게된 이유가, 저로서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블랙 라이크 미」나 (이 책의 말미에도 등장하는) 「노동의 배신」처럼, 그 직업 속에 뛰어들어가 직접 겪어보며 문제점을 이해해보겠다는 것인지7, 단순히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거 없으면 그거나 해야지"(p21)의 '그거나'의 지위로까지 격하되어 있는 대리운전기사라는 직업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과연,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p8)

이 의문에 대한 답이 구해질 수 있을까? 혹,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게 아닐까? 가 궁금했었습니다. 어쨌든 이끌어내어진, 제가 생각하는 이에 대한 결론은,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p138)

그 자체로만 보자면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애초부터, 우리가 이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살아가게 되는 한, 저자의 의문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란 답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란 걸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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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티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p214)

딱! 이 정도 수준의 위로와 조언을 담고 있다라, 저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의'이란 구절이 폄하의 의미가 아닌, '이 정도 수준의' 위로와 조언에도 대한민국이 감격한다라는 것에의, 뭐랄까 속상함? 뭐 그런 걸 담고 있지요. 암튼! --- "대리기사는 타자의 주체화를 위해 요구되는 역지사지보다 한 단계 높은 덕목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p8)란 홍세화의 글은, 먹물들의 흔한 오바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글의 초반에 적어놓은 '공간의 특수성'을 제외한다면, '대리운전'이란 노동을, 우리의 노동과 딱히 달리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 책을 읽음으로, 오히려 류동민 교수님의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더욱 꼼꼼하게 읽어봐야겠다라 다짐해보게 되네요. 딱히 머리 아프지 않게, 자본주의 하의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께는 이 책 「대리사회」를 권해봅니다.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문학 : 분노의 포도」, 「투명인간


...금연 119일째 



 

  1. 문학과지성사, 2001.
  2. "차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땀을 흘리면서, 차의 주인이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 고작이다. …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운전대와 액셀. 브레이크, 아마도 이 세 개가 전부다."(p65) --- 이에 대해, '난 안 그런데?'란 항변이 저자의 주장을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저자의 인식에 '일반적'이란 단어를 허하기는 어렵다,의 일례정도는 될 수 있다라 전 생각합니다.
  3. 마이클 샌델, 위의 책 p168.
  4. "이데올로기가 최고의 수준으로 성립하는 것은 명시적인 형식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내면화할 때다."
  5. '노동자'와 '노동'만이 멀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본'은 스스로 '노동자' 및 '노동'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 "노동의 관계도는 가장 간단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계약의 주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용자는 그 중간에 '대리인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여러 책임에서 벗어난다. 노동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사용자는 자신이 고용한 이들이 아니기에 법적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pp172~173) --- 류동민은 그 이유를 "거래비용을 절감하고 위험부담을 최소화한 덕에 늘어난 이익은 위(자본)로 솟구쳐 올라간다. 그리고 위험만은 그 반대 방향, 아래쪽(노동자)으로 흘러내려가게 되는 것"(류동민, 위의 책 p145)이라 설명해 줍니다.
  6. ​"'Onine to Offline'의 약자.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이 결합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 네이버 검색
  7.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은, 그래서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지나온 '대리의 시간'을 몸의 언어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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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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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가지고 있었었으나, 그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었기에,



"①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괴물뿐이며, 세상을 구하려면 그 괴물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판타지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②우리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모든 존재 중 가장 우수하며 우리보다 우수한 존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583, 김영사, 2015.

유발 하라리의 위와 같은 해석에 '아, 그런가보네~'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었고, 에이 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 참에 그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역시나 사놓고 한참을 묵혀둔 이 책을 꺼내어 펼쳤더랬습니다. 이 소설, 읽어보니,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게, 뭔 괴물이 나와 행패를 부리고, 그래서 그 괴물을 물리친다라는 류의, 막 앞이 다 보이고 한 그런 스토리가 전혀 아닌, 정말 생각나는 것 모두 적어보자면 논문 한 편 쯤 써질 것도 같은, 그처럼 참 많은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정말 멋진 작품이었네요. 암튼!


다 읽고 나니, 유발 하라리의 위 해석에, 물론 여기에 그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감안한다 하더라도 딱히 공감이 가지가 않습니다. ②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①번의 해석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큼 동의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 이 작품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메시지를, BBC는 10가지로 구분해 놓았더군요.1 BBC가 적어놓은 내용과 관계 없이, 제가 생각했던 것에 들어맞는 다섯 가지의 제목을 빌어, 이 독후감을 써볼까 합니다. 고로 이 독후감엔, 「프랑켄슈타인」의 줄거리가 요약되어 있지 않으나, 혹시나 궁금하시다라면...


​이 감상문에 인용한 영문은 다음의 사이트에서 참조하였습니다.

https://ebooks.adelaide.edu.au/s/shelley/mary/s53f/



………………………………………………………………………


【 Science can go too far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이처럼) 인공적 대체물의 발달은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조되어도 괜찮다는 신념2을 배양하고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중 pp 67-70. 일조각, 2003.

지금으로부터 대략 15년 여전 쯤의 문화인류학자들이 (염려 어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이처럼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였었었거늘, 그 후로의 세상은, 변해도 너무나 빨리 변해왔고, 이제 우리는,


"40억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자연선택이라는 구체제는 오늘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살아 있는 개체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원래 해당 종에게 없던 특성을 부여하는 정도까지 자연선택의 법칙을 위반하는 중이다. …… 지난 40억 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인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 유발 하라리, 위의 책, pp 563~564.

인간과 신을 구분짓는 경계가 어디/무엇인지, 뭐 그게 어디 한두 가지이겠습니까만, 아무래도 가장 결정적인 임계점은 바로 '창조', 그것도 '생명의 창조'에 놓여져 있다라 생각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겁니다. 물론, 아직 우리는 '생명의 창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굳이 이름 짓자면 '생명의 개조' 정도?까지 와있긴 하죠. 암튼! --- 저 개인적으로, 완벽한 무()로부터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거다에 표를 던지겠습니다만, 영화 <로보캅>과 같은 '생명의 존재 형태에 대한 개조'를 통한 영생(eternal life)의 쟁취3(예를 들어 삼겹살로만 구성된 돼지라든가, 간이 내장의 90%정도를 차지하는 아구라든가 하는 식의) 욕망의 충족, 더 크게 식량문제의 해결 등은, 윤리적·신학적·정치적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리 오래지 않을) 언젠간 가능해질꺼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는 …… 불가시성(不可視性)이 인간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 - 비밀, 힘, 자유를 상상했어. 바람직하지 못한 결점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 (p154) ……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고, 그것의 놀라운 이점을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을 뿐이었지. 이젠 아무리 엉뚱하고 놀라운 일을 저질러도 벌을 받은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내 머리는 벌써 온갖 터무니없는 짓을 할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네." (p171)

- 허버트 조지 웰스, 「투명 인간」중, 열린책들, 2014.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예(example)의 하나일 투명 인간이 된 순간의 흥분과 기대가, 영생의 쟁취나 욕망의 충족, 좀 더 고상하게는 식량문제의 해결 등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서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말하자면 우리 인류가 "신 비슷한 존재"4가 되는 미래에 대한 흥분과 기대와, 말하자면, 적어도 저의 눈에는, 특별히 다른 점이 당췌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 기분은 10분 전에 힘차게 밖으로 나왔을 때와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지. 이 불가시성이란 정말! 나는 오로지 이 궁지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네."

- 허버트 조지 웰스, 위의 책 p174

비가역적일 수 밖에 없을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 놓은 현실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지 않을, 그런 자신감이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라 스스로 확신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느냐와 연관지어 답변되어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만 봐도, 침팬지가 인간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은 그 모든 것은 정말 하찮게 시작되었었거늘, 그런 시도5가 정말로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으란 보장 --- 소설 속 '궁지'에 우리 인류 전체가 통째로 빠져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세상 그 어느 과학자도 보장해줄 수 없는거잖습니까. 

진보(progress)는 오로지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때에만 좋은 것이 될 수 있겠죠. 물론! 그 '옳은'에 대한 판단은 사회구성원들 모두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선가는 하나의 합의점에 이르를 수 있겠을, 우리가 추구하는 진보의 방향이 과연 과학의 오만을 어디까지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며, 자연을 거스르는 생명에의 개조에 대한 본능적 공포과 경계심을 얼마나 어루만져줄 수 있을 것인가는 분명히 필요하지요.


【 Don't play God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 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 유발 하라리, 위의 책 p584.  

