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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한구석에 - 상
코노 후미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1
「세계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을 보면, --- 거의 모든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게 대부분 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의 한 구절마냥, 그러니까 별 것 아닌 이유로 시작한 다툼이,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참혹함을 낳아왔었다,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한 일의 진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 전쟁의 한복판에서 휩쓸리는 민중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국가'라는 실체가 대체 왜 이런 전쟁이라는 행위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알지 못한다,라는 사뭇 허망한 실상이 드러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appearance of fiction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53, 김영사, 2015.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가 '정의'의 편에 서 있노라라는 확신은, 전쟁의 발발 원인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성립되어 왔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속해 있는 국가'를 '정의'로 규정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의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상대편 국가는 '불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그 당시엔 편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도 꼭 친구들은 '넌 어떤 편이야?'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나뉘어 대립해 있던 시절이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라는 남과 북으로, 운동회에선 청군과 백군이, 영화에선 좋은 놈과 나쁜 놈이. …… 소련이 언제 핵을 쏠지 모르고, 북한은 연신 땅굴을 파대는 이 불안한 세계 속에서, …… 정의는 늘 승리했다.
- 박민규, 「지구영웅전설」중 pp27~28, 문학동네, 2003.
미국과 남한이 '정의'의 역할을 맡게 되는 한, 소련과 북한은 얄짤없이 '불의'의 역할을 이행하여야 하는 것이고, 거꾸로 소련과 북한이 '정의'가 될 때엔 미국과 남한이 '악의 축'이 되어야 하는, 어쨌든 '편'은 갈라져야하고, 그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 없이, '내가 속해 있는 국가'는 정의의 편인 것이고, 그런 나의 국가를 침략한 상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악의 축'이 되는 지극히 단순한 도식이 완성되게 되는 겁니다.
"국가가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것이 제도라고 보고 가장 중요한 것을 '국익'으로 파악한다. 국가주의는 공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며 단결과 화합을 강조한다. 애국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의례는 이런 국가주의를 자극하고 국가와 나를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 하승우, 「아나키즘」중 p143, 책세상, 2008.
그렇지않아도, "집단주의적 사고방식과 현상유지의 태도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국가가 침공당하는 것은 곧 나와 나의 가족이 공격을 당하는 것과 동일한 상황으로 인식되지요. 나와 내 가족을 지키겠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은 이제, "온 힘을 다하고 다하여 귀한 사명을 이루리라"라는 스케일의 확장을 가져 옵니다. 이제부터 나의 저항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닌, 국가의 보존을 위한 숭고한 행위로 격상되는 것이죠.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언제가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폭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 pp165~167, 민음사, 2015.
예를 들어, 군수 물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조차 "부지런히 애쓰는 기술에 쌓이는 것은 세계 평화의 빛이다"란 환상을 심어주게 되면, 그리고 그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선,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저 놈들(미국)을 무찔러야 한다라는 한 마디가 거기에 더해지게 되면,
① 폭격을 하는 미군의 비행기를 향해 "그런 폭력에 굴할 줄 알아?"란 다짐을 하게 되는, 즉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이 아닌 미국이라는 일방적 인식이 자리하게 되는, 이제 더 이상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별해보려는 의지 자체가 소멸되어지는 단계가 되고,
② 일본의 패배를 확인시켜주는 천황의 일명 '옥음방송'을 듣고는 "이 나라에서 정의가 날아가버린다"라는 기괴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에 슬퍼하고, 그 슬픔이 격해져 어쩌면, 자신의 국가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혹은 애초부터 왜 그러한 전쟁을 했었던가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될 수도, 그리하여 그러한 민중들의 자각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전쟁'이라는 물리적 폭력이 자리할 수 없게될 수도 있겠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전히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관념이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세뇌가 있어왔기 때문이겠죠.
"국가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여 대량의 전사자를 낼 경우, 국가는 그 전사자를 위한 -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그리고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 숭고한 희생이었다는 식으로 성별하고 이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추모하며 찬미하는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깊은 정신적 타격을 입은 유족들을 위로하고 감사하고, 위무한다. 유족이 가슴에 품은 전사의 비애와 공허감, 애절한 심정을 국가는 그 같은 '국가의 이야기'로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국민들이 유족이나 전사자들에게 공감함으로써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 역시 그들을 계승해야만 한다'는 '자기희생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면 전쟁을 거듭 반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선다."(p117) …… "(이처럼) 전쟁기념사업을 통하여 위로의 기능이 작동하고 '명예로운 전사였기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변한다."(p167)
- 다카하시 데쓰야, 「국가와 희생」중, 책과함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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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현실이란건, 현실 속 전쟁이란 건, 군인에게건 민간인에게건, 참혹함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참혹함은 전쟁의 폐해를 말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전쟁이란 행위의 멸절을 위해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 차원에서만의 참혹함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 국가가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당하는 전쟁을 이야기하게 되면 당연히, '동정'은 폭격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로 향하게 되고 이는, 세계 2차 대전 속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정당성까지를 부여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자신들을 2차 대전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게 됩니다. 물론!
이 만화가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라 단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 전쟁에 대한 조롱이나 국가의 거짓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극기가 나오는 장면 바로 옆에 쓰여진 "폭력으로 복종시켜 온 건가. 그러니까 폭력에 굴복하는 건가. 그게 이 나라의 정체인가"란 주인공의 독백 등은 이 작품이 전쟁에 반대한다라고, 제국주의 일본의 행태에 대한 일종의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라 읽고 이해할 수는 여지를 없지않아 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단...
"과거를 잊어버리는 인간은 악을 낳습니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마지막 목격자들」중 p417, 글항아리, 2016.
뿐만이 아닌,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것 또한 악을 낳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그런 작품으로 이해될 여지가 훨씬 더 크다라, 그리고 그 점에 바로 이 작품을 읽는 의의가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물론 저에겐 후자로 받아들여졌...) 이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동명의 영화가 이런 저런 상, 심지어! <제19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국제경쟁 장편부문 대상>까지 수상하였다 하는데, 정녕... '과거를 잘못 기억하게 하는' 우(愚)가, 영화에서만큼은 여하히 극복되어지고 있는지, 사뭇 궁금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