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만물의 핵심에 무작위성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다"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신은 우주를 창조할 때 선택을 했을까?"라는 말은 "우주가 다른 식으로 시작되었을 수 있을까?"라는 의미다.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중 p34, 김영사, 2007.
(신자(信者)마저 반하게 하는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위와 같은 해석/주장에 대해, 이 책 「사피엔스 Sapiens :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줍니다.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2)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 이 습성, 이 환경이, 지난 process를 반복한다 해도 변함없이/여전히 등장할 '당연한 결과'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시간을 다시 "135억 년 전"(p18)으로 되돌려 '빅뱅'부터 새롭게, 그 어떠한 의미로서든, 말 그대로의 '진화/역사'를 다시 시작해 본다면, 그 135억 년 후의 모습이 지금과 똑같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심지어 이 세상이 지금처럼 '인간'이란 종(種)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지 우린 확신할 수 없는 것이고, 혹여 그렇다해도 그 '인간'이란 종의 모습과 지능이 지금의 모습과 지금의 지능에 한정되어야 할 이유나 가능성은 한 마디로 --- 전혀 없다!라는 겁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p8)에 대한 이해를 독자에게 선사해주고 싶다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내고 있는 이 현재와 이 현재의 모든 상황이란 것이, 미리 놓여진 기차의 철로와 같이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 일종의 '연속된 무작위의 결과'같은 건 아니라는,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란 주장에 기대어 보자면,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부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p19)
'세 개의 혁명'이 지금과 같은 모습의 인류와 지구를 shaping해 놓았다라는 것이죠. 책의 시작에 저자가 이렇게 밝혀놓았다면 --- 이제 독자로서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①이 세 개의 혁명이 과연 무엇이며, ②어떠한 연유로 발생되었으며 그 과정에는 어떤 필연성 같은 게 존재하기는 했는가, 그리고 ③어떠한 영향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 미쳤는가 등의 정도로 추려지겠죠. 하지만,
줄거리만을 통해 한 편의 소설을 다 즐겼노라 말할 수 없겠는 것처럼, 누군가 써놓은 요약본을 읽어내는 것으로 이 책 「사피엔스」에 담겨 있는 통찰(insight)과 만났었노라 말할 수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적 대화'라는, 그게 어떤 건지 도무지 알 수 없겠지만 암튼 그런 걸 위한 넓고 얉은 뭔가가 필요하다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의 엑기스적 문장 하나를 굳이 골라본다면,
우리 종의 역사는 세 가지 혁명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지혁명(우리가 똑똑해진 시기), 농업혁명(자연을 길들여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만든 시기), 과학혁명(우리가 위험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된 시기)이다."(p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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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화되어 있는 내용에 대해, 그것이 시중에 판매되는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을 땐 더욱, 게다가 그것이 베스트셀러이라면, 심지어! 아니인정할 수 없는 학문적 background를 지닌 저자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내용이라면, 잘 알고 있는 분야일지라도 그러할진데 심지어 가장 취약한 분야이라면 --- '비판적'과 같은 단어는, 그 책 속 내용에 대한 습득이나 이해 등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지지는 못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그 '받아들임의 단계' 해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작업인 '정리'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감상문을 써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제 아무리, 이 감상문을 이 책의 (또 하나의) 요약본으로 써낼/볼 생각은 (의도완 달리 결과가 그렇게 될 수는 있겠으나, 지금의 단계에선) 전혀 없다라 하더라도 --- 제가 알고 있었던, 읽었었던 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들, 아주 약간과 새로운 지식의 추가 등에 대한 (인용하는 부분만 많을 수도 있는) 간략한 정리가 대부분이 될, 꽤나 긴 '간략한' 정리랄까? 뭐 '요약'과 '정리'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가급적, <원인-결과>의 frame은 지켜가는, 그런 감상문을 써보고는 싶습니다. 일단, 함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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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mestication of fire - "불을 길들이는 것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신호였다."(p33) 】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마빈 해리스, 「작은 인간」중, 민음사, 1995.