「프랑켄슈타인」의 원제엔 'The Modern Prometheus'​란 단어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라 하면, 인간들이 이 험한 자연에서 살아남기 너무도 약한 존재같아 보였기에, (허락도지 않은 행동이었던) 불(fire)을 선물해 준 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만,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전에 인간을 창조한 신이기도 하더군요. 즉,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불까지도 안겨주었고, 그리하여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주었던 존재인 겁니다. ​그렇다라면, ---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탐욕스러워질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제우스는, 그렇게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신 비슷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의 단초를 안겨준 것에 대해 격노를 하여, 끝나지 않는 형벌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게도 되지요. 이처럼,  


신(God)이 반드시 인자하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겁니다.6 물로 온 세상을 덮어버리고, 바벨탑을 무너뜨린 것만 봐선, 신도 화를 내시긴 하며, 한 번 내면 아주 끝장나게 내는 분인 것 같기도 하죠. 뭐 이게 꼭 성경 속 신(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신화 속의 다른 신들은 뭐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죠. 이제,


'만물의 영장'이란 칭호로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인간은, '신과 비슷한 지위' 뿐만이 아니라 '신의 능력'에까지 아주 가까이 다가와있지요. 위에서도 언급했었듯, (개조/tuning까지는 참아주실 수 있다해도) 자신만의 고유 영역인 '창조'의 단계에까지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피조물일 뿐인 존재들이 침범한다라는 걸 과연, 그 신이 허용해주겠느냐의 문제는 --- 이게 뭐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신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도 받아들인다 하여도, (예를 들어 '이상(理想)처럼,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나 하나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을 수는 있겠는) 일종의 개념적 존재로서 생각해볼 수는 있겠을 '신'이란 지위에까지 인간이 오르려 하는, 일종의 '신 되어보기'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하는 문제는 --- 좀 거창하게 나가보자면 인류의 종말과도 관련이 있는 사안이 될 수도 있다란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읽는다면,  

작가 메리 셸리는 이 작품을 통해 윌턴 선장7과 프랑켄슈타인8이라는 두 인물이 지닌 욕망이 결국 파국을 맞게되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간의 어떤 노력의 결과가 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의 엄청난 메카니즘을 조롱하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 무서울 것"(p15)이란 자신의 생각을 아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란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현상 중 하나가 인간, 아니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의 신체 구조였다. 어디서 생명의 원리가 비롯된 것일까? … 그것은 대담한 질문이었으며,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질문이기도 했다.(p74)

생명의 원인에 대한 해답을 죽음으로부터 얻으려 했던 프랑켄슈타인은, 일종의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연구를 통해9, 드디어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밝혀"(p75)내게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 인간과 신의 임계점까지도 넘어서게 되었죠.


생명이 없는 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p75) …… 새로운 종()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터였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이 나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 이런 상상을 계속하다 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비록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p77)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아주 오래된 소설 속 상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화석으로부터 매머드를 다시 탄생시킬 수 있다라고, GMO10는 이미 자연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노라 자랑하는 인간이, 언젠가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켜'내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었던 예수의 기적이 '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하지 않을꺼란 보장을, 이젠 그 누구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메리 셸리가 1818년에 출간한 이 작품을 통해 피력했던 이러한 염려는, 이후 「지킬박사와 하이드」 및 「투명 인간」등을 통해 'Mad Scientist'라는 일종의 전형적 인물상으로 이어졌으며, 예의 동일한 결론 - 자연/신의 섭리에 거스르려는 시도가 가져오는 충분히 불행한 결론을 이어가게 됩니다.

 


【 Difference should be celebrated, not shunned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기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God saw everything that he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 창세기 1장 26절 ~ 31절​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피조물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라 느끼셨었었거늘, "그의 팔다리를 비례가 맞도록 구성했고 아름다운 외모의 특징들을 골라 짜 맞추"(p81)어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11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지옥에서 막 나온 듯한 추악한 얼굴 unearthly ugliness"(p136)을 하고 있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 too horrible for human eyes"(p136)했었습니다. 여기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나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란 기준은 예의 창조자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라는 게 중요합니다. 막 진흙에서 생겨난 아담이나, 시체의 부분부분이 이어져 만들어진 괴물(daemon)12에겐 '미()'의 기준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죠, 즉,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의 시선이 미()의 기준까지도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혹성탈출」13에서의 유인원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을 향해 "너는 정말로 못생겼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권력은 '나'와 '너'를, '우리'와 '너희들'을 여하히도 구분지어놓으려 합니다. 구분에의 기준은 너무도 많아요. 권력있는 자에 의한 구분지어짐, 대한민국의 갑질이란 것도 알고보면 이런 구분지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 이 작품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이 인간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유는, 그의 외모 딱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그가 모습들 드러내지 않은 채 행한 선행은 "착한 정령"(p155)이란 단어를 불러왔었었거늘, 그의 모습을 본 후 그 모든 것은 평생 헤어나지 못할 공포14로 전환되지요. 이 관계에 대한 괴물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우리가 화합하는 데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요. … 나는 상처받은 만큼 복수할 거요. 사랑을 일깨울 수 없다면 두려움을 일깨우겠소. (p190)

​그리고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 Monsters are not born monsters 

소설 속 괴물을 "소외받고 핍박받는 계층인 노동자, 외국인, 여성 등을 상징하는 인물"15로 해석하는 것에 큰 무리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구분'과 '차별'이란 단어가 지니는, 국어사전 속 뜻의 차이완 비교가 되지 않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차이란 게 --- 가리봉동이나 안산의 조선족/동남아16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그 누구든 ('가리봉동'이란 고유명사로 대변될 수 있겠을) 그러한 환경에 던져진다면 미국인이건 스웨덴 사람이건을 떠나 똑같은 비난에 직면하게될 수도 있다란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리는 바로 이 '심각한 차별'이야말로 지적되고 고쳐져야할 문제점인 것이죠. 가리봉동이 문제가 아닌 것이고, 조선족이나 동남아 사람이라서가 '주요하며 유일한' 원인이 아니란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이나 정부가 왜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소. 죄악과 살육에 관해 자세히 듣고서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지만 나는 역겹고 혐오스러워 고개를 돌렸소. … 인간 사회의 이상한 구조 … 부의 분할, 거대한 부와 비참한 가난, 그리고 계급과 가문, 귀족 … (p161)

​이 소설이 쓰여졌던 19세기 초반과 현재 21세기라는 시간적 차이는, 괴물이 지적했던 이해할 수 없음의 실례들을 무색케 해주지요. 도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쨌든 --- 완전한 이방인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았던 괴물의 '이해할 수 없음/역겨움/혐오스러움'은 오래가질 않습니다. 이제 그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배웠으니까요.  

내가 왜 나를 동정하지 않는 인간을 동정해야 하오? …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존경하겠소? why I should pity man more than he pities me? … Shall I respect man when he condemns me?(p190)

​이제부터 괴물은, "타락한 천사는 악마가 되는 법17 the fallen angel becomes a malignant devil"(p288)을 따르기로 합니다.18 자! --- 위의 몇 줄이 '가리봉동의 조선족과 안산의 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한 아주 간략한 설명이라면, 뭐 크게 어긋날까요? 물론, 가리봉동이나 안산,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이 다 천국이고 천사란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이었었건 그들의 타락에 과연 대한민국은 '난 잘못 없어~'라며 정색할 수 있겠느냔거죠. '난 강남에 사는데?', '난 어엿한 한국 사람인데?', '난 명문대 재학중인데?', '난 정규직인데?'라는 이유들이 당신을 그들과 다르게 해준다구요?

"내가 너를 사랑함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것, 내가 비정규직인 것은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도록 일해도 한달 수입이 백만 원밖에 안되는 것은 내 '생산성'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잠을 줄이고 노력하여 부족한 내 사랑, 부족한 내 '스펙', 부족한 내 생산성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다그치는 것이 바로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주문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207, 웅진지식하우스, 2013.   

당신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 그 어느 곳이건, 이 사회는 당신에게 강요하는 요구를 항상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넌 노예야. … 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p220)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던 '돈'이란 것이,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리란 바람으로 받아들였던 '자본주의'란 것이 거꾸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듯,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거꾸로 프랑켄슈타인에게 명령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의, ---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했던 존재가, 탄생 당시부터 괴물로 태어났던 것이 아니었었듯, 당신과 나도, 예전보다는 괴물스러워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며, 그리하여 언젠간, 아직 괴물이 덜 된 누군가들에게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 요구하는 (버젼만 다를 뿐인) 프랑켄슈타인이 되어갈 수도 있겠구 말이죠.



Actions have consequences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19 

 

'누가 낳아달랬어?'란 사춘기의 반항같아 보이는, 하지만 그보단 훨씬 더 가슴아프고 본질적일 질문을 빌어오는 것20으로, 작가는 이 소설의 시작을 열고 있습니다. 소설 속 괴물 역시,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 끼치는 괴물을 왜 만들었는가?"(p172)라 묻지요. 자, 이제까지의 제 글이, 괴물의 입장만을 말하고 있었다라면, 이제부턴 우리 인간의 편에서도 좀 봐볼까요? --- 지극히 완전히, 인간의 시선에서, 그리고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상상하며 이 소설의 메시지를 뽑아내 본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도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 아닐까라, 생각해봅니다. 이 소설이 쓰여졌을 당시 한창이었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가히 '혁명 Revolution'이란 단어까지를 불러내왔었을만큼 급격한 것이었었고, 그 새로움과 급격함은 (편리함과 미래에의 희망 등과 함께) 염려스러움 그리고 두려움까지도 주었을 수 있었겠지요. 1963년  작가 피에르 불에 의해 탄생했던 한 편의 소설, 「혹성탈출」이 1968년 영화가 되고, 그 앞뒤의 이야기들이, 몰라보게 발전한 영화적 기법의 발전에 따라 시리즈로 만들어져 와있듯, 우리가 지금의 과학과 기술에 굳이 '4차 산업혁명'21이란 조어를 붙여내고 싶다면, 

"이제 우리에게 '인간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으로서 자연에 개입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해왔고 원하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가?"

