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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뮌터
보리스 폰 브라우히취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풍월당 / 2022년 6월
평점 :
가브리엘레 뮌터
“나는 당신이 없어 외롭고, 당신 때문에 불안해요.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도 역시 외롭다는 걸 알고 있어요.”
(표지그림은 작가가 그린 <안락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여인, 1929년 >이다)
독일표현주의 화가이며 베를린 출신의 가브리엘레 뮌터는 칸딘스키와의 만남으로 인해 오히려 손해를 본 예술가다.
그녀의 이름앞엔 언제나 칸딘스키의 연인, 혹은 버림받은 여인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온전한 그녀의 이름, 그녀의 작품은 이렇게나 아름답고 독창적인데도 말이다.
또한 서로의 예술에 있어서는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사이다. 애정관계에선 칸딘스키는 그 누구보다 무례했고 잔인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여성에겐 창조력이 없다고 믿던 시대에 태어났다.
다행히 형편이 나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언니와 함께 미국의 친척들을 만나는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언니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그녀는 보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담아간다.
답답하고 꽉 막힌 현실에서 카메라, 그리고 자전거는 그녀의 위안이었다.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기며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게 해 준 자전거, 그리고 보고싶은 것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해 준 카메라는 그녀에게 자유와 독립심을 키워주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본 것을 담으며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림을 배우는 것조차 남자들과는 달리, 사교육을 통해서 혹은 질 낮은 교육을 받아야 했던 시절,
우연히 “팔랑크스 회화반”에서 칸딘스키의 수업을 듣게 된다.
예쁘고 재능 넘치는 젊은 여성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칸딘스키는 한눈에 반하게 되고, 사촌이자 아내인 안나가 있음에도 훗날 이혼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그렇게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면서 예술적 동료가 된다.
회화반 이름이 왜 팔랑크스였을까?
팔랑크스는 그리스 시대 중장보병들이 앞뒤로 창을 세워 마치 적군에게 고슴도치처럼 보이게 한다. 뭔가 복선같다는 느낌?
그녀 또한 고슴도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시선은 그림을 그리는 그녀, 칸딘스키의 내연녀라 불리는 그녀에게 편견과 비난의 창들을 던져댔다.
또한 그녀의 뛰어나고 창의적인 작품들은 칸딘스키의 덕이라며, 혹은 그의 지도 덕이라며 평가절하되었다.
칸딘스키의 색감이라 불리는 이 아름다운 새로운 색감은, 실제는 뮌터의 색감이었고, 오히려 칸딘스키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와 칸딘스키 등이 주축이 되었던 '청기사파'에서, 곧 그녀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좀벌레 취급을 받았다. 예술협회의 분열에 여자만큼 쉬운 핑계는 없었다.
그리고 사랑했던 칸딘스키는 최악의 이별을 가브리엘레에게 선사했다.
1차대전으로 러시아로 돌아간 칸딘스키는, 헤어지기 전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전처와 이혼 후, 가브리엘레 대신 젊은 니나와 결혼한다.
가브리엘레는 그 사실을 칸딘스키가 결혼하고 그의 아이가 세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거기다 가브리엘레가 돈을 지불하며 보관하고 있던 작품들을, 칸딘스키가 몰래 가져가려 하는 바람에 소송까지 벌어지게 된다. 둘은 합의를 보았고, 훗날 가브리엘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모두 기증한다. (니나칸딘스키는 남편 사후, 남편의 작품들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작품들을 팔아 온갖 보석등을 구매했다. 그러다 집에 강도가 들어 보석을 강탈당하고 살해된다. 특이하게도 이 강도들은 보석만을 가지고 갔을 뿐 칸딘스키의 작품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팔기 어려워서였을까? 러시아 당국이 니나가 칸딘스키 작품들을 해외로 마구 팔아대자, 작품 유출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음모론도 있다.)
뮌터는 실험하고 도전하며 예술에서도 다양성을 추구했다.
칸딘스키란 거장앞에서, 그녀는 전혀 기 죽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갔으며, 오히려 거장인 그에게 그녀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양식을 찾아내기도 했다. 민속화의 일종인 유리이면화의 기법을 배우고 작품에 적용했으며, 무르나우에 집을 사서 칸딘스키와 함께 러시아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작품은 인정받았고, 1994년엔 유럽태생으로 40세 이상의 여성 미술가에게 수여하는 가브리엘 뮌터상이 제정되기도 했다.
(클레를 그린 그림, 푸른색 블라우스의 오스카 올존 부인)
그녀가 그린 초상화에는, 그녀가 추구했던 공감과 진심이 담겨있다.
각자가 육체 속에 담고 있는 정신적인 면이 드러나는 듯, 그녀가 그린 초상화 속 얼굴들은 이미 상징 그 자체가 되어 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랑에 빠졌었다.
사랑하는 이와 그림을 그리고, 토론하고, 함께 보았고, 서로를 위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사랑한다 써내려간 편지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너무나 쉽게 뒤돌아섰다.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시기와 질투 속에 여자화가란 이유로 고깝게 보는 이들은 더 많았다.
그런 이들조차 1차대전 속에 죽어나갔고,
2차대전에선 아름답다 새롭다 여긴 그림들이 불탔다.
몰래 지켜 온 그녀의 그림들은 이 집의 지하에 숨겨져 있다.
이제 더 이상 아방가르드도 젊음도 변화의 중심에서도 조금은 멀리 떨어진 이 곳.
눈 쌓인 가지 위 새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모방의 아이콘이란 오명과 무시의 대상, 환쟁이라 멸시받던 여성화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는 과정은 참 길고 험난하다. 누구의 연인으로, 누구와의 관계로만 부각되는 이들, 그럼에도 가브리엘레 뮌터는 칸딘스키옆에서 침몰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누구의 아내, 화가의 아내, 예술가의 조력자로 자신의 붓과 화구통을 뺏긴 채 생계마저 책임지며 살아간 이들이 더 많았던 시대, 그들은 꿈조차 고달팠고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