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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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1919년 : 아무눌라 칸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프가니스탄 왕국 성립, 완전 독립 쟁취,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파키스탄)가 듀랜드 라인으로 분리

#2. 1973년 : 좌익 파르참가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군주제 종식되고 공화국 성립

#3. 1978년 12월 24일 :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 파르참를 지원하기 위해 10만 병력을 동원해 침공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4. 1988년 :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5. 1992년 : 반군이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14년에 걸친 전쟁 종식   


- 김영미, 「세계는 왜 싸우는가?」, 추수밭, 2011.

​아프가니스탄 근현대사의 몇몇 주요 장면들 중, #2의 몇년 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내어야 했었던, 바로 그 공간적·시대적 배경이 보여주고 있는 <외부 세력의 침공 - 극복 - 내부의 새로운 갈등>이라는 sequence는, 그 구체적 주체들만 다를 뿐,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지요. 그러하기에, 혹은 어쩌면 매우 역설적으로! 


이 소설의 스토리가 보여주고 있는 '감동'이란 게, 딱히 새롭다거나 커다랗다거나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 누군가를 지배했던 역사를 가진 국가/계급보다, 누군가에게 지배를 당했던 역사를 가진 국가/계급이 훨씬 더 많고/광범위하고, 그러하기에 그 피지배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문학이란 게 사뭇 흔하기도 하여, 마땅히 지녀 건네주어야 할 '감동'이란 것마저, 뭐랄까... '삼시 세끼, 1년 내내 먹어낸 자연송이'를 오늘 아침 밥상에서 또 보게 되는, 뭐 그런 (일종의) 식상함이었다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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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1


권여선의 「레가토」 속 오정연에게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시간적 배경이, 하필이면 그녀의 꽃다운 20대 초반과 겹치고 있다라는 건, 결코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주어진 것'이었지요. 이와 같은, 일종의 '선천적 구속(拘束)'2을, 일 개인의 차원에서 극복해낸다라는 건, ("사회의 총체적 변화"3로 정의되는 '혁명'에 성공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4 물론, ---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는 개인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습니다만, '노력한다'와 '극복한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그 두 단어가 국어사전에 배열되어 있는 간극의 몇만 배는 될만큼, 많이 다르지요. 이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이러한 '선천적 구속'을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농공상'의 사회적 서열과 '양반과 평민'이라는 불특정 지배-피지배의 구조를 과거의 역사로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인 저(와 당신)에게, 예의 딱히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갈등 구조이지요. 


역사를 극복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파쉬툰인이었고 그는 하지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였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기어다니는 법을 같이 배웠다. 역사, 인종, 사회, 종교 중 어느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p40)

그런데 말입니다 --- 막상 그러한 수직적 계층 구조 속 특정 계급으로, 태어날 때부터 자리되어진 두 사람, 아미르와 하산에게는, 딱히 그러한 '선천적 구속'에 대한 저항감이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아미르가 비록, 


하산을 골리는 건 묘한 재미가 있었다. 하산과 내가 벌레를 괴롭힐 때 받는 느낌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가 개미이고 나는 그 위에 확대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p81) 

와 같은 (지금의 제 관점에서 보아 '비뚤어진'이란 형용사를 쓸 수 밖엔 없는) 관점에서의 '원래 삶은 이런 것!'이란 생각을, 별 고민 없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p101)라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오는 하산의 반응, 다시 말해 그가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 이러한 '선천적 구속'이 갈등 유발의 시발점이기는 하나, 그 갈등이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어떠한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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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 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의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5


일 개인의 힘으로는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며 게다가,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저 그 사회의 구조에 별다른 저항감조차 가지지 않은 채 순응하며 살아가는 걸 선택합니다만 --- 불공평하게도, 사회의 구조란 건 일 개인의 인생/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요. 


이기는 건 늘 세상이다. 그게 현실이란다. (p148) …… 공정한 건 아니지만, 며칠 동안, 아니 단 하루에 있었던 일이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수도 있단다. (p211)

"오랫동안 바라던 것을 갖게 된"(p127) 아미르는, 그 쟁취의 행복함을 잃기 싫었고, 그러기 위해선 하산을 버려야 했습니다. 배반과 음모로, 그렇게 하산을 떠나가게 만든6 아미르는, 일견 자책을 느끼지만, 또 한 편으론 "나의 일부는 기뻐하고 있었다"(p157)란 희열의 즐거움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그렇게...


아프간 사람들은 '젠다기 미그자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 캄야브(행)와 나캄(불행), 위기 혹은 카타르시스에 상관없이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먼지가 자욱한 코치(유목민)의 마차처럼, 인생은 앞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는 것이다. (p529)

오늘이 어제를 밀어냈었었듯, 내일이 어느 순간 지금 오늘을 밀어내고야 마는, 그 멈춤 없는 시간이 흐름이란 건, 지난 시절의 괴로움7과 행복을 한데 버물리어, 퇴적의 더 아래쪽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들이지 세월의 퇴적층 저 아래에 파묻혀 있는 과거가 아니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지요. 그러나!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는 삶"


- 헤르타 뮐러, 「숨그네」 p341, 문학동네, 2010. 

과거에 대한 망각을 영양분 삼아, 마음 속 아픔은 이어지고 또 자라나는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이 나에게 허락해준다는 그 시기란 게8, 너무 늦기 전에, 과거에 대한 망각조차 망각되어 마음 속 아픔이란 것 또한 사라져 버리기 이전에, 주어진다라는 건 예의, 뭔가 정말로 소설스러운 행운인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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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라.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이 있어."(p284)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기대하기 쉽지 않은,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소설 속 주인공 아미르에겐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의,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기에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p550)라는, 참으로 간단한 대구(對句)로 주인공의 속죄를 허락해주지요. 뭐...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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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거를 마음에 담지 않고 포효하며 흐르는 강이었다. 나는 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내 죄를 바닥에 가라앉히고, 물살이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실어가게 할 수 있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해도, 나는 그 이유만으로도 미국을 받아들였다. (p203)

이게, 결국엔 자신의 죄를 씻어낼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맺음되어졌기에 망정이지, 그 이전에 아미르는 분명히, 자신의 과거와 단절되기를 원했었다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뭐 이것을 가지고 아미르를 비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자격이 제게 있는지, 저 스스로 자신 없기도 하구요. 헌데 말입니다,


"나의 새로운 삶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험들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었어요. (p30) …… 나는 그곳이 파키스탄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 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인류 문명의 성취였어요.(p34) …… 나는 뉴욕에 발을 디딘 젊은 뉴요커였어요. … 내 세계는 변하고 있었어요. 


