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심야에 딸아이 하교 때마다 데리러 간다.
하교 시간을 마추려 하다보니,
그간 저녁에는 책도 읽고 걷기도 하곤 했는데 못하고 있다.
조금 심드렁해진 것도 덧대졌기도 하다.
어제는 유난히 더 지쳐 보이는 딸아이가,
"아빠, 오늘은 더 피곤한 기분이야." 라고 한다.
"힘들어?"
"응"
"미안해, 괜히 태어나게 해서,,,"
"그래도, 태어나서 좋은 것도 있잖아"
"그렇치
좋은 것도 있지.
그런데 좋은 건 짧고 적고,
힘들고 고단한 것은 길고 많다는 거니...
이것도 앞으로 고삼 졸업 때까지 해야 하는데,
참 못할 짓이지?
그래도 아빠는 학교 다닐 때,
교실에서 오며 가는 시간 아까워서
책상 치워 놓고 침낭 깔고 자기도 했거든.
그럼, 삶은 시간을 견디는 거야.
힘 들어도 참아.
지금의 공부가 고역스럽더라도
앞으로 즐거이 하는 학습을 찾게 되는 길목이라 생각하고
지금 이것도 못하면 앞으로는 즐기는 공부는 시작할 수 없거든.
공부는 다 고단을 이긴 영광을 만나는 시도이거든."
삶은 온전히 자신이 선택할 수도,
그렇다고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없기도 하지.
결혼도 하기 싫었는데 살다보니 하게 되고,
아이도 낳기 싫었는데 오로지 내뜻대로 되지는 않아서
딸아이가 태어나고,
또 어렵게 살아가야 한다는 멍에를 지우는 것같은 본질적인 원죄의식은
떠나지가 않는다.
모순 덩어리와 부조리함과 비열함이 가득한 이 세계가
희박한 행복이라는 가능성에 도박적 내기를 하기에는 터무니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나는 부모에게, 또 나는 딸아이에게
이어 낸다는 것은 중년의 나이에도 아직 모르겠다.
요즘은 청년들이 결혼도 하지 않는다거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아이도 낳지 않으려 한다.
흔히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풀이 될런지도 모른다.
다만 해석은 딱 여기까지라고 손치더라도,
인간의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회의감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스러울 따름이다.
수저론이 괜히 도출된 사회적인 현상은 특히나 이를 더 악화시키고
심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공정한 룰의 평등한 적용이라든가, 경쟁의 페어 플레이라든가
기회적 균등과 노력에 따른 성과의 합리적 보상이라든가
이런 보편적인 가치가 심각히 훼손당하고 조리되지 못한 사회일수록
수저론은 수그러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저 딸아이에게 아프리카가 아니라서, 혹은 시리아가 아니라서
다행으로 여겨라 하기에는 참으로 옹색하기 이를 때 없는 운명의 떠안김에 대해
더 이상 내가 해줄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