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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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서울 거 없다고!"

모래가 깨끗하게 씻겨 발자국 하나 없다. 각종 물건이 파도에 밀려 올라와 사구 근처에 구불구불한 선을 그린다. 플라스틱 병, 막대기, 머리를 잃어버린 대걸레 자루, 더 멀리에는 빗장이 부서진 마구간 문까지.

"어느 집 말인지 몰라도 오늘 밤에 잘 돌아다니겠구나"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그런 다음 한참 걸어간다. 이 위는 파도의 소음과 멀어서 조금 더 조용하다. "가끔 어부들이 바다에서 말을 발견하는 거 아니? 언젠가 내가 아는 사람이 바다에 빠진 수컷 망아지를 끌고 나온 적이 있는데, 한참 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더구나. 아주 멀쩡했다. 너무 오래 돌아다니느라 지쳤을 뿐이었지."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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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젊은 시인이 쓴 한 구절이야. 그 무렵 그 말을 항시 입버릇처럼 하고 있었지.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 말을 해버리면 남에게 살해당하든지 자살하든지 머리가 돌아버려 눈 뜨고 볼수 없는 반인간적인 괴물이 되어버리든지, 그중 어느 것인가를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진실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어.
그 진실은 일단 입에 올려놓으면 가슴속에 재조정할 수 없는 신관을 작동시킨 폭탄을 안게 되는 거나 같은 그런 진실이지. 형은 눈뜨고 살아 있는 인간이 그러한 진실을 남한테 말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진실을 말할까. 하고 어떤 절대적인 순간에 결의하는 사람은 있겠지. 하지만 그는 진실을 얘기하고 나서, 살해당하지도 않고-자살하지도 않고 발광해서 괴물이 되는 일도 없이 계속 살아나갈 방도를 찾아내겠지."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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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있는 망자들은 실로 오랜 시간을 고통 받아왔기 때문에 이미 고통에는 익숙해져 있을 테니 오히려 질서 유지를 위해서 고통스러운 시늉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이런 지옥에서고통 받는 시간의 길이를 정의해둔 걸 보면 정말이지 편집증적이라네. 예를 들어, 이런 열지옥에서는 인간 세계의 천육백 년을 하루로 친 단위로 만 육천 년이 그들의 하루지. 그 길이란 상상을 초월한다네! 더구나 이 지옥에서 망자는 그들의 가장 긴 단위인 만 육천 년 동안이나 계속 고통을 받아야 하니까 아무리 고통에 둔한 망자라 해도 어느덧 익숙해지겠지." - P134

"그 애가 그렇게나 많은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니?"
"못 했지. 그렇기 때문에 넓은 종이를 전부 사용해서 작은 먼지 같은 점을 연필로 찍었어. 은하의 천체 사진을 명료한 점으로표현한 것 같은 화면이었지. 그것이 작품 18번 왈츠의 음의 총량이었어. 그 화면을 보고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계산한 거지. 그런데 그 계산 결과를 분실해버렸으니 아쉬운 거야. 나는 그 애가연필로 찍은 점들의 숫자가 분명 정확할 거라고 생각해."
그러더니 다카시가 뜻하지 않게 나를 위로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형수님 또한 독특해"
나는 다카시가 머리를 붉게 칠하고 목을 매고 죽은 친구에 대해 그 사람은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고, 그 말은방금 다카시가 한 말과 겹쳐지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들었다. S형 또한 독특한 인간이었다고 다카시가 말한다면 나는 더이상 그의 꿈의 기억에 대해서 그 어떤 아는척하는 수정도 시도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은 모두 죽어버린 그들, 타인에게 전달불가능한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어떤 것의 존재감을 진정으로 느낀 이의 말이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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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 어떤 문학적 기법들은 동일한 것으로 가정된 어떤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관점들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가능한 수렴(收斂, convergence)의 규칙에종속되기 마련인 데 반해서, 이러한 기법들은 마치 완전히 구분된 어떤 경치가 그것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각에 따로따로 대응하는 것과도 같이 그들 자체가 서로 다르며 발산(發散)하는(divergent) 그런 이야기들과 관계가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기법들에 따르면 발산 중인 계열들[이야기]로 이루어진합치가 존재하며, 이 합치는 곧 그 자체가 ‘위대한 작품‘ (Grande Oeuvre)과구분이 되지 않는 그 어떤 혼돈(chaos)을 필연적으로 구성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성된 비정형적 혼돈은 아무래도 좋은 그런 무조건적 혼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혼돈이 발산하는 모든 계열을 혼돈 자신 속에 ‘접혀진‘(compliquées) 상태로 취하면서 모든 계열을 접고 (compliquer) 있다면,
이와 동시에 각각의 현실적인 계열은 이 혼돈을 펼치고(expliquer) 있으며,
또 잠재적인 모든 계열은 이 혼돈을 잠재적인 자신의 계열 속에 감싸고(impliquer) 있기 때문이다. (36-37)

*세계를 읽는 두 방식1) "오직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낳는다." - 유사성 • 동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차이를 사유. 사본들의 세계. 재현. 표상(représentation)의 세계. 세계자체를 재현으로 제시.
2) "오직 차이만이 서로 유사하다." - 유사성, 동일성을 일종의 생산물처럼,
즉 바탕을 이루는 같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생산물처럼 생각하도록 인도.
세계 자체를 환영으로 제시. 다름 disparité. 유사성은 내적 차이의 생산물,
효과로 간주된다(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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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그림은 확언이 아니다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 사이의 분리, 유사와 확언의 등가성. 이 두 원칙이고전 회화의 긴장을 구성했었다. 후자는 언어 요소가 세심하게 배제된 회화에담론(말이 있는 곳에서만 확언(確言, affirmation)이 있다)을 재도입했다. 거기에서 고전 회화가 언어 외부에서 자신을 구성하면서도 말을 한다는그것도 아주 많이-사태가 비롯되었으며, 거기에서 고전 회화가 자신 아래에 이미지와 기호의 관계를 되살릴 수 있었던 일종의 공통의 자리(lieu commun)를갖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그리트는 언어 기호와 조형 요소들을 연결시키는데, 그러나, 어떠한 선행동위소(isotopie)도 설정하지 않는다. 그는 유사가 태연하게 근거하고 있는확언적 담론의 바탕을 회피한다. 그리고 그는 지표 없는 용적과 구도 없는 공간의 불안정 속에서 비확언적 순수 상사체들과 말의 언표들을 놀이하게 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말하자면, 바로 그 작동 절차의 기본 형식을 제공한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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