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핀 꽃은 지고
꽃이 진 자리에 꽃은 피고
죽은 시간에서
다시 시간이 산다.
지고 피고
흐르며 잇는
이 윤회 같은 뫼비우스 곡선.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누가 있었던 곳이며
내가 떠난 뒤에
다시 누가 채워질 것인가.
이 끊기지 않는 체재에
저항은 고사하고
시작과 끝에 순응만 있는
탁류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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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사진을 보면 시간의 죽음이 보인다. 지난 시간들은 분명 죽었기에 죽은 시간의 자리에서 다시 시간이 사는 거 같다.
꽃이 진 자리에 꽃씨는 떨어지고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새순이 돋고 몽우리를 뭉치게 한다. 그리고 꽃이 피고 지고하는 이 과정들이 한장의 사진이 의미하는 바이다. 세상이란 탁류는 흘러도 우리들의 삶은 대를 이어 시간의 순환. 시간이 왜 일직선인가? 아니 시간은 거대한 바퀴처럼 둥글다. 우주가 둥글듯이 시간이 이 끝과 저 끝이 맞닿아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윤회라고도 했다. 그래서, 해탈이란 이 시간의 윤회라는 거대한 바퀴에서 탈출을 의미하지 않았던가. 그기에 연꽃이 피었고 지고 씨를 떨군다.
지난 일요일 시골로 돌아다니며 보았던 한 연못에 핀 연꽃. 많은 연꽃이 피었지만 한 프레임에 시작과 과정과 끝의 일생을 단축시켜 보게 될 줄이야. 사진 자체를 놓고 보면 사진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사진은 어떻게 볼 것인가의 의도라는 것의 말을 부여한다. 의도는 의미를 낳고 의미는 사고방식의 진로를 연다. 그래서일까. 연꽃을 보고 삶의 시간을 깨닫는다. 생명의 시작과 존재의 죽음은 둘이 아니라 같은 곳에서의 하나라는 것을. 그렇게 보고 사진을 담았던 이유다. 이미 수많은 연꽃이 피고 지고 있어 사진을 담지만 나는 그런 마음의 사진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사유의 과정이며 시간의 죽음이다. 그기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꽃이 지기 전까지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할까?라는 과제를 남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아둥바둥거릴 땐 거려야겠지만, 때로는 나의 최후에 내삶의 꽃에 대해 따져 보는 여유도 가지자. 꽃을 피우고 어떤 향기를 낼 것인지. 지금 나에게서 피어나는 향기는 꽃향기일까 악취일까.자본에 짜들린 돈맛의 향기일까. 가치의 향기일까.누군가에게 슬품을 주지 않는지, 스스로의 자기 삶에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에는 놔야 하지 않을까. 쥐고 있어도 결국은 힘이 풀리는 것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