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3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청춘 남녀의 신분 격차가 크면 연애는 할 수 있을망정 결혼에 이르기는 어려운 법이다. 가난한 남자 개츠비는 그런 이유로 놓칠 수밖에 없었던 여인 데이지(Daisy)를 되찾기 위해 5년간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다. 그는 어둠의 세력과 손 잡고 큰 돈을 번 뒤,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데이지 앞에 다시 나타나 그녀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별로 위대할 게 없는 인생이다."

- 강준만,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중 pp74~75

설이란 것을, (심지어 추리소설일지라 해도) 줄거리로만 이해하려는 건 정말 멍청한 짓입니다. 뭐, 그런 류의 소설이란 게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이 길지 않은 인생, 눈 어두워 책조차 읽지 못하게되는 시절이 오기 전의 시간을 '그런 류의 소설들'만 읽기엔 심히 억울하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소설이라 함은 당연히 '줄거리'라 불리어질만한 이야기의 전개를 (보통은) 가지고 있다라 여겨지며, 그러하기에 종종 어쩔 수 없이 그것, 줄거리를 일종의 대표값으로 하여 소설의 소개를 하게될 수 밖엔 없기도 합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하지 못하는 '요약'이란 걸, 빌어오자면 위와 같고, 위의 '요약'은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기까지 하네요. 이 소설을 다 읽고나니 어쨌든!

"이 소설은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를 쓴 작품이 아니다"(p313)라는 역자 김석희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엔 없습니다. 심지어 --- "'Great'라는 단어의 반어법 …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Great Gatsby'는 실은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대단한 개츠비'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놈 참 대단한 녀석이야'할 때의 뉘앙스가 담긴 것이다.(p314) …… 나는 제목에서 아예 그렇게 번역하고 싶었다.(p301)"이란 주장에까지도 박수치며 '네, 맞아요!'를 외칠 수 있기도 합니다.1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제 관심은, 소설의 줄거리나, 개츠비의 '위대함' 여부 같은 것에 주어져 있지가 않네요. 게다가 이 작품 「위대한 개츠비」가 하나의 고전(classic)2이란 주장에도 또한 쉽게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저에게 이 소설은 오로지! --- 차분히 되짚어볼 수록 가슴 시린, 문득 저의 옛날을 떠올리게 해준, 한 편의 연애소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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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한 개론>에서) 납득이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첫사랑이며,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마지막 사랑이라고 승민을 위로한다. 그 말이 일종의 통념으로 성립한다면, 사람들은 사랑의 진정성을 사랑이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이 사랑이 마지막 사랑임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중 p128, 북돋움, 2012,

젊었던 시절의 개츠비는, "세상에서 처음 만난 '멋진(nice)' 여자"(p229)였던 데이지와의 사랑을 이루어낼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면, 사회적 신분 등 그 무엇 하나, 자신에게는 데이지에게 미래에의 믿음을 줄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으니까요. 사랑이, 이성(異姓)과의 결혼이 한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느냐와 같은 질문을 차치한다면, 이후 개츠비에게 있어 일생의 목표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이루어내는 것이 됩니다. --- "그는 열일곱 살 소년이 상상력으로 만들어낼 만한 제이 개츠비란 인물을 꾸며낸 다음, 그 이미지에 끝까지 충실했던 것이다"(p154)에서 보여지듯, 개츠비란 인물의 '위대함'이란 (걸 굳이 찾아보자면) "어쨌든 끝까지 꿈을 믿고 그 꿈에 목숨을 바친 것"(p300)이겠지요. 영어에도 이런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거야말로,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순애보'의 전형인 겁니다. 이처럼,    

이 친구 개츠비, 현실 속 그의 행태3완 별개로, 상당한 로맨티스트입니다. 그녀, 데이지의 소식을 알기 위해 신문을 5년 동안 구독했던 점이라든가4,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의 건너편에 자신의 집을 장만해5 매일 밤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라든가, 차마 찾아가지는 못한 채, 그녀가 행여 찾아와주지는 않을까 하여 매주 자신의 집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성대한 파티를 연다라든가 등, 한 마디로 --- "그의 환상은 그녀를 넘어섰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p151)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남자이거든요. 그런 그의 앞에, 드디어 나타난 그녀, 데이지의 첫 말,

다시 만나 정말 기뻐요.(p136) 

​너무나 오랜 세월, 그녀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어내기 위해 살아오고 기다려왔던 개츠비에게, 그녀의 이 한 마디에 개츠비는 그냥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녀와 만날 날을 마음속에 그려왔고. 그것만을 꿈꾸며 이를 악물고, 말하자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열렬하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이제 그 반작용으로 그는 너무 감긴 시계태엽이 풀리듯 긴강이 풀리고 있는 중이었다.(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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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조의 견해를 따르자면,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은, 오랜 시간이 흘렀었어도 여전히 첫사랑이었던 것이겠죠.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된 이제까지의 시간 동안, 개츠비는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세계 material without being real"(p250)를 꿈꾸며 살아왔던 겁니다.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는 데이지, 그녀와 그녀의 남자 톰을 향한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어요. … 모든 걸 전과 똑같이 만들어놓을 거요"(pp172~173)란 개츠비의 선언은, ---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나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p202) 자신이 아닌 남자, 톰과 결혼했었던 것일 뿐, 데이지는 "나 말고 어느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소!"(p202)란 그, 개츠비만의 확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확신은 "짐작건대 그는 데이지를 사랑하게 만든 무언가를, 아마도 그 자신의 어떤 관념 같은 것을 되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후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했졌지만, 일단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천천히 되짚어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p173)이란 그만의 바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었죠. 남편 톰의 불륜에 화가 나있던 데이지는, 잠시나마 개츠비의 강요어린 사랑의 확인에 동조를 하기도 하나, 끝내 그녀의 선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남자인 톰이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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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바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왜곡이 쉽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함께한 시간에 대한 공유는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서로 다른 기억의 충돌은 없었던 시간으로 남곤 한다. 그리하여 사랑의 기억이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없었던 순간의 기억이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두 사람의 기억이 온전히 똑같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사랑이 온전한 시간으로 남는 것은 드물다.

