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목차를 비롯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대략 훑어보았는데, 아마도 영감을 주는 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예술을 만드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만들 수밖에 없는
멋진 상태에 놓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라.
-로버트 헨리 Robert Henri - P5

모든 것은 인류가 그저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덕분이다. - P17

어차피 맛도 아름다움도 제 눈에 안경, 정해진 기준이 없다. - P17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쓰임에는 때가 있으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다
(전도서 3장 1~5절까지의 내용) - P18

그러나 때의 흐름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거대한 창조 행위에 동참하지만 그 주체는 아니다. 이끄는 대로 행하여질 뿐이다. 예술가는 자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주가 정해놓은 시간표를 따른다. - P18

창조를 통한 우주의 위대한 펼쳐짐 속에서 생각과 아이디어, 주제, 노래, 모든 예술 작품은 물질세계에서 제 옷을 찾을 때까지 천상에 머무르며 정해진 일정대로 무르익어간다.
그 원료를 지구상으로 끌어내려 모양을 바꾸고 세상과 나누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다. - P19

모든 사람은 우주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옮기는 통역사와 같다. 특정한 순간에 공명하는 에너지를 끌어당기는 가장 섬세한 안테나를 가진 이가 가장 훌륭한 예술가가 된다. - P19

많은 위대한 예술가가 처음에는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리한 감각을 발달시킨다. 그들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더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모든 것을 남보다 더 강렬하게 느낀다. - P19

들을 수도 없고 확실하게 정의되지도 않은 신호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찾으려고 하지 마라. 그게 답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예측하려고도 분석하려고도 하지 마라. 대신 에너지가 나에게 들어오도록 뻥 뚫린 공간을 만든다. 그러려면 마음 한쪽에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차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공간. 우주가 만들어내는 창조의 물질을 그리로 끌어당길 수 있게. - P20

일생에 걸쳐 훌륭한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아이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 방식을 연습을 한다면, 그대는 자유로워지고 우주의 시간표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 - P21

아이디어는 세상에 도착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우리를 통해 표현의 방법을 찾는다. - P22

원료는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원천은 밖에 있다. 우리를 둘러싼 지혜,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 선물에 있다. - P24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거나 기억하거나 알아차린다. 경험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꿈, 직관, 잠재의식의 조각 등 온갖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로 밖에 있는 재료가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 P24

마음이 보기에 이 재료는 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환상이다. 우리 안에는 광범위한 원천의 자그마한 조각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 작은 조각들이 마치 수증기처럼 무의식에서 피어올라 한데 엉기어 하나의 생각을,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 P24

창의성의 원천을 구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구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형태를 바꿀 뿐이다. 비로 변하여 바다의 일부가 되고 또다시 증발해 구름으로 돌아간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생각 에너지의 순환이다. 에너지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결합해서 돌아오므로 새로워 보인다. 세상에는 똑같은 구름이 없다. - P25

처음 접하는 예술 작품이 깊은 차원의 울림을 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익숙한 무언가가 그저 낯선 형태로 돌아온 것이니까. 혹은 깨닫지 못할 뿐,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내내 찾고 있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같은. - P25

아이디어를
현실로 바꾸면
훨씬 작아 보인다.
세상의 것이 아니었지만 세상의 것이 된다. - P26

상상에는 한계가 없다.
물질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은 두 영역 모두에 존재한다. - P26

무엇을 알아차리는가는 바꿀 수 없지만 알아차리는 능력은 바꿀 수 있다. - P28

우주는 우리가 인식하는 만큼만 크다. 인식을 키우면 우리의 우주가 확장된다. 우주가 확장되면 창조에 쓸 수 있는 원료의 범위가 넓어진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범위도 넓어진다. - P29

깊이 들여다보는 능력은
창의성의 뿌리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껍데기를 지나쳐
겉으로 보이지 않는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 P30

예술가는 어린아이의 인식법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유용성이나 생존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하게 음미하고 경이로워하는 상태로. - P32

