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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평점 :
역사학자 권내현 교수의 "수봉일가"에 대한 200년간 가계 기록을 근거로 연구한 자료를 책으로 엮었다. 기본 줄거리는 노비 신분에서 양반 신분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나열하고 여기에서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후반기의 신분제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신분제에 대하서는 신분의 전복을 노리기 보다는 상위 신분으로의 편입을 줄기차게 했던 눈물겨운 수봉일가의 몸부림이 결국은 조선시대 후반기에 두드러지면서 서서히 신분제의 강고한 사슬이 느슨해지는 결과를 사회적 변천과정으로써 나오게 된다. 조선 초기만 해도 소위 사대부라 칭하는 신분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극소수였고 일반 양민이나 노비가 절대 다수의 사회였다. 따라서 극소수의 양반이 누리는 지위와 권력에 대한 끝없는 편입을 시도했던 조상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이 책의 줄거리이자 모티브이다.
그런데 왜 양반으로 편입을 시도 하게 되었는가에 주목해 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양반의 권력과 신분적 지위는 가히 절대적이었던 사회적 특혜이자 신분이 주는 힘이었다. 균역(군대와 국가의 토목사업에 강제 동원등 의무)과 각종 세금에서 면제되고 나아가 관리로써 나갈 입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금석이었기 때문이고 이와 관련한 부수적이지만 막강한 토착화되는 권리는 신분제의 권리이었고 양반의 신분 자체가 이미 기득권이었다. 신분은 세습되고 부와 권력 또한 대를 이어 나가고 노비들은 그 집안의 재산의 가치 역할이었다고 나온다. (도망가 버리거나 생사가 불명한 자기 집 노비들 마져 끝끝내 명단에서 지우지를 못하고 몇 대를 걸쳐 이어서 유산으로 여전히 재산적인 가치로 매겼다. 기록에는 나이가 많아서 죽은 100년도 넘은 노비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노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반기(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에 들어 서면서 국가의 제정이 열악하고 따라서 이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시도가 결국 신분제를 서서히 무너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양민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부를 축적한 양민들이 그 대상이었다.수봉일가가 노비에서 양민으로, 다시 양민에서 유학자신분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비슷한 케이스를 들었다. 여타 다른 이유가 많았겠지만 결국은 돈 받고 재정을 충당하면서 신분제의 사슬을 느슨하게 했다는 것이 여러 사례를 들어 이야기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도 흔히 "돈 주고 산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따라 수봉일가를 예를 들었다.(아마도 수봉일가를 조사하고 연구한 이유가 비교적 자료의 보존이 우수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봤다.) 조선시대의 신분 상승의 곡선을 모델로 삼아서 수봉일가가 대를 이어가면서 호구 조사에서는 그 신분의 조금씩 조금씩 상승하여 기록되어져 있음을 저자는 기록으로 추적하여 연구하였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노비신분에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한 다른 가계도 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초기에 극소수였던 양반의 가문이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급격히 증가하는 이유가 그래서 더 유의미하게 다가 온다. 그렇게 자본의 힘을 밑천으로 양반가로 진입을 하게 될수록 결국 기득권의 확대와 다수가 됨으로써 국가는 더 열악한 지경에 이르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며칠전 오촌 아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중에서 족보를 30년마다 한번씩 발행하는데 자료 수집 때문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인식일테고 그 뿌리의 기록이 족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번에도 서류를 만들고 제출해서 아이들까지 등재시켜야 한다는 논지의 이야기였다. 집안에 어른이랍시고 몇 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에서 매년마다 벌초를 하며 만나는 아재의 말에는 족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작업은 조상은 제쳐 두고서 살아 있는 집안에 어른 눈치 때문이기에 하기는 해야 겠지만, 그런데 과연 이게 객관적이기한 것일까 라는 의문은 지울 수는 없었다. 현재 당대와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에서야 근현대사의 시간 속에서 족보라는 의미는 이제 단순히 가계도를 기록한 책이겠지만 아직도 여전히 족보로 대표되는 의미는 양반집이었다는 가문의 프라이드와 자존심의 기반을 하고 있음을 은연 중에 들어내는 표식이 오늘날의 족보라는 책의 형태가 된 것은 아니었겠는가 싶었던 이유였다. 이 책에서 언급된 수봉일가의 사례와 같이, 내가 소속한 집안이라고 해서 그렇게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신분 세탁하는 줄기찬 과정을 전혀 무시하고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 근거로 족보는 그야 말로 신빙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겠는가 싶었다. 그렇다고 윗대 조상들의 무덤을 파고 과학적으로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몇 퍼센트의 일치가 나와서 자손이 맞네 아니네 등등의 판가름을 할 정도로 꼭 따져야 할지도 의문이긴 매한가지였다.