- 백가흠, 「마담뺑덕」중 p59, 네오북스, 2014.

사랑이란 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개츠비는 데이지를 다시 만난 그 때, 잠시 잊었었던 건 아닐까라, 생각합니다. 그게 뭐, 소설 속 인물인 개츠비만 그러하겠습니까. 여전히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있는 나이듯, 그 누군가도 또한 나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란 착각은, 심지어 지금의 저도 완전하게는 벗어나지 못했다라 말할 수 밖에 없을만큼, 적지않은 수의 당신들에게도 심어져 있으리라 미루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순일곱 살 되는 생일, 프란체스카는 창가에 앉아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다. 그녀는 브랜디를 부엌으로 가지고 와서, 두 사람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있었다. 마음 속의 감정이 넘쳐흘렀다. 언제나 그랬다. 얼마나 강한 감정인지,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감히 이렇게 자세히 추억하는 것은, 겨우 일 년에 한 번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짓눌리고 짓눌린 나머지 프란체스카라는 존재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리라.

- 로버트 제임스 윌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중 p135, 시공사, 2002.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제가 아는, 정상적인 방식으로서는6 '유일'하게 성공한 불륜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몇십 여년간 마음 속 감정이 넘쳐 흘렀었음에도 그걸, 그저 '일 년에 한 번뿐' 상대를 생각하는 것으로 참아내었던 데에 있었죠. 프란체스카는 킨케이드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킨케이드에게 강요하지 않았었으며, 킨케이드 또한 그러했었던 겁니다. 훗날, 서로의 마음이 그러했었음이 확인되었을 때, 그것이 (독자인) 제 3자에게조차 한없는 안타까움이 될지라도, 또 다시 등장하게 되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라는 류의 쉴드로 (어쨌든!) 불륜일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사랑을 부추겨, 정당화 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의 말로를 통해 '아서라~'라는 말을 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데이지를 만났고, 헤어졌으며, 다시 만나기까지 개츠비의 삶에 대한,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사느라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paid a high price for living too long with a single dream (p250)

 

란 한 문장의 표현은 심지어, '난 여전히 그를 가끔씩 떠올려 보는데...'란, 이걸 뭐라 해야하나, 일종의 '아쉬움'이라 순화하여 부르게 되는 이, 마음 속 감정을, 혹시 그 사람도 가지고 있기는 할까,란 하릴 없는 기대를, 절대로 확인하려 들지말라란 충고를 해주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이게, '자포자기'라든가, 낭만의 소멸이라든가가 아닌,  

 

 

술에 취한 너를 들쳐 업고, 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를 때 / 내 등 뒤에서 너는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을 잤었지.

힘이 들어 난간에 기대면 어느새 깼는지 작은 소리로 /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고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지.


열쇠를 찾아서 겨우 문을 열고 끈을 풀러 신발을 벗겨주고 / 침대에 널 뉘어놓고 돌아서 터덜터덜 층계를 내려오지.

새벽길에 옷깃을 여미며 흩어진 시간을 흩어진 기억을 / 어깨에 남은 너의 몸무게에 담아 물지게처럼 지고 가지.

- 김창완, <너를 업던 기억> 중

'어깨에 남은 너의 몸무게'스런, 딱! 그만큼의 기억만큼만이 허용되어 있다라 받아들여야겠죠. 술 취한 그녀를 침대에 뉘어놓고 돌아서 층계를 내려올 수 있는 사랑만이, 현재의 규범상으론, 그야말로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랑일테니까 말이죠. 뭐,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랑보다는, 기어이/끝내 '이루어지는' 사랑을 원한다란 주장도, 있을 순 있겠죠만... (그러다간 자칫 B급 에로영화가 되어버릴 수도 있겠기에.) --;; 

...금연 181일째

 


 