예술가는 기존의 이야기에 유연성을 허락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신념에 쉽사리 들어맞지 않는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필터링하지 않은 원재료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 - P32

창조 행위는 그릇에 든 내용물의 총합을 잠재적인 재료로 삼고 그중에서 지금 유용하거나 중요해 보이는 요소들을 선택해 다시 표현하는 것 - P33

우리를 통해 끌어당겨진 이 원천을 책이나 영화, 건물, 그림, 요리, 사업처럼 우리가 착수한 프로젝트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 P33

우리가 창조한 작품을 세상과 공유하면 다시 순환이 시작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원재료가 되어줄 수 있다. - P33

원료가 들어온다.
필터가 거른다.
그릇이 받아낸다.
대개 이 과정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 P33

기본 시스템을 우회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유용하다. - P33

원천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그릇의 수신 능력을 확장하는 것은 훈련으로 가능하다. - P33

악기를 바꾸는 것이 음악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 P33

창조의 도구가 무엇이든
진정한 도구는 나 자신이다.
나를 둘러싼 광활한 우주의 초점이
나를 통해 맞춰진다. - P34

예술가들은 보통 최종 작품이 더 큰 욕망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 P35

우리가 창조하는 이유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기 위함이 아니다. 창조 행위는 신비한 영역에 들어가려는 시도다. 초월하고 싶은 욕망이다.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내면세계를 살짝 공유할 수 있게 허락한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는 포털이다. - P35

영적인 요소가 없으면 예술가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작업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세계는 과학의 영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이로움과 개방성의 감각을 제공한다. 이성의 세계는 좁고 막다른 골목이 가득할 수 있지만, 영적인 관점은 무한하며 멋진 가능성을 불러들인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무한하다. - P36

영성을 단순히 연결에 대한 믿음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마법을 믿는 것이라고 여겨도 괜찮다. 우리가 믿는 것들은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무게감을 가진다. - P36

영성의 실천이란 나 혼자만 덩그러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표면 뒤에 더 심오한 의미가 있다. 우리 주변의 에너지는 우리의 작품을 고양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우리는 설명을 초월하는 훨씬 거대한 무언가, 즉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계의 일부이다. - P36

영적인 에너지의 활용은 창조 행위에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 그 원칙을 움직이는 토대는 믿음이다. 즉,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 - P36

작품을 만들 때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작위성을 벗어나는 수준으로 자꾸만 우연이 발생한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내면의 지혜가 나아갈 방향을 부드럽게 일러주는 것만 같다. 믿음은 이해할 필요없이 그 방향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 P36

영성이라는 말은 주로 지성의 영역에 몸 담은 사람이나 그 단어를 종교와 동일시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 P36

숨이 턱 막히게 하는 순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라. 아름다운 노을, 특이한 색깔의 눈동자, 감동적인 음악, 복잡한 기계의 우아한 디자인에. - P37

작품이나 의식의 조각, 자연의 요소가 어떻게든 더 큰 무언가에 다가가게 해준다면, 바로 그것의 영적인 요소가 드러난 것이다. 영성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한다. - P37

과학이 결국 예술에 이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술이 영성에 이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 P38

예술의 재료는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대화, 자연, 우연한 만남 속에 섞여 있고, 기존 예술 작품에 들어 있다. - P39

창조에 관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라. 현재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켜줄 새로운 방법을 가리키는 단서를 찾아내라. - P39

우리가 열려만 있다면 메시지는 항상 우리에게 도달한다. 책을 읽다가 기막힌 인용문을 발견하고, 영화를 보다가 마음을 움직이는 대사가 나와서 돌려 본다. 때로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던 답일 수 있다. 혹은 어딘가에서 계속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며 관심을 끌거나 지금 가고 있는 길을 확증해주는 생각일 수도 있다. 이런 메시지는 매우 미묘하다. 항상 있지만 놓치기 쉽다. 단서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그냥 지나간다. 연결 고리를 파악하고 어느 방향으로 이어질지 생각하라. - P40

