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첫 장을 펼치면 고대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햇살 가득한 포도밭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 시절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매개체였어요.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에서 바쳐지던 와인은 점차 기독교의 성만찬을 통해 '구원의 상징'이 되었죠.
수도원이 거대한 와이너리가 되고, 교회가 와인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모습은 거룩함과 탐욕이 한 병에 공존했던 모순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중세와 근세를 지나며 와인은 왕과 귀족들의 식탁 위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릅니다. 특히 유럽 와인의 심장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세 지역은 그 자체로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었어요.
보르도(Bordeaux): '와인의 왕'이라 불리며 영국 왕실의 사랑을 받았던 보르도는 거대한 자본과 해양 교역의 중심에서 '부와 위엄'을 상징했습니다.
브르고뉴(Bourgogne): 수도사들의 정성이 깃든 땅에서 난 이 와인은, 신에게 바치는 순수한 정성이자 '섬세한 예술적 취향'을 구분 짓는 잣대였죠.
샹파뉴(Champagne): 축제와 승리의 순간 터지는 거품, 샴페인은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한 연회에서 '환희와 사치'라는 이름의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사의 흐름에서 이태리를 빼놓을 수 없겠죠? 프랑스가 와인을 '권력의 포장지'로 썼다면, 이태리는 와인을 '삶의 예술이자 르네상스의 영혼'으로 빚어냈습니다.
풍요로움이 깃든 토스카나의 언덕부터, 안개 자욱한 알프스 자락에서 태어난 바롤로까지. 이태리 와인은 로마 제국의 유산 위에 가문의 자부심을 얹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한 맛'을 지켜왔습니다.
이야기는 이제 1976년 파리의 어느 시음회장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아니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사건이 벌어지죠. 프랑스 와인이 세상의 기준이던 시절, 최고 권위의 심사위원들 앞에 프랑스 1등급 샤토들과 미국의 이름 없는 와인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놓입니다. 결과는 그야말로 '역천(逆天)'에 가까웠어요. 당연히 프랑스가 승리할 것이라 믿었던 심사위원들이 최고점을 준 와인은 다름 아닌 미국의 와인이었으니까요. 와인 세계의 신들이 거주하던 올림포스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던 이 사건은,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유럽 중심의 위계질서를 단번에 전복시켰습니다.
파리의 심판이 남긴 충격은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 아래서 새로운 희망으로 피어납니다. 전통이라는 거대한 벽에 '기술'과 '혁신'이라는 망치를 휘두른 이 젊은 와인들은, 더 이상 와인이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로벌한 취향의 축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보수적인 유럽의 와이너리들조차 캘리포니아의 도전에 자극받아 변화를 시작한, 진정한 의미의 다극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오늘날 와인 시장은 수억 원을 호가하는 컬트 와인과 일상의 저가 와인으로 양극화되어 가고 있어요.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라벨'과 '평점'이라는 새로운 계급의 언어 속에서 '누가 무엇을 마실 자격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와인은 주류의 바깥에서, 이름 없는 작은 포도밭에서 태어났다고요.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작은 오크통 속에서 새로운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익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