  1. 반면, 강준만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위대한'의 이유로 추측해보고 있는데, 여기서도 여섯 번째는 역자 김석희의 견해와 다를 바 없기도 하지요. ---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대략 7가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첫째, 희망에 대한 집념과 재능이다. 둘째, 물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정신 우선주의’다. 셋째, 사랑 그 자체에 모든 것을 거는 순애주의다. 넷째, 낭만적 민감성이다. 다섯째, 파멸의 예감에서 비롯되는 미학적 숭고함이다. 여섯째, 위대하다는 건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개츠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풍자일 뿐이다. 일곱째, 작가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풍성하게 가미해 만들어낸 개츠비라는 인물은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라는 점에서 위대해야만 한다. 작가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에 대해 보인 엉거주춤한 자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강준만, 위의 책 p75)
  2. "예술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소설은 반드시 시대성과 보편성(영원성)의 교차점에서 창조된다. <위대한 개츠비>도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성을 그리면서 그 안에 인간의 욕망과 좌절이라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시대성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그 보편성 덕분에 언제 다시 읽어도 신선하다. 그게 고전의 매력이다." (p307)
  3. ​"개츠비는 지독한 속물이다. 그런 속물이 밀주업으로 돈을 모아 졸부가 된다. 부자가 된 이유는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다."(p313)
  4. "그 사람은 데이지의 이름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5년 동안이나 시카고의 신문을 구독했다면서도"(p126)
  5.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것은, 데이지가 살고 있는 곳이 만 건너편이 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p124)
  6. '비정상적인 방식'으로로라도 성공하는 불륜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지요. --- 다니자키 준이치로, 「열쇠」,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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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주제가 있는 미국사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 한 권력체가 전 세계를 그토록 압도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p5)가 '압도성''안정성'으로, ② "오늘날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 하나의 사조를 이루어 미국에 적대적인 사람과 나라들까지 사로잡고 있다"(p5)를 통해서는 그 영향력의 범위강도(intensity)를 짐작해볼 수 있는, 미국의 힘을 표현함에 있어, 아무래도 가장 놀라운 것은 --- ③ "미국은 유럽이 2,000년 동안 경험했던 것을 한두 세기로 역사를 압축시켜놓았다"(p6)라는, 그 성장 과정의 급속함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와 같은, 유래 없는 급속한 양질의 성장에 대하여, '지리적 혜택 더불어 무엇보다, 단기간에 유입된 수많은 양질의 인적 자원 있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란 저자의 분석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아, 물론 이 책이 그런 뻔하디 뻔한 걸 말하자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도 아니겠구요. --- <머리말>을 통해 저자가 제시해주고 있는, (지리적 혜택이야 그냥 넋놓고 부러워만 할 수 밖에 없다쳐도) 다른 국가는 해내지 못했던, 그러한 양질의 인적 자원의 블랙홀로 오직 미국(만)이 작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거대한 괴수'가 된 미국의 힘은 훔친 건 아니다. 아니 훔칠 수도 없다. 미국 스스로 만든 것이다. 미국이 무언가를 훔쳤다면 그건 바로 … 미국을 향해 거대한 이민의 물결을 이룬 사람들의 마음이다.(pp6~7)

그렇다면, 이러한 이유로 현재 (중국의 부상이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 superpower'을 뛰어넘는 '초초강대국 hyperpower'이라 유일하게 불리우게 된 '미국'이라는 나라가,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기는 하나, 역설적이게도, 그보다 훨씬 더 큰 강도로 질시와 저항의 되어버린 건 또 무엇 때문일까요?

미국의 최대 죄악은 '사이즈'다. 양적 사이즈인 동시에 질적 사이즈다. … 사이즈가 그 자체로서 죄악이라는 건 거대 기업들과 독과점이 잘 말해준다. (p7) …… 우리가 작은 조직에서도 '조직의 논리'를 내세워 개인을 억압할 수 있듯이, 거대 제국은 '제국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느라 때론 작은 나라들을 억압하면서도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둔감해진다. … 대부분의 반미주의는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힘이 다른 나라의 자유를 부인하는 역할을 해온 데서 비롯된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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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 청교도적 근검 정신"(p59)에 기초하여 성립되었었던, 그리하여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쯤으로 요약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일종의 상징(emblem)은, 19세기 중반의 일명 '골드러쉬'로 인하여 "승자독식과 일확천금 정신으로 대변되는 '캘리포니아 드림'으로 변질"(p59)되어버립니다. 

골드러시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캘리포니아 드림'의 정신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일확천금과 승자독식의 정신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이어졌다. 스타 시스템은 극단적 빈부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작동하는 기본 모델이 되었다. … 할리우드에 이어 실리콘밸리가 그 정신을 이어 받았다. 창의력을 숭배하고 패자부활전을 허용하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만, 극소수의 20대 무일푼 청년들이 수년 만에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재산을 가진 거부로 변신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 마법의 본질이 골드러시가 보여준 게임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p28)  

이러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이 수많은 이들의 '꿈 Dream'일 수 있는 이유가, 심지어 장려되기까지 하는 이유란 게 --- "위대한 업적은 반드시 위대하거나 도덕적인 행위의 소산은 아니더라도 위대한 발상의 소산이다"(p34)라는 하워드 민즈라는 한 저널리스트의, 얼핏 읽어보면 사뭇 훌륭하게 이해되어질 수도 있을 주장에 담겨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아메리칸 드림'으로 성장했던 '미국'이란 나라의 어두운 면이 싹트기 시작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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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민즈의 위 주장은 사실, 19세기 후반, 미국 철도 회사 경영자들의 엄청난 부정부패에 대한 (일종의) 옹호의 뉘앙스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 바로 뒤에 이어지는 하워드 민즈의 말이란 게, "미국은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뜯어먹은 것의 수천 배를 돌려받았다"(p34)이지요. 한 마디로, A라는 특정 현상을 통해 사회적 복지의 극대화 (혹은 비약적 증대)가 이루어졌다면, 그 A라는 특정 현상이 발생될 수 있었던 과정 속 잘잘못들은, '위대한 발상'이라는 대의(大義)로 묻어줄 수 있다/묻어주어야 한다라는 겁니다. 암튼!