- 모신 하미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pp43~44, 민음사, 2012. 

역시나, 이 또한 한 편의 소설일 뿐이라 말하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 이슬람 문명을 자신의 기원(origin)으로 하고 있는 두 작가 -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역자가 동일하네요 - 가 보여주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거부감 없는 태도는, 저에겐 매우 당혹스러웠다는 건 꼭, 왜인지 모르겠으나 꼭 적어놓고 싶습니다. 복거일의 다음 질문아닌 질문은 정녕, 만인으로부터 동일한 대답을 이끌어내고야 마는 것일까요?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상권 p54, 문학과지성사, 1987.  



  1. 박주영, 「고요한 밤의 눈」 p123, 다산책방, 2016.
  2.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루소, 「사회계약론」중) - 김석, 「법철학 소프트」 p60, 박영사, 2015.
  3. 자오팅양 · 레지 드브레, 「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p31, 메디치, 2016.
  4. '불가능하다'란 인식의 지배하에 있어왔던, 그 극복에의 바람(願)은 결국, '홍길동'같은 혁명적 인물을 그려내게 해주었지요. 즉, 현실적으론 정말로 불가능하다란 겁니다.
  5. 장 그르니에.
  6. "호수에는 괴물이 있었다. 그 괴물이 하산의 발목을 잡고 진흙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 괴물을 바로 나였다."(p129)
  7. "속죄하지 못한 죄들이 가득한 내 과거"(p7)
  8.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이 어느 한 시기 정도는, 인생에서 최소한 한 번은 허락되었다" - 구병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p252,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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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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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흑인 여자들을 항상 피부색으로 묘사하는 게 지겨워요! 꿀색이 어떻고! 다크 초콜릿색이 어떻고! 내 친할머니는 모카색이 감도는 카페오레, 망할 그레이엄 크래커 갈색이었다고 하다니! 대체 백인 여자들을 음식이나 뜨거운 액체의 색으로 묘사하지 않는 이유는 뭐죠? 어째서 이 인종 차별적이고 결말도 없는 책에 요구르트색, 달걀 껍질색, 스트링 치즈 피부, 저지방 우윳빛 백인 주인공은 안 나오는 거죠? 그래서 흑인 문학이 후지다는 거예요! (p197)

주인공 Me은, 소설 속 두 등장인물들1로부터 'sellout'이라 불리웁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sellout'은, "헐값에 팔아버리는 것, 또는 배신자라는 뜻"(p135)이란 역자의 설명보다, 'someone who forgets their roots'라는 영어사전2의 설명이, 이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훨씬 더 명확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무의식 중에 자신들을 스스로 피부색으로 특징지워버리는 흑인들에 대한 Me의 실망/비판이, 다른 흑인들의 눈엔 영 거슬렸던 거지요. 


이웃의 누가 목을 매려고 하면 아버지는 절대 당황하지 않았 … 다. "내 장담하는데, 흑인들은 매듭을 제대로 묶지 못하거든"(p108)

이 작품 속의 이러한 사고를 전 '자기 비하'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3 "가난한 사람들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자동차 보험을 들 돈이 없어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방어적으로 운전할 수밖게 없기 때문"(p121)이라는 일반론적인 (매우 슬픈) 인식이, 특정 케이스에까지 확장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대체 왜! --- 이와 같은, 일종의 자기 비하, 또는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의 피해 의식과 같은 것들이 대체 왜! 흑인들의 사고에 깊숙이 뿌리박혀있게 되었나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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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이 이 토지를 개척한 거야. 할아버지들은 인디언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아버지는 여기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잡초나 독사들과 싸웠단 말이야. … 다음에 우리가 태어난 거야. … 애들도 여기서 태어나고. … 이런 우리 땅이야. 우리가 측량을 해 우리 손으로 부친 땅이야.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죽어갔어. 쓸모없는 땅이라 하더라도 역시 우리들 것이요. 그게 정말 소유권이지, 숫자를 적은 종이 따위가 소유권이 아니란 말이요.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중, 홍신문화사, 2012.

1930년 대공황 시기를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라 불리우는 「분노의 포도」가 보여주고 있는, 미국 백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실체입니다. --- "인디언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란 한 구절로, 백인들의 잔혹한 인디언 말살은 역시나 '자랑스런 서부개척'의 역사로 정의되고 있지요.4 미국이란 땅이 이처럼, 자신들의 소유라 생각하는 백인들은, 그 땅에 처음으로 건너왔던 영국 청교도인들, 그리고 그 후 뒤를 이었던 폴란드와 이탈리언들, 그리고 유태인들, 이 모든 백인들은 예의 그들만의 '용광로'속에서 한데 어울어져 살아 왔거늘, 피부색이 검은 흑인들만큼은 결코 자신들의 그 '용광로' 속에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이유 역시 "인디언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와 동일하게, 앞뒤의 논리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피부색이 다르다라는, 일종의 폭력적 당위 뿐입니다. 그리하여, 


"흑인은 … 교수, 의사, 변호사, 정치가 따위의 전문직은 물론이요, 공무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흑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육체노동, 청소부, 점원, 구두닦이, 호텔 종업원, 하인 따위의 하찮은 직업뿐이었다."


-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중 p312, 푸른나무, 1995.

소설은, 흑인으로 태어났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무 껍질의 총알구멍을 만져 보면서, 열 개째 나이테 부근에 파묻힌 달팽이처럼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p61)와 같은 체념이 또한,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당연시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인 학교에서 시행되는 직업 설명회, <진로의 날>에 그들 앞에 펼쳐지는 선택지들이란 게,


광부, 골프공 주워오는 사람, 바구니 제작자, 도랑 파기 기술가, 제책가 (p212) …… 쓰레기 수거인, 가석방 담당관, 디제이, 백업 래퍼5(p214)

물론, 이러한 직업을 가진다라는 것 자체를 차별이라 말하는 건 아닙니다. 허나! 이러한 보잘것 없는 직업들로만 선택지가 구성되어 있다라는 건6, 명백히 부인할 수 없는 차별이지요. 그냥 흑인들은 'destined to do'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는 사회적 강요는, 뭐라 변명을 하더라도 '폭력'임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백인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문화생활의 혜택을 누릴 어떠한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흑인노예들은 모든 면에서 '확실히' 백인보다 열등했다. 따라서 흑인 자신들도 스스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세뇌되었다. 


