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댓글에서 서친으로 계시는 오거서님께서 풍류를 언급하셨더군요. 네, 풍류라는 단어가 인이 박히듯, 못이 박히듯 꼽힙니다. 한문으로는 "風流 : 바람의 흐름"이라고 하죠. 즉, 자신의 삶을 유유히 부는 바람에 태우고 순응하며 삶의 시간으로 흐른다는 뜻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악착같이 애를 써가며 바람을 극복하는 삶이란 것도 물론 있겠지만 종국에는 이 우리 삶이란 결국은 부는 바람의 시간 앞에서 꼬꾸라질 수 밖에 없는 절대값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스를 수가 없죠. 그래서 줄였다 늘였다 하는 기계, 타임머신 같은것이 현실적으로 없겠지요. 풍류를 응용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의 시간 흐름일 것입니다. 이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이 순응하고 시간에무리 없이 타고 넘는 것이겠지요. 이는 결국은 노장사상의 가르침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는 평소 알고 지내며 안부를 여쭙는 누님 친구분이 암으로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목장을 치르고 떠나보냈다고 누님이 소식 전하더군요. 30년 지기의 친구를 보내야만 하는 마음이야 어떨지는 충분히 느끼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제는 가을의 전설이란 음악이 라디오를 통해 흐르고 있더군요. 네 눈물도 덩달아서요. 그래서 시와 함께 포스팅하게 된 이유였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한 분을 떠나보내고 나니, 또 악몽 같은 소식이 연이어 들려옵니다. 국민학생 때 삼촌 댁이 부산 동래에 있어서 방학 때만 되면 부산으로 놀러 갔고요. 어릴 때 함께 놀 친구도 없던 나는 사촌 형님을 무척 따랐습니다. 형이랑 노는 게 아주 좋았고요. 자주 볼 수 없으니 형님에게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 있을 정도로 철썩 달라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싫은 내색도 없이 돌아다녀 주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 형님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형님과 함께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았던 그런 추억이 공유되어 많이 쌓여 있었던 터라 형님과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친형님 이상으로 진배없거든요. 그런 형님은 평생 다녔던 회사에서 퇴직하고 이제야 자신의 시간으로 삶을 가꿀 두번째 인생의 시간을 가지려는 찰나였습니다. 경북 청도에 땅도 구입하고 장차 전원주택이라도 올리고 나서 가족 모두 초대하겠다고 지난여름에 뵀을 때 얼마나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지 모습이 선하게 기억납니다. 지난 추석 때였습니다. 매번 벌초하러 올라오셨는데 이번엔 동생들에게 미안하다며 바빠서 못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바쁘시면 바쁜 거 처리하셔야지 너무 걱정 마시고 일 보시라고 했습니다. 저야 사촌 동생이 있으니 함께 하면 될 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형님이 징후가 상당히 좋지 못한 부위의 암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아직 환갑도 아닌 나이에, 벌써 라니 어찌나 막막하던지요. 무슨 말로 위로랍시고 건넬 수 있을까? 그저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해필 이 가을에... 매년 꼬박꼬박 빠짐없이 가을에 벌초라는 핑계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가을이었는데 이번 추석 때는 뵙지를 못한 이유가 아픈 것이었다니 전혀 의문조차 가지질 못 했던 것에 대해 아 눈치가 이렇게 없었나 싶었습니다. 그러데 왜 이런 사정이라고 말도 하지 않았는지. 지금 괜히 걱정 끼치니 마니, 그런 문제가 아닐 텐데요.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무력감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손에는 힘이 자동으로 풀리고 눈동자는 초점을 맞춰지질 않을 만큼 근육은 이완되어 버리며 그저 보이는 모든 것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모친이 병원에 누워서 아직도 질긴 육신을 버리지 못하는 끈기를 보이는데 아직 창창한 형님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의 바다에 이렇게도 빨리 배를 띄우려 합니다. 이 바다를 건너야만 피안으로 가려는 것인지 정녕 모를 일입니다.