이와 같은 frame에 대한 독자의 판단을 도와주기 위한 역사적 사실과 사례들의 소개가, 이 책의 주된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 처세술의 달인으로 알려진 데일 카네기는 '나는 이미 행복하다는 듯이 행동하라. 그러면 정말로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좋고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것을 만들어낼 뿐이다"(p200)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셰익스피어의 이 문장이,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류의 자기최면에 사용되어질 수 있겠으나, 또한 (어쩌면 대부분의 경우), 이미 이룩되어있는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무비판적 수용을 종용하는 것으로도 악용될 수도 있지요. 그리고/그렇게,    


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

                      

- Edward A. Murphy

그 유명한 '머피의 법칙'은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 1791년 통과된 '총기를 보유하고 간직하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란 수정 헌법 제2조는 사실 "정부의 독재와 횡포에 대한 공포"(p304)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었거늘, 개인이 총기를 소지하는 용도가 (최소한 현재의 미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정부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하기 위함이 아님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치명적 부작용들에마저 "좋고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것을 만들어낼 뿐이다"라는 식의 왜곡이 가해져서는 곧바로, 


외부의 '타자들'에 대한 전쟁이 민간 사업자들과 주식회사에 합법적인 이윤을 가져다준다고 하면, 내부의 '타자들'을 상대로 한 '범죄와의 전쟁'이 '우리들' 가운데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지 말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p313)

와 같은 자본주의식 주장이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저자 강준만 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의 미국은 '범산복합체(prison-industrial complex)'가 자아내고 있는 "징벌 민주주의 punishin democracy"(p318)의 상태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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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공유'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지식의 습득'을 전제로 한다라 생각합니다.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가 그러했었죠. 그 노래 가사의 배경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그 노래에 대한 감상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 'one-drop rule'이란, 참 말도 안된다라 생각되는 가치관이 여전히 횡행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작 몇십 년 전에 Billie Holiday라는 가수에 의해 불리어졌던 <Strange Fruit>이란 노래 역시, 아무 생각없이 들었던, Annie Lennox가 부른 노래로만 흘려들어왔던, 이 노래의 배경과 가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되고, 다시 보고나니 이게 참... (아래의 동영상엔,  충격적인 화면이, 아주 많이 충격적인 장면들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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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을 실용적으로, 쿨하게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 자세는 미국을 보는 내 기본적인 시각이며, 이 책의 기조이기도 하다. (p11)

정통 역사서도 아닌, 그렇다고 작정하고 쓰여진 사회학 서적일 수도 없겠는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미국의 모습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될 거란 기대같은 걸 하지는 않았더랬습니다. 그저, 앞으로 읽으려 하는 전형적 미국 소설들(?)에 대한 사전 준비 운동 쯤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하기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실망이나 환호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국이란 나라를 '실용적으로, 쿨하게' 보자는 저자의 주장엔 저 역시 동감하나, 그 '실용적이고 쿨하게'란 것이 --- "욕하면서 배우는 건 가증스러운 위선인가"(p9)란 저자의 인식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욕하는 대상으로부터는 배울 것도 없을 것이라든가, 혹 배울 것이 있어도 배워서는 안 된다라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A라는 점을 향해서는 심하디 심한 비난을, B의 지점으로부터는 배움을 가지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허나!


동일한 A라는 현상에 대해, 자신이 필요한 단물은 모두 다 빼먹은 뒤, 그러니까 A로부터 배울 건 다 배운 뒤, 그 A에 대해 '배워봤더니 별 거 아니더라~'라는 수준의 비난을 떠들어 대고, 그 판단을 강요하며,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이 A를 배우려는 것을 막기까지 하는 작태는 '가증스러운 위선'을 훨씬 뛰어넘는... --;; (뭐 자세하게는 쓰지 않겠지만, 관련하여 --- 전, 이재정 같은 인물이 경기도의 교육감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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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주제가 있는 미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의 일부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라 합니다. 전 이 책을 사고나서야 그걸 알았고, 행여 미리 알았었더라도 컴퓨터 화면으로 긴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 저이기에 사겠다면 샀었을 겁니다... 만, 뭐 꼭 저같은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네이버로 보셔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부터... '미국'에 관한 소설들에 빠져보겠습니다.


대놓고 쓴, 미국에 관한 소설 : 지구영웅전설

...금연 178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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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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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인간의 얘기를 하는 것일진대, 세상에 정치와 무관할 수 있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1라는 작가 이문열의 소설관()과,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2란 작가 박주영의 소설가관()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비슷한 내용과 형식3을 보여주고 있는,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도 예의 'grand'란 형용사를 헌사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겠거늘, 헌데 이게 참, 그 'grand'라는 단어를 사용한 마음과는 정반대의 감정인, '아 뭐 소설을 이따구로 써놔서~'란 불친절함에 대한 불만 또한, 읽는 내내 버려낼 수 없었다라는 것이, --- 대략 보름여 간의 시간 동안을 저와 함께 했던, 역시나 길고 긴 이 연휴가 아니었더라면 다 읽어내고 이 감상문을 써낸다라는 것이 가능이나 했었을까,란 의문을 아니가질 수 없는, 이 소설 「양철북」에 대한 제가 쓸 독후감(讀後感)의 전반적인 ton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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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위화, 「허삼관 매혈기」의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중 pp5~6