- 유시민, 위의 책 p310

백인들 또한, 그처럼 세뇌되어있는 흑인들까지도 증오하는 건 아니다라는, 일종의 친절7을 베풀기도 합니다. 우리 백인들은 흑인을 '평등'하게 생각한다, 이것 봐라, 드라마 속에서 드디어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와 데이트도 하지 않냐,라 말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허용한 소위 '평등'이란 건 그저,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과 데이트를 할 때면 늘 출연진 중 가장 못생긴 백인 남자가 우리 자매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p376)

의 수준일 뿐이고, 이 소설은 --- 이와 같은,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p363)란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 짧지 않은, 게다가 저에겐 심히 낯설기만 한 과정을 밟아오지요.8


"당신이 까맣든, 하얗든, 갈색이든, 노란색이든, 붉은색이든, 초록색이든, 자주색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하죠.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편견 없는 태도의 증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를 자주색이나 초록색으로 칠한다면, 엄청 화를 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피고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피고는 모두의 색을 다시 칠하고, 이 지역 사회를 자주색과 초록색으로 칠하며 누가 평등의 존재를 아직도 믿는지 확인했습니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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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평등은 이루어졌습니까? 흑인 대통령이 취임한 사실을 과연, "미국이 마침내 빚을 청산한 것 같다"(p395)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 'sellout'이라 불리우는, 그러나 결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는, 주인공 Me의 생각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나의 상대적 행복이 여러 세대가 고통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노예선을 타고 온 어느 조상님이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하는 사이, 자기 똥물에 다리를 무릎까지 담그고 잠시 쉬는 사이, 언젠가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와이파이를 쓸 수 있을 테니 숱한 세대를 걸쳐 살인과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과 극심한 질병을 겪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가 그 와이파이가 속도도 늦고, 신호도 불안정하다면. (pp297~298)

주인공이 표현하고 있는 '늦은 속도와 불안정한 신호의 와이파이'란 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9해가며 이루어 낸 약간의 성공이며, 하지만 그 약간의 성공이란 것 마저 기실 "자신이 흑인에게 '양보할' 뭔가가 있는 듯한, 또는 흑인이 그들의 흑인 특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줘야 할 것 같은"10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의무감스런 동정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란 거죠. 그리하여 결국 이 책은, 


"백인은 다른 사람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못된 뱀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들에게 뱀을 피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 말콤 X  


- 유시민, 위의 책 p308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흑인 전용 코미디 클럽의 무대에 선 흑인 코미디언의, 백인 관객을 향한 "어서 꺼져! 이건 우리 거라고!"(p392)란 호통이 상징하고 있는 바, 그러니까 --- 흑과 백의 '통합'11이 아닌, 각자의 '분리'12를 주장합니다.13 그리고, 


오래 전 유시민의 책으로부터 배웠던 바, 「블랙 라이크 미」가 보여주었던 백인들의 뿌리깊은 편견, 얼마 전 읽었던 「빌러비드」, 그리고 이 소설 「배반」, 이들 책으로부터 저 또한, --- 상처의 치유가 없는 반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상처의 치유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결국엔 '분리'가 옳은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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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노예 폭동이 수요일에 일어난 건 전통적으로 목요일이 채찍질하는 날이기 때문 … 이 나라에 첫 발을 디딘 후로 계속 그랬어요. 누가 잘하든 잘못하든, 누군가는 채찍질을 당하거나 심문을 당하거나 무기가 있는지 검문을 당했어요. 그러니 목요일에 어차피 맞을 거면 수요일에 얼간이 짓을 하는 게 낫겠지요. (p111)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입니다. --- "나는 노예예요. 그게 나예요. 그게 내가 타고난 역할이에요. 어쩌다 배우가 된 노예. 하지만 흑인으로 사는 건 메소드 연기가 아니예요"(p112)라 말하는, 늙은 흑인 호미니를 바라보며 주인공 Me가 하게 되는 다음의 생각은, (흑인이 아닌, 흑인의 피가 섞여 있는) 혼혈 대통령을 선출해 '준' 것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참으로 오래되어, 어찌 지워낼 수 있을까 싶은, 「빌러비드」의 주인공, 세서의 등에 각인되어 있는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와 같은 상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내가 살아 있는 한, …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수 세기 동안 억압된 분노, 수십 년 동안 드러내지 못한 비굴함에 종지부를 찍으며, 내 무릎을 끌어안으면서도 더 세게 때려 달라고 사정하던 것을. 그의 검은 몸이 환희의 신음과 함께 내 채찍의 무게와 소리를 반기던 것을. 호미니가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역사 속의 모든 노예들이 그랬듯이 나를 기소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것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p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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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가는 곳마다 온통 '민권운동의 진전'이란 말을 떠들고 있다.  … 4백 년 동안이나 백인은 우리의 등에 긴 칼을 꽂아 두었다가 이제 그 칼을 반쯤 뽑기 위해 흔들어 대고 있다. 우리더러 감지덕지하라고? 어림없는 말이다! 만약 그 칼을 다 뽑아 낸다 해도 상처가 남을 판이 아닌가!" - 말콤 X


- 유시민, 위의 책 p323

호미니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그때 그시절에 대한 일종의 향수는 분명 --- 역사가 남겨놓은, 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으며, 지워낼 수도 없을, 너무도 아픈 상처인 것이죠. 역사가 무엇일까요? 오로지 '미국의 흑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뭔가, 이 시대의 일본 정치인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이 책이 말해주고 있는 '역사의 정의', 이 하나만으로도, 


읽어내기에 참으로 난해한 이 소설은, 이 소설을 읽어낸 것에 대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게 해주네요.


우리는 역사를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지를 넘겨 버리면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적힌 종이가 아니다. 역사는 기억이며, 기억은 시간과 감정이자 노래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p159) 

