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원제엔 'The Modern Prometheus'란 단어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라 하면, 인간들이 이 험한 자연에서 살아남기 너무도 약한 존재같아 보였기에, (허락도지 않은 행동이었던) 불(fire)을 선물해 준 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만,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전에 인간을 창조한 신이기도 하더군요. 즉,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불까지도 안겨주었고, 그리하여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주었던 존재인 겁니다. 그렇다라면, ---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탐욕스러워질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제우스는, 그렇게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신 비슷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의 단초를 안겨준 것에 대해 격노를 하여, 끝나지 않는 형벌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보게도 되지요. 이처럼,
신(God)이 반드시 인자하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겁니다. 물로 온 세상을 덮어버리고, 바벨탑을 무너뜨린 것만 봐선, 신도 화를 내시긴 하며, 한 번 내면 아주 끝장나게 내는 분인 것 같기도 하죠. 뭐 이게 꼭 성경 속 신(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신화 속의 다른 신들은 뭐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죠. 이제,
'만물의 영장'이란 칭호로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인간은, '신과 비슷한 지위' 뿐만이 아니라 '신의 능력'에까지 아주 가까이 다가와있지요. 위에서도 언급했었듯, (개조/tuning까지는 참아주실 수 있다해도) 자신만의 고유 영역인 '창조'의 단계에까지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피조물일 뿐인 존재들이 침범한다라는 걸 과연, 그 신이 허용해주겠느냐의 문제는 --- 이게 뭐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신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도 받아들인다 하여도, (예를 들어 '이상(理想)처럼,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나 하나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을 수는 있겠는) 일종의 개념적 존재로서 생각해볼 수는 있겠을 '신'이란 지위에까지 인간이 오르려 하는, 일종의 '신 되어보기'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하는 문제는 --- 좀 거창하게 나가보자면 인류의 종말과도 관련이 있는 사안이 될 수도 있다란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읽는다면,
작가 메리 셸리는 이 작품을 통해 윌턴 선장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두 인물이 지닌 욕망이 결국 파국을 맞게되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간의 어떤 노력의 결과가 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의 엄청난 메카니즘을 조롱하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 무서울 것"(p15)이란 자신의 생각을 아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란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현상 중 하나가 인간, 아니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의 신체 구조였다. 어디서 생명의 원리가 비롯된 것일까? … 그것은 대담한 질문이었으며,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질문이기도 했다.(p74)
생명의 원인에 대한 해답을 죽음으로부터 얻으려 했던 프랑켄슈타인은, 일종의 환원주의(reductionism)적 연구를 통해, 드디어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밝혀"(p75)내게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 인간과 신의 임계점까지도 넘어서게 되었죠.
생명이 없는 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p75) …… 새로운 종(種)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터였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이 나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 이런 상상을 계속하다 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비록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p77)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아주 오래된 소설 속 상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화석으로부터 매머드를 다시 탄생시킬 수 있다라고, GMO는 이미 자연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種)을 만들어냈노라 자랑하는 인간이, 언젠가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켜'내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었던 예수의 기적이 '신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하지 않을꺼란 보장을, 이젠 그 누구도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메리 셸리가 1818년에 출간한 이 작품을 통해 피력했던 이러한 염려는, 이후 「지킬박사와 하이드」 및 「투명 인간」등을 통해 'Mad Scientist'라는 일종의 전형적 인물상으로 이어졌으며, 예의 동일한 결론 - 자연/신의 섭리에 거스르려는 시도가 가져오는 충분히 불행한 결론을 이어가게 됩니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피조물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라 느끼셨었었거늘, "그의 팔다리를 비례가 맞도록 구성했고 아름다운 외모의 특징들을 골라 짜 맞추"(p81)어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지옥에서 막 나온 듯한 추악한 얼굴 unearthly ugliness"(p136)을 하고 있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 too horrible for human eyes"(p136)했었습니다. 