​참으로 여러 번이나 인용했었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관(小說觀)입니다. 그러니까 전, 여하한 경우에도 소설이란 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질 수 밖에 없다라 생각하는 독자이지요. 물론, 이 때의 경험이란 게 반드시 직접적 경험이어야 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타인의 친절함, 혹은 타인의 잔인함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심지어 동시대가 아닌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모두 이, '개인적 경험'에 포함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그리하여 --- 소설이란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어줄 수 있는 감동이란 게, 예를 들자면, 1969년 6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나, 서대문구 연희동을 반경으로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보내었던, 현재는 경기도 일산이란 곳에 거주하고 있는 저에게, 시대를 상관하지 않으며, 작가의 국적이나 사상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전해질 수 있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사이에 극복되어질 수 없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듯, '너의 경험'과 '나의 경험'에도 그러한 차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제 아무리 '너의 경험'에 공감(共感)을 나누고 싶다 하여도,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의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중, 웅진지식하우스, 2007.

극복해낼 수 없는 차이란 게, 분명 존재하는 겁니다. 제 아무리 특정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특정 사건의 잔상/영향력의 크기와 범위는, 예를 들자면,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라는 것과 서울에 있었다라는 것 같은, 시대와 정서를 같이 함에도 넘어설 수 없는 공간적 경험에의 결여를, 그 결여를 행여라도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 한 편으로 메워낼 수 있지 않을까란 바람()이 얼마나 무지한 착각인지와 동일한 연유로 말미암아, ---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제가 지니고 있지 못한,

 

오스카의 전기적 공간은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대표하고 있다. (p499) …… 오스카는 일상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의 독일 시민 사회의 모순과 역사를 집약하고 있는 알레고리적인 인물4이라고 하겠다. (p500)

이러한 시대와 공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공감의 결여'란 것이, 굳이 저의 탓으로 삼아져야 한다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폴란드 꼬마인 것은 결코 네 책임이 아니란다" (1권, p109)라는 말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알고 싶고, 알려고 해보아도 알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지(無知)란 게, 욕먹어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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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그 삶이 존재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회고록의 형식을5 띠고 있는 소설입니다. 헌데 말이죠, 그 회고의 표현이라는 게 --- "이 작품은 … 그 강렬한 언어 구사와 암시적인 이미지, 반어와 역설 그리고 풍자로 가득한 서사적 표현 기법으로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2권, p498)란 <작품 해설>과 같이, 예의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잘 알지 않는 한) 선뜻 이해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로6 특징지어주고 있지요. 엄살기가 좀 심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 생각하시는 분들께...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 전등 아래에서 태어나고, 세 살의 나이에 일부러 성장을 멈추고, 북을 얻고, 노래로 유리를 부수고, 바닐라 냄새를 맡고, 교회 안에서 기침을 하고, 루치에게 먹이를 주고, 개미를 관찰하고, 다시 성장을 결심하고, 북을 파묻고, 서방으로 가서 동쪽을 잃고, 석공 일을 배우고 모델 일을 하고, 다시 양철북으로 되돌아가서 콘크리트 요새를 시찰하고, 돈을 벌고, 손가락을 보관하고, 손가락을 선사하고, 웃으면서 도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고, 그 후에 석방되어, 오늘 30회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검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2권, pp488)  

주인공 오스카 스스로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라 표현하고 있을 만큼, 그의 삶을 모두 다 옮겨놓은 위 구절을 읽으며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모두 다 제 기억 속에 떠올랐었다라는 사실에, 저 스스로에게 '그래도 굉장히 열심히 이 작품을 읽었었구나~'란, 작가 귄터 그라스와, 이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이웃분의 칭찬이 막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란 자뻑을 날려보게도 됩니다만, 이 자체만으로는 대체 그러한 사건들이 뭘 의미하는지, 앞과 뒤의 연관성은 도무지 있기라도 한건지, 등의 의아함은 또한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라는, 이 감정을 직접 느껴보셔야~란 말을 전하고 싶기도 합니다. 암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안락한 휴게소가 나오더라~라 싶게, 이 긴 작품을 다 읽고나면, 그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상세한 <작품 해설>이 독자를 맞이하여 줍니다. 텍스트를 읽어가며, 다음과 같은 작품의 콘텍스트를 알아내지 못했다하여, 자신의 독해력(讀解力)을 원망하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다라 생각합니다. 뭔가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딱히 '우와~'하는 감탄이 또 나와지는 건 아닌, 어쩔 수 없이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라는 주장의 현시(顯示)에 불과할 뿐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옮긴이가 적어내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마지막으로, 2017년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저와 함께해주었던 「양철북」의 독후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는 중간, 이 책을 선물해주신,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하여 참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이웃분께, 제가 혹 뭘 잘못했던게 있나?하는 우스운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가져보기도 했었었네요. 어쩌면! --- 그 사람이 너무 미운데, 밉다라는 거 티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 ^^;;