통상 반상이라는 신분제에 있어서 근원적인 핵심은 문자였다. 비문맹과 문맹의 차이는 바로 정보의 차이였고 기록에 대한 판독의 유무였다. 글을 모르는 일반 양민이나 노비들에겐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다. 양민 중에서도 먹고 살만한 집안에서 아이에게 서당을 다니게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글을 익혀 권력자로 편입되는 일은 속담처럼 개천에서 용이 날 정도로 드문 케이스 였다고 보면 된다. 요즘 강남 부유층들이 수능 보다 sst(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를 공부하는 맥락과 비슷하다. 단순히 양반이라고 해서 권력의 표시로 기록되는 관문에 입성해서 관직의 자리에서의 권력을 의미하는 바는 약간은 지협적인 시각은 아닐까 한다. 관직에 나가서 자리를 족보에 등재하는 것이 일종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였고 결국 관직에 출사하는 과정도 글을 모르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이라도 문자를 통하여 공부가 되어야 아버지 잘 만나 세습하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가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을테다. 우선 당장에야 권력이 주는 특혜는 바로 보이는 것들이고 즉각적인 것이었으니 200년이나 걸쳐 양반의 신분에 편입되고자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양반이 권력을 유지시켜 나가는데 첫번째가 학문을 익히고 공부하는 것이었음은 굳이 크게 수립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 게 양반과 노비의 보이지 않는 차이였다. 흔히 고전 사극 드라마를 하나 보더라도 양반의 자리는 사모관대를 쓰고 협탁에 앉아서 책을 펴 놓은 장면은 이를 쉽게 보여주는 대목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직이 없이 죽은 양반에게 지방이 이름이 학생인 이유이다. 공부했던 사람이었단 뜻이다. 그래서 그 공부가 관직에 나가는 수단이고 관직에 나가서 행정을 하는 발판이고 임금의 교지를 받아 집행하는 문서의 수발과 소통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양반에게 있어서 공부라는 것은 평생의 필적하는 과업이었다. 이 평생에 수행해야할 학생이 장사를 하고 땅을 일구고 재화 물건을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천민이나 노비가 하는 역할의 분담이었다. 혹시라도 노비가 글을 알게 되었을 때 양반이 될까 싶어 기득권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서 주인은 노비의 목슴까지 빼앗게 된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1년 가도 책 한 권 안보는 양반 흉내는 수두룩하다. 웃기지 않는가. 추석날 설날이면 전부가 다 양반처럼 제사를 지내고 고향땅을 내려 가고 올라오지만 막상 책 한권 공부할 여력과 여유도 없이 모습으로 흉내나 내는 모사꾼 후손들은 얼마나 꼴 사나운 짓인지 이 또한 분명하다. 이제는 글이라는 특정한 집단의 전유물은 아니다. 대부분 문맹을 벗어 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문서 해독율 또는 독서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통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긴 글을 요구하지 않는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파악이 안되는 정도의 수준에 족보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하지는 않았어도 족보가 가지는 문자의 자존심에 대한 가치는 별 것도 아닌 것이다. 까막눈에겐 족보라는 유형적인 물건이나 혹은 징표같은 것일뿐이다. 흡사 중세 유럽에서 가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나 깃발의 표시정도가 될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족보의 신빙성이나 근거로써는 가장 확률적으로도 높은 것은 족보와 같이 하나의 set처럼 페키지화된 그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 오는 문집이 그 집안에 확실한 입증자료가 되는 셈이다. 어느 선비치고 문집을 내고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족보만 있고 문집이 없다면 일단은 의심해 보고도 남을 일이다. 하다 못해 문집이라는 이름으로 일기라도 썻다. 이는 글을 알았고 글을 쓸 수 있었고 글로써 마음을 표현하는 신분제의 근원적인 토대는 아니었겠는가 싶었다. 그러나 족보만 덩그런히 있는데 조상이 쓴 일기가 없다면,혹은 있어도 읽지를 못하고 조상의 심정을 알길이 없다면 족보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존감정도로 여기고 말 것이다. 이처럼 기록이란 힘은 믿음을 더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족보도 예외는 아니다. 