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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한 때 쿠바에 대한 낭만을 키웠던 적이 있다. 쿠바의 음악과 혁명이 바삭거릴 것 같은 바닷가와 느긋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실제 쿠바에서 낚시를 하며 어쩌면 문장을 낚았을 헤밍웨이, 그래서 낚아올린 <노인과 바다>의 행간엔 진짜 짜디 짠 바닷물과 그 바다를 사랑하는 노인이 담겨있다.
산티아고, 소년, 커다란 청새치와 바닷가의 가난한 모습들과 사투.
밧줄에 낚시줄에 긁힌 상처를 바닷물의 짠기로 소독하며 고독이든 아픔이든 그저 파도에 흔들어 보내버린다.
젊었던 영광의 시절을 지났다. 아쉬워 할 것도 아파할 것도, 지금의 처지에 지독하게 절망할 필요도 없다. 담담한 그는 다시 바다로 간다. 그리고 커다란 청새치를 잡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뜯기고 빈 배와 늙고 다치고 지친 육신으로 다시 돌아온다. 차라리 바다에 나가지 말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노인은 그런 후회를 하기도 한다.
혼자선 배 위에서 소년을 그리워하고, 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잡은 청새치에게 연민과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바다와 자연을 고마워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그저 이 한 몸으로 낚시를 하고 삶을 영위할 뿐이다.
소년은 지친 산티아고를 위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준비한다. 잠든 노인 곁에서 그 삶의 고단함과 힘듦에 눈물 흘리는 소년,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어부들.
커다란 대가리와 뾰족한 주둥이만이 노인이 잡은 그 청새치가 얼마나 큰지 말해 줄뿐, 어부출신이 아닌 웨이터는 그저 그 뼈의 흔적을 상어로 생각한다. 저렇게 큰 청새치가 설마? 그러나 그렇게 큰 청새치를 잡았고, 노인은 그 전과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삶을 영위한다.
어릴 적 내겐 보물같은 책들이 있었다. 계몽사 문고판 책들이다. 아버지가 누군가의 부탁으로 월부로 샀을 책들, 아마 120권쯤 됐던 것 같다.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책들이지만 아무래도 호불호가 있었다. 책등이 까만 애들이 있는가 하면 조금은 덜 낡은 책도 두어권 있었다. 그 책 중 하나가 바로 노인과 바다였다. 초등아이들 보는 책에 무슨 노인과 바다인가 만은 표지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아 한동안 외면했었다. 그러다가 정말 정말 심심했던 어느 날, 그 책을 펼쳤다. 그 때 내가 느낀 건 참 답답하다 왜 이 노인은 억울해 하지도 분통을 터트리지도 않는걸까. 크고 나선 조금 달라졌다. 나 또한 노인이다. 바다라는 삶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갔지만, 결국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내일 또 바다로 나가야겠지 삶이라는 걸 살아가려면. 지독히 운 없는 날들도 있었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날들도 있었다. 왜 내게만 태풍이 오는지 원망도 했다. 그렇지만 바다같은 삶에 파도도 태풍도 내게만 오는 것은 아니다. 나만 노를 잃고 혹은 작살을 버려야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는 삶이라도 살아가는 것. 내일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낚시의 미끼를 준비하는 것. 나를 둘러싼 삶이란 바다를 존중하는 것. 지나가는 새에게도 작은 생명도 존중하며 내게 도움을 주는 수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
헤밍웨이는 건조한 문체로 유명하다고 한다. 짧고 담담하고 깔끔한 문장들 사이에서 <노인과 바다>는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어릴 적 헤밍웨이는 아버지에게는 낚시대와 어머니에게는 첼로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낚시대와 첼로, <노인과 바다>에는 밧줄에 쓸려 상처에 굳은 살 투성이 노인의 낚시대와, 그 노인이 바다와 삶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 첼로 선율처럼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