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일기
박동진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1. 들어가는 말.

박동진 시인께서 시의 그릇에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언어의 밥 같은 시집을 내셨다. 일전에 책 보내드린 답장을 시집으로 해주신다. 그래도 받은 책은 받은 것이고 나는 별도로 서점에서 시집을 주문도 했다. 더구나 불시에 가을이 지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칠 때 불어온 적절한 훈풍 같은 시집이다.

 

일면식도 없는 시인에게 책을 받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글의 세계에 시인의 내조적 체험과 시 상념을 느껴 가는 맛. 알코올의 분자식이 흡사 시의 단어 하나하나와 구조가 비슷한 염기서열을 이룬다고 느낀다. 만약 그렇지 않고서 시집을 읽고 시어에 취한다는 느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같은 책이 두 권이라 좋은 이유가 한 권에는 저자의 육필 싸인이 있다는 점과, 또 한 권에는 연필로 밑줄 치며 유심히 보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단어에 힘을 주고 해석하게 되고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은 시의 빈 여백에 메모하기 안성 맞춤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 연필로 줄 긋고 메모 글 쓰는 버릇이 있어서 책이 좀 더럽혀진다고나 할까. 그래서 책을 구입하고 나면 중고로 되팔 수가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시집 제목이 "유배일기"란다. 생의 지조가 꼿꼿해서 현실로부터 시로써 유배를 떠나면서 시인은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태생적 본질적 언어의 세계로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것이 바로 시가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누가 보낸 것이 아닌 스스로가 떠나도록 했던 자기 유배는 그래서 세계를 한층 더 멀찍히 서서 보려 드는 의도였으리라.


시인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 유배가 곧 치열한 현장에서 놓음으로써 스스로의 빈 공간의 여백 같은 휴식이라고 했다. 다들 지쳐가는 생활의 부대낌을 잠시라도 내려놓기를 바라는 느낌의 요구가 시집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혼자 지레짐작으로 추측해 보게 된다. 평소에도 간간이 시집을 사보는 형편이라 소주 값 두어 병 값이면 일주일의 글 밥으로는 넉넉하다. 술을 마시고 취하듯이 언어에 취하고 시집 한 장이 곧 소주 한 잔과 같은 효과는 당연하겠다. 멀직히 서서 지켜보는 유배지에서의 휴식의 시선이야말로 객관적인 취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들의 삶에 아둥바둥함에 매몰되지 않고 물리적인 취함으로 인해 늘어지는 것이 아닌, 상념적 각성이 돋아남을 노렸던 것은 아닐까 한다.

 
 

 

 

2. 유배 일기 시리즈의 시를 중심으로.

왜가리 한 마리

물질하는 청둥오리 떼를 피해

입대 부적격 판정을 받은 장정처럼 물끄러미

갯바위에 서 있다.

청명한 날씨지만 찬 공기 머금은 구름아래

키를 다 키운 대파가 뽑혀 묶이고

파 단 실은 봉고 트럭이 비탈길을 딱정벌레처럼 기어간다

오토바이 탄 우체부가 빈집 우편함 앞에서

수차례 주소를 확인하고

이미 펄프가 되어 버린 우편물을 포개놓는

편지 한 통이 개봉될 확률을 생각하다가

통째 몸 부린 동백꽃을 밟아 뭉갰는데

노란 꽃가루가 핏물보다 진하게 흙 속을 밴다

육지를 출발한 태양이 바다를 건널 때

섬은 육지와 더욱 멀어지고

일찍 어두워지는 이곳은 별나라와 가까운지

주먹만한 별들이

실금 같은 초승달을 에워싼다

<유배일기, 39P 유배일기>


"입대 부적격 판정을 받은 장정"처럼 왜가리라 했다. 부산을 떠는 청둥오리 떼로부터 홀로 떨어져 분답게 않는, 그러면서 입대 부적격 판정은 한편으로는 무리에 편입되지 못해 입대에서 열외 되었다는 안도감이자, 소외감이었는데, 맑은 날이지만 차갑게 시린 날에 파를 실은 봉고트럭이 딱정벌레처럼 기어가는 가을.


 

종이가 오랜 시간에 탈색되어 종이의 원류로 변해버릴 만큼의 시간이 오래 지나 버린 뜯지 않는 부재중인 누군가는 흡사 왜가리를 닮았을 수도 있다. 이미 펄프가 된 우편물 위에 뜯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 우편물을 또다시 포개야 하는 우체부의 난감한 고단함이 애닯프거니와, 입대 부적격을 받은 장정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 했을 것만 같았다."노란 꽃가루가 핏물 보다 진하게" 흙 속에 파고들어 물이 든다는 것도 유배지에서  보는 섬세한 언어적 감각이다. 외로움은 섬의 밤은 길게 하고 갯바위에 홀로 서있는 왜가리의 그 밤은 작은 별들이 주먹만 하게 크길래 초승달을 삼켜 버린다.

자꾸 입대 부적격이 맘에 걸린다. 무리에 소속할 수 없는 자기 소외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입대 부적격은 다른 말로 입사 부적격, 또는 어디 들어가는 자격에 불합격을 의미한다. 얼마나 외로운 시대인가. 그러나 시인의 소외는 곧 자기 소외로써 가질 수 있는 스스로의 적극적인 소외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곧 스스로 유배를 떠난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급물살을 따라온 배들도

금방 뱃머리를 돌리는 부두

소외된 뱃길마저 가로막은 채

바다 한가운데 함대처럼 떠 있는 바지선 향해

군령(軍令)이 떨어졌는지

개 짖는 소리가  텅빈  항구를 가득 메운다.

