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간식은 감꽃이야! - 최순나 교단일기
최순나 지음 / 만인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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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초등학교 선생님.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제자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교사가 교단에서 쓴 일기로 구성된 책이다. 요즘 초등학교의 교육은 어떤 것인지 거의 모른다. 딸아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서 학부모가 되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초등교육에 관심을 가졌을 뿐 딸아이가 진학함으로써 초등학교는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정규 교육과정으로, 그리고 첫 사회생활의 범주에 포함되는 학창시절의 생활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사람으로 변화해야 하는 첫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초등학교의 교육이 별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에서 경험과 지식과 담아지는 추억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즐거움이거나, 때론 인생의 나쁜 추억의 짐으로 자리매김 하는 과정이다. 어릴 시절에 받았던 사랑이나 결핍이 일생에 트라우마를 낳기도 하는 만큼, 굉장히 중요한 시절임에는 틀림없다. 중학교는 초등을 거쳐 고등학교의 과정으로 짧은 기억에 크게 남지 않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는 대입이라는 관문에 인상이 강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성인으로써의 역할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도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이렇듯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란 때로는 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초등학교의 선생님에 대한 역할은 인생에서 무의식적으로도 심어지는 인성의 판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일 수 있다. 특히 선생님의 인품과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사명감이나 교육 철학과 방향에 따라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각인되는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적다. 한 반에 고작 30명도 채 되지 않는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아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를 격세지감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녔든 국민학교 시절에는 베이비 붐의 끝 세대였다. 한 반에 거의 70명 가까이 넘는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서 바글바글했었다. 넘치는 아이들이 보물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쯤은 아니었던가 싶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러니 선생님은 있어도, 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도 없고 개인별로 선생님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웠다. 책임져야 할 아이가 넘쳐났으니 선생님의 교육은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하루하루가 북새통으로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절이었다. 열악한 품질의 교과서로 몽당연필의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과의 관계란 그저 한 학년 거치면서 지나쳐 버리고야 마는 그저 스쳐버린 관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 결정적으로 각인된 추억 자리에서는 선생이라는 교육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생산이 사회적이거나 혹은 개인적으로도 어떤 문제와 어떤 과정의 인생을 겪는 것인가에 대한 각성은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낳아 놓기만 하면 제 먹을 것은 다 있다는 이 터무니없는 육아 방식은 때로는 효도라는 보험적 성격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고 입히고 학비를 들여서 공부 시키면 양육은 끝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리적으로 들이는 비용이 양육의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아이의 시대적 십자가에 대해 그 시대의 부모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배운 적도 없고 알아야 할 개별적 동기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결혼하면 아이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오토매틱 시스템처럼 작동하던 시대의 과잉의 인구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산아 재한 정책의 결과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습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낳기만 하면 다 되던 시절에 사연 많은 집들이 어디 한둘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태어났던 사람이 이제는 장년층이 되고 보니 왜 그렇게 무턱대고 낳았던 것인가에 대한 각성과 함께 자신의 세대의 치열한 경쟁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도래했다. 한 반에서 이부제 수업까지 했었던 내 또래들 세대가 겪은 그 바글바글한 숫자에 대해 다들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 넉넉하지도 못했던 가정 형편에 아이들이의 감내할 고단함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겪는 일종의 슬픈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많이 낳아 방임하듯 양육하기보다는 적게 낳고 보살핌을 집중하겠다는 자연스러운 발상은 전혀 낯선 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의 마지막 베이비붐 세대으로 대학 진학률은 졸업 정원제를 시작으로 급격히 고등 교육이 늘어났던 점도 이에 부합하고 따라서 우리 부모 세대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과잉의 경쟁과 바글바글함에서 부대끼며 겨워했을 세대가 취할 행동 패턴은 당연히 각성된 여건이 이를 증명하듯 급속하게 인구 숫자를 줄이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고도성장에서 야기된 부의 재분배 문제와 더불어서 급격하게 치솟는 부동산의 가격과 결혼 비용의 증가로 이어짐으로써 혼인율을 낮아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혼인율이 낮아질수록 출생률도 비례하여 떨어지는 것도 이와 맞물려 있다. 또한 양육비와 교육비에 비례해서 소득은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야 당연히 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길게 설명했다만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려우면 낳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쯤은 당연하다. 여유와 잉여가 없이 낳음으로써 무대책의 결핍을 재현하고 싶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는 아이 하나하나가 귀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이유도 부모 세대의 바글바글함으로 빚어진 결핍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도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 또래 친구들 아이를 보면 대부분 하나 아니면 둘이다. 셋 이상은 거의 없다. 넷까지 낳았다면 굉장히 측은하게 보는 것도 어쩌면 부모 세대가 겪은 트라우마의 작용과 반작용적인 역학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귀중한 존재로서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생님의 존재가 특별히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아이 하나하나를 지속적인 관심과 개별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교육의 지침과 방향을 설정하는 문제는 아이가 장차 성장하면서 미치는 영향은 평생을 이어간다는 전인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봤던 부분이 바로 선생님의 담임반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교육이 굉장히 부럽게 다가왔다. 아이를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느끼게 한다.