 ...금연 214일째



 미국 역사 속 흑과 백 : 「블랙 라이크 미」, 「빌러비드



  1. 포이와 마페사.
  2. Urban dictionary.
  3. 또한 이런 것을 가리켜 '블랙유머'라 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4.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나라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백인들이 원주민을 철저히 말살하고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 미국 건국사는 뒤집어 말하면 인디언 말살사 그 자체다. 원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그들을 황량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으며, 그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참혹하게 쳐부순 학살의 역사를 백인들은 자랑스런 '서부개척'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미국은 출발부터 전례 없는 인종차별주의 위에서 건설되었다. 그것은 유색인의 인간적 존엄을 부인하는 백인지상주의 사상이었다." -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중 pp308~309, 푸른나무, 1995.
  5. "모든 흑인 남성은 자신이 세상 누구보다 이 셋 중에 하나는 잘한다고 내심 생각한다. 농구, 랩, 농담."(p278)
  6.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은연중에 그들에게 하나의 일상이 되어가지요. --- "흑인으로서의 삶에 존재하는 여러 서글픈 아이러니 중 하나는, 온갖 시시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모임을 모두 <행사>라고 부르는 것이다."(p131)
  7. "사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자기가 흑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흑인이 자기 '분수'를 알고, 그에 걸맞는 요구를 고분고분하게 내놓는 경우에는 그것을 환영하고 격려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증오한 것은 흑인 일반이 아니라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분수 모르는 흑인들'뿐이었다. 따라서 백인들은 이같이 '불순한 흑인'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흑인 민권운동의 요구들을 일부 수락했다. 이것이 이른바 '상징정책(tekenism)'이다." (유시민, 위의 책 pp 320~321)
  8. "운 좋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하루 24시간 컨버터블 자동차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 (p309) --- "하루에 스키장과 해변, 사막에 모두 갈 수 있는 곳"(p165)인 로스엔젤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저에게도 몇몇 낯익은 지명, 도로번호, 식당 이름 등이 등장하고 있는 소설입니다만 아무래도, 컨버터블 자동차의 앞자리에 앉아보지 못한 저이기에, '운 좋은 소수의 사람들'의 삶이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이 작품은 제게, 그러니까, 미국인이 아니고, 캘리포니아에 살지도 않으며, 결정적으로 흑인이 아니기에, 역자의 각주로도 채워지지 않는/채워질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더랬습니다. 심지어! "난무하는 블랙 유머"가 있다는 인터넷 서점 MD의 소개에마저도 전혀 동의할 수가 없어요. 뭐, 이 소설을 가리켜 "노예 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이 현대에 다시 도입되는 이야기를 담았다"란 소개글엔 그저 어이가 없을 뿐.
  9. 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중, 살림, 2009.
  10. 존 하워드 그리핀, 위의 책.
  11. "통합은 강제할 수 없다. 통합하고 싶은 사람들이 통합하는 거지. … 이곳 미국에서 '통합'은 은폐일 수 있다. … 문제는 통합이 자연스러운 상태인지 부자연스러운 상태인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p229)
  12. "우리는 …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는 '격리'와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 흑인들이 백인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언제가 백인에게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할 것이며, 백인은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면서 언제든지 우리를 '격리'시킬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유시민, 위의 책 p322.
  13. 「블랙 라이크 미」를 통해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 역시,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라며, 흑과 백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지요. 헌데 그 책의 출판사는 어처구니 없게도, ---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꿈꾸는 통합과 평등"란 문구의 띠지를 붙여 그 끝모를 무지함을 선전하기도 했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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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1865년에 승인된 수정헌법 13조는 미국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철폐하였다.

3년 후에 수정헌법 14조는 …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였다."1


···


"흑인이 억압당하는 땅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려 했다. 

……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2 

 

노예제도가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누군가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노동을 강제한다와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결국 흑인 노예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폐지는 (원래부터 인간이었던) 흑인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유의 대상에서 시민으로의 변화"3라는, 도무지 새로울 수조차 없을, 검은 피부색을 가진, 오로지 그들에게만 주어졌었던 과정을 거쳐냈!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지요. 이 소설 「빌러비드」는, --- 그 당연한 것을 오랫동안 누리지/알지 못했던, '노예제도가 폐지된 때로부터 십여 년 후'4라는 시간적 공간, 즉 여전히 자신들이 '소유의 대상'이었던 시절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한 사람들의, 차마 '가슴 아픈'이란 형용사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참혹한5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베이비 석스가 사랑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알고 지낸 사람까지도 죄다 도망치거나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면 다른 집에서 빌려가거나 임대되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사오거나 비축되거나 저당잡히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도난당하거나 잡혀갔다. … 그녀가 인생이 더럽다고 한 것은 체스 말에 그녀의 자식들이 포함된다고 해서 체스 놀이를 멈추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p46)

……………………………………………………………………………… 


남북전쟁 (American Civil War)이 끝났던 1865년, (이것을 '남북전쟁의 결과'라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예제도는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발표되었던 <Strange Fruit>라는 노래, 더 나아가, 근 백여 년이 흐른 후인 1959년 출간되었던 「블랙 라이크 미」라는 책을 통해서, 예의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한다/살아간다라는 것은 여전히, --- "자유를 찾는 일과 자유를 찾은 자신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별개 Freeing yourself was one thing ; claiming ownership of that freed self was another"(p161)라는 관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걸, 알 수 있었었지요. 


백인들에게 노예인 흑인은 그저, 소유권의 대상일 뿐인 '물건', 그러나 생명이 있기는 한, 그러니까 일종의 '가축'의 수준으로 인식되어 왔더랬습니다. 이는 소설 속에서 --- 남자 노예들의 이름을 그저 "폴 디 가너, 폴 에프 가너, 폴 에이 가너"(p26)와 같이, 주인의 성(family name)을 따르되, 그 이하에선 A·B·C로만 구분되어 불려지는 존재라든가, "사람들이 널 뭐라고 불러? What they call you"(p63)에서 보여지듯, 흑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관습6, 심지어! 


"거기 누워서 새끼를 낳을 거야? What you gonna do, just lay there and foal7?"(p63)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흑인 여성의 출산을 암말의 출산과 동일시하는 백인들의 표현 등으로부터 확인되어지고 있지요.8 그리고 이러한 백인들의 시선은9 그들이 망아지나 송아지를 시장에서 사고팔 듯, 흑인 어린 아이를 시장에서 매매하는 행위마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까지 확장됩니다. 그리하여/그 반면 흑인들에겐, ---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 - 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 곳에 도달하는 것 to get to a place where you could love anything you chose - not to need permission for desire well now, that was freedom"(p269)로 정의(define)되는 '자유'라는 게 무려! --- risky하고 dangerous한 것으로까지 인식되게 되지요.       


위험해, 폴 디는 생각했다. 정말 위험해. 한때 노예였던 여자가 뭔가를 저렇게나 사랑하다니,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이 자식이라면 더욱더. 그가 알기로는 그저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걸, 그저 조금씩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대상의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포대에 처넣는다 해도, 그 다음을 위한 사랑이 조금은 남아 있을 테니까.(p82) Risky, thought Paul D, very risky. For a used-to-be-slave woman to love anything that much was dangerous, especially if it was her children she had settled on to love. The best thing, he knew, was to love just a little bit ; everything, just a little bit, so when they broke its back, or shoved it in a croaker sack, well, maybe you'd have a little love left over for the next one.