'도구의 사용'이야말로 (훗날의) 인간과 여타 유인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배웠었던 기억이 있으며, 이러한 '도구의 사용'이 '동기 부여'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주장했던 마빈 해리스 역시 어쨌든, "가장 커다란 막대기를 휘두르는 동물이 가장 커다란 이빨을 가지고 으르렁거리는 동물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덧붙였었듯, <직립보행 →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라는 도식은 딱히 반박되어질 수 없는, 일종의 '정립된 명제'의 지위까지를 지녀 왔었다,라 전 알고 있었습니다... 만,
선사시대 인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릴라, 반딧불이, 해파리보다 딱히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 (p20) ……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살았지만 이들이 지구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다른 인간종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7만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원시 사피엔스(는) … 다른 인간 종들보다 딱히 더 나은 점이 없었고 특별히 복잡한 도구를 만든다거나 다른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p42)
위의 주장을 이의 없이 받아들여 본다면 '직립보행 → 도구의 사용'이란 첫 번째 단계에 대한 문학 작품 속 반론 역시, 그 논거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쨌든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고,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란 이후의 도식에 대해서도 서서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고인류 Archaic humans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 이것이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살아남기 좋은 전략이었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버릴 수는 없다. 침팬지는 호모 사피엔스와 논쟁을 벌여 이길 수 없지만 인간을 헝겊 인형처럼 찢어버릴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p27)
'논쟁에서의 승리'가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었을 당시라면, 그렇다고 당시 수준에서의 '지능의 발달'이란 게 뭔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스나이퍼!' 식의 사냥용 총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안겨준 것도 아니었기에 --- <창세기>속 창조주의 한 마디를 제외해보자면, 이제 <직립보행 → 도구의 사용 → 뇌 크기의 증가 → 지능의 발달 → 자연을 지배하게 됨>이란, 이제까지 '정립된 명제'급으로 인식되어왔던 이 도식은 이제, 뭔가 손가락도 팍팍 들어갈 것 같은 정도의 빈틈을 보여주게 되지요. 물론! 그 정도의 빈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다음에 언급될 추가적 단계가 그 빈틈을 모두 다 메워주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올라서는 핵심단계는 불을 길들인 것(domestication of fire)이었다. (p31)
위협으로부터의 방어나 화식(火食)의 이로움 정도를 선사해준 것으로 묘사되었던 '불의 사용'에 대해, 저자 유발 하라리는 그것이 '진화의 원인' 수준에서도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 이후 인류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도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었다라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다지 중요치 않은 동물, 주변환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으로 세상에 등장해, 어느새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p31)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그 시작이자 핵심이 바로 (단순한 '불의 사용'이 아닌) '불을 길들인 것'이었다라는 것이죠. 이 순간 또 다시...
"삶은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의 우연히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이라고, 불가피한 상황이 우연이라면 행동은 사람의 명백한 의지라고, 학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 백가흠, 「마담뺑덕」중 p45, 네오북스, 2014.
왜 인간류만 불을 '사용'하고 기어이 '길들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저자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처럼, 생명의 탄생 이후의 time -series속에 적지 않은 수의 임계점(critical point)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라는 건, 굳이 고고학 같은 과목에 직접 머리 싸매가며 덤벼들어보지 않았었어도 그냥 받아들여지곤 하지요. 그러한 이유로 하여 "현재 우리 인류도 이전 단계의 인류에서 외계인의 개입에 의해 출현한 존재"라는 주장 등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며, 무작정 그런 주장들을 허무맹랑하다라 무시해버리는 것도 좀 그렇죠. 암튼!
'불을 길들일 수 있게 된 것'이 어찌어찌한 연유로 하여 가능해졌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면, 그 길들인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는다거나,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또는 맹수들을 쫓아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등의 생활 속 효용을 넘어선, 무언가 훨씬 더 큰 파장이 그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라,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 자연의 먹이사슬 속 최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지요.
먹이사슬에서 호모 속이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최근까지도 확고하게 중간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왔으며 지속적으로 대형 포식자에게 사냥을 당해왔다. …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중간에서 꼭대기로 단숨에 도약한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pp30~31)
설혹,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 위에 제가 짧지 않게 적어놓은 부분이 아닐지는 몰라도 저에겐 --- '도구의 사용'이라는 교과서 속 원인이 아닌 '불을 길들임'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류의 잔인함을 이끌어 내는 이 논리가 너무도 매력적인 겁니다. 너무도 매력적이서,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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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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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등장(appearance of fiction)"(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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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협력의 가능"(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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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가 발명한 가상의 실재의 엄청난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 패턴의 다양성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인지혁명 이전에 모든 인간 종의 행위는 생물학의 영역에 속했다." (p66)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인지혁명'의 진행이 오히려 묻혀지더군요. 암튼!
