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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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인간의 얘기를 하는 것일진대, 세상에 정치와 무관할 수 있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1라는 작가 이문열의 소설관()과,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2란 작가 박주영의 소설가관()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비슷한 내용과 형식3을 보여주고 있는,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도 예의 'grand'란 형용사를 헌사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겠거늘, 헌데 이게 참, 그 'grand'라는 단어를 사용한 마음과는 정반대의 감정인, '아 뭐 소설을 이따구로 써놔서~'란 불친절함에 대한 불만 또한, 읽는 내내 버려낼 수 없었다라는 것이, --- 대략 보름여 간의 시간 동안을 저와 함께 했던, 역시나 길고 긴 이 연휴가 아니었더라면 다 읽어내고 이 감상문을 써낸다라는 것이 가능이나 했었을까,란 의문을 아니가질 수 없는, 이 소설 「양철북」에 대한 제가 쓸 독후감(讀後感)의 전반적인 ton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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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위화, 「허삼관 매혈기」의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중 pp5~6

​참으로 여러 번이나 인용했었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관(小說觀)입니다. 그러니까 전, 여하한 경우에도 소설이란 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질 수 밖에 없다라 생각하는 독자이지요. 물론, 이 때의 경험이란 게 반드시 직접적 경험이어야 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타인의 친절함, 혹은 타인의 잔인함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심지어 동시대가 아닌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모두 이, '개인적 경험'에 포함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그리하여 --- 소설이란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어줄 수 있는 감동이란 게, 예를 들자면, 1969년 6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나, 서대문구 연희동을 반경으로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보내었던, 현재는 경기도 일산이란 곳에 거주하고 있는 저에게, 시대를 상관하지 않으며, 작가의 국적이나 사상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전해질 수 있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사이에 극복되어질 수 없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듯, '너의 경험'과 '나의 경험'에도 그러한 차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제 아무리 '너의 경험'에 공감(共感)을 나누고 싶다 하여도,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의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중, 웅진지식하우스, 2007.

극복해낼 수 없는 차이란 게, 분명 존재하는 겁니다. 제 아무리 특정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특정 사건의 잔상/영향력의 크기와 범위는, 예를 들자면,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라는 것과 서울에 있었다라는 것 같은, 시대와 정서를 같이 함에도 넘어설 수 없는 공간적 경험에의 결여를, 그 결여를 행여라도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 한 편으로 메워낼 수 있지 않을까란 바람()이 얼마나 무지한 착각인지와 동일한 연유로 말미암아, ---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제가 지니고 있지 못한,

 

오스카의 전기적 공간은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대표하고 있다. (p499) …… 오스카는 일상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의 독일 시민 사회의 모순과 역사를 집약하고 있는 알레고리적인 인물4이라고 하겠다. (p500)

이러한 시대와 공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공감의 결여'란 것이, 굳이 저의 탓으로 삼아져야 한다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폴란드 꼬마인 것은 결코 네 책임이 아니란다" (1권, p109)라는 말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알고 싶고, 알려고 해보아도 알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지(無知)란 게, 욕먹어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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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그 삶이 존재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회고록의 형식을5 띠고 있는 소설입니다. 헌데 말이죠, 그 회고의 표현이라는 게 --- "이 작품은 … 그 강렬한 언어 구사와 암시적인 이미지, 반어와 역설 그리고 풍자로 가득한 서사적 표현 기법으로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2권, p498)란 <작품 해설>과 같이, 예의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잘 알지 않는 한) 선뜻 이해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로6 특징지어주고 있지요. 엄살기가 좀 심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 생각하시는 분들께...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 전등 아래에서 태어나고, 세 살의 나이에 일부러 성장을 멈추고, 북을 얻고, 노래로 유리를 부수고, 바닐라 냄새를 맡고, 교회 안에서 기침을 하고, 루치에게 먹이를 주고, 개미를 관찰하고, 다시 성장을 결심하고, 북을 파묻고, 서방으로 가서 동쪽을 잃고, 석공 일을 배우고 모델 일을 하고, 다시 양철북으로 되돌아가서 콘크리트 요새를 시찰하고, 돈을 벌고, 손가락을 보관하고, 손가락을 선사하고, 웃으면서 도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고, 그 후에 석방되어, 오늘 30회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검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2권, pp488)  

