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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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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스피리추얼리티라니. 푸코는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푸코의 명석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의 이로에서 보면 푸코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706p 

이것은 부분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말을 수시로 털어낸다. 



라캉,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는 이 책은 과연 한 권인가. 이 뒤로 얼마나 많은 책이 그림자로 겹겹인가. 그러나 그 그림자가 얼마나 두껍간건에, 또한 이 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대도 이 책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볼만 하다고 추천한다. 일본의 혈기 왕성한 철학자가 '나를 따르라, 저 어둔 개념속으로 같이 가자' 는 투의 비장하지만 즐거운 말투로 논의를 진행한다. 문장은 꽤나 문학적이고, 비유라서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개념어나(아니 제목부터 야전과 영원이 도대체 무슨뜻인가) 한자어로 이해하면 그럴듯하지만 단어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읽기가 아주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일본인)저자와 좀더 가까운 말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책을 재미있게 읽는 것과 그것을 무엇으로 남기는 일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고, 그것은 한달이나 한달에서 이틀 정도 더해진 시간으로는 어림없었다. 또한 기억에 남는 페이지를 접는 일은 책에 대한 인상을 적을 때 아주 유용하지만 이번의 경우 하등의 쓸모도 없다는 것도 말해둔다. 접어놓은 페이지가 너무 많기 때문. 그러므로 이것을 따로 적는 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라캉과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며 넘어졌던 부분을 옮겨본다. 


그녀들이 새롭게 낳으려고 하는 텍스트=말씀=개념은 "그리스도의 신체"이고, 그것은 "정신적이고도 정치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니까. 신에게 안겨, 신과 "함께" 연애편지를. 212


저자는 라캉이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을 세 군데로 꼽는다. <거울>과 <팔루스>그리고 '여성의 향락'이 그렇다. 또한 라캉의 정신분석이 서양의 인식과 종교(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르장드르의 비판을 적극 옹호한다. 그러나 라캉이 정신분석으로 멀리 가고 싶었던 부분과 최대한 싸운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라캉의 언어는 정신분석은 하나의 경향으로서 역사의 것이라는 수긍이 이 문장으로 들었다.


신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비치지 않으므로 분할할 수 없고, 트레 위네르도 새겨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로 셀 수가 없다. 따라서 덧셈도 할 줄 모른다. "만능" "전능"이 몇 개나 있어서는 난감한 것이다.  고로 어떠한 신학상의 주석에서도 신의 <거울>에 관한 논의는 "미쳐 있는"것이 될 수밖에 없다.  280


라캉이 말했던 <거울>을 <사회적 거울>로 가져온 르장드르가 문제제기하는 부분이다.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이런 물음이 깜짝 놀라서 그 이후로 연쇄하는 생각이 즐거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다. 이는 거짓이다. 누군가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주체는 자신을 "출산한 두 사람"의 모습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안트로포스다. 태어나 낳고 말하고 쓰고 춤추는 자다. 후마니타스도, 초근대인도,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동물도, 벌거벗은 삶도 아니다.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전혀 새로운 시대"따위는 오지 않았다. 426


통쾌한 르장드르의 부분. 데카르트의 논의를 통쾌하게 부수며 현실로 발딛는 이야기를 전한다. 


18세기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지배하는 시장에서는 국가가 풍요로워지고 증대한다. 즉, 이는 힘을 갖기 위한 원리가 된다"고 논한다. "더 적은 통치로, 더 국가로 향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18세기가 내놓은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시장에 대한 "개입의 기술"로, "국가적 관리의 기술화"로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구자유주의자들은 "영원한 생시몽주의"라고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673


푸코의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시장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시장의감시를 받는 것입니다." 674 라고 설명한 것이 반가웠던 이유는 <거울> 이나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등의 이야기에서 건너와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세계가 이렇게 밖에 흘러갈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 같았고, 그래서 푸코가 나중에 대안으로서 말하는 것이 궁금했다. 그게 바로 처음 인용한 '영생'이다. 자기에의 배려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고 자신을 개선하는 일을 당부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적 실천"과 연결된다고 말했는데, 다소 맥이 빠지는 이야기 였음에도 한 가지 대안으로, 방법이 있긴 있겠구나 하는 위로였다. 


나는 가끔 물어본다. 미국의 금리 동결과 유가의 하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를. 말해줘도 알지 못하고, 안들 어쩔 수 없는 판임에도 궁금해 한다. 그러나 또한 나는 요새의 소설을 찾아보며 이를테면 김엄지나, 오랜만의 김경욱이나, 새로운 금희등을 찾아 보며 이들의 왜를 궁금해 한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세계를 '나'라고 불리는 한 장면이 감지할 수 있는 최대치를 더듬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는 것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하나의 숫자로 충분히 셀 수 있는 일이라고 믿으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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