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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정 시집을 훔치던 날 

 그때는 8월, 여름의 한가운데였으나 추운 겨울로 기억한다. 그 거리는 추웠고 나는 훔쳐야 했다. 추위로 훔친 것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날씨, 혹독한 계절이었다. 나는 그것을 샀지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훔친 것이 분명했으므로 날씨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어야 했다. 몹시 추워야 했고 내게는 품에 안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얼어 죽거나 죽는 것을 모른체해야 했다. 그때 나에게 이 시집을 알려준 이는 나를 눈감아 주었으니 그도 공범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 시집이 필요한 이가 여러 명 떠올랐을 것이나, 말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마음속에 있는 이토록 욕망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왜'라고 묻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밖으로 내어봤자,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챈 그의 본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누구나 다 아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린 시내의 깔끔한 헌책방이었다. 한낮의 추위를 피해서 들어온 곳은 시원해서 땀이 다 식었다. 가지런히 꽂혀진 책들은 저마다 등을 보이며 제목을 읽게 해 주었고 언제나 그렇듯 시 코너에서 오도 가도 못할 걸음을 미진하게, 그러나 부산하게 떨고 있었을 때였다. 내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시집이 그의 눈에는 단 한 번에 띄어 뽑아 들었다.

왜 여기 있지, 그의 첫마디였다. 세상에는 자기 자리를 모르고 자리에 있는 것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이상한 자리에 있다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시집, 더 이상 시인이 없는 시집, 그래서 읽고 싶은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는 이 시집이, 누구나 다 아는 곳에 나와서 값어치를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집에 표기된 값어치라기보다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가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가치를 다 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오래전에 읽었던 시가 스쳐갔다. 여섯 살, 여섯 살, 중얼거렸다. 

 


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다행히 한 편이라도 알고 있어 그것을 말할 수 있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게는 이 시집을 가질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시집이라면 다른 시집도 많았다. 이것을 구하고 싶어서 발을 구르고 있을 문청이 수두룩할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시에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했을 간청이 외딴곳, 아무 눈에나 띄는 곳에 꽂혀 있었다. 아무 눈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밖에 설명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나는 갖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특히나 잘했고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몇 개 안되는 미덕이었다. 마음 내는 것은 대부분 갖고 싶은 것이라는 걸 알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사거나 갖지 않았다. 나는 검소했으며 검소한 것이 자랑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이었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를 보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켜는 부부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는 딸에게 새로운 바이올린을 사주기 위해서 경매에 참여한다. 경매에 나온 바이올린은 아주 좋은 소리와 울림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꼭 사 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경매는 어느덧 자신들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은 그 바이올린이 갖고 있는 가치를 넘어선 가격을 내고 있었다. 부부는 결국 바이올린을 사지 못한다. 그리고 경매장을 나오면서 마지막 가격을 불렀던 어떤 남자에게 묻는다. 

 

저게 어떤 바이올린인지 아시오? 바이올린리스트가 되려는 장래있는 아이의 앞길을 방해했어! 당신에게 저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완전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으나 이런 내용의 화 냄이었다. 어떤 남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부부는 경매장을 완전히 빠져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당연히 부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남자가 바이올린을 가져야 했을 마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남자도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지 모르고, 재능이 있는 어떤 이에게 선물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돈이 많아 취미나 수집으로 바이올린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라고 그려졌고 그렇게 생각했다. 돈이라는 이유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은 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도 이 자리에서 마찬가지였다. 어떤 남자보다는 돈이 적었지만 충분하기도 했다. 화를 내던 이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되어 부부의 비난을 듣고 있었다.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그에게 투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빴다. 나도 나쁜 얼굴이 되었다. 바이올린이 부부의 딸에게 갔을 이유보다 자신에게 돌아갈 필요를 증명하지 못 했다. 남자는 바이올린을 간절하게 켤 수 없었고 나는 한글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읽을 수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어떤 소용으로 데려갈 힘이 없었다. 힘이 없는 나는 나쁜 얼굴을 내려놓고 시집을 찬찬히 살폈다. 시집을 갖고 있었을 이는 시집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낙서도 접은 흔적도 없었다. 그(녀)의 필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줄이었는데 '21세기 전망 동인'이라는 진이정이 몸담았던 곳의 이름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집을 보면서 나는 이것을 내놓은 이가 시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를 버렸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알 수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시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시집을 정리했다. 자신의 지인이나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책을 보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나 다 아는 곳에 책들을 보내기로 했다. 분명히 헐값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술값이기 쉬웠다.

