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과거 친하게 지내다가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나오코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는다. 나오코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들로 인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요양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지내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시간을 내어 그곳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나오코와 함께 지내고 있는 레이코라는 사람을 새롭게 알게 된다. 와타나베는 기존에 알고 지냈던 나오코는 물론이고 레이코와도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결코 적지 않은 페이지(대략 100page 이상)를 차지할 정도로 나름 비중있게 다루어지는데, 이것은 그 만남의 밀도가 상당히 진했음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그 만남의 물리적인 기간은 몇 일밖에 안됐지만 이렇게 소수의 인원들과 깊이있는 교제의 시간을 나누고 일상으로 돌아온 와타나베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도시의 삶에 다시금 적응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이 예전보다 늘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와타나베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요 근래 알게 된 미도리라는 친구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평소 와타나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지난 몇 일간 학교에서 안보이던 와타나베를 다시 만나게 되자 굉장히 반가워함과 동시에 적극적인 플러팅(?)을 이어나간다.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것저것 강요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와타나베는 그런 것이 없다면서 호감을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아직 미도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오픈할 정도의 친밀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판단하고, 그녀의 플러팅을 약간은 밀어내는 듯한 뉘앙스로 말한다. 자신이 아직 미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강요하는 게 없는 것일 뿐,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게 된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를 서로 강요하면서 살아가니까." - P248

"널 만난 덕분에 이 세상에 약간 적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P251

"저,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 하고 갑자기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묻겠는데, 그런 게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지?"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건 별로 없지." 하고 나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런 게 사물을 더욱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 - P256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쓸모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쓸모가 있냐 없냐는 그다음 문제야.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 P257

"그럼 난 혁명 따위는 믿지 않겠어. 나는 사랑밖에 믿지 않아." - P261

"병원이라서 그럴 거야." 하고 미도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다 그래. 냄새나 소리, 가라앉은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초조, 실망, 고통, 피로 ㅡ 그런 것들 때문이야. 이런 것들이 위를 억눌러서 식욕이 나지 않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 그리고 밥을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환자를 간호할 수도 없고. 정말이야.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네 분의 병간호를 해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어.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서 제때 밥을 먹을 수 없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돼." - P270

"다른 사람은 가끔 찾아와 동정만 하다 갈 뿐이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가래를 받아내고, 몸을 닦아주는 건 나란 말이야. 동정만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해결된다면, 난 남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 P270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라고." - P270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세요? 고대 그리스 사람인데,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리고 있어요. 최후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한테 물려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죠." - P275

"그(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의 특징은 여러 사건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져서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점이에요. 아시겠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 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또 모두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죠.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리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람의 정의가 통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또 아주 간단하게 풀려요.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로 가라. 너는 이리로 와라. 너는 저 사람과 손을 잡아라. 너는 거기서 잠시 가만히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이죠. 중재자 같은 거죠. 그러면 모든 일이 깨끗하게 해결돼요. 이걸 바로 ‘데우스엑스마키나deux ex machina‘ 라고 불러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언제나 이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갈라지고 있어요." - P275

"음식이 맛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 P277

2·26사건(1936년 일본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 사건) - P281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미도리.‘ - P281

사람의 죽음이란 건 작고 기묘한 추억들을 남기고 가는 모양이다 - P284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장을 청소하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서른여섯 바퀴쯤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는다. 자,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요즘 들어 곧잘 혼잣말을 하는 듯하다.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겠지. - P285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게 괴롭긴 하지만,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나의 도쿄 생활은 더 끔찍한 것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침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듯이 나도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85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 P285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고독하다. - P285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 P287

"확실히 결정된다는 건 좋은 일이야, 어쨌든." - P289

"스페인어 시작했어요?"
"응. 외국어는 한 가지라도 더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원래 난 그런 것에 소질이 있거든. 프랑스어도 독학이었지만 거의 완벽해. 게임과 똑같아. 룰을 하나만 제대로 알면 나머진 몇 개를 하든 모두 똑같은 거야." - P290

"세상이란 건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건 내 탓이 아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 P291