 

어릴 때만 해도 글쓰기의 시작이 일기 쓰기였다. 일기라는 숙제도 제일 골치였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혹은 생각을 어떤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으로 이어 나갈 것인지 큼지막한 칸에 글씨를 채워 넣어야 하는 숙제가 제일 싫었다. 지나고 보니 일기를 쓰라는 숙제는 내줬지만 일기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이어 나갈지,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없었다. 단순하게 그 날 있었던 사실의 나열이 곧 일기라고 짧은 가르침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라는 글쓰기 창작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일기라고 쓰기만을 강요했을 뿐이다. 주입식 일방적인 것을 교육이랍시고 그 시절의 선생님들 대부분 그러 했었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나열하며 자신의 느낌을 글감으로 만들어 내는 훈련도 없으면서도 쓰라는 일기의 강요는 결국 제일 싫은 숙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방학숙제에 제일 큰 걸림돌이 일기 쓰기 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보니 문득 요즘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에서 보면 최순나 선생님의 별명이 아이들이 지어낸 "최쓰나 선생님"이라고 하니 글쓰기 교육이 얼마나 잘 강조된 것인지 감동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자기 생각을 담는 교육이야말로 앞으로 학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론이 이루어질 때 생각을 도출하여 판단하며 정리하게 됨으로써 논리를 갖추고 부족한 지식과 정보에 대해 찾아서 자신의 생각에 반영시키는 능력이 얻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글쓰기야말로 비로소 창작이라는 과정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글쓰기가 심화되면 시처럼 확대되는 효과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한다. 특히, 우리 세대에서는 글쓰기를 재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글쓰기를 배운 부모가 없으니 아이들이 장차 글잘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는 아이의 장례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시대는 바뀌었다. 글쓰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컨텐츠와 창작의 시대가 더 크가 작용한다는 걸 간과한다.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는 교육에서도 개별적인 생각의 표출을 막았다. 개별적인 특출난 사고방식은 억제된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전부 다른데 비슷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저렇게 하라"고만 하는지에 대한 아무 논리의 강요가 선생님을 존경의 대상보다는 강압적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글감의 발상을 의도하여 이끌어 주고 의견을 지속적으로 묻고 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이 곧 교육의 토론 방식에 대한 시작이다. 개별적 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 적재적소의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르는 개성적인 교육이 한 아이 아이마다 이 특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글쓰기가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시절에 김순나 선생님 같은 스승이 있었더라면 작가는 못되더라도 글쓰기에 아주 좋은 가르침을 배웠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쓰기에 대해 배우지 못한 세대는 단순 글씨의 문맹은 낮아도 문장의 문맹은 높다. 하물며 몇 줄 조차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일방적으로 주입된 교육의 방식은 받아들이는 in put이 활발했으나 out-put이 어려운 이유이다. 읽기가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해력의 미흡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창의력은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유의 근본은 단어와 단어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도출되는 논리를 띄는 측면이 강하다. 창의력 뿐만 아니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뛰어난 문장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만 평범한 일기 같은 글은 일상의 꾸준한 글쓰기는 많은 연습과 훈련에서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의 글쓰기 토대가 마련되고 장차 글쓰기를 통해서 사유할 수 있기에 몽매를 피해 갈 수 있다. 생각은 행동하게 하는 단초이다. 비상식적인 사회에 무지함을 이겨 낼 수 있는 기초가 결국은 글쓰기에 있다고 믿는다.

 

특히 선생님이라는 선행과 글쓰기의 모범으로 아이들에게 본보기는 진정한 선생 다운 교단일기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란 업이 무엇인가. 학생들보다 먼저 하고 선두에서 모범으로 보이며 따라오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이다. 가르침이라는 게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피동적인 교육보다 능동적이고 동기 유발의 교육이 확실히 효과가 있음은 이미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선생님의 교단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해서 교육하는 교육가인지 엿보고 이런 훈련을 받아 자란 아이들이 정말 부럽고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비정상적인 교육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이후 세대이다 보니 바글바글한 학생을 통솔하기 위해서 매을 들고 몽둥이질하는 선생을 자주 겪었다. 좁은 교실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게 고작 주입과 강요에 의하는 것도 일견 이해는 한다. 교실을 더 늘리고 학생 수를 더 줄이고 교사의 수를 많이 하기에는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 재정의 한계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실히 교사 업무에 임하는 스승도 찾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선생님이 한해 동안의 교단에서 아이를 돌보며 관찰하고 학습계획을 아이들과 공유하며 함께 써 내려간 일기를 제자들이 보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초등학교 선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랑은 받아먹은 사람만이 아는 그 심리적 여유와 만족감에 대해 아이들이 얼마나 견고한 자아의 확립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게 한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아이 하나하나가 존귀함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아이에 걸맞은 교육자는 직업 가로써의 선생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내보이며 아이 하나하나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스스로 아이가 느낀다면 그 아이가 성장하며 형성해 나갈 인격은 그야말로 품격을 갖추는 시민으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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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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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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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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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0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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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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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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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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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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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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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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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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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2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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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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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0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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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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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2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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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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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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