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율, 강의와 강연

근거율, 강의와 강연 ㅣ 하이데거 전집 1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김재철 옮김 / 파라아카데미 / 2020년 2월

근거율, 강의와 강연

근거율이란 ‘어떤 것도 근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자는 근거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근거에 관한 문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때 부터 논의 되었다. 그는 근거를 인식근거, 사물적 존재 또는 사실적 존재에 대한 근거, 본질근거, 행위근거 등 4가지로 근거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근거율’이 최초로 확립되고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에 이르러서이다. 그 이후 근거율은 모순율, 동일률, 배중율과 함께 논리학의 제1원칙이되고, 또한 여러 철학자가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거율을 연구한 학자들은 근거율을 당연하게 전제되는 것으로 여기고, 근거의 본질 등 근거 그 자체에 관하여는 문제 삼지 않았다. 즉, 근거율이란 어디서 비롯되었나, 우리는 왜 근거율에 따라야 하는가, 근거율을 따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등은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근거율 자체에 관하여 의문을 품고 근거율이라는 것의 본질에 관하여 따지기 시작한다.

이 책 ‘근거율, 강의와 강연’은 하이데거의 위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하이데거의 설명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근거를 존재 속에서 찾고 있다.

“즉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 그러나 근거율은 존재에 대한 말로서 ‘존재가 하나의 근거를 가진다.’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에 대한 말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존재는 존재자로서 표상되는 것이다. 존재자만이 필연적으로 근거를 가진다. 존재자는 근거지어진 것으로서만 있다. 그러나 존재는 그 자체로 근거이기 때문에 근거 없이 있다. 존재가 그자체로 근거이면서 근거를 놓는 한, 존재는 존재자를 그때마다 존재자로 있게 한다. ”(308P)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이처럼 모든 것에서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이다. 신은 근거를 스스로 정립하기 때문에 근거를 찾지 않고, 동물은 현재만을 살기 때문에 근거를 찾지 않는다. 신도 동물도 아닌 둘 사이에 놓인 인간만이 불안한 삶에 확고한 근거를 부여하길 갈망한다고 한다.

하이데거에게 ‘근거’의 문제는 사유법칙으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즉 실존과 관련한 문제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유명하게 한 그의 대표저서는 ‘존재와 시간’이다. 그 책은 철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저술이지만, 그 어떤 철학책 못지않게 난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많은 새로운 개념을 정의하면서, 그에 기반해서 논의를 전개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하이데거 저서 중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고는 하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근거율에 관한 학술 논문 두 어편을 읽고 나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의 사유의 깊이는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깊은 사색의 결과물을 아둔한 내가 한 번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어렵다는 하이데거의 책을 한 권 접한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