"선배는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없어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이봐,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도 있어. 그건 당연하잖아. 다만 나는 그런 걸 전제조건으로 인정할 수 없는 거야. 자신의 힘을 100퍼센트 발휘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거야. 원하는 건 가지고, 원치 않는 건 받아들이질 않아.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막히면 막힌 곳에서 다시 생각하지. 불공평한 사회란, 거꾸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지." - P292

"그렇지만 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과일이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는 건 아냐. 나는 나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어. 너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하고 있지." - P292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치가 떨려.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이란 것을 하지 않을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가사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야."
"가령 취직이 결정되어 다른 사람들은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거 말인가요?"
"그래, 그런 거야. 난 봄까진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독일어·프랑스어는 이미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대충 되어가고 있어. 이런 게 노력 없이 가능할까?" - P292

테린(닭이나 생선을 얇게 썰어 단지에 넣고 익힌 음식) - P295

"방황하지 않고, 상처 받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 - P300

"농어가 정말 맛있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동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것 같았다. - P300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 P301

"정말 같은 거야. 늦은 아침식사와 이른 점심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어. 먹는 것도 같고 먹는 시간도 같은데, 다만 부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 P301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 P301

하쓰미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적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P303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흔들어놓은 것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자신의 일부‘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이지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 P304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P313

"몇 번을 봐도 똑같은 것밖에 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할 수 없잖아, 우리도 줄곧 같은 걸 하고 있는데 뭘."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 P324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몸을 움직이니까 왠지 정신도 해방되는 것 같아." - P326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붙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워." - P331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긴 했지만 잠들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 P332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하고 그(나가사와)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 P343

봄이라는 계절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 - P344

내겐 어려서부터 그런 점이 있었다. 뭔가에 열중하면 그 밖의 주변 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 P346

"여행 같은 건 하나도 재미없어. 일을 하는 게 훨씬 좋지." - P348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뭘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고, 그럼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 P351

나는 그런 새로운 상황에 나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물론 내가 강해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 사기를 북돋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 P353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제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이란 걸 느낀다. 이봐,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고. 그리고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 P354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중략)...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 P357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야.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거지.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니까.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동안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이야. - P367

마치 편지를 씀으로써 산산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생활을 간신히 지탱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P367

"나로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온갖 문제가 엉켜 있는 데다 그게 오래 지속되어왔기 때문에, 사실 어떤 마음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나도 그 여자도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책임 같은 거야. 그래서 난 그걸 저버릴 수가 없어.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설사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해도." - P373

"나를 가질 때는 나만을 가져야 해. 그리고 나를 안을 때는 나만을 생각해야 해."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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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에티오피아 G1 시다모 보나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일단 포장을 뜯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향이 너무 좋아서 드립백을 꺼낸 뒤에 포장지 속 잔향까지 맡아볼 정도였으니 뭐 말 다했다. 그리고 최근 몇 일간 날이 다소 더웠던 관계로 아이스로 해서 마셨는데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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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상권을 완독했고 오늘은 하권을 읽는다. 상권 마지막 부분에서 유키의 아버지인 마키무라 히라쿠는 자기 가족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주인공인 화자에게 유키를 정기적으로 만나며 돌봐줄 것을 요청하지만 화자는 그 부탁을 거절한다. 사람을 의무적으로 만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키가 필요로 할 때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화자 본인도 양 사나이와 관련된 다소 비밀스런 얘기를 유키와 나눌 수 있는데다, 그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인간적인 친밀감도 어느정도 쌓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에서 화자는 이제 갓 열세살인 유키가 몇 년 후에 어떻게 성장해있을지를 조심스레 상상해보다가 문득 인간의 최고 전성기(절정기)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이와 관련된 것인데, 이건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얘기로 보인다. 여기서의 핵심은 어떤 시기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인생에서 절정기가 반드시 있으며 그 고점을 찍고 나면 거기서 조금씩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든 생각은 자기 인생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좌절해있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금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기 인생에 전성기가 왔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기묘하게도 인간에게는 각기 절정기라는 게 있다. 거기에 올라서 버리면, 다음에는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기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분수령이 닥쳐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열두살 때 절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별로 시원찮은 인생을 보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올라간다. 어떤 사람은 절정에서 죽는다. 많은 시인이나 작곡가들이 질풍처럼 살다가 너무 급격히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든 살이 넘어서도 힘찬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그대로 편안히 죽었다. 이것만큼은 끝이 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이다. - P12