 

시를 포기하면서 할 말 같은 게 있을까요. 당신도, 그리고 당신도, 이것을 읽기 바랍니다. 쓰여있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 한참 들여다보고 마침내 그것을 훔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침내라고 말하기에는 고민이 없었다. 보자마자 훔쳐야 했으므로 천백 원. 결코 산 것은 아니었다. 그날 헌책방을 나오면서 책을 여섯 권을 샀는데, 그중에 하나는 600 쪽에 달하는 우주에 관한 책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넉넉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훔친 것도 모자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시집의 두께가 보이지도 않게 했다. 완벽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욕심'이라 말하며 들어주었다. 그 말에 조금 편해졌는지 웃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울지 않았을까. 그때 환하게 웃었던 얼굴이 천상 도둑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남는다. 정말 필요한 사람이 찾았다는 것처럼, 거짓. 그에게도 비췄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내가 조금 걱정되었다. 

 

나는 무엇으로도 이 책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계절에 영원히 봄이 오지 않는 곳에 있어 네게 그만 봄을 줄테니 달라고 해도 갖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여름으로 착각하는 뜨거움이라도 언제나 책등을 말끔하게 닦아 차갑게 놓을 것이다. 그날 나를 모른척해주었던 서가의 책들과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특히나 그에게 공범이라는 굴레는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편치는 않을 것인데,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그 마음을 내가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도 시집을 보면서 이곳에 있는 연유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리에서 말로 되어 이야기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시집을 훔쳤으니 나는 도둑으로서의 자세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길게 남기는 이유는 하나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책들이 누군가에게 갔을까 불현듯 고민하게 되는 날 당신의 시집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려 걱정하기를 포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고민이나 걱정이 염려로 더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또 불현듯 차서 도둑은 다리를 곧게 펴지 못하고 잔다, 구부정하게 시집을 읽는다. 

 

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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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aladin.co.kr/766487104/6487534 <어젯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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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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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눈, 말하지 않는 입
셔츠를 걸쳤으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몸을 읽는다. 몸을 내보이고 고개 돌린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녀의 시선이 책 밖의 사람과 눈 마주치려나 싶어 표지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시선을 '비껴가' 내 왼 편에 있는 '어떤 것'에 고정한다. 그녀와 마주치려면 책에서 '비켜서'야 한다. 읽기를 그만두어야 가능한 마주침. 그녀, 분명한 입술은 '다물어'져 있고 한 쪽 눈은 '감기지' 않는다. 

앞뒤 알 수 없는 그녀의 몸
 음영이 진하게 드리운 등-에 의심이 인다. 진한 고동색으로 음영은 근육이 아니라 가리기 위한 자국 같지 않은가. 깊게 팬 그림자를 지나면 둥글게 유선을 잡은 듯한 가슴팍, 동심원이 생기다 자국, 뻗으려다 만 쇄골을 따라가고, 마주치는 것은 명백히 돌아선 얼굴. 거의 다 드러낸 몸을 보고도 그것이 앞인지 뒤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녀를 넘기면 분명해질까. 책을 펼친다.

<혜성>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 
벌써 옷에 와인을 흘렸고 그 자리에 냅킨을 덮어놓았다. p16

일상의 언어가 기척도 없이 주저앉는 것은 공들여 쌓아온 사건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깊은 자국을 남긴다. 와인은 흘려지기 마련이고 그 자리를 냅킨으로 덮어두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혜성>의 아델이 발화하는 순간 일상의 언어는 절벽으로 옮겨와 그곳을 뛰어내려간다. 사뿐한 걸음으로 수직을 내딛는다. 이 장면들이 당연하게 연결되어 혹시 아침 산책길을 뛰는 것인가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거꾸로 읽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절벽을 뛰어내려 가고 있는 것이 맞다. 맨발로 흩날리는 치마, 절벽 끝은 궁금하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하루는 버그도프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쇼윈도에 맘에 드는 초록색 코드가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그 코트를 샀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서 다른 곳에서 처음 코트보다 더 좋은 걸 본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샀어요. 나중에 옷장 안엔 초록색 코트가 네 벌이나 걸려 있게 됐죠. p21

그녀는 재혼한 남편 필립의 과거를 사람들 앞에 폭로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대나 각오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필립은 자기가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데,..."라고 말을 잇는다. 이 말 뒤에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라는 부정이 와야 하 것만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온다. 그래서 아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옷장을 열었을 때 초록색 코트가 네 벌이나 걸려 있는 당혹스러움. 결국 무엇을 더 나았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나의 욕망은 조금도 나아진 적이 없다. 지리함, 한 번에 네 벌의 코트를 입을 수는 없는 그를 그녀는 무심히 바라본다.

폭로가 끝난 후, 둘은 여느 때의 일상을 맞는다. 필립은 '오늘'만 볼 수 있다는 혜성을 바라보기 위해 바깥에 서 있고 아델은 필립에게 집으로 가자며 부른다. 아델은 발을 '헛디디며'집으로 먼저 들어간다. 모든 비극은 오늘 시작하고, 모든 행복은 오늘 끝난다. 내일이 시작되면, 그들은 여전히 맞을 수밖에 없는 오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늘 앞에서 어젯밤의 모습은 어떻게 떠오를까. 이어서 책의 가장 끝에 실린 <어젯밤>을 읽는다.
  

