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처럼, 우리는 1+1이 무엇인지 안다고 대답하지만, 안다는 지점을 좀 더 넓혀 1+1이 그 대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염두하지 않는다. 우리는 1+1의 값이 2와 같다고 말하지만, 이건 1+1과 2도 과연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기호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1과 2같은 것 대신 유영과 주혁을 보내 '안다'는 것을 얇게 쪼갠다.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일방적인 발화라는 점을 부디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 한다. 

 

아는 것에 익숙하며 그것을 말하는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러명 나와 유영을 안다며 말을 건다. 그들에겐 유영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는 상관없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아주 잘 알고, 당신은 이렇게 예쁘고, 그때 나와 술을 재밌게 마셨고, 지금도 그렇게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들은 유영과 아주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고 하지만, 유영은 자신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가 안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니다. 유영은 그가 아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남자들이 무엇보다 크게 당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되기'의 유영의 전략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당신을 잘 안다는 사람이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만남이 건강한 관계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유영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보내는 시간에 불쑥 들어와 수 년전의 자신을 호명하며 리듬을 깨는 일의 무례함을 생각할 수 있다. 유영을 알은채 하는 남자들은 유영을 만나서 너무 다행스럽지만 유영에게는 하나도 다행스럽지 않다. 무례하게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무안을. 이런 유영과 대화가 가능할 때는, 바로 상대가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 둘 때 뿐이다. 해서 남자는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으로 미루고, 그마져도 이내 '똑같은' 사람이지만 아주 '닮은' 다른 사람으로 밀어내고야 만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유영을 잘안다 생각한다. 잘 알기 때문에 유영이 조용히 책을 보는 테이블, 건너편에 허락도 없이 거침없이 앉아서는 말을 걸고 수년 전 출판사에서 다 함께 회식을 한 번한 것을 인생의 기억인것처럼 알은채 하며 인사를 해 온다. 이 뿐인가,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유영에게 왜 술을 먹고 다니냐며 화를 내고, 급기야 욕을 하고,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마지막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레파토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횡횡했다. 이에 가느다랗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을 하는데. '저를 아세요?' 이건 다시 말해 당신들이 말하는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내가 아니어서 너를 모르겠고 말겠다는 선언이다. 이제까지 없던 '언어', 이것은 남자들이 '알아왔던' 여자의 말이 아니다. 유영은 다르다. 유영은 얼마든지 자신을 버리고도 나를 세울 수 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은유가 아름답고 상냥한, 아주 교훈적인 영화다. 이 교훈은 아주 값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를 버릴 수 있을 때 만 비로소 보인다.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만 그건 거의 기적같은 일. 우리가 흔하게 착각하는 것은 '사랑'자체가 기적같다는 소문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워, 소중해, 이렇게 하늘만한 크기의 언어로 빚어내는 사랑은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상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구절구절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랑이란, 어제도 봤고, 엊그제도 봤고, 그렇게 몇년을 함께 해온 사람을 매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늘 겸손하게 두는 일이다. 이것은 사랑에 결코 익숙해 지지 않는 일이다. 너의 다정이 당연하지 않으며,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일은 죽는 날까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없던 언어로 되받아오는 '여자'에 깜짝 놀라는 남자들과,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다시 알아가고자 존댓말을 쓰는 남자가 있다. 영화는 뜬구름 잡는 사랑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비록 술취한 김주혁의 구부러진 발음이지만. 곡진하고, 잘 이해된다.  


유영이 술자리에서 나와 낮은 담벼락 아래서 우는 장면이 있다. 유영이 구부러져서 울때, 영화 내내 유영을 찾아 헤맨 주혁이 드디어 유영을 만난다. 유영이 술을 먹을 때 기억을 잃는지, 잃어버린 척 하는지, 자신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영은 그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알은채하며 떠드는 이들에게 '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영이 우는 것은 중요하다. 술먹고 우는 일은 자신도 알기 어렵고 우는 일이 몸에 다녀가는 일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가지의 이유가 한데 모여 울음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언어가 불가능한 사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주혁은 유영에게 왜 우냐고 묻지만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사실 그건 이유를 알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주혁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그저 둔다. 우는 일은 우는 일. 당신이 우는 일에 내가 있어 다행인 것이 그 장면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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