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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고장나는 핸드폰, 편의점의 삼각김밥, 그리고 계약직-낭비 사회를 넘어서
관계는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서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내일 당신과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고 내년에는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불확실함이 관계를 만드는 동력이다. 어떤 실망과 실패에도 끊임없이 관계가 일어나는 까닭은 아마도 '끝'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정해져 있지 않다' 모르기 때문에 다가서고 만들어지는 관계들. 그러나 어떤 이와의 만남이 2년이나 5년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만나면서부터 알고 있다면 어떨까. 관계의 수명이 있다면.
운명이라는 말은 접어두자.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대체로 두 사람의 의지에 의해 관계의 지속이 결정된다. 이것이 당사자를 제외한 누군가의 결단에 의해 조종되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이것과 함께 생각해 보자. 거의 모든 물건의 수명이 '의도적으로 짧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수명이 끝난다. 그러니까 아무리 아껴쓰고, 애지중지해도 안된다. '정해져 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소비를 부르고 물건은 생활의 이야기를 간직하기도 전에 사라진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의 저자는 이것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부른다. 이러한 계획적 진부화가 위험한 까닭은, 물건의 진부화가 인간 진부화를 예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련의 일들을 적어본다. 약정 기간과 함께 고장나는 핸드폰, 편의점의 삼각김밥, 그리고 계약직.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 이름이나, 어쩌면 물건의 계획적 진부화가 인간마저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증명이 아닐까? 쓰고 버려지는 물건, 물건과 동일하게 언제든 대체 가능한 사람. 오늘날 어떤 유별난 능력자만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다.
저자는 낭비 사회, 계획적 진부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을 닮는 것과 탈성장 혁명으로 가는 것을 제시한다. '자연은 사실상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놀라운 말이다! 자연이 버리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엽적인 검약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구조적인 낭비를 막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버려진 것을 다시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품 지속 가능성, 수리 가능성, 계획적 재활용으로 대체함으로써 우리의 생태 발자국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매년 발표되는 성장률 수치에 사회는 요동한다. 경기를 예상하며 얼굴은 어두워진다. 성장이 부족한 것일까. 그럼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언제나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시장은 더 커지고, 소비는 더 늘어났으며, 슈퍼마켓은 부족한 것 없이 항상 물건이 가득하다.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은걸까. 얼마나 더 성장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물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탈성장을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은 행복하지 않다.' 때문에 성장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성장과 행복을 등식으로 여기며 '식민화 되었던 우리의 상상력'*** 역시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핵심은 아프다. 그간 지배당하고 있는줄도 몰라서 단단하게 꿰뚫렸고, 이 얇은 책으로 식민화된 생각에서 독립할 용기를 얻는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는 아주 얇은 책이다. 백여페이지가 간신히 넘는다. 이 책은 오랜만에 사회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철학임을 되새겨 주었다. 사회는 철학이 만든 생각의 테두리에서 최선의 가치를 추구해간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회가 그것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철학이 대두되어야 한다는 신호임을 알아봐야 한다. 이 책은 그 부름에 정확한 대답 제시한다.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기다렸나. 누구나 읽어도 쉽게 공감할 말들이, 생각의 전환을 불러올 논거와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103
**106
***111
탈성장 혁명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다시금 세계에 마법의 주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인류-우주론(anthropo-cosmology)의 출현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