'어젯밤'은 완전하다. 어떤 신이 와도 <어젯밤>을 '어제' 아닌 곳에 놓을 수 없다.

그럼, 행복한 나날들을 위하여. 그녀가 말했다. 그러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미소였다. 미소에 반대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거였다. 184p

월터는 안감힘을 쓰며 앉아있다. 행복을 들킬 수 없고 슬픔에 취할 수 없다. 아내와 보내는 마지막 저녁식사가 될 것이다. 월터는 아내가 원하는 죽음을 도와주기로 한다. "행복한 나날들을 위하여."라는 말은 역시 평소에 쓰이는 말이지만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발화해도 괜찮은 말일까. 위치를 배반하는 단어들이 소설의 간극을 벌리고 일상을 으스러뜨린다. 그녀는 자신에게 없을 '나날들'이라는 말을 살아갈 사람에게 건넨다. 그녀는 정말 그의 앞으로 '행복한 나날들'을 위해 건배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월터가 숨기고 싶었던 기쁨, 수잔나를 부른 자리에서 '행복한 나날들'을 빌고 있다. 그녀는 둘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의 들리지 않는 진동을 두드린다. 예고 없이 떨어지는 단어의 폭격을 뚫고 지나면 무심히 던진 보통의 인사가 물 한가운데 떨어져 비가 된다. 주변이 어두워진다. 
 
그는 접시를 꺼낸 다음 마른 수건으로 덮었다. 그렇게 하니 더 끔찍했다. 접시를 내려놓고 주사기를 집어 여러 가지로 손에 쥐어보았다. 결국 거의 다리 뒤로 감추는 모양새가 되었다. 192p
저녁식사가 끝난 후, 월터 부부와 수잔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월터는 앞의 소설 <혜성>에서 처럼 '자국'을 덮는 일은 반복한다. 덮는 것이야말로 자국의 명징한 해설. 덮어서 더 끔찍한 것은 덮은 것으로 인해 모양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른 수건은 주사기만을 덮는 것이 아니다. 용액을 채운 주사기가 접시에 담겨 냉장고에 들어가 있던 시간을 덮는다. 아니, 그 이전 수잔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의 아내로부터 변한 마음, 모든 총합이 마침내 주사기 하나로 환한다. 그는 그것을 덮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기가 고장 나길 바라는 마음은 안쓰럽다. 마음은 힘이 없고 행동은 마침내 주사를 그녀의 팔에 꽂는다.  

모두 잘못되었어요. 마리트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더니 수잔나를 향해, 아직 여기 있어요?
지금 가려고 했어요. 수잔나가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월터가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마리트가 흐느꼈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 p198

다음 날, 그녀는 살아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어젯밤, 아래층에서 월터는 수잔나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 출현함으로써 '어젯밤'을 만들었다. 거대하게 출몰한 그녀. 월터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안해.'라는 말은 아무에게도 쓰이지 못한다. 월터는 어젯밤의 자신이 되어 '미안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월터 자신도 듣지 못한다. '어젯밤'은 모두의 손을 떠나 완전해졌다. 어떤 신이 오더라도, '어젯밤'을 어제 아닌 곳에 놓을 수 없다. 
 '어젯밤'의 출현으로 수잔나는 떠났고 수잔나와 만났던 월터 자신도 떠났다. 죽음을 뚫고 온 그녀만 남았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이 말은, 무엇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일까. 자신의 죽음을 놓아 달라는 부탁일까. 혹시 그와의 시작을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까. 자신의 죽음이 잘못되어 수잔나를 영영 떠나보낼 수 있었으니, 그녀는 비로소 홀로 남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의 왼편
책을 덮는다. 책 읽으려는 사람 왼편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그녀. 그리고 동시에 입 '다문' 그녀. 집요한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을 읽는 이의 보이지 않는-'과거'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바라볼 뿐'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림이 의도하지 않았던 무엇을 더 오독해 버린 것일까. 

소설은 표지의 그녀처럼 '어떤 것'을 끈질기게 바라보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정확히 맞춰지는 것이 있다. 스스로 드러날 수 없었던 거짓이나 덮어 두고 싶었던 진실. 그것은 그녀의 몸처럼 등이나 가슴을 다 꺼내 보여도, 끝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만히 나의 왼편 허공을 쓰다듬는다. 가만히 '미안해'라고 말해본다.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영원히 올 수 없는 '어젯밤'에게. 그리고 앞으로 마주치게 될 수많은 '어젯밤'에 대한 예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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