​란 질문에 대해, 얼마만큼 확립된 대답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책임지지 못할 행동의 결과와 그 피해를, 그저 미래 세대로 넘기면 그만이란 생각은,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의 뒤늦은 후회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세상에 내보낸 사악한 마귀한테 무방비로 당하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겠는가?(p127)

………………………………………………………………………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가 덮친 이유는 스트립클럽, 디스코장, 술집, 여타 사악한 장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다>"(p234) ……… "우주는 마음이 없다. 감정도 인격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해치거나 기쁘게 하려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나쁘냐 좋으냐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238)

- 리처드 도킨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김영사, 2012.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한 위 frame으로 보자면, 정말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소설에 "고전 classic"이란 타이틀이 가능했었었겠죠. --- 디스토피아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연속해서 읽었었다란 직전의 경험이 없었더라도, 이 작품은 유쾌함을 남겨주는 소설은 될 수 없지 않을까, 그 어느 독자에게나, 좀 심하면 두려움, 좀 덜하면 반성을 안겨주지 않을까 싶습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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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괴물뿐이며, 세상을 구하려면 그 괴물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판타지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②우리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모든 존재 중 가장 우수하며 우리보다 우수한 존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583, 김영사, 2015

유발 하라리의 위 두 해석에 왜 동의하지 않는가를 적어내기 위해, 이 길고 긴 독후감을 써내려왔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대답이 이 장광설에 담겨져 있다라 전 생각했거늘, (여기까지 써놓고 읽어봐도) 어디에 어느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느냐,란 물음에 딱히 어느 한두 곳을 집어내지는 못하겠네요. 맘에 들지는 않지만, --- 써내는 것이 참 고생스러웠었고, 그만큼 정말 많이 생각했었었기에, 여하한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어쨌든, 제 대답이 오롯이 다른 분들께 전달되었길, 훗날 다시 읽어 볼 이 감상문에 후회하지 않고 싶다는 바람()을 이렇게 끝내 버려내지 못하겠네요. 아... 그나저나, 이제부턴 좀 짧게 쓰고 싶... --;;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 : 「사피엔스

 Mad scientist novel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 인간

 

 

 

 

 

 

 

 

인간 탐욕의 끝일 수 있는 한 예 :혹성탈출

그 밖의 미래에 대한 소설들 : 어떤 소송」, 「1984년」, 「백년법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금연 119일째



 

  1. http://www.bbc.com/news/magazine-12711091
  2. '인간 신체의 변형'에 대한 의문을 다루고 있는 소설로는 구사카베 요,「A케어」, 민음사, 2013. 가 정말 짜릿합니다.
  3. 좀 더 멋지게 표현하자면 --- "당신이 뇌를 휴대용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북 컴퓨터에 실행한다고 가정하자. …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 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유기화합물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40억 년간 배회한 끝에 마침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 위의 책 pp577~578)
  4. 유발 하라리, 위의 책 p581.
  5. 이게 정말로 현실이 될 뻔도 했었더군요. - "자연선택은 종종 어느 한 가지 기능을 위해서 선택된 구조를 이용하여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구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 기각류는 돌고래나 바다표범처럼 바다에 사는 포유류를 말하는데 뇌가 크고 사회성이 높다. …… 미국의 해군은 기각류들을 훈련시켜 바다 밑에 떨어진 미사일의 폭발물 부분을 물어다가 적군의 배 밑에다가 갖다 붙이도록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돌고래 여섯 마리가 샌디에고를 떠나 페르시아만까지 파견되었다. 그러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물체를 조작해야 하는 자연적인 필요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기각류 동물들의 뇌는 에렉투스에서 사피엔스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재구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보자면 그들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만일 그러한 재구성이 일어났다면 지금쯤 그들은 해군 신병 훈련소에 수용되어 바다 밑에서 서로를 죽이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중 pp68~69, 민음사, 1995)
  6. 이 말이, 신은 분명히/반드시 존재한다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성'의 반대 개념으로 '동물성'을 언급했었었기에, 그 또 다른 방향에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신성(神性)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당신이 무신론자라 하여 이 질문에 제게 화를 내는 건 받아들일 수 없겠습니다.
  7. "우리 인류에게 적대적인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누리고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찾는 지식을 얻기만 한다면 한 인간의 생사는 사소한 대가일 뿐이라고요."(p44) One man’s life or death were but a small price to pay for the acquirement of the knowledge which I sought, for the dominion I should acquire and transmit over the elemental foes of our race.
  8. "내가 알고 싶어 한 것은 하늘과 땅의 비밀이었다. … 세계의 물리적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p57)
  9.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예시로서 모든 인과 과정의 순간순간을 중단시켜 검토하고 분석하다 보니, 마침내 그 암흑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러운 빛이 내게 쏟아졌다."(pp74~75)
  10.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서 일반적으로 생산량 증대 또는 유통 · 가공상의 편의를 위하여 유전공학기술을 이용, 기존의 육종방법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농산물" - 네이버 백과사전
  11. "미세한 신체 부분은 작업 속도를 늦추는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체구가 거대한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즉 키를 2미터 40센티미터 정도로 잡고, 나머지는 거기에 비례를 맞추는 식으로 했다."(p77)
  12. 이 작품에 괴물의 이름같은 건 나오지 않습니다.
  13. 피에르 불, 소담, 2011.
  14. "다시는 이 오두막에서 살지 못할 겁니다. 아버님이 위독하세요. 아까 말한 끔찍한 일 때문이죠. 제 아내와 누이는 평생 그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p182)
  15. "영원한 타자로서의 프랑켄슈타인 생명체" 중, <네이버 매거진>
  16. "보기 흉한 외모, 그것이 주는 공포감, 그로 인한 편견은 그렇게 극복하기 힘든 것일까? 누군가를 우리 사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p300)
  17.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껀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세상 모든 곳에 기쁨이 가득하지만 나만 혼자 영원히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몰아냈단 말이오. 나도 인정 많고 착했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이오."(p137)
  18.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29~30, 웅진지식하우스, 2013.
  19. 「실낙원」중.
  20. 괴물 또한 소설 속에서 「실낙원」을 읽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21. 전 이 용어가 다분히 상업적 용도로 만들어졌고 사용되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22. 저(뿐만 아니라 아마도 이 작품을 읽어낸 대부분)의 시선과는 달리, '교육과 양육'의 관점에도 포커스를 둔 역자의 해설은, 번역의 능력만이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의 넓이 역시 함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원리를 발견하려는 욕망에만 빠져 있었지 생명 창조의 작업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업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냥 보기에 끔찍하고 무섭다는 이유로 자신이 생명을 준 자식을 악마라고 생각했고 학대하고 방치함으로써 그를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창조자, 부모(혹은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이 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다. …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그가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처음에 괴물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일종의 <자연인> 상태였다. …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선하게 태어났으나 타인들에 의해 악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빅터는 괴물을 창조한 데 대한 죄의식만 있지, 자기가 사랑하고 이끌어 주지 못해서 괴물이 살인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메리 셸리는 이 괴물을 통해 교육과 사랑하는 부모의 양육이 개인의 도덕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pp29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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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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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첨으로 달나라에 발디뎠던 1969년, 그 해에 태어났었는데,

89학번인데, 그니까 재수한 89학번인건데 어느덧,


89년생들이, 말 그대로 어느덧, '서른 즈음'을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 있다는 거야. 어림해보니 아, 진짜 그러네. 뭐 그래봐야 그 간극이란 게 (고작 탁상달력 20개만 갈아치우면 되는) 시간 20여 년에 불과(?)한 거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그저 니!가 '쉰 즈음'이 되었다라는 의미 (아, 이거 참... --;;)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89'란 숫자 뒤에 붙는 접미어로서 '학번'과 '년생'이 자아내는 정서적 차이란 건, 

걔네들에겐 '전설'일 김광석을,

대학로의 콘서트 장에서,

너 바로 앞에서 노래 부르는 그를,

넌 기억한다라거나, 그래서 니가,

그 노래를 걔네들보다 20년 쯤 먼저 부르기 시작했었다라는 것 같은

'경험적 정서'의 차이와,

 생각해보니,

걔네들보다 처마신 소주가 적어도 2,000병은 더 넘을꺼 같다란,

뭐 이렇게 숫자로 표시될 수 있겠는,

그런 객관적 차이를 낳고, 더 나아가,

뭐라 표현할 수 없겠는, 위 두 차이를 훨씬 뛰어넘을 듯한, 

뭔가 어마어마한 게 있을 꺼란 거의 확신을 낳기도 하지. 

근데 문제는, 그게 단지, 그러니까 그게,

따지고 보면 고작(?) '정서적'으로만 그렇다,

도 아닌, 그럴 수도 있다...라는 거.

…………………………………………………………………………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132)

시작은 (제 기준에서 보아) 매우 진부합니다.1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 했다"(p25)란 푸념은 '아무' 누나나 다 해보았을 수 있을, 그만큼 수없이 들어본 푸념이지요. 이후 소설은 --- "가족을 부양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p26) 할아버지에 대해, "계집질 안 하고, 마누라 때리지 않은 게 어디냐고, 그 정도면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p26)했었다는 김지영 씨의 할머니와,

"직장 생활이 원래 그런 건 줄"(p35) 알았었다고,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p35)을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p36)란 자위로 여전히 인내해내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김지영 씨가 어렸던 시절, "지금은, 돈 벌어서 너희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다 그래.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p36) 살아냈음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김지영 씨의 엄마를 등장시키며 전개됩니다. 그렇게,

그 다음 세대인 김지영 씨에게도 또한, 여자이기에 겪게되는 불합리들은 여전하거늘, 여자인 자신에게 건네어지는, 그 불합리들에 대한 설명과 위로들이란 게, ---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 짝꿍에 대해,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뜻"(p41)이란 기이한 해석을 가르쳐주는 담임 쌤으로부터, "남자애들이 원래 유치하다"(p38)란 언니의 말까지 모두, 뭔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p26)해져 있는 그들로부터, 김지영 씨가 받았던 것은 그저, 

"원래 그랬으니까"(p25)란, 뭔가 위로같으면서도 생각해보면 결국, 체념어린 인정(recognition)2을 배워야 한다는 무언(silent)의 (아마도 작가는 이 부분에 '사회적'이란 접두어가 꼭 붙길 원할 듯 싶은) 강요, '체념의 세대간 이전(transfer)'에 대한 강요3였었을 뿐인겁니다. 비록 --- 어린 김지영 씨에겐 단지,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뜻"이란 게 이해되지 않았었을 뿐,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p46)더랬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렇게 시작되었었던,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란 게, '똥이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우니까 피하지'란 비겁한 변명에의 일상적 익숙함을 장착하지 않고선 살아낼 수 없는 곳임을, 성인 김지영 씨는 이내 깨닫게도 되었던 거지요.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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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p136) …… 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p145)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기'에 쏟아지고 있는 모든 (이 표현이 좀 심하다면, '거의 모든', '아주 많은') 부조리와 불합리가 '사회로부터의 뿌리깊은 구조적 차별' 때문,이라고, 즉,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 김지영 씨가 육아와 직장 생활의 병행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 그녀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작가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최고의 수준으로 성립하는 것은 명시적인 형식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마음 속에 내면화할 때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p 37~38, 웅진지식하우스 , 2013.