이 작품 「빌러비드」를 통해, "흑인 여성 작가"(p462)10  모리슨은, 그 risky하고 dangerous한 '자유'를 원했던 인물, --- 쾌락을 느끼는 것마저가 죄악이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미소조차 지을 수조차 없었던 과거11, 그리고 여전히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증식하는 자산"(p376)으로서 작용하여야 하는12현재로부터,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고 싶다, 나의 자식들만큼은 그러한 세상에 살게할 수 없다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세서(Sethe)라는 인물을 통해, "이 나라 흑인 여성들이 겪은 전혀 다른 역사"(p451)13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부가 희기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하기 위해 흑인의 인격을 모두 빼앗을 수 있었다. 일을 시키거나 죽이거나 사지를 절단할 뿐 아니라, 더럽혔다. 완전히 더렵혀서 더는 자신을 좋아할 수 없게 했다. 완전히 더럽혀서 자기가 누군이지 잊어버리고 생각해낼 수도 없게 했다. 그녀와 다른 이들은 그 일을 겪고도 살아남았지만, 자식만큼은 절대 그런 일을 겪게할 수 없었다. … 머리도 발도 없이 표시만 남은 채 몸통만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이 내 남편인지 폴 에이인지 고민하는, 그런 꿈으로조차 꿀 수 없는 꿈들은 더 이상 안 된다. … 그리고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딸의 특징을 공책의 동물적인 특징 목록에 적을 수는 없었다.(p409) 

·

·

·


"과거의 삶과 관련된 언급치고 상처가 아닌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것은 고통 혹은 상실이었다."(p102)

 

"젊은 엄마 마거릿 가너 이야기 … 노예로 살다 도망친 그녀는 주인의 농장으로 자식들을 돌려보내느니14 차라리 그중 하나를 죽여버린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도 죽이려고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p452)15 ---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의 원형이 된 실화이며, 이 소설의 주요한 줄거리라 말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 그리고 현재가 너무도 고통스러우며, "과거의 삶이 아닌 삶"(p78)로 정의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마저/조차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 "그 애를 기다리고 있는 과거로부터 그 애를 지키는 일"(p78)의 유일한 선택지가 "자기 자식의 목에 톱질을 해대는"(p308) 것 뿐었일 때, 과연 우리는 그 행동에 대해 비난 혹은 단죄할 수 있는 것인가, 그 행위를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주저해야 하는가, 씨발! 그럼 그들(흑인)에게 그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이들(백인)의 과거 행위에 대한 현재의 태도는 당췌 어떠하여야 하는가...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 쉽지는 않겠으나16 만들어볼 수 있겠지요.  

……………………………………………………………………………… 

너도 알 거야.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잖니. … 자리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어. … 단지 내 재기억17 속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말이야. (p67)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부가 검은 색인 채로 태어났다라는 이유만으로,18 "참을 수 있는 만큼"(p386) 참아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어제'를 살아온, 차마 "기억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p455)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한, 자신의 이름을 '빌러비드 Beloved'로 알고 있었던, 그러나 스스로는 사랑받지(beloved) 못했었다라 기억하고 있는, 한 '(피부가 검은 색이었었던) 영혼'의 아픔에 대하여, 이처럼, '영혼'이란 것까지 불러낼만큼 (<각주 17>의 'rememory'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아픔이란 걸,) 잊어내지 못하는/잊혀지지 않는/잊을 수가 없는 아픔(이란 것)에 대해 --- 제가 어찌, 어림으로라도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까만,  

"내가 …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19 I will call … her 'beloved', who was not beloved." (로마서 9장 25절)
 
"뼈아픈 인간 역사에 대한 이야기"(p463)란 게, 2017년 현재, 전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나지 않는 폭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미국에서 일어났었던, 결코! 꾸며낸 일들이 아닌,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20이 안겨주는 섬뜩함이란 건, 갑자기 싸늘해진 2017년 11월 12일의 날씨의 매서움만큼, 참으로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작가 한강의 다음 질문이, 이처럼,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일 수 있을거란 생각, 전 정말로... 해보지 못했었었었거늘,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한강, 「소년이 온다」중 p134, 창비, 2014.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금연 208일째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카인」 · 「눈 뜬 자들의 도시

- 귄터 그라스 (1999) : 양철북

- 존 쿳시 (2003) : 추락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 : 마지막 목격자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 : 남아있는 나날」 · 나를 보내지 마 



 ​전문적으로 번역의 질(quality)를 논할 만한 수준은 미처 아닙니다만, 이 작품의 번역이란 게, 디테일하게 보아, 적잖은 아쉬움을 안겨주는 건, 아무래도 부인되어질 수 없다라 생각합니다. 한글의 문맥이 이상하다, 대체 이 구절은 뭔 뜻일까? 싶을 때를 위해, (구글의 검색을 통해 얻은) 원문 파일을 첨부하여놓겠습니다.     



 

  1. 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세상을 바꾼 법정」중 p170, 궁리, 2006.
  2. 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중 p14, 살림, 2009.
  3. 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위의 책 p103.
  4. "노예로 육십 년, 자유인으로 십 년을 살며..."(p176)
  5. "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This is not a story to pass on"(p448)
  6. "말뜻을 정의하는 일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 소관이지 정의를 듣는 사람 소관이 아님 definitions belonged to the definers - not the defined."(p313)
  7. "When a female horse foals, it gives birth."
  8.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들에겐 스스로를 인격이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라는 아픔 또한 이 작품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세서, 당신은 두 발 달린 인간이야,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고"(p273)
  9. "뱀이나 곰과는 달리 죽은 검둥이는 가죽을 벗겨 팔 수도 없고 고기로 무게를 달아봐야 한푼 가치도 없다."(p247) …… "하느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넘겨주신 짐승들 creatures God had given you the responsibility of"(p249)
  10. "그녀는 흑인이며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흑인 여성 작가'라는 명칭을 거부하지도 않았다."(p462) --- <해설>중.
  11. "우리 엄마는 재갈을 너무 많이 물어서 미소짓는 얼굴이 되었다는 걸. 웃지 않을 때에도 엄마는 미소를 지었고, 난 한 번도 엄마의 진짜 미소를 보지 못했어. She'd had the bit so many times she smiled. When she wasn't smiling she smiled, and I never saw her own smile."(p335)
  12. "노예는 쾌락을 느껴서는 안 된다. 노예의 몸은 쾌락을 느끼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식을 많이 낳아 주인이 누구든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도 쾌락을 느껴서는 안 된다."(p344)
  13. <작가의 말>중.
  14. "설사 그럴 필요가 없다 해도, 그애에게 설명해줄 거야. 내가 어째서 그랬는지를.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어도 그애는 죽었을 테고, 그애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절대 두고볼 수 없었다는 걸."(p329)
  15. "1856년 1월, 켄터기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의 삼촌이자 노예 출신인 조 카이트의 집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이 집을 포위해 끝내 붙잡힐 지경에 처하자,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고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에 마거릿 가너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 이 재판은 이례적으로 길어졌는데,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간적 이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 아니면 1850년에 발효된 도망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하는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지만 마거릿 가너의 변호사는 그녀를 살인죄로 재판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가너 역시 자신의 행동을 그저 이성이 없는 노예의 미친 짓으로 여기고 관대히 넘기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거릿 가너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pp456~457)
  16. 이 소설의, 소위 말하는 '줄거리'란 걸 추려내기도 역시/예의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산발적인 이야기들의 나열이 계속되다가, 19장에 가서야 그 이야기들이 한데로 엮이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허나! --- 그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독자를 단. 한. 순.간.도. 놓아주질 않으며 폭풍처럼 휘몰아 이어진다라는...
  17. rememory : ①combination of the words "memories" and "remembrances"; thoughts of the recent or long past. ②To remember a memory (Urban Dictionary)
  18. 소설 속엔, 흑인이 백인을 "피부 없는 사람들 men without skin"(p354)이라 묘사하는 구절이 있기도 합니다.
  19. 작품의 앞에 인용되어 있는 성경구절입니다만, 한글은 '개역개정판'의 번역을 옮겨놓았습니다.
  20.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중, 비룡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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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한구석에 - 상
코노 후미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1

