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4 - 세상의 종말
부알렘 상살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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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신도는 아주 어릴 시절부터 길러지는 것이었다. … 인간의 삶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거부하는 완전한 신자. (p51)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 제게 주었던 충격, 선()이 자신의 존재함을 위해 악()의 부재(不在)를 용인하지 않는다란 설정을 --- 이 작품 「2084 : 세상의 종말」의 작가 부알렘 상살은, 완벽하게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려면 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 따라서 둘 중 하나를 없애면 다른 하나도 없어진다. (p61)
자신에게 주어졌던 악의 행사를 이제는 멈추게 해달라는 ​「예수복음」 속 악마의 간절한 청에도, 신께서 끝내 단호한 거부를 거두지 않으셨던 이유는 한 마디로, '악이 없어지면 선의 존재도 필요하지 않게되기 때문'이었었지요. 그리하여 어쨌든 신은 (악마와 더불어!) 명성과 존재를 이어가게 됩니다만, 이 작품 속의 신(), 욜라1- 실제 주체는 욜라를 믿는 종교의 지도자들 - 정반대로 상대 (즉, 모든 사상)의 존재를 아예 허용하지 않음으로 자신이 선()임까지도 포기한, 그러나 그렇기에 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되어버려, 여타의 판단가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선택합니다.    
공허는 세상의 본질 …… 영()​의 신비로움이 여기에 있다. 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불2은 완벽한 응답이었다. 세상의 절대적인 무용성에 대응하려면, 공허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어야 했다. (p321) 
이처럼, 소설 속 지리적 배경인 아비스탄 제국은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3이며, 그 지배는 "우리는 욜라의 것이며, 우리는 아비4에게 순종해야 한다"(p46)라는 (일종의 당위적) 규율을 강제함으로, 민중들 마음 속 '믿음'을 불러일으켰고, 이내 그 믿음이 '순종'으로 이어지게 된5 '길러진 신자(信者)',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절대적 구속의 지배구조6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고, 길이며 목적지이다. 이것은 순종과 복종만큼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었다. 훌륭한 신도라면 당연히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아파레유7의 감시에는 빈틈이 없어, 누군가를 속이려는 생각을 품기도 전에 그런 잘못된 생각을 품은 사람은 제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pp27~28) 
그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고픈, 자신만의 할 말이 있겠듯, 이같은 완벽한 통제에 대해, 아비스탄 제국의 지배자,
"세상은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 「사람의 아들」중 어느 제사장의 말, 민음사, 2004.​ ​  
​즉 성직자8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싶었을 꺼라, 결코 풍족하지 못한 아비스탄의 상황9하에서, 아비스탄의 민중들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들려줄 수 있는 말이라곤 여하하여도 "설령 한 푼도 없더라도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얌전하게 견디고 있으면 죽어서 금쟁반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10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노라고 항변하고 싶지 않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희망은 (여러분 다들 미루어 짐작 가능하겠듯) 웃기는 소리일 뿐이고, --- 1인칭과 2인칭만이 존재하도록 허용된, 3인칭은 아예 상상 속에조차 존재하지 못하며, 여기에 세뇌된 믿음11과, 그로부터 연유된 맹목적 무지12와 무기력한 안주(安住)13(혹은 포기(?))까지가 더해졌기에, '민중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란 그들의 항변은, 그들이 속으로 원하였던 바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올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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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적 체제는 …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가해한 토템과 초월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법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과 그 조각들은 토템과 지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존재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다. (p169) 
그들의 항변이 터무니없다라는 것이, 작가의 전지적 시점을 통해 독자에게 말해지고 있듯이, 뭐 꼭 굳이 그런 전지적 시점의 도움까지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고 2017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정상적 사고(思考)의 소유자라면 스스로 깨쳐낼 수 있겠듯, --- 이런 형식의 종교적 지배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으며, 어디서 어떻게 그 믿음에의 균열이 시작되는가를, 작가 부알렘 상살은 주인공 아티에게 다음에서 처럼, 뭔가 '보리수 아래에서의 그것'을 떠올려주는 듯한 방식의 깨달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과 불가사의를 이용해 사람들을 종교적 믿음에 엮어놓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는 날 아티는 폭우를 맞으며 깊은 사색에 잠겼고, 신앙과 광기를 하나로 묶고, 진실을 두려움에 묶어두는 사슬을 파괴해야만 낙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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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아티를 내리쳤던 깨달음의 궁극은, 그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너무도 허무한 것일 수도 있을14, 허나 가장 기본적이며, 그러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현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는 아니었다."(p166) 란 의문이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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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종교 없이 살 수 있으며, 성직자의 도움이 없이도 삶을 마감할 수 있다." (p145)
다분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기독교 신자인 제가 이런 문장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라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혼'나야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만, '체제에 맞서 싸울 의도'가 없었던 아티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종교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닌,
"아티가 마음 속으로 거부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었다." (p100)