 

 

'우리는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란 문구를, 현대 사회의 지극한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 ①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가질만한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다구요,란 피로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수도 있는, 더 나아가 어쩌면, ②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에, 어차피 내 몫이 될 수 없을, 당신의 '행복'에 관심을 두고싶지 않네요~란 애처로움으로 읽어야 맞는 것일 지도 모르겠는 현실이기에,


"기득권이 없는 이들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부대끼지 않으면서 적당히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자놀이'로 표현되는) 불가피한 게임의 룰을 받아들여 재빨리 적응하는 것이다."

- 류동민, 위의 책 p43.

자본주의 하 노동계층이, 징병제 하의 대한민국 남성이, 현 입시제도 하의 대한민국 고삐리들이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이란 게 각각 --- 자신의 착취를 가속화하는 노동자, 비상식적 관행과 제도에 남들보다 빨리 적응하는 군바리, 가능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위해 10대로서의 일상을 포기(!)한 고삐리가 될 것을 강


요받게 되고, 결국엔 개인의 취업 문제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우린 스카이가 아니니까"(p95)란 질책을 하는 것으로 끝맺음하라고, 능력이 떨어지는 남자 직원이 능력이 뛰어난 여자 직원을 앞질러 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건 '효율과 합리'의 결과4인 것이라 이해하도록 스스로를 세뇌시키라고 강요하고 있다라는 걸, 이 소설 속 김지영 씨를 통해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선배는 여자를 자꾸 안 되게 만드니까 이러는 거라고 대답했다. (p98)


 

 

그러나,


…………………………………………………………………………

"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77)

- <작가의 말> 중.

작가의 위와 같은 바람()은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저 역시 백번이라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낮 시간 강좌들은 대부분 취미반이거나 독서, 논술, 역사지도사 같은 어린이 대상 강사 자격증 준비반이었다. 여유가 있으면 취미 생활을 하고, 여유가 없으면 내 애든 남의 애든 가르치라는 건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관심사와 재능까지 제한받는 기분이었다. (p163)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이 향하는 것들이 아니라 하여, '독서, 논술, 역사지도사와 같은 어린이 대상 강사 자격증 준비반'에 대해 위와 같은 국외자적, 좀 더 심하게 표현해보자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내는 김지영 씨가 과연,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24시간 휴일도 없이 철야로 일하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비판하기에 앞서, 대형 마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영업방식을 택하도록 한 요인은 다름 아닌 더욱 싸고 편하게 장을 보려는 소비자의 욕구였으며, 역설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고 작업 조건이 좋지 못한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그처럼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마트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지요."5

자신의 필요성6이 생기기 이전까지의 김지영 씨가 과연, '24시간 휴일도 없이 철야로 일하는 대형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 대해서도 "정당한 보상과 응원이 필요하다,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져야 한다"라고 생각했었을까, "여유가 없으면 내 애든 남의 애들 가르치라는 건가"란 그녀의 신경질이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정당한 보상과 응원,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를 향한 조롱일 수 있다라는 걸 한번 쯤 생각이나 해보았을까,하는 의문을 끝내 지워낼 수 없기에, 그러한 의문에 긍정의 답을 떠올릴 수 없기에 결국 --- 김지영 씨에게 건네어져야 할 위로같은 건 없어야도 된다, 심지어 없어야 한다,를 선택하게 됩니다.

·

·

·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132)

반도체와 자동차, 핸드폰을 수출하는 대한민국 무역의 특징이란 게 여전히, '가공무역'이란 단어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게 현실7입니다. 당연히! --- 이처럼 세상은 참 많이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일 수 밖에 없는 건 예의 안타깝고, 서글프며 분노할 만한 일입니다만 적어도, "소외를 이야기하고 그 극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속한 그 작은 집단 속에서 (또) 소외집단을 만드는 모순8"이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이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란 주장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하기에, 

(노랫말도 노벨문학상을 받음에, 이 작품에 대해 이게 문학일까?란 의문을 가져보는 69년생이 '뭐 저런~'의 눈길을 받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한 게 아닌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리하여 작품의 형식에 대한 불만은 차치해버린다 하더라도) 소설 속 김지영 씨에 대해 "보편적인 모습"9이란 표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 역시 도저히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건,


"진공상태이던 우주를 불법들이 가득 채워버렸다면 사소한 불법 하나를 이 세계에 보태봐야 불법의 총량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

- 손아람, 「소수의견」중 p68, 들녘, 2010.

에서 의미되는 바의 '사소함'을 우리가 기꺼이 용인해주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것10과 같은 이유로 인함이지요.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은 건,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고, 당신도 또한 바뀌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정당한 보상과 응원, 더 다양한 기회와 선택지'는 '늘 신중하고 정직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김지영 씨에게(도 주어져야하겠지만, 김지영 씨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대한민국의 여성에게(도 주어져야하겠지만, 여성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건, 43년생의 제 엄마에게도, 69년생인 저에게도 주어져야 하며, 2002년생 종원군에게도 역시 예외없이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불합리와 차별은, 굳이 --- 82년생 여성 김지영 씨에게뿐 아니라11, 당연히 82년생 남성 김지영 씨에게도 다른 모습으로 가해지고 있음을 굳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이, 뿐만 아니라 도무지 동의해낼 수 없겠는 보편성12에만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이 그래서 전 당췌... --;; (참고로 전, feminism에도 관심없고, manism13에도 관심없는 남자입.)

 


 

  1. 사실 시작만 진부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내용이, 심지어 마무리마저도 진부합니다. 게다가 퇴사한 회사의 여자화장실에 몰카가 있었다는 내용같은 건, 너무도 뻔한 목적을 가지고 삽입되었다라는 게 확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이런 진부함을 '보편성'이란 단어로 포장하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2.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중 p70, 생각정원 刊, 2015.
  3.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p68)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위의 책 p69.
  4.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p123)
  5. 류동민, 위의 책을 읽고 쓴 감상문 중.
  6. ​"김지영 씨는 10년 만에 다시 진로를 고민했따다 10년 전에는 적성과 흥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했다. 최우선 조건은 지원이를 최대한 자신이 돌볼 수 있을 것.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지 않고 어린이집에만 보내고도 일할 수 있을 것. …… 김지영 씨는 앞을 시간과 조건이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기면 업종에 관계없이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pp162~163)
  7.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서.
  8. 김형민 作, 「썸데이 서울」중, 아웃사이더 刊, 2003.
  9. "작가는 신작 <82년생 김지영>에서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책소개 중.
  10. 또한 이건, 요즈음의 장관 인사를 보면서도 예의 갖게 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 시기에 따라, 경중에 따라 용인과 처단이 결정된다면 그건 더 이상 법(law)이 아닌게 되지요. 디케의 눈은 더 이상 가려져 있지 않은 건가요?
  11. '82년생 김지영'이란 존재가 여성만을 상징한다라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지요.
  12. <각주 9>.
  13. "The unilaterla law which states men are superior to women." - Urban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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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람 2017-08-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중 받지 못하는 집단에게 또 존중 받지 못하는 집단이 있으니 존중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글이로다.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만물의 핵심에 무작위성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다"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신은 우주를 창조할 때 선택을 했을까?"라는 말은 "우주가 다른 식으로 시작되었을 수 있을까?"라는 의미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중 p34, 김영사, 2007.

(신자(信者)마저 반하게 하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위와 같은 해석/주장에 대해, 이 책 「사피엔스 Sapiens :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줍니다.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2)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 이 습성, 이 환경이, 지난 process를 반복한다 해도 변함없이/여전히 등장할 '당연한 결과'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시간을 다시 "135억 년 전"(p18)1으로 되돌려 '빅뱅'부터 새롭게, 그 어떠한 의미로서든, 말 그대로의 '진화2/역사'3를 다시 시작해 본다면, 그 135억 년 후의 모습이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심지어 이 세상이 지금처럼 '인간'4이란 종()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지 우린 확신할 수 없는 것이고, 혹여 그렇다해도 그 '인간'이란 종의 모습과 지능이 지금의 모습과 지금의 지능에 한정되어야 할 이유나 가능성은 한 마디로 --- 전혀 없다!라는 겁니다.5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p8)에 대한 이해를 독자에게 선사해주고 싶다라 밝히고 있습니다.6 즉, 우리가 살아가고/내고 있는 이 현재와 이 현재의 모든 상황이란 것이, 미리 놓여진 기차의 철로와 같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 일종의 '연속된 무작위의 결과'같은 건 아니라는,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7란 주장에 기대어 보자면,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부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p19)
'세 개의 혁명'이 지금과 같은 모습의 인류와 지구를 shaping해 놓았다라는 것이죠. 책의 시작에 저자가 이렇게 밝혀놓았다면 ---  이제 독자로서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①이 세 개의 혁명이 과연 무엇이며, ②어떠한 연유로 발생되었으며 그 과정에는 어떤 필연성 같은 게 존재하기는 했는가, 그리고 ③어떠한 영향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 미쳤는가 등의 정도로 추려지겠죠. 하지만,
줄거리만을 통해 한 편의 소설을 다 즐겼노라 말할 수 없겠는 것처럼, 누군가 써놓은 요약본을 읽어내는 것으로 이 책 「사피엔스」에 담겨 있는 통찰(insight)과 만났었노라 말할 수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적 대화'라는, 그게 어떤 건지 도무지 알 수 없겠지만 암튼 그런 걸 위한 넓고 얉은 뭔가가 필요하다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의 엑기스적 문장 하나를 굳이 골라본다면,8

