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뜻하는 자유는 고도의 장인적 성취 속에서 가능해지는 조작가능성의 정점에서 잠시 열리는 쪽문의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의 맛은 대체로 사적이며 중성적이다.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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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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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를 목표 지점으로 잡다 보니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는 기껏해야 ‘근대 사회의 미숙아‘들이 되고 만다. 근대의 잣대로 이전 역사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화를 내며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걸핏하면 ‘전근대적‘ 이라는 말을 욕설처럼 사용합니다. 전근대적 노사 관행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노사관계는 근대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말하는 그런 관행은 근대사회인 우리 사회의 병폐이지 전근대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치부를 과거 사회에 책임 지우는 우리 시대의 못된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한탄에 공감이 간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 무려 오백 년을 지속한 조선의 체제가 가진 ‘힘‘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잘 모른다고 말한다. 조선이 가진 ‘힘‘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유보할 대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선을 그것이 가진 ‘힘’으로부터 사유하려는 태도에 나는 완전히 공감한다. 나는 여전히 해석과 무관한 사실을 믿지 않지만, ‘사실을 해석에 동원‘하는 역사주의에 맞서 ‘해석에 저항하는 사실들‘을 드러내는 기록학사로서의 그의 태도를 지지한다(내 생각에는 그것이야말로 ‘해석에 맞서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49p, <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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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 대해 글을 쓰려면 현명하기도 해야 한다. 한편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지!" 라는 경고를 통과할 묘책을 찾아내야 하고, 개인의 구구절절한 사연들로 가득한 여성지 특유의 수다의 향연의 늪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인지 특히나 사회과학은 개인에 대한 언급을피하려 한다. 개인을 공적 의제로 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강해 질수록, 방송국에 소소한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개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적세계와 개인이 과잉으로 넘치는 사적 생활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처량하게도 진자운동을 한다.
-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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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들어온 걸인이
머핀 하나와 방울토마토 한 움큼을 가방에 쑤셔넣는다
손에는 김밥 서너 개를 쥐고
사람이 드문 쪽으로 간다

민트색 나무 그림을 마주하고
김밥을 우물거리다가
우물거리지 않는다.

두 개째 김밥을 입에 넣은 그가 나가고
그림을 그린 작가는 그가 있던 자리로 가서
자신의 그림을 본다.

-‘머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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