<"유배일기 1,-벽파항"중에서 40P>

부산하게 떠드는 항구에 적막했나 보다. 급물살을 이기고 나가는 배들이어야 하는데 휩쓸릴 만큼 아주 작은 무동력 어부의 배들까지 들락거리며 부두의 활기가 사라진 가운데, 개는 컹컹 짖으며 요란한 항구의 시끌 벅적함과 상당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 부두에 정박하지 않고 바다 한가운데 묶여 닻을 내렸는데 부두의 유일한 개가 명령 내리는 소리만 낸다고 한다. 개 짖는 소리만 바지선에게 지시를 하는 부두였을 법 했으니까 말이다.

유배일기 2

-산벚꽃


역사의 기록에서처럼 섬은

여전히 기피의 대상일까


창문을 열어도

바다 건너 육지는 보이지 않고


무에 저리 그리운지

산등성이에 올라

바다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어대는

소복 차림의 군상들, 어떤 무리는

옹색한 산자락을 피해

해안으로 내려와 바닷물에 발목을 담근 채

눈물 젖은 손수건을 헹구기도 하는데


힘이 부치는지 늙은 어부는

보리숭어 철, 팔딱팔딱 뛰는 개펄의 숭어 떼를

막연히 바라보고 있다


끝내 아득한 그대여

산벚꽃 이파리

벗겨진 고기비늘처럼 선홍색 핏물 들어

조류에 밀려가거든

유폐된 자가 띄워 보낸

눈물의 편지려니!

<박동진 시집, 유배일기, ​42P 43P>


유배지는 섬이었다. 육지의 항구에서 다시 "역사의 기록"에서 언급되지 못한 잊혀 버린 섬이다. 이 유배는 결국 소외의 전형은 아니었겠는가. 형벌로서의 유배가 아니라 소외, 이 안으로 더 들어가는 형국이다. 가까운 섬이 아니라 창문을 열러도 멀리 있어서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먼 섬. 그러나 그 섬에도 삶은 생과 사로 점철 되어 있고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드는 소복 차림의 떠나 보냄도 있었다. 그럼에도 늙은 어부의 욕망은 숭어떼의 펄떡임으로 나오지만 안타깝게도 맞서지를 못한다. 끝내 아득하단다. 그 아득함은 산벚꽃 이파리가 선홍색 빗물에 조류에 휩쓸릴 때 띄워 보낸 편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 시의 스토리가 서정적인 섬의 모습이 비서정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유배일기 3

- 해안도로


... 중략.

양쪽 모두 급경사를 이루는

작은 곶과 만을 휘돌아

굽이굽이 가늠할 수 없는 길은

生으로 치면 어느 지점쯤일까

이어져 끝이 없는 이 길의 궤도를 벗어나면

새로운 生이 열릴까

...중략.


섬의 도로는 폐곡선이다. 닫혀 있는 도로는 좌우 변이 급경사를 이루고 곶과 만을 휘감아 돈다고 했다. 굽이굽이 치는 길은 직선도 아니다. 이런 위험한 겹경사의 낭떠러지 길, 이곳에서 묻는다. 이 지점이 생의 어디쯤일까라는 자문과 타답을 듣고 싶어 한다. 또한 이 폐곡선의 길에서 벗어난 길로 가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새로운 생이 열릴까라고 묻는다. 일상의 매너리즘의 타성적 자아에게 묻는다. 시의 바램은 결국 " 육지 어딘가로 가는 징검다리"를 박혀 있는 길을 섬의 폐곡선으로 빗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배일기 6

-낙조


...중략.

 저처럼, 필생의 의지를 잃고도

천진하게 공중부양하던

한때가 있었다.


섬으로 유배는 지조를 지킨 선비에게는 사약으로 죽는 것보다 못한 것과 같이 섬의 가두리는 그래서 필생의 뜻을 가진 고기의 절망이다. 넓은 바다를 잃어버리는 듯이 필생의 의지로 이루어 내어야 할 뜻을 꺾는다. 그래서 유배일기는 "충동 뒤에 잇는 모든 소멸이 평온하다."라는 필생의 의지가 결국 편안해지는 소외를 논지하고 있다. 뜻을 꺾어야만 비로소 평온한 놓음이 온다고 한다.


3.결.

시는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하며 시인의 역할은 또 무엇인가. 이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서평 " 길이 되고 노래가 되려고 그, 잠깐 사이"라는 윤인애 시인의 글 말미에 이런 문장이 나열되어 있다. " 사유하고, 사유하는 힘으로 행동을 촉발하는' 결의와도 같다. 사유로써 힘을 얻고 힘을 만드는 사유적인 에너지가 시의 힘은 아니었겠는가 싶었다. 세상이 어렵다고 한다. 쉬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할진대, 우리는 이 시대에 시인들이 노래하는 시어를 읽고 그 읽은 느낌이 비록 작을지라도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거대한 본질적인 추력에 가속도를 얻는 효과는 노려도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비록 블로그에서 알게 된 시인의 시에서 그 유배 길을 함께 떠나도 나쁠 것도 없다는 위안과 안온을 누릴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시로 에너지는 낼 수 있는 글 밥을 만나기를 기원드린다.

 

PS : 시집 감사히 읽었습니다.

블로그인 관계로 몇 편으로 감상문 후기로 가름하고 글의 양을 줄였음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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