우리 종의 역사는 세 가지 혁명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지혁명(우리가 똑똑해진 시기9), 농업혁명(자연을 길들여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든 시기), 과학혁명(우리가 위험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된 시기)이다."(p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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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화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 그것이 시중에 판매되는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을 땐 더욱, 게다가 그것이 베스트셀러이라면, 심지어! 아니인정할 수 없는 학문적 background를 지닌 저자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내용이라면, 잘 알고 있는 분야일지라도 그러할진데 심지어 가장 취약한 분야이라면 --- '비판적'과 같은 단어는, 그 책 속 내용에 대한 습득이나 이해 등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지지는 못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그 '받아들임의 단계' 해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작업인 '정리'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감상문을 써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제 아무리, 이 감상문을 이 책의 (또 하나의) 요약본으로 써낼/볼 생각은 (의도완 달리 결과가 그렇게 될 수는 있겠으나, 지금의 단계에선) 전혀 없다라 하더라도 --- 제가 알고 있었던, 읽었었던 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들, 아주 약간과 새로운 지식의 추가 등에 대한 (인용하는 부분만 많을 수도 있는) 간략한 정리가 대부분이 될, 꽤나 긴 '간략한' 정리랄까? 뭐 '요약'과 '정리'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가급적, <원인-결과>의 frame은 지켜가는, 그런 감상문을 써보고는 싶습니다. 일단, 함 가보죠......
…………………………………………………………………………
【 domestication of fire - "불을 길들이는 것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신호였다."(p33) 】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중, 민음사, 1995.

'도구의 사용'이야말로 (훗날의) 인간과 여타 유인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배웠었던 기억이 있으며, 이러한 '도구의 사용'이 '동기 부여'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주장했던 마빈 해리스 역시 어쨌든, "가장 커다란 막대기를 휘두르는 동물이 가장 커다란 이빨을 가지고 으르렁거리는 동물보다 더 무서운 것"10이라 덧붙였었듯, <직립보행 →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라는 도식11은 딱히 반박되어질 수 없는, 일종의 '정립된 명제'의 지위12까지를 지녀 왔었다,라 전 알고 있었습니다... 만,  
선사시대 인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릴라, 반딧불이, 해파리보다 딱히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13 (p20) ……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살았지만 이들이 지구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다른 인간종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7만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원시 사피엔스(는) … 다른 인간 종들보다 딱히 더 나은 점이 없었고 특별히 복잡한 도구를 만든다거나 다른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p42)
​위의 주장14을 이의 없이 받아들여 본다면 '직립보행15 → 도구의 사용'이란 첫 번째 단계에 대한 문학 작품 속 반론16 역시, 그 논거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쨌든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고17,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란 이후의 도식에 대해서도 서서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고인류 Archaic humans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 이것이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살아남기 좋은 전략이었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버릴 수는 없다. 침팬지는 호모 사피엔스와 논쟁을 벌여 이길 수 없지만 인간을 헝겊 인형처럼 찢어버릴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p27)     
​'논쟁에서의 승리'가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었을 당시라면, 그렇다고 당시 수준에서의 '지능의 발달'이란 게 뭔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스나이퍼!' 식의 사냥용 총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안겨준 것도 아니었기에 --- <창세기>속 창조주의 한 마디를 제외해보자면, 이제 <직립보행 →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란, 이제까지 '정립된 명제'급으로 인식되어왔던 이 도식은 이제, 뭔가 손가락도 팍팍 들어갈 것 같은 정도의 빈틈을 보여주게 되지요. 물론! 그 정도의 빈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다음에 언급될 추가적 단계가 그 빈틈을 모두 다 메워주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올라서는 핵심단계불을 길들인 것(domestication of fire)이었다. (p31)
위협으로부터의 방어나 화식(火食)의 이로움18 정도를 선사해준 것으로 묘사되었던 '불의 사용'에 대해, 저자 유발 하라리는 그것이 '진화의 원인' 수준에서도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 이후 인류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도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었다라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으로 세상에 등장해, 어느새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p31)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그 시작이자 핵심이 바로 (단순한 '불의 사용'이 아닌) '불을 길들인 것'이었다라는 것이죠. 이 순간 또 다시...

"삶은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의 우연히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이라고, 불가피한 상황이 우연이라면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라고, 학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 백가흠, 「마담뺑덕」중 p45, 네오북스, 2014.
왜 인간류만 불을 '사용'하고 기어이 '길들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저자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처럼, 생명의 탄생 이후의 time -series속에 적지 않은 수의 임계점(critical point)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라는 건, 굳이 고고학 같은 과목에 직접 머리 싸매가며 덤벼들어보지 않았었어도 그냥 받아들여지곤 하지요.19 그러한 이유로 하여 "현재 우리 인류도 이전 단계의 인류에서 외계인의 개입에 의해 출현한 존재"20라는 주장 등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며, 무작정 그런 주장들을 허무맹랑하다라 무시해버리는 것도 좀 그렇죠. 암튼!
'불을 길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어찌어찌한 연유로 하여 가능해졌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면21, 그 길들인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는다거나,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또는 맹수들을 쫓아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등의 생활 속 효용을 넘어선, 무언가 훨씬 더 큰 파장이 그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라,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 자연의 먹이사슬 속 최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지요.

먹이사슬에서 호모 속이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최근까지도 확고하게 중간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왔으며 지속적으로 대형 포식자에게 사냥을 당해왔다. …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중간에서 꼭대기로 단숨에 도약한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22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pp30~31)

설혹,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 위에 제가 짧지 않게 적어놓은 부분이 아닐지는 몰라도 저에겐 --- '도구의 사용'이라는 교과서 속 원인이 아닌 '불을 길들임'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류의 잔인함을 이끌어 내는 이 논리가 너무도 매력적인 겁니다. 너무도 매력적이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23"(p44)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p48)

"허구의 등장(appearance of fiction)24"(p53)

"대규모 협력의 가능25"(p53)

"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 패턴의 다양성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인지혁명 이전에 모든 인간 종의 행위는 생물학의 영역에 속했다." (p66)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인지혁명'의 진행26이 오히려 묻혀지더군요. 암튼! 
​원인보다는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p44)
수많은 빈틈들이 보인다 하여, 그 빈틈을 메우려 노력하거나 그 빈틈을 향해 의문/비난을 제기하는 것 모두 옳고 그름이란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겠으나, 그보다는 그러한 빈틈들을 거쳐,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개미는 우리가 남긴 것이나 먹고 침팬지는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 있는 데 비해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바로 이것"(p49)이란, 매우 다행스런(!) 현재라는 결과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냐라는 게 저자의 견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 History’s Biggest Fraud - "농업혁명은 덫이었다"(p129)
'도구와 불의 사용'이 수렵채집의 삶을 정착, 즉 농경과 목축의 시대로 이끌어 내었고, 그것은 진보였었다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진보progress'가 아닌, 단지 "생활하는 방식의 혁명"(p13)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렵채립의 시대에 어떠한 변화27가 발생된 것은 맞으나, 그것이 과연 인간류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했느냐에 대해, 다음의 두 마디는 그야말로 완벽한 부정(denial)의 의견을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p126)
다시 한 번 더, "하나의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 겁니다. "그저 배를 좀 더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pp136~137) 온 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p137)버렸지요. 평균 수명의 증가, 그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대변될 수 있을, 결국 이것이 번영이고 진보가 아니냐란 의견에 대해 저자는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p124)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진화적 관점의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p142) ……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p147)
인간류의 생존과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확대란 거시적 관점의 번영이란 기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p137)이란 고통스러운 미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진행되어왔었다라는 사실, 이를 확대하여 현대에 적용하여 보자면.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은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p152) ……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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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난, 최종적 감상을 굳이 한 단어만으로 표현하여야 한다면 '우울함'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이유의 1번은 이 책의 후반부, 그러니까 인간류의 미래에 관한 저자의 견해이지만, 못지않게 바로 이 부분 - "농업혁명은 덫이었다"(p129)가 함축하고 있는, '혁명'이란 단어와 '덫'이란 단어가 각각 지니고 있는 의미의 상반됨, 그리고 그 상반됨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문장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삶 속 고달픔의 도래(advent)'가 이토록 오래된 것이다라는 사실이, 과연 인류가 진보건 진화이건, 과거보다 더 나아지는 삶을 살아온 것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의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해도 되겠느냐란 질문에 대해, 오로지 부정적 답변만이 떠오르게 되었다라는 점도 매우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지요. 우리 인간류가, 나름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사뭇 '인간임'의 대표적 예로 들수 있겠을 '역사'와 '문화'란 것이 기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p153)

