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마지막 즈음, 혹은 1998년의 시작 무렵, 둘 중 어느 때였는지는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는, 그저, 결혼하자 마자 혼자 갔었던 미국에서 잠시 한국에 돌아와있었던 그 며칠 새, 기어이 치환군을 만나, 그 몇 개월여간 참으로 많이 그리워했었던 신촌의 <나의 집> 삼겹살을 먹고 있었던 시간이었다라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예의 맛있어 죽겠네~란 말은 떠올리며 먹고 마셨었을 <나의 집> 삼겹살, 그와 어울린 소주의 맛이 정확히 얼마만큼 맛있어 죽겠었었던지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습니다만, 그 때 그 시간, 지금은 사라진, 신촌 <나의 집>에서 우리 둘,
지금은 사라진 것이 확실한, '나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라는 건, 너무도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우리 둘, 그 때엔 정말로 행복했었었으며, 그러했기에 그 때 우리 둘은 "지금이 바로, 이제까지 내 인생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며, 이 정점은 앞으로 더욱 새로이 갱신될 것이다"란 행복한 기대를 거의 현실과 동급으로 확신하고 있었었지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여 년전의 어느 날은, 최소한 저에겐, 이렇게 기억되고 있는 겁니다.
………………………………………………………………………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 (p36)
제가 참 좋아하는, '전집 편집장님'의 아주 오래 전, 허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글, "그냥 그 때 거기, 버지니아 공대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란, 전혀 복잡하지 않은 구조의 문장이, 어쨌든 엄연한 일종의 위로인 이 한 마디가, 이 한 마디를 알게 된 이후, --- ① 아주 사소한 순간, 예를 들어 길을 걷고 있던 어느 비오는 날, 지나가던 자전거로부터 그다지 많지는 않은 양의 물이 나의 바지 끝 단에 살짝 튀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 한 문장이 되어주었었기도, ② 뭔가 나에게 커다란 잘못이 있음을 스스로 조용히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확정된 나의 불행에 대한, 타인의 위로에 자꾸 기대어 가며, 그래 그건 나의 잘못이/잘못만은 아니고,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야. 난 그저 '단지 그 상황 속에 놓여졌었을 뿐'과 같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면피 (혹은, 적어도 심정적으로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책임의 회피'?)의 용도로 사용해왔던 이 문장을, 구병모의 글에서, 난생 두 번째로, 다시금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
·
·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p134)
타인의 더 큰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삼는다라는 게, 참으로 잔인하고, 또한 하릴없는 짓이다라 허구헌 날 말하고 적어대왔으면서도, ---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나의 수많은, 크고 작은, 잘못된 결과를 낳은 선택들에 대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라는 체념이, 극에 달한,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짜증이랄까, 성남이랄까... 등을 나에게 가져다줄 때마다,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김없이 되뇌이었던 생각, '어디 뭐 세상에 실수하는 사람이 나만 있나?'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빛나는 추억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 니시 가나코, 「사바리 2권」중 p239, 은행나무, 2016.
·
·
·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 (P163)
(한번만 더) 타인의 더 큰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삼는다라는 게, 참으로 잔인하고, 또한 하릴 없는 없는 짓이다라 허구헌 날 말하고 적어대왔으면서도, 내 머릿 속에선 이 문장 하나를 만들어 내지 못해, 뭔가 명확히 그 이유를 대지 못했었거늘, "제대로 된 관찰자라도 되어야겠다, 생각해"란 소설 속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작가 구병모는 명쾌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문장으로 만들어 제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무엇보다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p185)
없애고 싶다고, 이젠 대충 없애져진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즈음, 여지없이 타인 혹은 내가 속해 있는 상황이 일깨워 주곤 해왔던 그 아픔이란 게 원래부터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노라고, 그냥 내 안에 녹아, 말하자면 내 몸과 마음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라는 걸 또한, 작가 구병모는 알려줍니다.
………………………………………………………………………
인연은 어떻게든 바꿀 수 있으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고 그랬다. (p211) ……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내 옆에 있었던 무언가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얼 잊어버리거나 놓고 온 걸까. (p233)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겠냐마는'이란 구절이 있는 반면, 또한 '좋아하는 덴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란 구절의 효용 또한 적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건만, ---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p163)란, 길지도 않은 열 아홉자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저이기에, 이 작가 구병모를 읽을 때마다 항상 저의 마음은 전율을 느끼곤 했었었으며, 이번에도 예의, 그리고 더해 심지어, "나는 무얼 잊어버리거나 놓고 온 걸까"(p233)란 문장을 읽는 순간, 40대의 후반 of 후반을 살아내고 있는 저에게 살짝이, 그러나 분명 찌르르 하게 눈물 딱 한 방울정도는 돋아나게 해준 이 작가를, 너무도 좋아하거늘,
그 좋아함의 이유를, 사고(思考)의 틀이라든가, 문장의 스타일이라든가 등과 같은 구체적 실례마저 이제는 확연히 뛰어넘어버린, 좋아함의 이유조차 딱히 한두 개의 문장으로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겠는, 이런 수준의 독자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
·
·
그런 저에게 작가 구병모는,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p248)라는, 소설 속의 문장으로 '현재에 대한 위로'를, 그리고 또한,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린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p251)
'과거에 대한 위로', 그리고 '현재에 대한 충고', 거기에 '미래에 대한 마음의 준비'까지 모두, 이렇게, 이 작품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작가 자신의 말로 건네어 주고도 있네요. 이렇게, 다시 한 번 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 성석제, 「투명인간」의 <작가의 말>중 p370, 창비, 2014.
하필이면(?) --- 이 시대에, '나는 단지 여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 말할 수도 있겠는 이 시대에, 저를 알지 못하는, 저도 얼마 전에야 그들의 글을 통해서나마 알게 된, 이러한 작가들이 '함께 존재해 준다'라는 것에, 그리하여 함께 느끼고, 제가 표현해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명확하게 글로서 보여주는 이들과 함께 한 세상을 살아간다라는 것에 자연스레 제 마음 속에 생겨난, 전해지지는 않을, 감사의 마음, 이렇게라도 써봅니다.
※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 「빨간구두당」
...금연 154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