「세계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을 보면, --- 거의 모든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게 대부분 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의 한 구절마냥, 그러니까 별 것 아닌 이유로 시작한 다툼이,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참혹함을 낳아왔었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한 일의 진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 전쟁의 한복판에서 휩쓸리는 민중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국가'라는 실체가 대체 왜 이런 전쟁이라는 행위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알지 못한다,라는 사뭇 허망한 실상이 드러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appearance of fiction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53, 김영사, 2015.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가 '정의'의 편에 서 있노라라는 확신은, 전쟁의 발발 원인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성립되어 왔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속해 있는 국가'를 '정의'로 규정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의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상대편 국가는 '불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그 당시엔 편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도 꼭 친구들은 '넌 어떤 편이야?'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나뉘어 대립해 있던 시절이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라는 남과 북으로, 운동회에선 청군과 백군이, 영화에선 좋은 놈과 나쁜 놈이. …… 소련이 언제 핵을 쏠지 모르고, 북한은 연신 땅굴을 파대는 이 불안한 세계 속에서, …… 정의는 늘 승리했다.  


- 박민규, 「지구영웅전설」중 pp27~28, 문학동네, 2003.

미국과 남한이 '정의'의 역할을 맡게 되는 한, 소련과 북한은 얄짤없이 '불의'의 역할을 이행하여야 하는 것이고, 거꾸로 소련과 북한이 '정의'가 될 때엔 미국과 남한이 '악의 축'이 되어야 하는, 어쨌든 '편'은 갈라져야하고, 그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 없이, '내가 속해 있는 국가'는 정의의 편인 것이고, 그런 나의 국가를 침략한 상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악의 축'이 되는 지극히 단순한 도식이 완성되게 되는 겁니다. 


 

"국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을 '국익'으로 파악한다. 국가주의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며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애국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는 이런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국가와 나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 하승우, 「아나키즘」중 p143, 책세상, 2008.

그렇지않아도, "집단주의적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국가가 침공당하는 것은 곧 나와 나의 가족이 공격을 당하는 것과 동일한 상황으로 인식되지요. 나와 내 가족을 지키겠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은 이제, "온 힘을 다하고 다하여 귀한 사명을 이루리라"라는 스케일의 확장을 가져 옵니다. 이제부터 나의 저항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닌, 국가의 보존을 위한 숭고한 행위로 격상되는 것이죠.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언제가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p165~167, 민음사, 2015.

예를 들어, 군수 물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조차 "부지런히 애쓰는 기술에 쌓이는 것은 세계 평화의 빛이다"란 환상을 심어주게 되면, 그리고 그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선,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저 놈들(미국)을 무찔러야 한다라는 한 마디가 거기에 더해지게 되면, 


① 폭격을 하는 미군의 비행기를 향해 "그런 폭력에 굴할 줄 알아?"란 다짐을 하게 되는, 즉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이 아닌 미국이라는 일방적 인식이 자리하게 되는, 이제 더 이상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별해보려는 의지 자체가 소멸되어지는 단계가 되고, 

② 일본의 패배를 확인시켜주는 천황의 일명 '옥음방송'을 듣고는 "이 나라에서 정의가 날아가버린다"라는 기괴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에 슬퍼하고, 그 슬픔이 격해져 어쩌면, 자신의 국가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혹은 애초부터 왜 그러한 전쟁을 했었던가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될 수도, 그리하여 그러한 민중들의 자각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전쟁'이라는 물리적 폭력이 자리할 수 없게될 수도 있겠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전히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관념이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세뇌가 있어왔기 때문이겠죠.    

"국가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여 대량의 전사자를 낼 경우, 국가는 그 전사자를 위한 -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그리고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 숭고한 희생이었다는 식으로 성별하고 이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추모하며 찬미하는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깊은 정신적 타격을 입은 유족들을 위로하고 감사하고, 위무한다. 유족이 가슴에 품은 전사의 비애와 공허감, 애절한 심정을 국가는 그 같은 '국가의 이야기'로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국민들이 유족이나 전사자들에게 공감함으로써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 역시 그들을 계승해야만 한다'는 '자기희생의 논리'를 만들어낸다그러면 전쟁을 거듭 반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선다."(p117) …… "(이처럼) 전쟁기념사업을 통하여 위로의 기능이 작동하고 '명예로운 전사였기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변한다."(p167)


-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중, 책과함께, 2008.

…………………………………………………………………………………… 

전쟁의 현실이란건, 현실 속 전쟁이란 건, 군인에게건 민간인에게건, 참혹함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참혹함은 전쟁의 폐해를 말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전쟁이란 행위의 멸절을 위해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 차원에서만의 참혹함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 국가가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당하는 전쟁을 이야기하게 되면 당연히, '동정'은 폭격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로 향하게 되고 이는, 세계 2차 대전 속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정당성까지를 부여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자신들을 2차 대전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게 됩니다. 물론!