당신이 행복해지지 못할지도 몰라, 하고 양 사나이가 말했다. 춤을 추는 수밖에 없어. 모두가 감탄할 만큼 잘 추는 거지. - P13

"사람은 불합리한 사랑에 빠지는 때가 있어. 더 좋아하는 상대를 고를 수 없을 때도 있고.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 P15

"어른의 세계에서는 모두들 서로 농담을 하고 웃거든. 어쩌면 시시한 농담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해." - P15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 - P16

혼자서 지내는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능력을 익히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 P24

"모두들 나이를 먹어. 세상도 변해. 신화라는 건 모두 언젠가는 죽어버려. 영원히 존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P27

"그런 때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모든 게 지나가. 시간문제야." - P35

"모든 사람들이 룰을 존중하며 지켜 주는 건 아니니까. 상대를 잘못 선택하면 지독한 꼴을 당하게 돼." - P37

"모두들 각기 원하는 방식이 달라. 그래서 이따금 엇갈림이나 오해가 생겨나지. 그리고 사람이 죽는 수도 있어." - P38

"죽은 사람에 관한 일이면 급히 생각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 어차피 죽었으니까. 좀 더 기운을 차린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도 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어차피 죽은 거야, 아주, 완전히, 죽었어. 해부되고 냉동된 상태로 있단 말이야. 네가 책임을 느끼든, 어쩌든 간에 되살아나지 않아." - P38

"여행이란 건 그런거야. 생각이 나면 바로 떠나는 거지. 그게 요령이라고.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어. 시베리아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 모자라면 저쪽에서 사면 돼. 저쪽에도 무엇이든 팔고 있으니까." - P45

"사람에겐 각기 나름대로의 능력이라는 게 있는 거야." - P45

"긴장을 푸는 거야. 몸의 힘을 빼는 거야. 그뿐이야." - P46

"뭐든 경비로 처리되는군." - P49

나는 고개를 저으며, 메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다음에 언젠가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무거운 화제다. 너무 무겁고 너무 뜨겁다. - P51

틀림없이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방법을 떠올렸다. 잘될지 어떨지 여부를 떠나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 P51

세상에는 가지각색의 이름들이 있다. - P53

"세상이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고 있어. 자신이 가난뱅이인지 부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물건은 풍부하게 있는데, 갖고 싶은 게 없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쓸 수 없어." - P54

"우리 집은 좀 구식이라 그런 식으로 가르쳤어. 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숫자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분수에 맞게 살면 되는 거라고 말이야.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통 크게 힘차게 살아가라고 말이야. 그건 하나의 사고방식일 수는 있어.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지. 하지만 분수에 맞도록 살아간다는 관념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런 사고방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래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말았지. 통 크게 굴지 않게 되고, 자질구레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만 남았어. 최악의 상태야.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나는 통 알 수가 없어." - P55

"일하는 건 좋아해,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정말 답답해. 이따금 두려워질 때가 있어." - P55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생이 있지"라고 나는 말했다. "사람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Different strokes for different folks." - P56

같은 세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확실히 여러 가지 종류의 수고를 덜게 된다. - P56

"감추고 있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기가 귀찮았을 뿐이야. 무슨 글자냐, 그런 이름이 흔한 거냐, 어느 곳 출신이냐 같은 것만 물으니까.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남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야.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하니까." - P57

"그 어둠은 사악한 게 아니고, 네게 악의를 품고 있지도 않아. 그러니 두려워할 건 없어. 거기에 어떤 것이 살고는 있지만ㅡ너도 그 발소리를 들었지ㅡ결코 너를 해치지는 않아. 무슨 상처를 입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만일 또 그 어둠과 마주치면, 가만히 눈을 감고, 거기서 엘리베이터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돼. 알겠어?" - P61

그럼 다음 뉴스 - P63

될 대로 되라지, 라는 것이다. 점을 따라 선을 그어 갔더니, 이렇게 됐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다. 나는 춤을 잘 추고 있는 것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사태 진행을 차례로 더듬어보고, 그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해 봤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썩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한 번 더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 할지라도, 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일단 발은 움직이고 있다. 스텝을 계속 밟고 있다. - P64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물결처럼 몰려왔다 몰려가곤 했다. 이따금 그 소리에 섞여 내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역시 지구의 거대한 영역 중의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 P67