평범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이유를 자문해보라.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더 큰 의미는 무엇일까? 이 과정은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단서를 통제할 수 없고, 의지로 드러나게 할 수도 없다. 때로는 답을 찾거나 길을 확인하려는 강력한 의도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편, 오히려 의도를 완전히 버려야 길을 찾을 수 있을 때도 있다. 예술가의 일에서 필수적인 것이 이런 신호를 해독하는 것이다. 더 많이 열려 있을수록 더 많은 단서를 찾을 것이고 애쓸 필요도 없어진다. 생각을 더 적게 하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답에 기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P40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방법은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장을 읽는 것이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연관성이 발견되어도 그저 우연일 수 있지만 우연만은 아닐지 모른다. - P41

"만약 의사가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다고, 신체 일부를 제거하라고 하면 믿지 말라." - P41

단서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시계의 섬세한 작동 원리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마치 우주가 내 편이고 내가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겠다고 작은 알람들을 울려서 알려주는 것 같다. - P41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나에게만 보이는 것을 찾아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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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화자인 주인공이 13살 소녀인 유키와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보통은 이런 문장을 만나면 이야기의 어떤 맥락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려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그냥 순수하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었다.

다소 주관적인 해석일수도 있겠만, 이 문장에 대한 독자인 나의 생각을 적어보자면,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경우에는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또는 ‘상황에 띠라 정상의 기준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라고도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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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이어 읽다가 주인공인 화자와 그의 친구이자 나름 유명 연예인인 고탄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다만 대화이긴 한데, 거의 고탄다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 90% 이상이고 주인공인 화자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간단하게 맞장구쳐주는 정도다.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점은 겉으론 화려해보이고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남부러울 것 없어보였던 고탄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별로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삶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부분이었다. 고탄다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으면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느끼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TV나 기타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삶을 보며 부러워 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브라운관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삶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어두운 그늘이 있는 듯하다. 물론 보여지는 게 화려하다보니 연예인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멋있어 보일 때가 많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고탄다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비단 연예인들 뿐만아니라 얼핏 보기에 화려해보이고 멋있어보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한 외면에 걸맞지 않는 어두운 내면을 갖고 있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주눅들거나 속지 말고 각자 자신의 내면을 충실히 가꾸어 나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보인다.

"굉장히 정상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엇나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거든." - P106

"사람과 사람이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 P107

그것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스타일이라는 걸 갖고 있어. 존경은 할 수 없어도 무시할 수는 없어. - P123

천둥은 약간 시끄러운 공중의 방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P126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항상 실수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그래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런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같은 실수를 세 번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지.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건 분명해." - P126

나는 문득 결혼 생활을 생각해 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생활 중에는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고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런 때에는 아내 역시 내가 말을 걸어도 몇 시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렇게나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일까, 하고 나는 곧잘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런 때에는 참을성 있게 사과하고 설명하면서 그 상처가 아물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마 나아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 P128

그녀가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집을 나가 버렸다. 그때뿐이다. 결혼 생활ㅡ그건 아주 기묘한 것이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용돌이와 같은 거야, 딕 노스가 말하는 것처럼. - P128

"용서한 건 아니야"라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야. 그건 정말로 잘못된 일이었고 나는 큰 상처를 받았어. 알겠어?" - P128

"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주 날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 수 있을 때와 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하지만 날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돌고 초조해져. 자신이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이야. 이런 느낌이 이해돼?"
"이해돼"라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 P133

"언제나 즐거워?"
"반드시 그렇진 않아"라고 나는 말했다. "불완전한 생물 둘이 모여 하는 일이니까, 언제나 잘될 수만은 없지. 실망하는 때도 있어. 기분 좋게 날고 있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수도 있어." - P133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잘될 확률이 커져가" 하고 나는 계속 설명했다. "요령을 알게 돼. 날씨와 풍향을 측정할 수 있게 되지. 하지만 대체로 그에 비례해서 성욕 자체는 서서히 감소되어 가지. 그런 거야."
"비참해" 하고 유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 P134