이 만화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라 단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 전쟁에 대한 조롱이나 국가의 거짓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극기가 나오는 장면 바로 옆에 쓰여진 "폭력으로 복종시켜 온 건가. 그러니까 폭력에 굴복하는 건가. 그게 이 나라의 정체인가"란 주인공의 독백 등은 이 작품이 전쟁에 반대한다라고, 제국주의 일본의 행태에 대한 일종의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라 읽고 이해할 수는 여지를 없지않아 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단...


"과거를 잊어버리는 인간은 악을 낳습니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마지막 목격자들」중 p417, 글항아리, 2016.


뿐만이 아닌,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것 또한 악을 낳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그런 작품으로 이해될 여지가 훨씬 더 크다라, 그리고 그 점에 바로 이 작품을 읽는 의의가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물론 저에겐 후자로 받아들여졌...) 이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동명의 영화가 이런 저런 상, 심지어! <제19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국제경쟁 장편부문 대상>까지 수상하였다 하는데, 정녕... '과거를 잘못 기억하게 하는' 우()가, 영화에서만큼은 여하히 극복되어지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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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사실 주류란 말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주류에 속한 사람, 적어도 자신이 주류에 속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 주류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대다수는 주변부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류라는 것은 많은 경우 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2권, <해설>중, p293)

​'주류(mainstream)'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어찌되느냐란 문제에 우선 답해야하겠지만, 그저 누구나 직관적으로도 상정할 수 있을,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 … 세()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1의 반대 개념 정도로서의, 그런 '주류'를 가정한다 하여도, '자신이 주류에 속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란 역자 정영목의 지적은, 예의 '일반적으로' (라는 전제 하에) 옳다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러했었고,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기에, 단지 현재뿐만이 아니라 적어도 몇십 년 이전부터, 이 땅 대한민국에서는, '주류'로의 편입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명문대학에의 입학이란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바라는 바에 속해있어왔겠죠.2 그러나! 

"시골 아이는 혼자 대학을 가지만, 외고 출신 애들은 부모의 배경과 재력 등을 모두 가지고 간다"3라는, 이건 당췌 어찌 나의 노력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4 또 다시, '주류'가 되고자 하는 '비주류'의 욕망/노력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뭐, 그러하기에, 당신이 이내 '헬조선'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이 때의 '헬'이란 접두어가 딱히 '조선'이란 명사의 앞에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게, 

"학생 선발의 주요 근거 중 하나인 SAT 점수는 학부모의 경제적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합격한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사기극일 뿐." (미시간 대학 닐 게이블러 교수)

- 강준만,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중 p103, 인물과사상사, 2013.

​사람 사는 건,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다라는 건 이처럼, '인생, 거기서 거기!'란 일곱 글자를, 딱히 부정해낼 수 없어보이기도 한 겁니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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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드'는 미국의 꿈을 내면화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5과 결혼까지 한 인물로, 유대인 사회의 우상이었던 사람이다.6 그런 그의 삶이 파국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미국의 목가」의 중심 부분을 이룬다. …… 결국 스위드의 비극은 한 고결하고 성실한 인간이 곡진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마는 이야기로, 유대인의 비극이자 미국인의 비극이자 인간의 비극이 된다." (<해설>중, pp294~296)

명백한, "미국 역사 수업"(2권, p114)과도 같은 문학 작품입니다.7 그러하기에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도 아닌 저로서는 단지/그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인간의 비극'에만 공감할 수 있다라는,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론, 작가 필립 로스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그 무언가의 2/3를 일단 제껴놓고 들어가고 나와야 한다라는, 여하히 극복해낼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주어져 있다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제목에서부터도 어쩌면, 그러한 '배제(exclusion)'를 전제하고 있어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 「미국의 목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작가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persona)로 볼 수도 있겠는8, 네이선 주커먼이라는 작가의, "미국 사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결코 '주류'에 끼지는 못하는 유대인"(2권, p291)인 주인공 스위드의 한 삶에 대한, 짧지 않은 기록을 통해 결국엔.


누가 비극에, 그리고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고난에 대비가 되어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지 않다. 비극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비극 - 그것이 모든 사람의 비극이다. (1권, p140)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유대인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는 그런, 그저 '(모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비극'에 관한, 또한 그 중에서도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비극'을 이야기를 해주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이란 것이,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저란 독자에게도 예의, 감탄어린 공감이란 결과물을 안겨주는 것이겠지요.  

…………………………………………………………………………………

 

태어나 보니, 나의 부모가 '주류'의 일원인 거고, 그리하여 거의 당연히/자연스레 나 역시 그 '주류'로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에겐 딱히, 그 '주류'란 개념에 대한 집착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제가 은근 자주 쓰는 표현인, '세상이란 게, 그리고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기에,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니까요. 허나! 


우리, 어린 우리가 가난, 무지, 질병, 사회적 불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무엇보다도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동체적 결의가 있었습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뭔가가 되어라!  공동체 전체가 우리에게 무절제한 행동으로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끊임없이 호소했으며, 기회를 잡고, 유리한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1권, pp70~71)

'주류가 아님'이라 하는 주어진 조건, 태어나진 조건대로 계속 살아가서는 안된다란 가치관을 주입/강요받으며 자라난 이들에게 '주류의 일원 되기'란 하나의 목표이며,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생의 과업 같은 것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진, 유대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류 '미국인'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닌 이가, 자신의 부모 세대로부터 요구받았던 바인, "끼고 싶어사는 동시에 밖에 있고 싶어하는,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1권, p38),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9 시대적 모순까지를 --- 작품 속 주인공 스위드는, 거의 완벽하게 성취해 냅니다. 그렇게, 그것을 성취해 내었기에 또 다시, 

학교의 영웅으로서 짊어졌던 책임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너는 영웅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거기에 따르는 규범이 있다. 너는 겸손해야 한다.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남을 이해해야 한다.10 (1권, p129) 

'뭔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공동체적 결의를 훌륭하게 완성해 낸, 청소년기의 스위드에게, 그러한 훌륭한 성취가 이내, 하나의 천형(天刑)이 되어 이후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겁니다.11 그리고! --- 이제 스위드는 예의, '세상이란 게, 그리고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란 착각을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말지요. 