여기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나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란 기준은 예의 창조자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라는 게 중요합니다. 막 진흙에서 생겨난 아담이나, 시체의 부분부분이 이어져 만들어진 괴물(daemon)에겐 '미(美)'의 기준이 당연히 존재할 수 없죠, 즉,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의 시선이 미(美)의 기준까지도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혹성탈출」에서의 유인원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을 향해 "너는 정말로 못생겼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권력은 '나'와 '너'를, '우리'와 '너희들'을 여하히도 구분지어놓으려 합니다. 구분에의 기준은 너무도 많아요. 권력있는 자에 의한 구분지어짐, 대한민국의 갑질이란 것도 알고보면 이런 구분지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 이 작품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이 인간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유는, 그의 외모 딱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그가 모습들 드러내지 않은 채 행한 선행은 "착한 정령"(p155)이란 단어를 불러왔었었거늘, 그의 모습을 본 후 그 모든 것은 평생 헤어나지 못할 공포로 전환되지요. 이 관계에 대한 괴물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우리가 화합하는 데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요. … 나는 상처받은 만큼 복수할 거요. 사랑을 일깨울 수 없다면 두려움을 일깨우겠소. (p190)
그리고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 Monsters are not born monsters 】
소설 속 괴물을 "소외받고 핍박받는 계층인 노동자, 외국인, 여성 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하는 것에 큰 무리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구분'과 '차별'이란 단어가 지니는, 국어사전 속 뜻의 차이완 비교가 되지 않는, 사회적 맥락에서의 차이란 게 --- 가리봉동이나 안산의 조선족/동남아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그 누구든 ('가리봉동'이란 고유명사로 대변될 수 있겠을) 그러한 환경에 던져진다면 미국인이건 스웨덴 사람이건을 떠나 똑같은 비난에 직면하게될 수도 있다란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리는 바로 이 '심각한 차별'이야말로 지적되고 고쳐져야할 문제점인 것이죠. 가리봉동이 문제가 아닌 것이고, 조선족이나 동남아 사람이라서가 '주요하며 유일한' 원인이 아니란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이나 정부가 왜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소. 죄악과 살육에 관해 자세히 듣고서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지만 나는 역겹고 혐오스러워 고개를 돌렸소. … 인간 사회의 이상한 구조 … 부의 분할, 거대한 부와 비참한 가난, 그리고 계급과 가문, 귀족 … (p161)
이 소설이 쓰여졌던 19세기 초반과 현재 21세기라는 시간적 차이는, 괴물이 지적했던 이해할 수 없음의 실례들을 무색케 해주지요. 도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쨌든 --- 완전한 이방인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았던 괴물의 '이해할 수 없음/역겨움/혐오스러움'은 오래가질 않습니다. 이제 그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배웠으니까요.
내가 왜 나를 동정하지 않는 인간을 동정해야 하오? …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존경하겠소? why I should pity man more than he pities me? … Shall I respect man when he condemns me?(p190)
이제부터 괴물은, "타락한 천사는 악마가 되는 법 the fallen angel becomes a malignant devil"(p288)을 따르기로 합니다. 자! --- 위의 몇 줄이 '가리봉동의 조선족과 안산의 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한 아주 간략한 설명이라면, 뭐 크게 어긋날까요? 물론, 가리봉동이나 안산,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이 다 천국이고 천사란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무엇이었었건 그들의 타락에 과연 대한민국은 '난 잘못 없어~'라며 정색할 수 있겠느냔거죠. '난 강남에 사는데?', '난 어엿한 한국 사람인데?', '난 명문대 재학중인데?', '난 정규직인데?'라는 이유들이 당신을 그들과 다르게 해준다구요?
"내가 너를 사랑함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것, 내가 비정규직인 것은 내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도록 일해도 한달 수입이 백만 원밖에 안되는 것은 내 '생산성'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잠을 줄이고 노력하여 부족한 내 사랑, 부족한 내 '스펙', 부족한 내 생산성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다그치는 것이 바로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주문이다.
-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중 p207, 웅진지식하우스, 2013.