오스카라는 예술적 형상을 매개로 그라스는 20세기 초반과 중반의 독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스카의 개인사는 거의 언제나 독일의 역사와 병행한다. 예컨데, 1927년에 오스카 자신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지하 창고에서의 추락 사건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독일 소시민 계층이 급격하게 나치즘을 추종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 한다. 어머니의 외사촌 형제이자 애인이며 오스카의 실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브론스키의 죽음은 폴란드의 패배를 의미한다. 오스카가 그래프 부인과 벌이는 질퍽거리는 성교는 수렁에 빠진 러시아와의 전쟁을, 아버지 마체라트의 죽음은 독일 제국의 붕괴를 암시한다. 그리고 화물열차 안에서의 오스카의 성장은 나치 독일의 패망과 일치한다. 또한 양파 술집에서의 우스꽝스러운 눈물 짜내기 장면은 슬퍼하는 능력을 잃어버진 세태에 대한 풍자라고 하겠다. 오스카가 머릿속으로는 정상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형상으로는 난쟁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18세기 독일 시민 계급의 예민한 지성이었언 시인 횔덜린이 "생각은 많으나, 행동은 빈약한"이라고 하면서 당대의 독일 지성이 처한 딜레마를 표현한 것처럼, 오스카라는 인물은 이념과 현실의 참담한 괴리에 짓눌려 있는 20세기 초·충반 독일 시민 사회의 딜레마를 나타내는 또다른 전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 후 오스카는 조금 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름아니라 독일 시민사회의 정신적 성장에 대한 작가의 기대를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는 독일 시민 사회가 양차 대전을 통해 지독하게 혼쭐이 났으니, 이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오스카는 121센티미터의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등에는 새로 혹까지 생겨난다. 과거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전후 독일 사회에 대한 그라스의 안타까움은 그만큼 절절한 것이다. (2권, pp 502~503, <작품 해설>중)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도플갱어· 예수복음· 카인」 · 「눈 뜬 자들의 도시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 : 마지막 목격자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 : 남아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 


 

  1. 「호모 엑세쿠탄스」의 <책머리에> 중 p7, 민음사, 2006.
  2. 「고요한 밤의 눈」중 p265, 다산책방, 2016.
  3. "독일 리얼리즘 소설의 적자(嫡子)" - p498
  4.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나 오스카는 처참하게 파괴된 인간의 모습을 고발적으로, 도전적으로, 초시간적으로, 더욱이 우리들 세기의 광기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2권 p271)
  5. "노랫소리로 양치질 컵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 오스카는 정신 병원에 갇힌 채 그의 목소리의 선사 시대를 감회에 젖어 회고하고 있을 뿐이다." (1권, p103)
  6. 이 점 뿐만이 아니라, 작가는 종종, 1인칭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무려 하나의 문장 속에서마저 번갈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도 아니언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형식에 어떠한 뜻이 담겨져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읽는 독자로서는 결코 맘편한 구조일 수는 없겠죠만, 일단, 이 부분은 각주로만 언급하도록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그 당시 나는 과자를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그 때문에 오스카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키는 크지 않았으나 살이 쪄 볼품이 없게 되었다."(1권, p140) / "나는 오스카의 교과서도 거기에서 찾았다. 라스푸틴과 괴테를 한 권으로 합쳐놓은 것이었다. 나는 나의 애독서를 가져가야만 했던가?(2권, p39) / "내가 오스카의 과거를 조금 장황하게 설명하는 동안 스승 베브라는 잠이 들어버렸다."(2권,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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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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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도 갈 수 있고, 또한 미래의 아무 시점이나로도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의 개발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허나, 2002년 개봉했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속, 온갖 디지털 기술들은, 당시만 해도 '세상에 저럴 수가!'라며,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냈을 뿐, 그런 기술들의 실현을 내 생전에 볼 수나 있을까 했었었거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영화 속 기술들의 현실화는 불가능이 아닌, 이제 몇 발만 더 내디디면 얼마든지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좁혀져 있다고도 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복제'가 아닌) '완벽한 창조'란 것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일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이것이 당위의 문제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듯 하나 어쨌든) '하나님(God)의 영역'으로만 남아있게 된다면, 즉, '타임머신'의 개발과 같이 불가능의 영역에 속해 있는/해야 하는 문제라면 --- '인간형 로봇'1이라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제품'이라는 한계에 지극히 충실하고 있는 그 대안은, 그렇게는 머지 않은 미래에, 그걸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와 상관 없이, 우리의 삶 속 일부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암튼!

"수레를 예견한다는 건 그걸 만들어 낸다는 것(to predict the wheel is to invent it)"이란, 칼 포퍼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견해, 그러니까 미래란 걸 예측한다는 건 논리상 불가능하다란 주장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또, (그렇다면 아예)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이란 앨런 케이의 적극적 견해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2 자, 과학이 이제까지 이루어 온 것들의 축적인 현재와, 앞으로 이루어 갈 미래에의 '예측'에 대해, 우리의 문학은 (부정적이건 적극적이건)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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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by-one game인 (심지어 시간의 제한까지 부과되어있는!) 바둑의 경우,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애초부터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바둑 기사들이 '감()'이라 표현했던 그 무엇의 위력이란 게, 실제 존재할 뿐 아니라, one-by-one game이라는 바둑의 형식마저 제압해낼 수 있는, 그처럼 대단한 것이었을 수도 있기에, 이세돌에게 희망을 걸어본 것이었었죠. 알파고는 이세돌보다, 커제보다 강한 바둑실력을 지니고 있었었지만,

작가 구병모는, 이 작품에 등장시킨 '인간형 로봇' 은결을 통해, 여전히,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학습'이란 인위적 행위의 결과로서가 아닌, 결국 어쨌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하게 되는, '감정'이라는 추상적 명사를, 인간이 '인간형 로봇'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상대적으로 '더 잘하는 것'이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럴듯한 조치를 취할까. …… 울음과 웃음이 한 얼굴에 존재하는 게 사람에게는 범상한 일일지 모르나 은결은 이런 아이러니를 분석 및 정렬하지 못한다. (pp108~109)

하지만, 이러한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감정이란 실체가, 정작 어떻게 생성되고 유지 또는 억제되는지, 우리는/도 알지 못합니다. 선천적인 면도 있겠으나, 감정 형성의 일정 부분, 어쩌면 과반의 부분들이, 생물학적·사회적 나이를 들어가며 후천적인 면들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 억제되는 것일 수도 있다라는 추측을, 작가 박주영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해 주었었죠.  