인간류의 집단, 우리가 '사회'라 칭하는 그 집단 속 '협력'이란 frame은 알고보니 그저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고,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춰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p234) …… ①
​결국엔 '복종'이란 단어로 칭해질 수 있겠는 '인공적 본능'이란 게, 우리 인간류가 자랑하는 '문화'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주장, 이게 딱히 반박할 수 없게 믿어진다라는 게 뭐랄까, 저 개인이 아닌 '인간류'에 대한 모욕 같은 걸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소설로 읽었던 「혹성탈출」속 인간류의 굴욕이 그저 소설이니까~로 받아들여졌었고, 영화로 보았던 <혹성탈출> 시리즈 역시 아무래도 메시지보다는 시각적 효과가 더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으나 --- 그런 가상(imagine)이 현실이 된다해도, 딱히 뭐 이상하다거나 부조리, 불합리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가 문제일 뿐, '지배-피지배'와 그에 따른 '복종'의 frame은 동일한 것이니까요. 게다가,
'쵸코파이야말로 현대의 만나(manna)'라는 병신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 같지도 않은 기독교 신자에겐, 같은 기독교 신자인 저도 욕을 퍼부어주겠으나, 위와 같은 지배-지피배와 복종의 frame에 결정적 도움을 준 것 또한 종교라는 사실과 그것을 설명해주는 저자의 시니컬함이 또한 우울함에 일조를 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기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28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p298) …… ②
​저자는 ①번과 ②번의 주장을 결합시켜, 종교가 인간의 문화, 즉 인공적 본능을 자신의 뜻에 맞게 조직했을 뿐 아니라, 아예 조작까지도 했었다란 주장까지도 등장시킵니다.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런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 진실을 말하자면,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p216)

【 Happily ever after -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p581)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p399)
농업혁명 이후 과학혁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는 이제까지와 같은 빅히스토리가 아닌, 일종의 유럽사 강의스런 내용을 짚어줍니다. 당연히, 제국주의 시대가 다루어지지요. 여기서! ---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저자가 제국주의에 찬성을 하지는 않아보입니다. 그럴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근대 유럽인에게 제국 건설은 과학적 프로젝트였고, 과학이란 분과를 건설하는 것은 제국의 프로젝트였다"(p420)과 같이 다른 개념, 여기선 '과학혁명'이란 것과 은근 슬쩍 섞어놓아 적어도 제국주의에 대해 '나쁜 것'이란 굴레를 씌우는 건 안된다,스런 주장을 보여주고는 있습니다.

영국 조사단은 그곳(모헨조다로)을 발굴해, 최초의 위대한 인도 문명을 발견했다. 인도인 누구도 모르고 있던 문명을 말이다.(p421) …… 롤린슨 같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고대 중동 제국들의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p423)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도 존재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맥락의 주장입니다. 영국 조사단이 모헨조다로를 발굴한 이유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발견했다라는 사실로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놓으면,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을 '발굴'로 포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지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땅에 철로를 부설했던 게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근대화라 칭하는 이들에겐 예의,

그는 현지인을 여럿 고용해 자신을 돕게 했는데, 그중 한 쿠르드족 소년은 절벽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냈다. (p422)
놓여진 철로만 보일 뿐, 그 철로는 놓기 위해 동원되어진 조선인들의 희생까지는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근대화식민지론' 같은 걸 비판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p471)란 염려를 하는 저자가, 영국인의 강압적 지시에 따라 '절벽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내야 했던 쿠르드족 소년의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이런 독자가 있을 수 있다라는 걸 알았을까요?
"인지혁명 이래 험난했던 7만 년의 세월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었는가?"(p530)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p532)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란 약한 뉘앙스의 서술을 선택한 저자는, 반면 인간류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해서는 사뭇 강도가 세지는 지적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계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생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35)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pp587~588)
농업혁명이 개인의 삶을 힘들게 만들기 시작했다면, 과학혁명은 인간류 전체에게 심대한 불행과 자칫 종말까지를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라는 게, 제가 이해한 바 저자의 견해였습니다. 물론 아직은, 우리를 대신해 다른 종들이 사라져 가고 있지요.29여기에 더해, '개인의 소외'30등과 같은 문제까지도, 종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초래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까지 하여도,

(1) 종의 멸망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 원인으로는 지구 온난화와 핵전쟁, 이 두 가지가 가장 유력하다고들 하더군요. 지구 온난화는 (제기되었던 처음에는 그러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엔 명백히) 과학적 주제가 아닌 정치적 이슈라 생각하는 저의 의견과 비슷한 맥락으로, 저자 역시 "오늘날 무슨 일이든 기후변화 탓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지구의 기후는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역사상 모든 사건은 모종의 기후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p106)라며, 지구 온난화 자체가 많은 인류 멸망 시나리오들31 중 선택될 가능성을 낮게 보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핵전쟁에 의한 지구 멸망만을 거론하고 있지요.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6,500만년 전, 소행성이 공룡을 쓸어버렸지만, 그럼으로써 포유류가 번성할 길이 열렸다. 오늘날 인류는 많은 종을 멸종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멸종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잘 버티고 있는 생물들도 있다. 가령 들쥐와 바퀴벌레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끈질긴 생명체들은 아마도 핵무기로 인한 아마겟돈의 폐허의 바닥을 헤치고 기어 나올 공산이 크다. 자신들의 유전자를 퍼뜨릴 능력과 준비를 갖춘 상태로. 어쩌면 지금부터 6,500만 년 후 지능 높은 쥐들은 인류가 일으킨 대량 살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볼지도 모른다. (p497)
피에르 불의 소설 「혹성탈출」의 주인공이 유인원에서 '지능 높은 쥐들'로 바뀌었을 뿐, 그 암울함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2) 종의 변화
역사상 모든 지점은 교차로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하나의 갈래였지만, 여기에서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이 중 일부는 더 넓고 평탄하며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될 가능성도 더 크지만, 때때로 역사는 - 또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 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인다. (p337)

인류는 드디어, 역사를 만들(어 가)기로 결정합니다. ---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p471)란 현실에 직면한 인류는 드디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란 경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지요.32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p584)  

생명의 탄생에 있어 창조주의 지적설계가 작동했다는 종교의 가르침과도 같이33, 이제 인간류는 다른 종()들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마저도 지적설계를 적용하는, 말 그대로의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40억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했다. 지적인 창조자에 의해 설계된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p561) …… 40억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자연선택이라는 구체제는 오늘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살아 있는 개체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원래 해당 종에게 없던 특성을 부여하는 정도까지 자연선택의 법칙을 위반하는 중이다. (p563) …… 지난 40억 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인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 그때가 도래하면, 그 이전의 인류사 전체는 생명이라는 게임에 혁명을 일으킨 실험 및 견습 과정이었다고 뒤늦게 재해석될 것이다. (p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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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미 : 지금 네 머리엔 조금이긴 해도 다른 사람의 뇌가 들어 있지?
준 : 그래
메구미 : 하지만 준은 준... 이지?
준 : 그야 당연하지. 내가 준이 아니라면 누구라는 거야? 나는 나야. 다른 누구도 아닌.
메구미 : 하지만 만약에 뇌를 전부 바꾸면 어떻게 되지? 그래도 역시 준이야?
준 : 그러면... 그러면 내가 아니겠지. 그 사람은 원래 뇌의 주인일거야.
- 히가시노 게이고, 「변신」 중, 창해, 2013.
​사람 A의 머리 속에 다른 사람 B의 뇌 일부를 이식한다라는 문학의 설정은 A가 A일 수 있는 한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이를 더 넓혀 보자면,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최근 돼지 등 동물의 장기를 인간 장기의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머지않아 "마치 구형 가정제품을 신형으로 교체하듯 신체 장기를 기능이 좋은 새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 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중 pp 67-69, 일조각, 2003.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이처럼, 몇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인간의 DNA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오래된 본능일지도 모르지요. --- "분명 세상에는 에너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p480)란 구절처럼,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닌, 그 방법을 몰랐던 것 뿐이었으며, 현대의 과학은

아직 보편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이러한 새로운 유전자 공학과 생명 공학의 발달은 이제 '인간다움'을 설명해 왔던 기존의 틀에 의문을 제기한다. …… (한 발 더 나아가) 사이보그는 한편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로 유기적 몸과 인공적 기계장치 사이의 경계가 인간의 몸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제 인공 심장, 인공 관절, 인공 신결, 인공 안구 따위가 수술을 통해 손쉽게 인간의 몸속에 삽입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인공적 대체물의 발달은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조되어도 괜찮다는 신념을 배양하고 있다. ……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발전의 과정이 기존의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p70-72.
문화인류학의 위와 같은 질문에,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뇌를 휴대용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북 컴퓨터에 실행한다고 가정하자. …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 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유기화합물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40억 년간 배회한 끝에 마침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pp577~578)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적어도 개조할 수는 있게 된, 말 그대로 "신 비슷한 존재"(p581)의 단계에까지 이르르게 된 것이죠.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pp438~439)라는 믿음이 우리가 스스로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릴 수 있는 기술까지의 진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말 그대로 'Happily ever after~'할 수 있을까요?