원인보다는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p44)
수많은 빈틈들이 보인다 하여, 그 빈틈을 메우려 노력하거나 그 빈틈을 향해 의문/비난을 제기하는 것 모두 옳고 그름이란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겠으나, 그보다는 그러한 빈틈들을 거쳐,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개미는 우리가 남긴 것이나 먹고 침팬지는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 있는 데 비해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바로 이것"(p49)이란, 매우 다행스런(!) 현재라는 결과에 대한 이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냐라는 게 저자의 견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 History’s Biggest Fraud - "농업혁명은 덫이었다"(p129) 】
'도구와 불의 사용'이 수렵채집의 삶을 정착, 즉 농경과 목축의 시대로 이끌어 내었고, 그것은 진보였었다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진보progress'가 아닌, 단지 "생활하는 방식의 혁명"(p13)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렵채립의 시대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된 것은 맞으나, 그것이 과연 인간류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했느냐에 대해, 다음의 두 마디는 그야말로 완벽한 부정(denial)의 의견을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p126)
다시 한 번 더, "하나의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 겁니다. "그저 배를 좀 더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pp136~137) 온 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p137)버렸지요. 평균 수명의 증가, 그로 인한 인구의 증가로 대변될 수 있을, 결국 이것이 번영이고 진보가 아니냐란 의견에 대해 저자는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p124)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진화적 관점의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p142) ……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p147)
인간류의 생존과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확대란 거시적 관점의 번영이란 기실,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p137)이란 고통스러운 미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유지되고 진행되어왔었다라는 사실, 이를 확대하여 현대에 적용하여 보자면.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은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p152) ……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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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난, 최종적 감상을 굳이 한 단어만으로 표현하여야 한다면 '우울함'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이유의 1번은 이 책의 후반부, 그러니까 인간류의 미래에 관한 저자의 견해이지만, 못지않게 바로 이 부분 - "농업혁명은 덫이었다"(p129)가 함축하고 있는, '혁명'이란 단어와 '덫'이란 단어가 각각 지니고 있는 의미의 상반됨, 그리고 그 상반됨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문장이 보여주고 있는 '우리 삶 속 고달픔의 도래(advent)'가 이토록 오래된 것이다라는 사실이, 과연 인류가 진보건 진화이건, 과거보다 더 나아지는 삶을 살아온 것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의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해도 되겠느냐란 질문에 대해, 오로지 부정적 답변만이 떠오르게 되었다라는 점도 매우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지요. 우리 인간류가, 나름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사뭇 '인간임'의 대표적 예로 들수 있겠을 '역사'와 '문화'란 것이 기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p153)
인간류의 집단, 우리가 '사회'라 칭하는 그 집단 속 '협력'이란 frame은 알고보니 그저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고,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 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춰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p234) …… ①
결국엔 '복종'이란 단어로 칭해질 수 있겠는 '인공적 본능'이란 게, 우리 인간류가 자랑하는 '문화'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주장, 이게 딱히 반박할 수 없게 믿어진다라는 게 뭐랄까, 저 개인이 아닌 '인간류'에 대한 모욕 같은 걸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소설로 읽었던 「혹성탈출」속 인간류의 굴욕이 그저 소설이니까~로 받아들여졌었고, 영화로 보았던 <혹성탈출> 시리즈 역시 아무래도 메시지보다는 시각적 효과가 더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으나 --- 그런 가상(imagine)이 현실이 된다해도, 딱히 뭐 이상하다거나 부조리, 불합리란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가 문제일 뿐, '지배-피지배'와 그에 따른 '복종'의 frame은 동일한 것이니까요. 게다가,
'쵸코파이야말로 현대의 만나(manna)'라는 병신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 같지도 않은 기독교 신자에겐, 같은 기독교 신자인 저도 욕을 퍼부어주겠으나, 위와 같은 지배-지피배와 복종의 frame에 결정적 도움을 준 것 또한 종교라는 사실과 그것을 설명해주는 저자의 시니컬함이 또한 우울함에 일조를 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흔히 차별과 의견충돌과 분열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 종교는 돈과 제국 다음으로 강력하게 인류를 통일시키는 매개체다. 모든 사회 질서와 위계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모두 취약하기 마련이다. 사회가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가 역사에서 맡은 핵심적 역할은 늘 이처럼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 따라서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p298) …… ②
저자는 ①번과 ②번의 주장을 결합시켜, 종교가 인간의 문화, 즉 인공적 본능을 자신의 뜻에 맞게 조직했을 뿐 아니라, 아예 조작까지도 했었다란 주장까지도 등장시킵니다.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런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 진실을 말하자면,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p216)
【 Happily ever after -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p581) 】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p399)
농업혁명 이후 과학혁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는 이제까지와 같은 빅히스토리가 아닌, 일종의 유럽사 강의스런 내용을 짚어줍니다. 당연히, 제국주의 시대가 다루어지지요. 여기서! ---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저자가 제국주의에 찬성을 하지는 않아보입니다. 그럴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근대 유럽인에게 제국 건설은 과학적 프로젝트였고, 과학이란 분과를 건설하는 것은 제국의 프로젝트였다"(p420)과 같이 다른 개념, 여기선 '과학혁명'이란 것과 은근 슬쩍 섞어놓아 적어도 제국주의에 대해 '나쁜 것'이란 굴레를 씌우는 건 안된다,스런 주장을 보여주고는 있습니다.