당신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 그 어느 곳이건, 이 사회는 당신에게 강요하는 요구를 항상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넌 노예야. … 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p220)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었던 '돈'이란 것이,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리란 바람으로 받아들였던 '자본주의'란 것이 거꾸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듯,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거꾸로 프랑켄슈타인에게 명령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의, ---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했던 존재가, 탄생 당시부터 괴물로 태어났던 것이 아니었었듯, 당신과 나도, 예전보다는 괴물스러워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며, 그리하여 언젠간, 아직 괴물이 덜 된 누군가들에게 '네 인생의 CEO가 되라'라 요구하는 (버젼만 다를 뿐인) 프랑켄슈타인이 되어갈 수도 있겠구 말이죠.
【 Actions have consequences 】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누가 낳아달랬어?'란 사춘기의 반항같아 보이는, 하지만 그보단 훨씬 더 가슴아프고 본질적일 질문을 빌어오는 것으로, 작가는 이 소설의 시작을 열고 있습니다. 소설 속 괴물 역시,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게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 끼치는 괴물을 왜 만들었는가?"(p172)라 묻지요. 자, 이제까지의 제 글이, 괴물의 입장만을 말하고 있었다라면, 이제부턴 우리 인간의 편에서도 좀 봐볼까요? --- 지극히 완전히, 인간의 시선에서, 그리고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상상하며 이 소설의 메시지를 뽑아내 본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도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 아닐까라, 생각해봅니다. 이 소설이 쓰여졌을 당시 한창이었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가히 '혁명 Revolution'이란 단어까지를 불러내왔었을만큼 급격한 것이었었고, 그 새로움과 급격함은 (편리함과 미래에의 희망 등과 함께) 염려스러움 그리고 두려움까지도 주었을 수 있었겠지요. 1963년 작가 피에르 불에 의해 탄생했던 한 편의 소설, 「혹성탈출」이 1968년 영화가 되고, 그 앞뒤의 이야기들이, 몰라보게 발전한 영화적 기법의 발전에 따라 시리즈로 만들어져 와있듯, 우리가 지금의 과학과 기술에 굳이 '4차 산업혁명'이란 조어를 붙여내고 싶다면,
"이제 우리에게 '인간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으로서 자연에 개입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해왔고 원하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가?"
란 질문에 대해, 얼마만큼 확립된 대답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책임지지 못할 행동의 결과와 그 피해를, 그저 미래 세대로 넘기면 그만이란 생각은,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의 뒤늦은 후회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세상에 내보낸 사악한 마귀한테 무방비로 당하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겠는가?(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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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또는 이렇게 말한다. <쓰나미가 덮친 이유는 스트립클럽, 디스코장, 술집, 여타 사악한 장소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다>"(p234) ……… "우주는 마음이 없다. 감정도 인격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을 해치거나 기쁘게 하려고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나쁘냐 좋으냐는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238)
- 리처드 도킨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김영사, 2012.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한 위 frame으로 보자면, 정말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소설에 "고전 classic"이란 타이틀이 가능했었었겠죠. --- 디스토피아와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연속해서 읽었었다란 직전의 경험이 없었더라도, 이 작품은 유쾌함을 남겨주는 소설은 될 수 없지 않을까, 그 어느 독자에게나, 좀 심하면 두려움, 좀 덜하면 반성을 안겨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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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괴물뿐이며, 세상을 구하려면 그 괴물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판타지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②우리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모든 존재 중 가장 우수하며 우리보다 우수한 존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583, 김영사, 2015
유발 하라리의 위 두 해석에 왜 동의하지 않는가를 적어내기 위해, 이 길고 긴 독후감을 써내려왔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대답이 이 장광설에 담겨져 있다라 전 생각했거늘, (여기까지 써놓고 읽어봐도) 어디에 어느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느냐,란 물음에 딱히 어느 한두 곳을 집어내지는 못하겠네요. 맘에 들지는 않지만, --- 써내는 것이 참 고생스러웠었고, 그만큼 정말 많이 생각했었었기에, 여하한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어쨌든, 제 대답이 오롯이 다른 분들께 전달되었길, 훗날 다시 읽어 볼 이 감상문에 후회하지 않고 싶다는 바람(願)을 이렇게 끝내 버려내지 못하겠네요. 아... 그나저나, 이제부턴 좀 짧게 쓰고 싶... --;;
※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 : 「사피엔스」
※ Mad scientist novel :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