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9년 : 아무눌라 칸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프가니스탄 왕국 성립, 완전 독립 쟁취,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파키스탄)가 듀랜드 라인으로 분리
#2. 1973년 : 좌익 파르참派가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군주제 종식되고 공화국 성립
#3. 1978년 12월 24일 :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 파르참派를 지원하기 위해 10만 병력을 동원해 침공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4. 1988년 :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5. 1992년 : 반군이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14년에 걸친 전쟁 종식
- 김영미, 「세계는 왜 싸우는가?」, 추수밭, 2011.
아프가니스탄 근현대사의 몇몇 주요 장면들 중, #2의 몇년 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내어야 했었던, 바로 그 공간적·시대적 배경이 보여주고 있는 <외부 세력의 침공 - 극복 - 내부의 새로운 갈등>이라는 sequence는, 그 구체적 주체들만 다를 뿐,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지요. 그러하기에, 혹은 어쩌면 매우 역설적으로!
이 소설의 스토리가 보여주고 있는 '감동'이란 게, 딱히 새롭다거나 커다랗다거나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 누군가를 지배했던 역사를 가진 국가/계급보다, 누군가에게 지배를 당했던 역사를 가진 국가/계급이 훨씬 더 많고/광범위하고, 그러하기에 그 피지배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문학이란 게 사뭇 흔하기도 하여, 마땅히 지녀 건네주어야 할 '감동'이란 것마저, 뭐랄까... '삼시 세끼, 1년 내내 먹어낸 자연송이'를 오늘 아침 밥상에서 또 보게 되는, 뭐 그런 (일종의) 식상함이었다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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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
권여선의 「레가토」 속 오정연에게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시간적 배경이, 하필이면 그녀의 꽃다운 20대 초반과 겹치고 있다라는 건, 결코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주어진 것'이었지요. 이와 같은, 일종의 '선천적 구속(拘束)'을, 일 개인의 차원에서 극복해낸다라는 건, ("사회의 총체적 변화"로 정의되는 '혁명'에 성공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는 개인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습니다만, '노력한다'와 '극복한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그 두 단어가 국어사전에 배열되어 있는 간극의 몇만 배는 될만큼, 많이 다르지요. 이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이러한 '선천적 구속'을 이야기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농공상'의 사회적 서열과 '양반과 평민'이라는 불특정 지배-피지배의 구조를 과거의 역사로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인 저(와 당신)에게, 예의 딱히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갈등 구조이지요.
역사를 극복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파쉬툰인이었고 그는 하지라인이었다. 나는 수니파였고 그는 시아파였다. 그걸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기어다니는 법을 같이 배웠다. 역사, 인종, 사회, 종교 중 어느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p40)
그런데 말입니다 --- 막상 그러한 수직적 계층 구조 속 특정 계급으로, 태어날 때부터 자리되어진 두 사람, 아미르와 하산에게는, 딱히 그러한 '선천적 구속'에 대한 저항감이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아미르가 비록,
하산을 골리는 건 묘한 재미가 있었다. 하산과 내가 벌레를 괴롭힐 때 받는 느낌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가 개미이고 나는 그 위에 확대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p81)
와 같은 (지금의 제 관점에서 보아 '비뚤어진'이란 형용사를 쓸 수 밖엔 없는) 관점에서의 '원래 삶은 이런 것!'이란 생각을, 별 고민 없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p101)라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오는 하산의 반응, 다시 말해 그가 '그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 이러한 '선천적 구속'이 갈등 유발의 시발점이기는 하나, 그 갈등이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어떠한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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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 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의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일 개인의 힘으로는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며 게다가,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저 그 사회의 구조에 별다른 저항감조차 가지지 않은 채 순응하며 살아가는 걸 선택합니다만 --- 불공평하게도, 사회의 구조란 건 일 개인의 인생/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지요.
이기는 건 늘 세상이다. 그게 현실이란다. (p148) …… 공정한 건 아니지만, 며칠 동안, 아니 단 하루에 있었던 일이 인생의 행로를 바꿔놓을 수도 있단다. (p211)
"오랫동안 바라던 것을 갖게 된"(p127) 아미르는, 그 쟁취의 행복함을 잃기 싫었고, 그러기 위해선 하산을 버려야 했습니다. 배반과 음모로, 그렇게 하산을 떠나가게 만든 아미르는, 일견 자책을 느끼지만, 또 한 편으론 "나의 일부는 기뻐하고 있었다"(p157)란 희열의 즐거움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그렇게...
아프간 사람들은 '젠다기 미그자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 캄야브(행)와 나캄(불행), 위기 혹은 카타르시스에 상관없이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먼지가 자욱한 코치(유목민)의 마차처럼, 인생은 앞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는 것이다. (p529)
오늘이 어제를 밀어냈었었듯, 내일이 어느 순간 지금 오늘을 밀어내고야 마는, 그 멈춤 없는 시간이 흐름이란 건, 지난 시절의 괴로움과 행복을 한데 버물리어, 퇴적의 더 아래쪽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들이지 세월의 퇴적층 저 아래에 파묻혀 있는 과거가 아니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지요. 그러나!
"굳이 수용소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는 삶"
- 헤르타 뮐러, 「숨그네」 p341, 문학동네, 2010.
과거에 대한 망각을 영양분 삼아, 마음 속 아픔은 이어지고 또 자라나는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이 나에게 허락해준다는 그 시기란 게, 너무 늦기 전에, 과거에 대한 망각조차 망각되어 마음 속 아픔이란 것 또한 사라져 버리기 이전에, 주어진다라는 건 예의, 뭔가 정말로 소설스러운 행운인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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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라.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이 있어."(p284)
지금의 대한민국에선 기대하기 쉽지 않은,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소설 속 주인공 아미르에겐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의,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기에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p550)라는, 참으로 간단한 대구(對句)로 주인공의 속죄를 허락해주지요. 뭐...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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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거를 마음에 담지 않고 포효하며 흐르는 강이었다. 나는 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내 죄를 바닥에 가라앉히고, 물살이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실어가게 할 수 있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해도, 나는 그 이유만으로도 미국을 받아들였다. (p203)
이게, 결국엔 자신의 죄를 씻어낼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맺음되어졌기에 망정이지, 그 이전에 아미르는 분명히, 자신의 과거와 단절되기를 원했었다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뭐 이것을 가지고 아미르를 비난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자격이 제게 있는지, 저 스스로 자신 없기도 하구요. 헌데 말입니다,
"나의 새로운 삶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험들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짜릿할 수가 없었어요. (p30) …… 나는 그곳이 파키스탄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 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인류 문명의 성취였어요.(p34) …… 나는 뉴욕에 발을 디딘 젊은 뉴요커였어요. … 내 세계는 변하고 있었어요.
- 모신 하미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pp43~44, 민음사, 2012.
역시나, 이 또한 한 편의 소설일 뿐이라 말하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 이슬람 문명을 자신의 기원(origin)으로 하고 있는 두 작가 -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역자가 동일하네요 - 가 보여주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거부감 없는 태도는, 저에겐 매우 당혹스러웠다는 건 꼭, 왜인지 모르겠으나 꼭 적어놓고 싶습니다. 복거일의 다음 질문아닌 질문은 정녕, 만인으로부터 동일한 대답을 이끌어내고야 마는 것일까요?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
-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상권 p54, 문학과지성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