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박경리 선생님의 책을 만나게 돼서 너무 반가웠다. 선생님의 책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이렇게 또 소설 한편이 나왔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토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이 책 <은하>는 1960년 4월 1일부터 8월 10일까지 '대구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라 한다. 이렇게 박경리 선생님의 글을 만나게 해주셔서 마로니에북스에 감사드리고 싶다.


<은하>의 시대적 배경은 한국전쟁 기간으로 거슬러 간다. 그 시대에 대학생들에게는 징집 보류라는 특혜가 있었다. 그러니까, 대학생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징집 기피자가 늘어남에 따라(그 당시 5만 명) 정부에서는 1956년에 징집 보류 제도를 폐지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 한꺼번에 많은 대학생들이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소설은 그 시대상황 속에서 방황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인희의 대학교 단짝 친구 은옥의 남자친구 이정식이 이런 경우이다. 그는 징집 보류가 해제되고 난 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지만,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나온다. 그는 군법을 어긴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며 여자친구의 집인 은옥에게 얹혀살다가 끝내는 헌병에게 잡혀가 폐병에 걸리고 나서야 군대에서 벗어나게 된다.


상당히 보수적인 인희는 은옥의 상황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 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청춘 남녀가 같이 산다는 것에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친구에게 책임감을 안겨주는 이정식이 못나 보였다. 하지만 인희의 인생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그녀의 은옥에 대한 생각은 바뀌어간다. 인희를 좋아한다며 줄곧 따라다녔던 송건수가 미국으로 간 뒤 몇 개월 동안이나 소식이 없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자취집에 한 남자가 찾아와 송건수의 결혼 소식을 알리며,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인희는 상실감을 안고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소극적이었나? 오랫동안 자신의 집에서 일했던 할멈이 새어머니에게 쫓겨나 살고 있는 사위의 집엘 찾아가 오십만 환을 할멈에게 건네면서 할멈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던 그녀가 왜 정작 자신의 삶에는 희망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인지. 누가 나를 구하여 줄 수는 없을까? 나를 여기서 구해줄 사람은 없을까.라며 우물 속 달에게 아무리 말을 건네봐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힘을 갖지 않았다. 자신보다 은옥이 옳았다고. 그녀의 사랑은 진솔하다며 은희는 말한다. 시대상황이 그렇다 해도, 스스로 얼마든지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할멈과 은옥,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조언을 해도 은희는 그들의 말을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였다. 어쩌면,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경리 선생님의 책들 중 가장 선정적인 글이 많았던 책이었으나 은희의 삶에 대한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송건수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애정에 배반을 당한 여자에게 진정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회의에 찼던 그녀가 서글퍼 보였다. 자, 얼마든지 우리는 운명에 거부할 수 있다고, 순응하지 말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책. 너무 좋았다..




괴로웠던 어젯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일들 그러나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다 합쳐도 그 비중을 뛰어넘는 것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부자연스러운 이런 사랑의 행각에 부수될 무거운 부채를 염려함보다 순간의 환희를 더 값비싸게 생각하는 그들의 행동, 은옥은 그들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괴로움쯤은 마땅히 지불되어야 할 부채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참 묘한 것이다. 남의 불행이나 슬픔을 볼 때 일종의 위안을 느낀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듯이 같은 불행자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모양이고 자기가 처해 있는 불행과 비교해보는 때문이리라. 그래서 자기의 불행이나 어려움을 견디어보자는 힘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p.24)


사람들이란 돈이 생김으로써 마음이 더 인색해지고 기득 이권을 위하여 무정한 수단과 책략을 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것을 먹어보겠다고 그야말로 야차같이 날뛰는 세상에서 가난은 나라도 못 당한다는 조용한 체념 속에서 자기의 푼수를 지키며 사는 할멈. 인희는 보잘 것 없는 남의 집 하인살이를 한 할멈에게 뭔지도 모르게 인간의 귀중한 선의 본질을 본 듯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들을 착하다고 칭송하기보다 못나고 천하다는 말로 대하여주고 벌레처럼 인간의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