"인간은 DNA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억의 총합입니다."


-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중 p36, 다산책방, 2016.

별 무리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박주영의 추측을 따르자라면, 인간이란 존재의 고유함이란 게 결국, 이처럼 그 알지 못하는 것들로 규정되게 됩니다. 알지 못하기에, 이제까지 '인간 존재의 고유함'이라 생각해왔던 '후천적 감정'의 생성을, '인간형 로봇'이란 공장 제품은 결코 지닐 수 없다란 주장은 성립될 수 없을 터이고, 그 가정의 실현, 그러니까 --- '인간형 로봇'이라는 것이 감정을 (조금이나마라도) 지니게 된다면? 이란 상상의 일례가 바로, 이 작품 「한 스푼의 시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당신의 아버지보다도 오래 살아온 시간이 그저 멋은 아닙니다. (p246)​

"한다. 하지 않는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 그때는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언제 다시 하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p99)로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인간 언어의 미묘함에 어려움을 겪는 '인간형 로봇' 은결은, 예의 '로봇'으로서의 능력으로 그 어려움을 어쨌든 극복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이 하는 말들의 미묘함이 결국엔 감정의 미묘한 변화로부터 기인된다라는 것도 알게 되지요.


명정은 은결에게 감정을 느끼는 기관은 없을지라도 감정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안다. … 그런데 알고 보면 사람에게도 감정을 느끼는 기관이란 딱히 없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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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로만 이루어져 있는 로봇의 연산 속엔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p114)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로봇의 연산 과정 속엔,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p115)이라 '삶'을 정의해낼 수 있는 프로세스 같은 건 아예 들어있지도 않습니다. 이제 작가는,


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p216)​

이란, 길지도 않은, 심오해보이지도 않는, 허나 낯설기는 한 이 질문을 통해,

독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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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순간 누구 하나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느낌에. …… 꺾이고 부서진다는 점에서 외관상 같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무너짐은 정말 저 무너짐과 같은가. 무너진다는 건 결국 그 현상을 대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 (p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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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건물과 다른 건 부서져도 대강 이어 붙일 수 있다는 점일까, 다시 일어난다는 점일까. 나는 아내가 떠난 뒤 무너졌지만 죽지 않았고,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도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역시 이렇게 살아 있는데... (p227)

평생 땅바닥으로부터 제 몸을 떼어낼 수 없는 지렁이에겐, 3차원이란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예 상상부터가 되질 않겠지요. 고작, 거기에 한 개의 차원이 더해졌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누리는 3차원의 공간이라는 게 말이죠. 그러하기에, 마치 2차원에만 살고 있는 지렁이가 3차원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타임머신'의 개발이 불가능한 것 또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3차원 이상의 세상에 대해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봅니다. 좀 과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구병모의 소설은, 이제까지 읽어낸 모든 소설들이 다, 무어라 감상문을 써내기가, 2차원 이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지렁이마냥, 타임머신을 개발해내지 못하는 인간마냥, 저에겐 참 어렵기만 합니다. 이 작품을 읽고 쓰는 이 글에서도 예의, "무너진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라 단문이 순간적으로 읽는 이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그 이유를, 그 분위기를, 도저히 전달해낼 수가 없네요. 아마도 --- 무너져버린 바로 그 감정선의 형성이, '후천적' 경험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볼 뿐. 어쨌든! 이 작품을 읽고, 당신의 감정선이 또한 무너진다면,

그것이 어쩌면, 당신과 저의 '후천적' 경험들 중 어느 곳에선가, 서로의 자리는 달랐을지언정, 공통의 접점이 있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겠죠. 그게 바로... '인간형 로봇'들은 죽었다 깨나도 따라올 수 없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감(共感)'이라는 작용, 일 것이겠고요.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 「빨간구두당」 · 「위저드 베이커리


...금연 156일째


 

 

 


 

  1. "리모컨이나 중앙컴퓨터로 원격 제어하는 로봇이 아니라, 기초 설정이 완료된 직후부터 외부의 모든 자극을 데이터베이스화하며 때로는 스스로 판단하고 그 계산과 선택의 결과를 새로이 자동 프로그래밍하여 움직이는 인간형 로봇"(p39)
  2. 네이버 지식 백과 <족집게 도사는 있을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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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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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마지막 즈음, 혹은 1998년의 시작 무렵, 둘 중 어느 때였는지는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는, 그저, 결혼하자 마자 혼자 갔었던 미국에서 잠시 한국에 돌아와있었던 그 며칠 새, 기어이 치환군을 만나, 그 몇 개월여간 참으로 많이 그리워했었던 신촌의 <나의 집> 삼겹살을 먹고 있었던 시간이었다라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예의 맛있어 죽겠네~란 말은 떠올리며 먹고 마셨었을 <나의 집> 삼겹살, 그와 어울린 소주의 맛이 정확히 얼마만큼 맛있어 죽겠었었던지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습니다만, 그 때 그 시간, 지금은 사라진, 신촌 <나의 집>에서 우리 둘, 