이런 느낌을 절절히 표현하는 시가 있더군요.

다음은 일본 에도시대의 하이쿠 시인, 고니시 라이잔(小西來山(1654~1716))의 시입니다.


봄날의 꿈 미치지 않는 것이 한스러워라

흰 물고기 마치 움직이는 물빛 같아라

벚꽃 피어서 죽고 싶지 않지만 몸이 병들어

오늘 밤의 달 그저 어둔 곳만이 보여라

내 잠자는 모습 고개 들어서 보니 춥구나

나의 봄은 초저녁에 끝나 버렸다

다만 태어난 죄로 죽는 것일 뿐 원통할 게 아무것도 없다


봄날에 꿈에 찬란히 미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봄날의 꿈, 춘몽이라고 하죠. 장자의 나비의 꿈에서도 나오죠. 내가 나비를 꾸는지 나비가 나를 꿈꾸는지. 바꿔서 말하자면, 봄날의 꿈이 나인지 내가 봄날의 꿈을 꾸는지, 차라리 그렇게라도 꾸지 못한 꿈이었더라면 더 찬란히 꿈꾸지도 못했으니까요. 흰 물고기는 자신입니다. 물빛이라는 시간에 투영된 자신이었겠지요.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흩어질 때 죽고 싶지 않은 무슨 몸일지라도 병이 들 수 밖에 없고 어둔 곳 즉, 아픈 곳만 서럽게 비춘다고 합니다. 자신을 모습을 보니 춥다고 합니다. 따스한 온기는 병이들어 시들어가고 체온은 떨어지고 시간이란 절대성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을 은유합니다. 이미 밤은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잠들려면 깊은 밤이 아니라 벌써 초저녁이라는 봄날의 일찍임을 토로하거든요. 그래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태어났으므로 죽어가야 하는 것의 이치를 되뇝니다. 그러니 원통할 것도 원망할 것도 이 세상에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서 한 움큼의 미련 자락이랑 남김없이 아무것도 없다고 삶의 시간을 초월해 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인가요. 인생 엔딩 노트라는 유언 기록장을 리뷰한 적이 이었습니다. 과연 형님은 이런 기록을 평소에 미리 염두 했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누군가 피할 수 없는 일이더라도 막상 아무런 대비 없이 유념도 없이 갑자기 닥쳤을 때의 그 당황감은 모든 시간을 흡입시켜 버릴 정도로 무색하게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에 이 노트는 내가 쓸 것이 아니라 형님에게 건내 줘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평소에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간의 시간에 대해서 겸허하고 숭고하게, 그리고 의미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고니시 라이잔의 이 시가 마지막 구절을 터득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원통할 게 아무것도 없음이 목적이 되는 삶을 위하여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의 바람 앞에서 각자가 주어진 삶의 여정에 대하여, 다시 한번 태세를 갖추어 나가는 일. 지나치지 않아야 할 거 같아서요. 그럼으로써 이 끝 모를 무기력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가을밤이 깊어만 가는데 이 삶의 시간에 흐름을 맡기고 풍류의 싯구 한절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밤이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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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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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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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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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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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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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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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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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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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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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0-22 1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이래저래 뒤척이는 시간이셨겠네요 ..
허하지 않도록 따듯한 음식 챙겨드세요 .
속이 비면 우울해집니다 .

yureka01 2016-10-22 19:10   좋아요 2 | URL
오후 내내 강변길을 해질녁까지 걸었습니다....
이렇게 비우는 거니까요..
감사합니다^^..

강옥 2016-10-23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죄로 죽는 것일 뿐 원통할 게 없어라.....
원통이라니요. 이 좋은 세상 잠시 보고 가는 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ㅎ

2박3일 서울 갔다 왔심더. 서울도 아직 가을은 멀었더군요.
오라카면 가야 되는 인생. 뭐 짜라다 미련 없고요~

yureka01 2016-10-25 23:30   좋아요 0 | URL
아 짜다리..미련없다는 말씀..팍팍 와닿습니다..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