또한 이 때의 '억압'이란 것이, 삶에 가해지는 개별적·단속(斷續)적 억압(이라기보단 일종의 '제약')의 수준을 뛰어 넘어,

과거를 돌이켜볼 때 역사에서 우리보다 앞선 세대를 덮친 위험한 현상을 지금도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위험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과거의 재앙이 조만간 이 시대에도 닥칠거라는 걸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종교가 그들에게 죽음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들은 하늘나라에 자리가 이미 예약되어 호화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p326)
​이미 완벽하게 고착화 되어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란 제사장의 말들이 오히려 깨뜨려질 수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어버린 이런 정도의 억압이라면, 이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가 어떠한 종교의 신자(信者)인가하는 여부마저 가리지 않고도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말을 작가가 전하고 있다고, 심지어 --- "견제가 없는, '단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몰상식으로 가득차게 된다"란 노명우 교수의 일갈15 속 '상식'의 자리를 '종교'가 대신한다 하여도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라는 걸, 이 소설이 또한 보여주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혹은 더 좁게/다른 방향으로 보아, 
이 억압의 주체를 '종교의 외투를 쓴 인간'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라면, 혹은 뭐, "신정국가, 종교적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p355)이란 역자의 단언처럼 굳이 현재의 이슬람권을 빗댄 소설이라 한정지어야겠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메시지16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암튼, --- 여기까지 뭐라 제가 지껄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내용일지라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있을/있다고 믿어지는 메시지의 내용이, 혹여 느껴지는 무거움이 여하히 당신에게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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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치면 로드 판타지로 분류될 이 소설의 스케일은 '슈렉'과 '반지의 제왕' 중간 어디쯤이다. 2부 중간까지 이어지는 지루함을 극복하면 뒷이야기가 엄청나게 궁금해지는, 살짝 유익하고 교훈적인 장편 소설의 재미를 볼 수 있다. … 유럽에서 '핫'한 정치 소설을 읽어두겠다는 지적 허영심만으로는 초반 '세계의 문법'을 익혀야 하는 길고 지루한 독서를 감당하기 어렵다."
- <2084년, 단 하나의 종교가 세계를 지배한다> 중, 2017.6.22. 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대개의 신문사 서평을 쓰는 방식과는 다르게) 아마도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어본 듯한 이윤주 기자의 위 기사는, (그나마 '유익'과 '교훈'으로 포장된) '재미를 볼 수 있다'란 출판사를 위한 일종의 lip-service용 문구를 제외한다면17, 전적으로 솔직하게 쓰여진, '길고 지루한 독서를 감당하기 어렵다'란 핵심적 구절에서 보여지듯, 이건 저도 또한 이 작품을 읽어가며 가졌었었던, '이 덥디 더운 여름 날, 에어컨/선풍기/맥주 등의 부대적 지출과 더불어, 그야말로 황금같은 주말의 시간을 투자해, 굳이 내가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란 의문을 단 한 시도 지워내지 못한 채, 그러나 결국엔 다 읽어내고만 제가 그러했었듯, 뭔가 마음 속 억울함 같은 걸 담고 있는, 그런 감상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작품의 역자나, 심지어 출판사조차도 --- 이 소설을 번역하고 출간한 것이 영리의 추구라는 상업적 이유에서가 아닌, 어쩌면 '외국 문학상 수상작 번역/출간'이라는 하나의 reference 를 쌓기 위함만이 아니었을까,하는, 매우 대담한 추측까지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레 해보게도 됩니다. 뭐 그만큼, 담고 있는 메시지의 내용과는 별개로, 읽어내기엔 완벽하게 재미 없는 소설이란 말이지요. 혹여, 저의 정신적·지적 수준 및 상태가 이 작품을 읽고 이해해내는 것에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신다해도 괜찮으며, 실제로도 그런거라 할지라도 별 달라지는 것 없이 부디,  
이 작품을 읽느니, 다음의 소설들 모두 혹은 한두 권이라도 읽는 것이 최소한! 천번 만번 쯤은 더 낫다라는 저의 조언에 당신이 동의해 주기를, 그리하여 당신의 정신 건강과 아까운 시간 및 기타 등등등,을 요딴 소설 읽는 것에 낭비하지 않아주길, 당신과 아무런 혈연 관계도 아닌, 또한 당신과 그 어떠한 금전적 거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 바라()봅니다.