신주단지에 고이 고이 모셔둔 족보를 그렇게 지키고 사수하고자 하기보다는 차라리 문집이나 조상의 일기를 더 챙겼더라면, 그리고 그 일기가 조상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단순히 가계의 명맥을 적은 족보보다야 가치는 훨씬 높았겠지만 불행히도 이와 반대였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대대로 입신양명의 출세라는 핵심은 조상의 빛나는 전통에 누를 끼치지 않고 그 업적을 토대로 이어 받은 영광을 더 밝게 확산시키는 것이 가문 최고의 명예이었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도 탐관오리로 권세를 부렸던 자들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고 후회했을 것이며, 그 조상의 이름에 먹칠한 자는 족보에서 마져도 빠졌다. 족보에서 빼버릴 놈이야 말로 가문의 추방자가 된 것이며 조상의 성공한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결백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횡령하고 공금 빼먹고 뒷돈 받아 처먹은 관리들은 족보에 오르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닌가.아니라면, 과거의 과오를 세탁이라도 버젖이 해내고마는 뻔뻔함으로 조작해내고야 말겠지.그러므로 어디 가문의 족보에도 가문에 누가 되는 이름이 오른 적이 없는 연유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오늘날에도 족보에서 이름 오르지 못할 놈들이 한둘이래야 말이지. 그런데 같은 감옥에 갖혀도 지조와 소신때문에 벌 받은 자들은 훗날에 또 다 복권이 되었고 오히려 자랑 꺼리가 되었으며 반대로 좀도둑처럼 비리와 악행은 영원히 기록에서 사장되었던 것은 뻔한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흔히 못배워 처먹은 세끼라고 욕하는 것도 배운 자는 비리를 저지를 수 없고 공부하고 수련한 진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관념적인 신념의 마지노선이었다. 갑오경장이후로 공식적으로 조선은 신분제가 철폐되었다. 이제는 신분제 따위는 없다. 다면 그 양반의 자리에는 자본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신분제는 없어졌어도 여전히 새로운 신분제에 대체되는 계급제는 유효하다. 주체적인 자유인이냐 자본적 생존 노예의 새로운 계급. 이 차이뿐이다. 이제는 신분제 따위는 없어도 여전히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 빚어지는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고 현재진행형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에 급급한 사람에겐 계급은 억매임의 신분이다. 억매임의 굴레와 멍애를 뒤집어쓴 자본의 노예들. 역시나 노예의 구성원도 절대 다수라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 날의 계급은 자본에 대한 개개인의 총량과 같다. 즉 자본이 많고 적음으로써 서열이 나눠지고 갈라지는 형국이다. 따라서 이 유산(有産)적인 계급에서는 철저히 유물론적이고 무형적인 자산에 대한 가치는 의미가 희박하다. 조상들은 명분 이거 하나 때문에, 명분이라는 가치와 신념 때문에, 가문이 멸문당할지라도 지키려 했던 의미가 이제는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비굴함도 어떠한 누추함도 어떠한 자존심도 한 방에 수그려드려 버리는 그 힘 앞에서 선비가 가지고 있는 지조 따위는 없다. 정절을 지키지 위해 은장도를 몸에 품었던 객기처럼 자본이란 장도에 모두 한 방에 나가 떨어진다.
이제 새로운 족보가 필요하다. 윗대 조상의 단순한 가계도는 의미가 없다. 내가 후대의 조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신빙성도 객관적 근거도 없는 이름과 출생과 사망의 기록보다는 그들에게 존재의 미학을 남겨야 한다. 오늘날의 아픔이 무엇이었던 것인지, 오늘날의 현 시대의 가치와 가르침이 무엇이었던 것인지, 오늘날의 동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서 절망과 희망의 메세지가 무엇이었던 것이지. 혹시라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노래를 하듯 글을 적은 기록같은 일기를 손자에게, 다시 그 손손자에게 까지 남기며 절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 때 살았던 가치의 사랑이 이런 것이었다고 노래를 전하는 마음이 새로운 족보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족보를 봐서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품었고 설파한 이야기가 드물다. 더우기 족보에서 그런 이야기를 찾기가 어렵다. 조상의 생각한 가치를 보고 싶어도 단출한 기록만으로는 알 길도 없고 교훈도 없고 무형의 유산도 보이질 않는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에 의한 일들만 나열할 수도 없다. 언제인가는 그들에게 풀어내야할 오늘의 현상을 반영 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 쓰는 족보가 우리의 얼굴처럼 물려줄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는 한은 말이다. 그래서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지배하며 조절하는 꼳꼳한 족보있는 선비가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