​"진화란 예측 가능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누적된 변화들은 급격한 환경적 변화와 당면할 때 인간 종을 멸종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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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서 치료를 멈춰야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중 p238, 부키, 2015.
이제 인류는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란 말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을수도 있다라는 거지요. 하지만! ---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p6)을 손에 넣은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을 때, 그 때를 가리켜 저자는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p571)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God)과 인간(Humankind)의 경계가, 가장 결정적인 임계점(critical point)이 어디인지 저는 모릅니다.34 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그 임계점이 눈 앞에 보일 때, 과연 인간은 그 곳에서 멈추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행여 그 임계점을 넘어서고 말았을 때, 그리하여 이제껏 (예를 들어)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p169)이란 '상상의 질서(omagined order)'에 복종해왔던 인류가 스스로 신들(gods)로 기능하게 될 때, 우리의 미래는 과연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 유발 하라리가 적어놓은, 이 두꺼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왜 이 책을 읽고 난 저의 전체적인 느낌이 '우울함'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35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p588)
(Is there anything more dangerous than dissatisfied and irresponsible gods who don’t know what they want?)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는 문학작품들 : 「혹성탈출」,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가지 이유


 

 

 



 

  1. 역자는 "우주의 나이는 137억 9,800만 년 ± 3,700만 년이다"(p18)라 더 정확하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2. "진화란 종의 유전적 형질이 시간을 통해 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변화의 누적을 통해 공통 조상으로부터 새로운 종이 발생하여 생명체의 종이 다양해지는 현상이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중 p51, 일조각.
  3.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의 '역사'를 따른다라면 ---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는 생명체가 좀 더 정교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그후 인류문화가 발전해온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p18)
  4. "지난 1만 년간 우리 종은 지구상의 유일한 인간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유일한 인류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인간 human'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호모 속(genus)에 속하는 동물'이고, 호모 속(genus homo)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여타의 종(species)이 많이 존재했다." (p22)
  5. "지구 역사의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어보라. 인류와 같은 존재도 없을 것이며,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다"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주장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견해에 반대하였던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창조주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빅뱅 이후 만들어진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종이 바로 지금의 인간 종'은 모두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요.
  6. 제겐 '어떻게 해서' 부분에 가장 많은 focus가 주어져 있다고 보입니다. 뭐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7.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 리처드 도킨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 p234, 김영사, 2012.
  8. 책의 말미에 실려있는 <옮긴이의 말>(pp589~593)은, 이 두꺼운 책의 요약으로 더할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9.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사람)" - 리처드 도킨스,「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 p58.
  10. 마빈 해리스, 위의 책 p19.
  11. "직립보행을 통해 인류이 조상은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시야를 확대할 수 있었고, 먹다 남은 사냥감이나 식량을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직립보행은 목구멍의 공간을 넓혀주어 성대의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인간이 다양한 소리와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4.
  12. "직립한 결과 두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인간의 조상들이 '도구'를 만들어낸 것이 인간을 '자연의 범주'로부터 '문명의 범주'로 전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되는 호모 사피엔스는 뇌 용량의 증가와 함께 발달한 지능으로 다양한 도구를 제작해 왔고, 인류 진화의 과정은 종종 문명을 통한 자연의 정복과 통제로 묘사되어 왔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6.
  13. "핵산염기 배열 분석과 DNA 잡종교배 방법에 따르면, 침팬지와 인간의 염기 서열은 98.4%가 동일하다고 한다. 2% 미만의 유전자의 '차이'가 종의 구분을 가져왔다는 의미는 어떤 점에서 인간이 여전히 '동물적인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3.
  14. 몇십 만년 전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그것이 제 아무리 엄밀한 과학적 배경을 잃지않고 있다 하여도, 이론이나 명제가 아닌 추측일 수 밖에 없다란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 '주장'입니다.
  15. 저자는 '직립보행'이 다른 방향에서 인간류의 진화에 도움이 되었다라 설명해줍니다. 중간을 생략해보자면 결국 '직립보행 → 사회적 존재'의 도식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죠. 이하의 설명은, 몇 권 되지 않지만 이제껏 읽어 본 여타의 진화 관련 책에서 제가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용이었었네요. --- "여성은 더 큰 비용을 치렀다. 똑바로 서서 걸으려먼 엉덩이가 좁아야 하므로 아기가 나오는 산도(질)도 좁아지는데, 하필이면 아기의 머리가 점점 커져가는 기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분만 중 사망은 인간 여성에게 주요한 위험이 되었다. 아기의 뇌와 머리가 상대적으로 작고 유연할 때 일찍 출산하는 여성이 더 살아남기 쉬웠고, 더 많은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연선택은 이른 출산을 선호했다. 사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때 인간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많은 시스템이 덜 발달한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p28) ……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여, 여러 해 동안 어른들이 부양하고 지키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인간의 사회적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 덕이요, 특유의 사회적 문제를 안게 된 것도 이 탓이다. 혼자 사는 엄마는 줄줄이 딸린 자녀와 자신을 위한 식량을 충분히 조달하기가 어렵다. 애를 키우려먼 가족의 다른 구성원 및 이웃의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인간을 키우려면 부족이 필요했고 따라서 진화에서 선호된 것은 강한 사회적 결속을 이룰 능력이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인간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교육을 받고 사회화할 수 있는 기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길다."(p29)
  16. "침팬지인 내 의견은... 우리가 사수류(四手類)라는 사실이 우리의 정신적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해. 덕분에 우리는 쉽게 나무에 오르고 공간의 3차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인간은 손이 두 개뿐인 데다다 손가락이 짧고 서툴러 땅바닥에 고착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평면의 2차원에만 안주해야했지. 신체적 장애로 인해 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던 인간에 비해 우리는 능숙하게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이었어." - 피에르 불, 「혹성탈출」, 소담, 2011.
  17. "수많은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도구 제작 그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p67)
  18. 물론 '화식의 이로움'이 인류의 진화에 일정 정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일종의 부산물이었다라는 것과 아예 '진화의 원인'이었다라는 건 달라도 엄청나게 다른 것이죠. --- "불이 하는 최고의 역할은 음식을 익히는 일이다. 조리 덕분에, 인간이 자연 상태 그대로는 소화할 수 없는 밀, 쌀, 감자 등이 인간의 주식이 되었다. … 침팬지는 날것을 씹어 먹느라 하루 다섯 시간을 소모하지만 사람은 익힌 음식을 먹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 익히는 요리법 덕분에 인간은 더욱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식사 시간도 줄일 수 있었다."(p32)
  19. "인간 진화의 과정을 다루는 인류학자들은 거대한 시간적 공백을 메워 나가기 위해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화석 자료와 생태학적 자료들에 의존해 왔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류 진화사는 과학적 추론에 의거한 해석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화석이 발견되거나 인간의 몸을 둘러싼 과학적 해명이 진전될 때마다, 진화의 구체적 과정과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조건들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0.
  20. 최준식·지영해, 「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중 p100, 김영사, 2015.
  21. "하나의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
  22.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
  23.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Tree of Knowledge mutation)"(p44)
  24.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 ,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pp48~49)
  25.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p53)
  26. 이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생명체의 한 종으로서의 인간은 생존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지닌 한계를 극복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생존력을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다양한 문명과 문화였다.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을 정복하는 방식들을 배워 갔고, 종교나 의례를 통해 삶의 의미들을 만들어 갔으며, 예술을 통해 자신의 문화를 표현해냈고, 정치와 경제 활동을 통해 힘과 자원을 조직적으로 분배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언어'를 통해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획득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p51~52.
  27. "인간이 250만 년간 먹고살기 위해 사냥했던 동물과 채집했던 식물은 스스로 자라고 번식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개입은 없었다. … 이 모든 상황은 대략 1만 년 전 달라졌다. 이때부터 사피엔스는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직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인간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다. 이런 작업을 하면 더 많은 과일과 곡물과 고기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pp12~13)
  28.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pp169~170)
  29. "산업혁명은 에너지를 전환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 덕분에 인류는 주변 생태환경에 예속된 상태에서 대체로 해방되었다. 인류는 숲을 베어내고, 늪의 물을 빼고, 강을 댐으로 막고, 들판에 물을 대고, 수십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로를 놓고, 고층빌딩이 즐비한 거대도시를 건설했다. 세상이 호모 사피엔스의 필요에 맞게 변형되면서, 서식지는 파괴되고 종들은 멸종의 길을 걸었다. 과거 녹색과 푸른색이던 우리의 행성은 콘크리트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쇼핑센터가 되어가는 중이다."(p495)
  30. "산업혁명은 인류사회에 수십 가지의 커다란 격변을 불러왔다. … (이들 중) 인류에게 닥친 가장 중요한 사회혁명(은) …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 사건이다."(p502) ……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지만, 불과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p509)
  31. ​"과학자들이 내놓은 수많은 인류 멸망 시나리오 가운데에 지구 온난화가 당첨" - 정승락 외,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가지 이유」중 p173, 월간토마토, 2017.
  32.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래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p580)
  33. 헤브루 대학의 교수인, 아마도 유대인일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를 부인합니다.
  34. "인간이란 여성과 남성 같은 범주처럼 '경계' 개념이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72.
  35.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p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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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4 - 세상의 종말
부알렘 상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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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신도는 아주 어릴 시절부터 길러지는 것이었다. … 인간의 삶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거부하는 완전한 신자. (p51)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 제게 주었던 충격, 선()이 자신의 존재함을 위해 악()의 부재(不在)를 용인하지 않는다란 설정을 --- 이 작품 「2084 : 세상의 종말」의 작가 부알렘 상살은, 완벽하게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려면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없애면 다른 하나도 없어진다. (p61)
자신에게 주어졌던 악의 행사를 이제는 멈추게 해달라는 ​「예수복음」 속 악마의 간절한 청에도, 신께서 끝내 단호한 거부를 거두지 않으셨던 이유는 한 마디로, '악이 없어지면 선의 존재도 필요하지 않게되기 때문'이었었지요. 그리하여 어쨌든 신은 (악마와 더불어!) 명성과 존재를 이어가게 됩니다만, 이 작품 속의 신(), 욜라1- 실제 주체는 욜라를 믿는 종교의 지도자들 - 정반대로 상대 (즉, 모든 사상)의 존재를 아예 허용하지 않음으로 자신이 선()임까지도 포기한, 그러나 그렇기에 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되어버려, 여타의 판단가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선택합니다.    
공허는 세상의 본질 …… 영()​의 신비로움이 여기에 있다. 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불2은 완벽한 응답이었다. 세상의 절대적인 무용성에 대응하려면, 공허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어야 했다. (p321) 
이처럼, 소설 속 지리적 배경인 아비스탄 제국은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3이며, 그 지배는 "우리는 욜라의 것이며, 우리는 아비4에게 순종해야 한다"(p46)라는 (일종의 당위적) 규율을 강제함으로, 민중들 마음 속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이내 그 믿음이 '순종'으로 이어지게 된5 '길러진 신자(信者)',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절대적 구속의 지배구조6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고, 길이며 목적지이다. 이것은 순종과 복종만큼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었다. 훌륭한 신도라면 당연히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아파레유7의 감시에는 빈틈이 없어, 누군가를 속이려는 생각을 품기도 전에 그런 잘못된 생각을 품은 사람은 제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pp27~28) 
그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고픈, 자신만의 할 말이 있겠듯, 이같은 완벽한 통제에 대해, 아비스탄 제국의 지배자,
"세상은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 「사람의 아들」중 어느 제사장의 말, 민음사, 2004.​ ​  
​즉 성직자8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싶었을 꺼라, 결코 풍족하지 못한 아비스탄의 상황9하에서, 아비스탄의 민중들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들려줄 수 있는 말이라곤 여하하여도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10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노라고 항변하고 싶지 않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희망은 (여러분 다들 미루어 짐작 가능하겠듯) 웃기는 소리일 뿐이고, --- 1인칭과 2인칭만이 존재하도록 허용된, 3인칭은 아예 상상 속에조차 존재하지 못하며, 여기에 세뇌된 믿음11과, 그로부터 연유된 맹목적 무지12와 무기력한 안주(安住)13(혹은 포기(?))까지가 더해졌기에, '민중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란 그들의 항변은, 그들이 속으로 원하였던 바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올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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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적 체제는 …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가해한 토템과 초월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법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과 그 조각들은 토템과 지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존재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다. (p169) 
그들의 항변이 터무니없다라는 것이, 작가의 전지적 시점을 통해 독자에게 말해지고 있듯이, 뭐 꼭 굳이 그런 전지적 시점의 도움까지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고 2017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정상적 사고(思考)의 소유자라면 스스로 깨쳐낼 수 있겠듯, --- 이런 형식의 종교적 지배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으며, 어디서 어떻게 그 믿음에의 균열이 시작되는가를, 작가 부알렘 상살은 주인공 아티에게 다음에서 처럼, 뭔가 '보리수 아래에서의 그것'을 떠올려주는 듯한 방식의 깨달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과 불가사의를 이용해 사람들을 종교적 믿음에 엮어놓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는 날 아티는 폭우를 맞으며 깊은 사색에 잠겼고, 신앙과 광기를 하나로 묶고, 진실을 두려움에 묶어두는 사슬을 파괴해야만 낙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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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아티를 내리쳤던 깨달음의 궁극은, 그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너무도 허무한 것일 수도 있을14, 허나 가장 기본적이며, 그러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현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는 아니었다."(p166) 란 의문이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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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종교 없이 살 수 있으며, 성직자의 도움이 없이도 삶을 마감할 수 있다." (p145)
다분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기독교 신자인 제가 이런 문장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라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혼'나야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만,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가 없었던 아티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종교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닌,
"아티가 마음 속으로 거부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었다." (p100)

