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대하여 / 박영근
바람 부는 공단거리 해종일 쏘다녀도
아는 이 한사람
만날 수 없고
옷 벗은 광고선전지만 날아와 발등을 덮고
지친 내 그림자가 기대고 선
공장 담벼락엔
찢겨진 낡은 포스터
저물어 역전거리에 나가
싸구려 노래테이프를 파는 내 친구
절단기에 잡아먹힌 헐렁한 팔소매를 끌고
소줏집에서 흰소리를 치다
돌아와 눕는 밤
마음 밑바닥 싸늘한 강판엔
옛말들 쇳가루처럼 쌓여가고
어리석은 마음이 그를 생각한다
악기 공장
닫힌 철문 앞에서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밤이면 노동자상담소 졸고 있는 눈들을 깨워
분필을 잡는 그를
내달리는 아이들 쌍소리에 골목이 툭, 툭 꺾이고
행길 건너 돌아앉은 고층아파트
애드벌룬에 입주예정 날짜를 띄우고 있는 재개발구역
국밥과 소주를 파는 그의 아내
막김치처럼 헤픈 그 웃음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잠은 오지 않고
하릴없이 묵은 소설책 갈피를 뒤적이는
한밤
돌아볼 옛날도
훗날도 없는 텅 빈 시간
답답한 마음이 골목엘 나와
외롭게 제 발등을 비추고 있는
보안등 불빛을 본다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