이상한 일이지만, 여자의 목덜미는 나이테처럼 차례차례 나이를 먹어 간다. 왠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소녀는 소녀와 같은 목덜미를 하고 있고, 성숙한 여인은 성숙한 목덜미를 하고 있다. - P69

"괜찮아, 또 내일이 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일이 지나면 또 모레가 있어" - P70

너희는 너희끼리 하면 돼. 나는 나대로 해나간다고. 나는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세계가 좋단 말이야. - P73

주문을 받으면 무엇이든 씁니다. 요컨대 눈 치우기와 같은 거죠 - P79

마치 히치콕의 영화 장면 같다고 나는 느꼈다. 점점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간다. 무엇이 정상이며 무엇이 뒤틀려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게 되어 간다. - P83

"식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당신은 언제나 그래. 일이 잘되어 가면 식욕도 생겨." - P83

"훈련하면 됩니다." - P90

"그녀의 사진은 뭐라고 할까, 시라는 것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언어를 고르고 골라 뼈를 깎듯이 자아낸 것이, 그녀의 사진에서는 한순간에 구현되어 있는 겁니다. 구현(enbodiment). 그녀는 공기 속에서, 빛 속에서, 시간의 틈에서 그것을 날쌔게 잡아내서,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심적 정경을 구현하는 거예요." - P91

"무엇이 탁 갈라지며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 아무런 예감도 없이 갑자기 세계가 튕겨 나가면서 갈라지는 거예요. 시간이나 빛 따위가 dissilient 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천재예요." - P92

"천재는 매우 희귀한 존재입니다. 일류 재능이라는 건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에요. 천재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은, 천재를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겠죠. 그러나ㅡ"라고 그는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는 것처럼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혹독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자아를 바늘처럼 찌릅니다." - P92

"나는 알게 됐어요. 이는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이런 만남은 일생에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 건 알 수 있어요, 확실히.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하면 아마 나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 P93

"마음의 평온은 손에 넣기 어려운 거예요." - P94

소용돌이든 맹렬한 회오리든 모래바람이든 간에 스스로 선택한 이상은 어떻게든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 P94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았단 말인가? - P95

나는 너무 냉정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든, 둘 다 온전하게 갖고 있든, 시인이든 시인이 아니든 간에, 여기는 거칠고 힘든 세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른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적어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상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너무 냉정하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지만. - P96

"친구란 제삼자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발적인 관계입니다. 내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 P98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중간한 친구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세계입니다. 우선 그것을 분명히 알아 둬야 해요." - P98

나이를 먹으면 암시의 암시성이라는 것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암시성이 현실의 형태를 띠기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있게 된다.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 P100

"난 어떻게 해야 해?"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라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 가는 거야. 옛날부터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 P102

"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 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구나?"
"그 이상은 운이야"라고 나는 말했다. - P104

"틀림없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어." - P105

"천천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무엇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사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면 돼.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알 수 있게 돼. 하지만 모두들 너무 분주해. 재능이 넘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공평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거든."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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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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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앞부분을 읽다보면 저자의 전작인 《양을 쫓는 모험》에 나왔던 내용과 소재들이 적잖이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1973년의 핀볼》에서 봤던 얘기도 일부 등장한다. 그러므로 가급적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을 먼저 읽어보시고 이 《댄스 댄스 댄스》를 읽어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이렇게 하셔야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재미나 교훈들도 더 많이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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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보면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A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A‘라고 말하는 식이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뭐 이런 거는 그냥 각자의 스타일이라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용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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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별개로,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참고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부‘와 ‘문학‘이라는 별칭으로 지칭되는 경찰 2명이 주인공을 취조하는데, 이건 뭐 단지 물리적인 폭력만 없을 뿐이고 취조받는 사람에게 엄청난 정신적 데미지를 안겨준다. 진짜 별것도 아닌 걸 하나 붙잡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본문에서 (프란츠) 카프카적인 냄새가 난다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류의 취조였다. 어느정도 끝났다 싶으면 또 물어보고 그것이 끝나면 또다른 걸 물어보는 식으로. 소설 속 화자도 엄청 답답했을 것 같은데, 독자인 나도 보면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특별히 두 번째로 밑줄친 문장에서 얼추 느낄 수 있듯이 실질보다는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런 문화(?) 로 인해 파생되는 엄청난 비효율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조사받는 사람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조사하는 사람도 피곤하게 만든다. 마음같아선 이러한 비효율이 당장에라도 개선되면 참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책임‘같은 문제로 인해 개선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일에 대해 말하는 방식엔 여러 가지 있다. - P355

