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위화, 「허삼관 매혈기」의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중 pp5~6
참으로 여러 번이나 인용했었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관(小說觀)입니다. 그러니까 전, 여하한 경우에도 소설이란 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질 수 밖에 없다라 생각하는 독자이지요. 물론, 이 때의 경험이란 게 반드시 직접적 경험이어야 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타인의 친절함, 혹은 타인의 잔인함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심지어 동시대가 아닌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모두 이, '개인적 경험'에 포함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그리하여 --- 소설이란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어줄 수 있는 감동이란 게, 예를 들자면, 1969년 6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나, 서대문구 연희동을 반경으로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보내었던, 현재는 경기도 일산이란 곳에 거주하고 있는 저에게, 시대를 상관하지 않으며, 작가의 국적이나 사상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전해질 수 있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사이에 극복되어질 수 없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듯, '너의 경험'과 '나의 경험'에도 그러한 차이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제 아무리 '너의 경험'에 공감(共感)을 나누고 싶다 하여도,
"모든 인간은 같은 '류(類)'로서의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중, 웅진지식하우스, 2007.
극복해낼 수 없는 차이란 게, 분명 존재하는 겁니다. 제 아무리 특정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한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러니까 특정 사건의 잔상/영향력의 크기와 범위는, 예를 들자면,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라는 것과 서울에 있었다라는 것 같은, 시대와 정서를 같이 함에도 넘어설 수 없는 공간적 경험에의 결여를, 그 결여를 행여라도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 한 편으로 메워낼 수 있지 않을까란 바람(願)이 얼마나 무지한 착각인지와 동일한 연유로 말미암아, --- 201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제가 지니고 있지 못한,
오스카의 전기적 공간은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대표하고 있다. (p499) …… 오스카는 일상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의 독일 시민 사회의 모순과 역사를 집약하고 있는 알레고리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p500)
이러한 시대와 공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공감의 결여'란 것이, 굳이 저의 탓으로 삼아져야 한다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가 폴란드 꼬마인 것은 결코 네 책임이 아니란다" (1권, p109)라는 말이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알고 싶고, 알려고 해보아도 알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지(無知)란 게, 욕먹어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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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그 삶이 존재했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회고록의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입니다. 헌데 말이죠, 그 회고의 표현이라는 게 --- "이 작품은 … 그 강렬한 언어 구사와 암시적인 이미지, 반어와 역설 그리고 풍자로 가득한 서사적 표현 기법으로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2권, p498)란 <작품 해설>과 같이, 예의 ('대략 1900년에서 1954년까지를 살아간 독일 사람들의 경험 공간'을 잘 알지 않는 한) 선뜻 이해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로 특징지어주고 있지요. 엄살기가 좀 심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 생각하시는 분들께...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 전등 아래에서 태어나고, 세 살의 나이에 일부러 성장을 멈추고, 북을 얻고, 노래로 유리를 부수고, 바닐라 냄새를 맡고, 교회 안에서 기침을 하고, 루치에게 먹이를 주고, 개미를 관찰하고, 다시 성장을 결심하고, 북을 파묻고, 서방으로 가서 동쪽을 잃고, 석공 일을 배우고 모델 일을 하고, 다시 양철북으로 되돌아가서 콘크리트 요새를 시찰하고, 돈을 벌고, 손가락을 보관하고, 손가락을 선사하고, 웃으면서 도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고, 그 후에 석방되어, 오늘 30회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검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2권, pp488)
주인공 오스카 스스로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라 표현하고 있을 만큼, 그의 삶을 모두 다 옮겨놓은 위 구절을 읽으며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모두 다 제 기억 속에 떠올랐었다라는 사실에, 저 스스로에게 '그래도 굉장히 열심히 이 작품을 읽었었구나~'란, 작가 귄터 그라스와, 이 책을 제게 선물해주신 이웃분의 칭찬이 막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란 자뻑을 날려보게도 됩니다만, 이 자체만으로는 대체 그러한 사건들이 뭘 의미하는지, 앞과 뒤의 연관성은 도무지 있기라도 한건지, 등의 의아함은 또한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라는, 이 감정을 직접 느껴보셔야~란 말을 전하고 싶기도 합니다. 암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안락한 휴게소가 나오더라~라 싶게, 이 긴 작품을 다 읽고나면, 그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상세한 <작품 해설>이 독자를 맞이하여 줍니다. 텍스트를 읽어가며, 다음과 같은 작품의 콘텍스트를 알아내지 못했다하여, 자신의 독해력(讀解力)을 원망하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다라 생각합니다. 뭔가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딱히 '우와~'하는 감탄이 또 나와지는 건 아닌, 어쩔 수 없이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라는 주장의 현시(顯示)에 불과할 뿐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옮긴이가 적어내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마지막으로, 2017년 열흘간의 황금연휴를 저와 함께해주었던 「양철북」의 독후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는 중간, 이 책을 선물해주신,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하여 참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이웃분께, 제가 혹 뭘 잘못했던게 있나?하는 우스운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가져보기도 했었었네요. 어쩌면! --- 그 사람이 너무 미운데, 밉다라는 거 티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