나는 원래 키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선을 따라 흐름을 추적해 왔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틈엔지 이 모양이 되어 버렸다. 기묘한 사람들이 잇달아 나타나, 모든 일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 P135

갑자기 나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해서 바짝 말라 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 버린 것이다. - P141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리고 있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기분." - P150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 무엇과 무엇이 이어져 있다. - P153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P154

"왠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제나 죽음이라는 게 내 옆에 있어. 그리고 기회가 오면, 그것이 어느 틈엔가 문득 모습을 나타내거든." - P155

"전쟁할 때보다 평화로울 때가 훨씬 더 분주해요." - P156

"혼자서 해야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 P157

"자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생각하는 거야." - P158

아메는 그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연기를 빨아들인 건 두세 모금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어 잔디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은 내게 시간의 유해 같은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시간이 잇따라 죽어 가며 불태워져 하얀 재로 변해 가는 것이다. - P159

혼자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고, 실패해도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 있으면 혼자 농담을 하고 혼자 킥킥거리며 웃으면 됐다. 아무도 ‘그런 농담은 시시하다‘ 고는 말하지 않았다. 지루하면 재떨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됐다. 내가 가만히 재떨이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도 ‘왜 재떨이 따위를 바라보고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좋든 싫든 나는 혼자 보내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 P162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있다고." - P166

아무리 풍기문란한 일이라도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단순히 선악의 척도로는 잴 수 없게 된다. 거기에 그것의 독자적이며 독립된 환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환상이 생겨나면, 순수한 상품으로서 제 기능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고도자본주의는 모든 틈새로부터 상품을 발굴해 낸다. 환상, 이것이 키워드다. 매춘이든, 인신매매든, 계층 간의 차별이든, 개인 공격이든, 도착적 성욕이든, 무엇이든 간에 예쁘게 포장해서 예쁜 이름을 붙이면 훌륭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 P171

혼란스러웠다. 연결이 얽히고설켜있는 것이다. 우선 그 얽히고설킨 것을 어떻게든 해소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다. - P172

해 질 녘의 푸른빛이 투명한 브러시로 거듭 칠해져 가는 것처럼 점차 진해지면서, 밤의 어둠으로 변해 갔다. - P173

어떤 종류의 것은 어떤 종류의 것과 숙명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 P174

사람에게는 각각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 P174

나는 파와 매실 무침을 만들고 가다랭이포를 뿌리고, 미역과 새우 초절임을 만들고, 고추냉이절임과 무를 간 것에 잘게 썬 어묵을 섞어 두고, 올리브오일과 마늘과 살라미를 사용해 채썬감자를 볶았다. 오이를 잘게 썰어 절임을 만들었다. 어제 만들어 둔 녹미채 조림도 남아 있었고, 두부도 있었다. 양념으로는 생강을 듬뿍 사용했다. - P176

"간단해. 모두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냐. 익숙해지면 금방할 수 있어. 요는 집에 있는 재료로 얼마만큼 만들 수 있느냐는 거지." - P176

"사람마다 각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 Different strokes for different folks." - P176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해." - P179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하고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손에 넣으려고 하면 웬만한 건 다 손에 들어오는데, 정말로 갖고 싶은 건 손에 들어오지 않거든." - P183