스위드는 평생 이렇게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다 그리는 능력을 유지했다. 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었다.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조화를 이룬다고, 조화를 이루어 바로 그렇게 하나의 전체가 된다고 느끼니, 다른 모든 것도 그렇게 된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1권,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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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12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2권, p288)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주류가 아닌 상태에서 시작하여, 당당히 미국 사회 주류의 일원이 된13 스위드가, 단지 완전히 다른 두 세대 - 비주류로 태어났고 주류가 되기 위해 고생을 했었던 부모 세대와, 태어날 때부터 나름 주류로 태어난 자식의 세대 - 사이에 위치했었던 스위드가 너무도 단순하게, 그저, 다른 모든 것도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었기에, "미국의 미래가 견고한 미국의 과거로부터 그냥 저절로 펼쳐질 거라고 생각"(1권, p138)했었다라는 것이, 그리하여,


우리가 뭔가를 잊는 것은 단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중요해서일 수도 있다. 또 우리는 각자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패턴, 지문처럼 확연하게 사람마다 다른 패턴에 따라 어떤 일을 기억하거나 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전기(傳記)에 들어갈 만한 사건으로 소중하에 여기는 현실의 조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예를 들어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만 번쯤 함께한 사람에게는 제멋대로 병적인 과장에 빠져 주절거린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1권, pp91~92)

스위드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스위드의 아버지에게는, 더 심하게는 스위드의 딸에게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스위드에겐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들이, 딸에게는 증오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다라는 이 대립14을, 어찌해서든 치유하고 극복해내려 노력한 스위드도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한 인간이었었기에,  


다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시간을 잘라내 만든 관 속으로 들어가 거기거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는 괴로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 그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저녁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해야 했다. 아무리 빠져나가고 싶어도 그는 그 상자 속의 순간에 딱 멈춰버린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세상이 폭발할 터였다. (2권, pp159~1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마찰의 과정에서 생겨난, 그러나 스스로 이겨내야 하다라 강제했었던 마음 속 분노를, 스위드는 끝내 터뜨려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에 정면을 맞서 삶 자체를 파괴하는 딸15, 그리고 아내의 불륜이라는, '그 모든 거짓말같던 진짜'를 기어이, 참아내지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뭔가를 해보려고 점점 더 미쳐간다. (2권, p62)

그렇게, '욕 먹을 것 없는 삶'을 살아내었던 스위드는, 결국, 자신 속에 쌓아두기만 한, 끝내 터뜨려내지 않은 분노를 안고 그렇게 삶을 마감합니다.16 결코, '행복했던'이란 수식어를 받을 수 있는,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의 목가"(1권, p139)를 누릴 수 있었던, 그런 삶은 아니었던 것이죠. 

………………………………………………………………………………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어쩌면 사람들에 관해서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 그래 그건 정말 복받은 거다. (1권, p62) 

소설의 초반부에 작가는 이미,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이란 문구를 통해, '사실을 그렇게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진짜같던 거짓말>17이 결국, "그 모든 거짓말같던 진짜"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뒤늦게 우리는, --- 서로간에 쌓인/쌓여진 수많은 층(layer)의 (자각하지 못한, 그리고 의식적인 것들까지도 포함된) 오해들이 한 편의 "놀라운 소극(笑劇)"(1권, p62)을 만들어 내어왔다는 것을, 그리고 이 소극 속 모든 이들의 삶이란 게 어쩌면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는 삶"18이라 표현되어져도 크게 틀리지 않다라는 거, 막 깨닫게 되지 않니?라는 질문은 그러하기에, 닥치고 '답정너'일 수 밖에 없지 싶기도 하네요. 이처럼,


WASP를 '이방인'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그들이 '이방인'인 유대인들에게, "미국의 목가"라는 게 허용되어 있느냐란 질문, 그걸 생각해 보란 소설로 읽혀지는 것이,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에 대한 가장 무난한 요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은, 이 작품을 한 번 더 읽으면 달라질지 알 수 없으나, 제 독해로는 아마도, 다음의 문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 선택은 없다. (2권, p74)

좀... 잔인,한가요? --;;

뭔가, 비슷한 뉘앙스의 소설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비명을 찾아서」 


...금연 189일째



 

  1. 최윤필,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중 p5, 글항아리, 2010.
  2. "나는 … 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런 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다." - 황석영, 「해질 무렵」중 p50, 문학동네, 2015.
  3.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중 p20, 창비, 2013.
  4. "누군가 말했듯,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된다." - 이문열, 「아가」중 p294, 민음사, 2000.
  5. 이 작품에서 '이방인'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의 원문은 goyim이며, 이 단어의 뜻은 "(유대인들이 가리키는) 비유대인"이라고 합니다.
  6.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인 스위드" (1권, p24) …… "우리 모두가 미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모범으로 추종하려 했던 소년"(1권, p143)
  7. ​"미국이 큰 위기를 맞이한 시기 … 그것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다. 이때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휘말려들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반전운동과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 혁명이 일어나는 등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2권 p295)
  8. "흔히 로스의 소설에서 작가 개인의 이야기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 지적되곤 하는데..." (2권, p291)
  9.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영향력, 그건 절대적이에요. 다른 사람의 요구처럼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 건 없어요"(2권 pp189~190)
  10. "그가 어떤 것을 감당할 수 있고 아내는 감당할 수 없다면, 그가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스위드가 아는, 남자가 남자답게 행동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1권, p304)
  11. "모두가 자기 역할을 알고 규칙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오랫동안 세대 사이에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어왔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자라면서 그 주고받음에 의한 사회화를 경험했다. 그런데 이민자 자손의 성공을 목표로 한 제의(祭儀)와도 같던 투쟁이 하고많은 집들 가운데 보통을 넘어선 우리의 신사 농부 스위드의 성에서 병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렸다.(1권, p139)
  12. 주인공 스위드의 성(family name).
  13. 그러나, WASP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스위드의 지위는 '주류의 변방'이었을 수 밖에 없었기도 합니다. --- "레보브 집안이 미국에서 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그 위에는 늘 더 올라가야 할 계단이 있었따. 이 사람은 바로 그 위의 계단에 있었다."(2권, p115)
  14. "늘 뭔가 미워할 것을 찾았다. 그래, 그것은 그애의 말더듬증을 넘어서 멀리멀리 가버렸다. 미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병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사랑했다. 미국인인 것을 사랑했다.(1권, p311) …… 그는 자신의 피부 속에서 살듯이 미국 속에서 살았다. 그의 젊은 시절의 모든 기쁨이 미국의 기쁨이었고, 모든 성공과 행복이 미국의 성공과 행복이었다. …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1권, p320)
  15. "스위드는 메리가 살아남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 아이에게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든, 부모의 경멸스러운 삶을 폐허 속에 버려주고 가겠다는 아이의 결의 때문에 아이는 결국 자신을 파괴해버리는 참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2권, p52)
  16. "결국 스위드가 죽은 것은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권, p117)
  17. 브로콜리너마저, '골든 힛트 모음집' 수록곡.
  18. 헤르타 뮐러, 「숨그네」중 p341,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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