영국 조사단은 그곳(모헨조다로)을 발굴해, 최초의 위대한 인도 문명을 발견했다. 인도인 누구도 모르고 있던 문명을 말이다.(p421) …… 롤린슨 같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고대 중동 제국들의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p423)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도 존재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맥락의 주장입니다. 영국 조사단이 모헨조다로를 발굴한 이유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발견했다라는 사실로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놓으면,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을 '발굴'로 포장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지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땅에 철로를 부설했던 게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근대화라 칭하는 이들에겐 예의,
그는 현지인을 여럿 고용해 자신을 돕게 했는데, 그중 한 쿠르드족 소년은 절벽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냈다. (p422)
놓여진 철로만 보일 뿐, 그 철로는 놓기 위해 동원되어진 조선인들의 희생까지는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우리가 '근대화식민지론' 같은 걸 비판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p471)란 염려를 하는 저자가, 영국인의 강압적 지시에 따라 '절벽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 비문 윗부분의 탁본을' 떠내야 했던 쿠르드족 소년의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더군요. 이런 독자가 있을 수 있다라는 걸 알았을까요?
"인지혁명 이래 험난했던 7만 년의 세월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었는가?"(p530)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p532)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란 약한 뉘앙스의 서술을 선택한 저자는, 반면 인간류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해서는 사뭇 강도가 세지는 지적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계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생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35)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pp587~588)
농업혁명이 개인의 삶을 힘들게 만들기 시작했다면, 과학혁명은 인간류 전체에게 심대한 불행과 자칫 종말까지를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라는 게, 제가 이해한 바 저자의 견해였습니다. 물론 아직은, 우리를 대신해 다른 종들이 사라져 가고 있지요.여기에 더해, '개인의 소외'등과 같은 문제까지도, 종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초래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까지 하여도,
(1) 종의 멸망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 원인으로는 지구 온난화와 핵전쟁, 이 두 가지가 가장 유력하다고들 하더군요. 지구 온난화는 (제기되었던 처음에는 그러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엔 명백히) 과학적 주제가 아닌 정치적 이슈라 생각하는 저의 의견과 비슷한 맥락으로, 저자 역시 "오늘날 무슨 일이든 기후변화 탓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지구의 기후는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역사상 모든 사건은 모종의 기후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p106)라며, 지구 온난화 자체가 많은 인류 멸망 시나리오들 중 선택될 가능성을 낮게 보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없고, 핵전쟁에 의한 지구 멸망만을 거론하고 있지요.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6,500만년 전, 소행성이 공룡을 쓸어버렸지만, 그럼으로써 포유류가 번성할 길이 열렸다. 오늘날 인류는 많은 종을 멸종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멸종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잘 버티고 있는 생물들도 있다. 가령 들쥐와 바퀴벌레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 끈질긴 생명체들은 아마도 핵무기로 인한 아마겟돈의 폐허의 바닥을 헤치고 기어 나올 공산이 크다. 자신들의 유전자를 퍼뜨릴 능력과 준비를 갖춘 상태로. 어쩌면 지금부터 6,500만 년 후 지능 높은 쥐들은 인류가 일으킨 대량 살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볼지도 모른다. (p497)
피에르 불의 소설 「혹성탈출」의 주인공이 유인원에서 '지능 높은 쥐들'로 바뀌었을 뿐, 그 암울함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2) 종의 변화
역사상 모든 지점은 교차로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하나의 갈래였지만, 여기에서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다. 이 중 일부는 더 넓고 평탄하며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될 가능성도 더 크지만, 때때로 역사는 - 또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 예상을 벗어나서 움직인다. (p337)
인류는 드디어, 역사를 만들(어 가)기로 결정합니다. ---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p471)란 현실에 직면한 인류는 드디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란 경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지요.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p584)
생명의 탄생에 있어 창조주의 지적설계가 작동했다는 종교의 가르침과도 같이, 이제 인간류는 다른 종(種)들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마저도 지적설계를 적용하는, 말 그대로의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40억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했다. 지적인 창조자에 의해 설계된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p561) …… 40억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자연선택이라는 구체제는 오늘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살아 있는 개체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원래 해당 종에게 없던 특성을 부여하는 정도까지 자연선택의 법칙을 위반하는 중이다. (p563) …… 지난 40억 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인 새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 그때가 도래하면, 그 이전의 인류사 전체는 생명이라는 게임에 혁명을 일으킨 실험 및 견습 과정이었다고 뒤늦게 재해석될 것이다. (p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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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미 : 지금 네 머리엔 조금이긴 해도 다른 사람의 뇌가 들어 있지?