지금은 사라진 것이 확실한, '나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라는 건, 너무도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우리 둘, 그 때엔 정말로 행복했었었으며, 그러했기에 그 때 우리 둘은 "지금이 바로, 이제까지 내 인생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며, 이 정점은 앞으로 더욱 새로이 갱신될 것이다"란 행복한 기대를 거의 현실과 동급으로 확신하고 있었었지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여 년전의 어느 날은, 최소한 저에겐, 이렇게 기억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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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 (p36)

제가 참 좋아하는, '전집 편집장님'의 아주 오래 전, 허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글, "그냥 그 때 거기, 버지니아 공대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란, 전혀 복잡하지 않은 구조의 문장이, 어쨌든 엄연한 일종의 위로인 이 한 마디가, 이 한 마디를 알게 된 이후, --- ① 아주 사소한 순간, 예를 들어 길을 걷고 있던 어느 비오는 날, 지나가던 자전거로부터 그다지 많지는 않은 양의 물이 나의 바지 끝 단에 살짝 튀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 한 문장이 되어주었었기도, ② 뭔가 나에게 커다란 잘못이 있음을 스스로 조용히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확정된 나의 불행에 대한, 타인의 위로에 자꾸 기대어 가며, 그래 그건 나의 잘못이/잘못만은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야. 난 그저 '단지 그 상황 속에 놓여졌었을 뿐'과 같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면피 (혹은, 적어도 심정적으로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책임의 회피'?)의 용도로 사용해왔던 이 문장을, 구병모의 글에서, 난생 두 번째로, 다시금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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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p134)

타인의 더 큰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삼는다라는 게, 참으로 잔인하고, 또한 하릴없는 짓이다라 허구헌 날 말하고 적어대왔으면서도, ---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잘못된 결과를 낳은 선택들에 대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라는 체념이, 극에 달한,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짜증이랄까, 성남이랄까... 등을 나에게 가져다줄 때마다,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김없이 되뇌이었던 생각, '어디 뭐 세상에 실수하는 사람이 나만 있나?'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빛나는 추억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 니시 가나코, 「사바리 2권」중 p239, 은행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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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 (P163)

(한번만 더) 타인의 더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삼는다라는 게, 참으로 잔인하고, 또한 하릴 없는 없는 짓이다라 허구헌 날 말하고 적어대왔으면서도, 내 머릿 속에선 이 문장 하나를 만들어 내지 못해, 뭔가 명확히 그 이유를 대지 못했었거늘,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1란 소설 속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작가 구병모는 명쾌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문장으로 만들어 제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무엇보다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p185)

없애고 싶다고, 이젠 대충 없애져진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즈음, 여지없이 타인 혹은 내가 속해 있는 상황이 일깨워 주곤 해왔던 그 아픔이란 게 원래부터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노라고, 그냥 내 안에 녹아, 말하자면 내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라는 걸 또한, 작가 구병모는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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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어떻게든 바꿀 수 있으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고 그랬다. (p211) ……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내 옆에 있었던 무언가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얼 잊어버리거나 놓고 온 걸까. (p233)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겠냐마는'이란 구절이 있는 반면, 또한 '좋아하는 덴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란 구절의 효용 또한 적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건만, ---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p163)란, 길지도 않은 열 아홉자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저이기에, 이 작가 구병모를 읽을 때마다 항상 저의 마음은 전율을 느끼곤 했었었으며, 이번에도 예의, 그리고 더해 심지어, "나는 무얼 잊어버리거나 놓고 온 걸까"(p233)란 문장을 읽는 순간, 40대의 후반 of 후반을 살아내고 있는 저에게 살짝이, 그러나 분명 찌르르 하게 눈물 딱 한 방울정도는 돋아나게 해준 이 작가를, 너무도 좋아하거늘,


그 좋아함의 이유를, 사고(思考)의 틀이라든가, 문장의 스타일이라든가 등과 같은 구체적 실례마저 이제는 확연히 뛰어넘어버린, 좋아함의 이유조차 딱히 한두 개의 문장으로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겠는, 이런 수준의 독자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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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저에게 작가 구병모는,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p248)라는, 소설 속의 문장으로 '현재에 대한 위로'를, 그리고 또한,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린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p251)

'과거에 대한 위로', 그리고 '현재에 대한 충고', 거기에 '미래에 대한 마음의 준비'까지 모두, 이렇게, 이 작품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작가 자신의 말로 건네어 주고도 있네요. 이렇게, 다시 한 번 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 성석제, 「투명인간」의 <작가의 말>중 p370, 창비, 2014.

하필이면(?) --- 이 시대에, '나는 단지 여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 말할 수도 있겠는 이 시대에, 저를 알지 못하는, 저도 얼마 전에야 그들의 글을 통해서나마 알게 된, 이러한 작가들이 '함께 존재해 준다'라는 것에, 그리하여 함께 느끼고, 제가 표현해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명확하게 글로서 보여주는 이들과 함께 한 세상을 살아간다라는 것에 자연스레 제 마음 속에 생겨난, 전해지지는 않을, 감사의 마음, 이렇게라도 써봅니다.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 「빨간구두당


 


...금연 154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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