"밝지 않은 미래" ​(모두 강추!) : 「혹성탈출」, 「1984년」, 어떤 소송」, 「백년법」,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가지 이유

 

 

 



 

  1. "유일신, 하느님" (p359)
  2. "아비스탄의 성스러운 종교의 명칭이자, 아비가 자신의 신성한 가르침을 기록한 성서(聖書)의 명칭" (p359)
  3. "아비스탄의 경제는 모두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p24)
  4. "욜라의 대리인" (p359)
  5. "카불의 치하에서 믿음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종으로 이어졌고 … " (p227)
  6. "법복이 성직자를 만들고, 믿음이 신자를 만든다" (p208)
  7. ​"아파레유는 정의로운 형제회와 아비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한을 지닌 조직이었다." (p30)
  8. "고귀한 사람들, 즉 정의로운 형제외의 대율법학자들과 아파레유의 지도자들만이 그것을 비롯해 나머지 모든 것을 알았고, 그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작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을 손에 쥐고 다녔다." (p82)
  9. "삶 자체가 힘겨웠고, 제국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일상은 결핍에 결핍이 더해지는 삶이었다.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몸이 쇠약해진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p35)
  10. 존 스타인벡 作, 「분노의 포도」중 톰의 말, 홍신문화사, 2012.
  11. "​사람들이 믿음을 유지하고, 필사적으로 믿음에 매달리게 하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결코 멈추지 않는 진정한 전쟁이 필요하고, 보이지 않는 적, 더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적이 필요하다. … 원수를 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원수는 분명히 원칙적으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p133)
  12. "신의 본질을 과신하는 존재가 판단력이 마비된 미숙한 못난이로 전락하는 이유" (p120)
  13. "백성들은 이처럼 무심했고 상상력도 거의 발휘하지 않았으며, 현실이란 경계 너머로 시선을 두지 않았다." (p20)
  14. "의심은 불안을 낳고, 곧이어 불행이 들이닥친다. 아티가 그런 지경에 빠졌다. 아티는 불면에 시달렸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싸워야 한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p40)
  15.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중, 사계절, 2013.
  16. "조지 오웰 선생이 <1984>에서 상상하고 완벽하게 창조해낸 빅 브러더의 세계가 그의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일러두기> 중
  17. 굳이 재미를 찾아 보자면, '2084'의 의미라든가, 왜 지구가 이렇게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그야말로 초간단 교훈 설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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