"유감이지만 관청이란 게 그런 곳 아니겠어. 서류가 전부지. 서류와 인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곳이나 마찬가지지." - P358

지독한 장소다. 여기서는 온갖 수단을 써서 인간의 자아며 감정이며 자부심이며 신념을 압살하려고 든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남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짓이겨 내고, 개미굴 같은 관료적 미로 속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사람이 품는 불안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태양의 광선을 멀리하고,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게 한다. 불쾌한 땀을 흘리게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곰팡이가 생겨난다. - P359

"어쩌면 나 자신을 벌주고 있었는지도 몰라." - P365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머리에 나사를 조일 필요가 있다. 조일 수 있을 만큼 꽈악 말이다. - P370

"뭔가 이렇게, 그런 것을 본 사람의 감정이 공기처럼 이쪽으로 전달되는 거라고.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야.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난 그것을 느끼고, 형태를 바꿔 놓을 수가 있어. 하지만 그건 정확한 형태는 아니고, 형태 비슷한 거야." - P370

"유키는 내 속에 있는, 혹은 내게 달라붙어서 존재하고 있는 감정이나 사념을 느끼고, 그것을 예컨대 상징적인 꿈처럼 영상화할 수 있다, 그말인가?"
"사념?"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 말이지." - P371

"그뿐이 아니야. 그 강렬하게 생각한 것을 만들어 낸 것, 그런 것이 있어. 아주 강렬한 무언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런 게 있으면 나는 느껴 버리거든. 감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걸 나 나름대로 보는 거지. 하지만 꿈같은 건 아니야. 텅 빈 꿈. 그래. 그런 거. 텅 빈 꿈이야. 거기엔 아무도 없어.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아. 왜 그 텔레비전의 밝기를 굉장히 어둡게 하거나 굉장히 밝게 했을 때 같은 거. 아무것도 안 보여.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 있는 거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걸 느껴. 거기에 있는 것은 양 모피를 뒤집어쓴 사람이다, 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아니, 그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나쁜 존재가 아니야. 그래도 보이진 않아. 불에 쬐면 나타나는 그림처럼 그건 거기에 존재해.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어.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보이는 거야. 형태가 없는 형태인 거지." - P371

"난 예지는 아니고, 거기에 있는 걸 다만 느끼는 것뿐이야. 뭐랄까, 무슨 일인가 일어나려면 일어나기 위한 분위기 같은 게 있겠지. 이해가 가? 예컨대 철봉을 하다가 다치는 행위에는 무엇인가 방심이랄까 과신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 들떠 가지고 제멋에 겨워 있다든가. 그런 감정의 파도 같은 것이 나한텐 굉장히 민감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리고 이건 뭔가 위험해,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렇게 되면 텅 빈 꿈 비슷한 게 훌쩍 튀어나와. 그것이 튀어나오면...... 일어나는 거야, 그게. 예지가 아니야. 더 어렴풋한 거야. 근데 그게 벌어져. 보인다고. 하지만 이젠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을 하면 모두 나를 귀신이라고 부르니까. 그저 보는 거야. 여기서 이 사람은 화상을 입지 않을까 하고. 그러면 화상을 입거든.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런 건 너무 지독하지 않아? 스스로가 싫어져. 그래서 닫아 버려. 닫아 버리면 스스로를 싫어하지 않아도 되니까." - P375

"양 사나이는 정말로 있어?"
"정말로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호텔 안에 그가 살고 있는 장소가 있어. 호텔 안에 또 다른 호텔이 있거든. 그건 평소엔 보이지 않는 장소야. 하지만 그건 어김없이 거기에 남겨져 있어. 나를 위해 남겨져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장소니까. 그는 거기에 살아 있으면서, 나와 여러 가지 것들을 연결하고 있어. 그건 나를 위한 장소고, 양 사나이는 나를 위해 일하고 있어. 그가 없으면, 나는 여러 가지 것들과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그가 그런 것들을 관리하고 있거든. 전화교환원처럼."
"연결한다고?"
"그래. 내가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무엇인가를 연결하라고 말이야. 그러면 그가 그것을 연결해." - P375

