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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위의 만찬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각으로 복기하는 스크린의 기억: 이용재의 <필름 위의 만찬>
해운대의 푸른 바다가 아스라히 내려다보이는 달맞이길의 조용한 서재에서, 코끝을 맴도는 커피 향과 함께 책장을 펼칩니다. 매년 300권이 넘는 책을 혀끝으로 음미하듯 읽어내고 활자 속에서 맛과 향을 찾아내는 '북소믈리에'로서, 책을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미식 여행과 같습니다. 최근 저의 감각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책은 바로 이용재 저자의 <필름 위의 만찬>입니다.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며 마주한 '영화 속에서 만난 음식과 감정들'이라는 핵심 구절은, 스크린이라는 차가운 평면 위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서사와 시각적 연출로 영화를 기억하지만, 때로는 혀끝에 닿을 듯한 미각적 상상력이 그 영화의 가장 깊은 감정선으로 우리를 안내하곤 하니까요.
이 매력적인 만찬은 마치 파인다이닝의 코스 요리처럼 1부 '욕망과 허기', 2부 '권력과 기만', 3부 '불안과 위로', 4부 '공감과 우정'이라는 네 가지의 정교한 챕터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 욕망과 허기, 생존을 향한 처절한 미각
에피타이저 격인 1부에서 가장 먼저 저의 시선을 강탈한 작품은 <황해>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구남이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던 세 가지 음식, 즉 김, 황해 정식, 그리고 감자를 통해 저자는 단순한 '먹방'이 주는 쾌감을 넘어 생존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본능과 억눌린 감정을 묵직하게 풀어냅니다. 책을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던 구남의 그 퍽퍽하고도 절박했던 식사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새삼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어지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야기는 무거운 분위기를 유쾌하게 환기시킵니다. 극 중 중요한 매개체인 초코파이가 사실은 미국 '문파이(Moon Pie)'의 손자뻘이라는 저자의 역사적 고증은 제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원조를 뛰어넘어 '청출어람'의 아이콘이 된 초코파이의 서사를 읽으며, 익숙한 음식이 영화 속에서 얼마나 큰 상징성을 지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2부: 권력과 기만, 음식에 숨겨진 계급의 민낯
메인 디쉬로 넘어가는 듯한 2부에서는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코엔 형제의 명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우유에 대한 고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살인마가 고요히 우유를 마시는 그 섬뜩한 이질감을 시각적으로만 받아들였지, 실제 이 영화를 보면서 '우유'라는 오브제가 지닌 기만과 권력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음식 이야기는 단연 백미입니다. <설국열차>, <기생충>, 그리고 <미키 17>에 이르기까지, 음식이라는 계급적 기호를 통해 권력의 구조와 갈등 해소의 과정을 서술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합니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당장 스크린을 켜고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영화 속 음식들을 다시금 샅샅이 살펴보고, 저자의 예리한 시선을 길잡이 삼아 그 위에 저만의 생각과 철학을 더해보고 싶어 졌습니다.
3부: 불안과 위로, 상실을 어루만지는 혀끝의 기억
3부에서는 영화 <피그>를 통해 최고급 식재료로 칭송받는 송로버섯(트러플)의 본질을 마주합니다. 화려한 미식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허영, 그리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과 위로를 차분히 반추해 보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합니다. 흙내음 가득한 송로버섯처럼 묵직한 여운과 사유를 남기는 챕터였습니다.
4부: 공감과 우정, 달콤하거나 혹은 신랄하거나
마지막 디저트와도 같은 4부는 달콤함과 매서움이 공존합니다. 너무 오래전 감상하여 기억조차 희미해진 명작 <E.T.>에 초콜릿이 등장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는데, 외계인과 교감하던 그 달콤한 매개체가 최근 인기 있는 '리세스(Reese's)'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척이나 기억에 남습니다.
반면,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속 케이크들에 대해서는 저자가 아주 신랄한 비난을 가합니다. 화려한 시각적 연출에 치중하느라 정작 제과의 핵심인 '앙트레메'와 '프티 가토'의 본질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정체불명의 디저트가 되어버렸다는 전문가적 일침은, 텍스트에 묘한 긴장감과 재미를 불어넣습니다.
이어지는 <웰컴 투 동막골>의 팝콘 씬은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던 아름다운 팝콘의 미학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한국 전쟁 시기에는 우리나라에 팝콘용 옥수수 품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차가운 역사적 사실을 짚어내는 대목은 서정성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어떤 영화는 음식으로 기억된다"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필름 위의 만찬>은 단순히 영화를 리뷰한 책이 아닙니다. 수많은 명작 영화들을 정교하게 큐레이션 하여 고급 접시 위에 보기 좋게 올려놓은 파인다이닝과도 같은 책입니다. 책 한 권 속에서 다채로운 영화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입체적인 위치와 감독의 숨은 의도까지 탐구할 수 있었던, 실로 지적이고도 풍요로운 독서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