준 : 그래
메구미 : 하지만 준은 준... 이지?
준 : 그야 당연하지. 내가 준이 아니라면 누구라는 거야? 나는 나야. 다른 누구도 아닌.
메구미 : 하지만 만약에 뇌를 전부 바꾸면 어떻게 되지? 그래도 역시 준이야?
준 : 그러면... 그러면 내가 아니겠지. 그 사람은 원래 뇌의 주인일거야.
- 히가시노 게이고, 「변신」 중, 창해, 2013.
사람 A의 머리 속에 다른 사람 B의 뇌 일부를 이식한다라는 문학의 설정은 A가 A일 수 있는 한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이를 더 넓혀 보자면,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 최근 돼지 등 동물의 장기를 인간 장기의 대체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 신체의 특정 장기의 이상 때문에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과, 생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머지않아 "마치 구형 가정제품을 신형으로 교체하듯 신체 장기를 기능이 좋은 새것으로 바꿀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 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중 pp 67-69, 일조각, 2003.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이처럼, 몇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인간의 DNA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오래된 본능일지도 모르지요. --- "분명 세상에는 에너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p480)란 구절처럼,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닌, 그 방법을 몰랐던 것 뿐이었으며, 현대의 과학은
아직 보편화된 단계는 아니지만, 이러한 새로운 유전자 공학과 생명 공학의 발달은 이제 '인간다움'을 설명해 왔던 기존의 틀에 의문을 제기한다. …… (한 발 더 나아가) 사이보그는 한편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로 유기적 몸과 인공적 기계장치 사이의 경계가 인간의 몸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제 인공 심장, 인공 관절, 인공 신결, 인공 안구 따위가 수술을 통해 손쉽게 인간의 몸속에 삽입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인공적 대체물의 발달은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조되어도 괜찮다는 신념을 배양하고 있다. ……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발전의 과정이 기존의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p70-72.
문화인류학의 위와 같은 질문에,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뇌를 휴대용 하드드라이브에 백업해서 노트북 컴퓨터에 실행한다고 가정하자. …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 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유기화합물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40억 년간 배회한 끝에 마침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pp577~578)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적어도 개조할 수는 있게 된, 말 그대로 "신 비슷한 존재"(p581)의 단계에까지 이르르게 된 것이죠.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pp438~439)라는 믿음이 우리가 스스로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릴 수 있는 기술까지의 진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말 그대로 'Happily ever after~'할 수 있을까요?
"진화란 예측 가능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누적된 변화들은 급격한 환경적 변화와 당면할 때 인간 종을 멸종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 한국문화인류학회, 위의 책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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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서 치료를 멈춰야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중 p238, 부키, 2015.
이제 인류는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란 말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습니다. 죽지 않을수도 있다라는 거지요. 하지만! ---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p6)을 손에 넣은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을 때, 그 때를 가리켜 저자는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p571)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God)과 인간(Humankind)의 경계가, 가장 결정적인 임계점(critical point)이 어디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그 임계점이 눈 앞에 보일 때, 과연 인간은 그 곳에서 멈추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행여 그 임계점을 넘어서고 말았을 때, 그리하여 이제껏 (예를 들어)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p169)이란 '상상의 질서(omagined order)'에 복종해왔던 인류가 스스로 신들(gods)로 기능하게 될 때, 우리의 미래는 과연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 유발 하라리가 적어놓은, 이 두꺼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왜 이 책을 읽고 난 저의 전체적인 느낌이 '우울함'일 수 밖에 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p588)
(Is there anything more dangerous than dissatisfied and irresponsible gods who don’t know what they w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