또한 이 때의 '억압'이란 것이, 삶에 가해지는 개별적·단속(斷續)적 억압(이라기보단 일종의 '제약')의 수준을 뛰어 넘어,

과거를 돌이켜볼 때 역사에서 우리보다 앞선 세대를 덮친 위험한 현상을 지금도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위험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과거의 재앙이 조만간 이 시대에도 닥칠거라는 걸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종교가 그들에게 죽음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들은 하늘나라에 자리가 이미 예약되어 호화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p326)
​이미 완벽하게 고착화 되어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란 제사장의 말들이 오히려 깨뜨려질 수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어버린 이런 정도의 억압이라면, 이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가 어떠한 종교의 신자(信者)인가하는 여부마저 가리지 않고도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말을 작가가 전하고 있다고, 심지어 --- "견제가 없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란 노명우 교수의 일갈15 속 '상식'의 자리를 '종교'가 대신한다 하여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라는 걸, 이 소설이 또한 보여주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혹은 더 좁게/다른 방향으로 보아, 
이 억압의 주체를 '종교의 외투를 쓴 인간'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라면, 혹은 뭐, "신정국가, 종교적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p355)이란 역자의 단언처럼 굳이 현재의 이슬람권을 빗댄 소설이라 한정지어야겠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메시지16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암튼, --- 여기까지 뭐라 제가 지껄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내용일지라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있을/있다고 믿어지는 메시지의 내용이, 혹여 느껴지는 무거움이 여하히 당신에게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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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치면 로드 판타지로 분류될 이 소설의 스케일은 '슈렉'과 '반지의 제왕' 중간 어디쯤이다. 2부 중간까지 이어지는 지루함을 극복하면 뒷이야기가 엄청나게 궁금해지는, 살짝 유익하고 교훈적인 장편 소설의 재미를 볼 수 있다. … 유럽에서 '핫'한 정치 소설을 읽어두겠다는 지적 허영심만으로는 초반 '세계의 문법'을 익혀야 하는 길고 지루한 독서를 감당하기 어렵다."
- <2084년, 단 하나의 종교가 세계를 지배한다> 중, 2017.6.22. 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대개의 신문사 서평을 쓰는 방식과는 다르게) 아마도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본 듯한 이윤주 기자의 위 기사는, (그나마 '유익'과 '교훈'으로 포장된) '재미를 볼 수 있다'란 출판사를 위한 일종의 lip-service용 문구를 제외한다면17, 전적으로 솔직하게 쓰여진, '길고 지루한 독서를 감당하기 어렵다'란 핵심적 구절에서 보여지듯, 이건 저도 또한 이 작품을 읽어가며 가졌었었던, '이 덥디 더운 여름 날, 에어컨/선풍기/맥주 등의 부대적 지출과 더불어, 그야말로 황금같은 주말의 시간을 투자해, 굳이 내가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란 의문을 단 한 시도 지워내지 못한 채, 그러나 결국엔 다 읽어내고만 제가 그러했었듯, 뭔가 마음 속 억울함 같은 걸 담고 있는, 그런 감상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역자나, 심지어 출판사조차도 --- 이 소설을 번역하고 출간한 것이 영리의 추구라는 상업적 이유에서가 아닌, 어쩌면 '외국 문학상 수상작 번역/출간'이라는 하나의 reference 를 쌓기 위함만이 아니었을까,하는, 매우 대담한 추측까지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레 해보게도 됩니다. 뭐 그만큼, 담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과는 별개로, 읽어내기엔 완벽하게 재미 없는 소설이란 말이지요. 혹여, 저의 정신적·지적 수준 및 상태가 이 작품을 읽고 이해해내는 것에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신다해도 괜찮으며, 실제로도 그런거라 할지라도 별 달라지는 것 없이 부디,  
이 작품을 읽느니, 다음의 소설들 모두 혹은 한두 권이라도 읽는 것이 최소한! 천번 만번 쯤은 더 낫다라는 저의 조언에 당신이 동의해 주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정신 건강과 아까운 시간 및 기타 등등등,을 요딴 소설 읽는 것에 낭비하지 않아주길, 당신과 아무런 혈연 관계도 아닌, 또한 당신과 그 어떠한 금전적 거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 바라()봅니다.

"밝지 않은 미래" ​(모두 강추!) : 「혹성탈출」, 「1984년」, 어떤 소송」, 「백년법」,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가지 이유

 

 

 



 

  1. "유일신, 하느님" (p359)
  2. "아비스탄의 성스러운 종교의 명칭이자, 아비가 자신의 신성한 가르침을 기록한 성서(聖書)의 명칭" (p359)
  3. "아비스탄의 경제는 모두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p24)
  4. "욜라의 대리인" (p359)
  5. "카불의 치하에서 믿음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종으로 이어졌고 … " (p227)
  6. "법복이 성직자를 만들고, 믿음이 신자를 만든다" (p208)
  7. ​"아파레유는 정의로운 형제회와 아비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한을 지닌 조직이었다." (p30)
  8. "고귀한 사람들, 즉 정의로운 형제외의 대율법학자들과 아파레유의 지도자들만이 그것을 비롯해 나머지 모든 것을 알았고, 그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작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을 손에 쥐고 다녔다." (p82)
  9. "삶 자체가 힘겨웠고, 제국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일상은 결핍에 결핍이 더해지는 삶이었다.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몸이 쇠약해진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p35)
  10. 존 스타인벡 作, 「분노의 포도」중 톰의 말, 홍신문화사, 2012.
  11. "​사람들이 믿음을 유지하고, 필사적으로 믿음에 매달리게 하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결코 멈추지 않는 진정한 전쟁이 필요하고, 보이지 않는 적, 더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적이 필요하다. … 원수를 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원수는 분명히 원칙적으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p133)
  12. "신의 본질을 과신하는 존재가 판단력이 마비된 미숙한 못난이로 전락하는 이유" (p120)
  13. "백성들은 이처럼 무심했고 상상력도 거의 발휘하지 않았으며, 현실이란 경계 너머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p20)
  14. "의심은 불안을 낳고, 곧이어 불행이 들이닥친다. 아티가 그런 지경에 빠졌다. 아티는 불면에 시달렸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싸워야 한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p40)
  15.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사계절, 2013.
  16. "조지 오웰 선생이 <1984>에서 상상하고 완벽하게 창조해낸 빅 브러더의 세계가 그의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일러두기> 중
  17. 굳이 재미를 찾아 보자면, '2084'의 의미라든가, 왜 지구가 이렇게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그야말로 초간단 교훈 설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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