주인공 오스카 스스로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라 표현하고 있을 만큼, 그의 삶을 모두 다 옮겨놓은 위 구절을 읽으며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모두 다 제 기억 속에 떠올랐었다라는 사실에, 저 스스로에게 '그래도 굉장히 열심히 이 작품을 읽었었구나~'란, 작가 귄터 그라스와, 이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이웃분의 칭찬이 막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란 자뻑을 날려보게도 됩니다만, 이 자체만으로는 대체 그러한 사건들이 뭘 의미하는지, 앞과 뒤의 연관성은 도무지 있기라도 한건지, 등의 의아함은 또한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라는, 이 감정을 직접 느껴보셔야~란 말을 전하고 싶기도 합니다. 암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안락한 휴게소가 나오더라~라 싶게, 이 긴 작품을 다 읽고나면, 그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상세한 <작품 해설>이 독자를 맞이하여 줍니다. 텍스트를 읽어가며, 다음과 같은 작품의 콘텍스트를 알아내지 못했다하여, 자신의 독해력(讀解力)을 원망하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다라 생각합니다. 뭔가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딱히 '우와~'하는 감탄이 또 나와지는 건 아닌, 어쩔 수 없이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라는 주장의 현시(顯示)에 불과할 뿐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옮긴이가 적어내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마지막으로, 2017년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저와 함께해주었던 「양철북」의 독후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는 중간, 이 책을 선물해주신,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하여 참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이웃분께, 제가 혹 뭘 잘못했던게 있나?하는 우스운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가져보기도 했었었네요. 어쩌면! --- 그 사람이 너무 미운데, 밉다라는 거 티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 ^^;;


오스카라는 예술적 형상을 매개로 그라스는 20세기 초반과 중반의 독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스카의 개인사는 거의 언제나 독일의 역사와 병행한다. 예컨데, 1927년에 오스카 자신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지하 창고에서의 추락 사건은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독일 소시민 계층이 급격하게 나치즘을 추종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기 한다. 어머니의 외사촌 형제이자 애인이며 오스카의 실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브론스키의 죽음은 폴란드의 패배를 의미한다. 오스카가 그래프 부인과 벌이는 질퍽거리는 성교는 수렁에 빠진 러시아와의 전쟁을, 아버지 마체라트의 죽음은 독일 제국의 붕괴를 암시한다. 그리고 화물열차 안에서의 오스카의 성장은 나치 독일의 패망과 일치한다. 또한 양파 술집에서의 우스꽝스러운 눈물 짜내기 장면은 슬퍼하는 능력을 잃어버진 세태에 대한 풍자라고 하겠다. 오스카가 머릿속으로는 정상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형상으로는 난쟁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18세기 독일 시민 계급의 예민한 지성이었언 시인 횔덜린이 "생각은 많으나, 행동은 빈약한"이라고 하면서 당대의 독일 지성이 처한 딜레마를 표현한 것처럼, 오스카라는 인물은 이념과 현실의 참담한 괴리에 짓눌려 있는 20세기 초·충반 독일 시민 사회의 딜레마를 나타내는 또다른 전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2차 세계대전 후 오스카는 조금 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름아니라 독일 시민사회의 정신적 성장에 대한 작가의 기대를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는 독일 시민 사회가 양차 대전을 통해 지독하게 혼쭐이 났으니, 이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오스카는 121센티미터의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등에는 새로 혹까지 생겨난다. 과거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전후 독일 사회에 대한 그라스의 안타까움은 그만큼 절절한 것이다. (2권, pp 502~503, <작품 해설>중)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도플갱어· 예수복음· 카인」 · 「눈 뜬 자들의 도시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 : 마지막 목격자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 : 남아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 


 

  1. 「호모 엑세쿠탄스」의 <책머리에> 중 p7, 민음사, 2006.
  2. 「고요한 밤의 눈」중 p265, 다산책방, 2016.
  3. "독일 리얼리즘 소설의 적자(嫡子)" - p498
  4.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나 오스카는 처참하게 파괴된 인간의 모습을 고발적으로, 도전적으로, 초시간적으로, 더욱이 우리들 세기의 광기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2권 p271)
  5. "노랫소리로 양치질 컵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 오스카는 정신 병원에 갇힌 채 그의 목소리의 선사 시대를 감회에 젖어 회고하고 있을 뿐이다." (1권, p103)
  6. 이 점 뿐만이 아니라, 작가는 종종, 1인칭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무려 하나의 문장 속에서마저 번갈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도 아니언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형식에 어떠한 뜻이 담겨져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읽는 독자로서는 결코 맘편한 구조일 수는 없겠죠만, 일단, 이 부분은 각주로만 언급하도록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그 당시 나는 과자를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그 때문에 오스카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키는 크지 않았으나 살이 쪄 볼품이 없게 되었다."(1권, p140) / "나는 오스카의 교과서도 거기에서 찾았다. 라스푸틴과 괴테를 한 권으로 합쳐놓은 것이었다. 나는 나의 애독서를 가져가야만 했던가?(2권, p39) / "내가 오스카의 과거를 조금 장황하게 설명하는 동안 스승 베브라는 잠이 들어버렸다."(2권,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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