"양 사나이는 아주 옛날부터 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옛날부터 있었지.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나는 그걸 줄곧 느껴 왔었어. 거기엔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양 사나이라는 또렷한 형태를 가지게 된 건, 그다지 오래전의 일이 아니야. 양 사나이는 조금씩 조금씩 형태를 정하고, 그가 사는 이 세계의 형태를 정해 왔거든. 내가 나이를 먹는 데에 따라서 말이지. 왜 그럴까? 나도 알 수 없어. 아마 그럴 필요가 있어서겠지. 살아가기 위해, 그런 것들의 도움이 필요해진 거겠지. 그렇지만 나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어.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라. 줄곧 생각하고 있는데 모르겠어. 바보 같지." - P376

"아저씨도 귀신 조직의 한 사람인 거야" - P376

"학교 같은 데 억지로 갈 건 없어.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돼. 나도 잘 알고 있어. 거긴 형편없는 곳이야. 꼴 보기 싫은 놈이 잘난 척 뽐내고 있어. 형편없는 교사가 거들먹거리고 있지. 명백히 말해서 교사의 팔십 퍼센트는 무능력자 아니면 사디스트야. 또는 무능력자인 데다 사디스트야.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서, 그걸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학생들한테 내던지지. 무의미하고 자질구레한 규칙이 너무나 많아. 사람의 개성을 압살하다시피 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상상력의 부스러기도 없는 바보 같은 놈이 좋은 성적을 받거든. 예전에도 그랬어. 지금도 분명 그럴테지. 그런 건 변하지 않거든." - P378

"어떻게든 되지.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 P378

"글을 쓴다고 할 만한 게 못됩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한 문장을 제공하고 있을 뿐입니다. 뭐든 상관없죠. 글자가 쓰여 있기만 하면 되지만, 그건 누군가 반드시 써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제가 쓰고 있는 겁니다. 눈 치우는 일 같은 겁니다. 문화적인 눈 치우기." - P386

"수준이 낮으면, 모든 것은 아주 단순해지죠." - P387

"무엇이 정의인지 아무도 알지 못해. 다들 알지 못하지. 눈앞의 일로 다투고 있을 뿐이야." - P387

"완고하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저 나름의 생각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뿐입니다." - P395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 손으로 만든 진공관 앰프와 마찬가지야. 노력과 시간을 들여 그런 것을 만들기보다는, 오디오 숍에 가서 신품인 트랜지스터 앰프를 사는 편이 싸게 먹히고, 소리도 좋아. 망가지면 곧 수리하러 오지. 신품을 살 때에는, 신품 대금의 일부로 중고품을 팔 수도 있지. 생각의 시스템 운운할 시대가 아냐. 그런 것이 가치 있던 시대가 확실히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지. 사고방식도 그래. 적당한 것을 사갖고 와서 연결하면 돼. 간단하다고. 그날부터 곧바로 사용할 수 있어. A를 B에 삽입하면 되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해낼 수 있지. 낡아 버리면 교환하면 돼. 그러는 편이 편리해. 시스템 따위에 구애 받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돼. 눈치 빠르게 행동할 수가 없어. 남들이 귀찮게 여긴다고."
"고도자본주의 사회" 하고 나는 요약했다. - P396

현실이 점점 용해되어 어둠 속으로 녹아 흡수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들이 그 본래의 형태를 잃고 뒤섞여 버리고, 의미를 상실하면서 하나의 카오스가 된다. - P397

피곤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이 용해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용해되어 하나의 둥근 카오스의 공 모양을 이루고 있다. 마치 일종의 천체 같은 형태를. - P397

"시스템도 좋지만, 버티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거든." - P398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댄스 스텝같은 거예요. 습관적인 겁니다.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음악이 들리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죠. 주변이 바뀌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스텝이어서, 주변을 생각하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스텝이 틀어져 버리니까요. 단지 서투를 뿐이에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요."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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