"필요라는 건 그런 게 아냐. 자연스레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 그건 그냥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거야." - P183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 그런 세계야. 미나토구와 유럽 자동차와 롤렉스를 손에 넣으면 일류로 여겨지지. 쓸모없는 짓이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요컨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필요라는 것은 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야. 자연히 생겨나는 게 아니야. 날조되는 거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필요한 것이라는 환상을 부여받는 거야. 간단해. 정보를 자꾸 만들어가면 돼. 주거지라면 미나토구입니다. 승용차라면 BMW입니다. 시계는 롤렉스입니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정보를 부여하는 거야. 그러면 모두들 전적으로 믿어 버려. 주거지라면 미나토구, 승용차는 BMW, 시계는 롤렉스라고 말이야. 어떤 종류의 인간은, 그런 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진짜 차별화가 된다고 생각해. 타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결국 타인과 똑같아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거야. 상상력이 부족해. 그 따위 것들은 인위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아. 단순한 환상이야. 난 그런 일들이 정말 지긋지긋해. 좀 더 착실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안 돼. 나는 프로덕션에 얽매여 있어. 옷을 갈아입히는 인형이나 마찬가지야. 빚을 지고 있으니까,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어. 내가 이러고 싶다고 말해도, 내 말 따위는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다고. 미나토구의 근사한 맨션에서 살며, 마세라티를 타고, 파텍 필립 시계를 차고, 고급 콜걸과 자고. 어떤 종류의 인간은 그런 것을 부러워하겠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냐.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생활을 하는 한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거야."
"이를테면 사랑"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이를테면 사랑. 그리고 평온. 건전한 가정. 단순한 인생" 하고 고탄다는 말했다. - P185

"난 하려고만 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온갖 가능성을 다 갖고 있었지. 기회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어. 하지만 나는 그저 인형이 됐지. 밤이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간단히 데리고 잘 수 있어. 거짓말이 아냐. 정말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정말 원하는 여자와는 합쳐질 수 없어." - P186

"이렇게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너밖에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정말이야.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어. 내가 마세라티보다는 스바루를 타고 싶다고 말하면, 모두들 내가 머리가 돈 모양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정신병원에 끌려가지. 유행이라고, 정신병원에 가는 게. 지겨워. 연예인 전문 정신과 의사란 토한 걸 청소하는 일의 전문가 같은 거야" - P186

"하지만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건 모두, 모두, 모두가 지겨운 얼간이 같은 놈들이야. 정말 구역질이 나. 순수하고 절망적인 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 P187

"쓸모없는 놈들이 주위에 우글거리고 있어"라고 고탄다는 토해 내듯이 말했다. "도시의 욕망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흡혈귀 같은 자들이야. 물론 모두 다 형편없는 건 아니야. 착실한 사람도 약간은 있어. 하지만 형편없는 놈들이 너무 많거든.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요령이 좋은 놈들. 지위를 이용해서 돈이나 여자를 손에 넣는 놈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세상의 욕망의 웃물을 마시며 통통하게 살이 찌는 그런 세계야. 넌 알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형편없는 놈들이 많아. 이따금 그런 놈들과 술을 마셔야 할 때도 있어. 그런 때는 계속 나 자신을 타이르고 있어야 한다고. 분통이 울컥 치밀어도 목을 졸라 죽이진 말자. 이런 놈들을 죽이는 건 에너지의 소모니까, 라고 말이야." - P187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걸, 구멍을 파고 외치는 거야. 입 밖에 내면 후련해져." - P188

"어느 부분에선 그래. 나름대로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결코 행복한 건 아니야. 너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어떤 종류의 것이 결여되어 있어.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그저 댄스 스텝을 계속 밟고 있을 뿐이야. 몸이 스텝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계속 춤을 출 수는 있거든. 개중에는 감탄해 주는 사람도 있지. 그러나 사회적으로 나는 완전한 제로야." - P189

"어떻게 될지도 몰라. 안 될지도 몰라. 아무도 알 수 없어. 모두 똑같아." - P189

"너는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취향을 따지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거기서는 ‘취향이 좋은 사람‘이란 ‘성격이 비뚤어진 가난뱅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야. 동정 받을 뿐이지.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 - P191

엉거주춤하게 일을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그 엉거주춤한 모양을 다음 단계까지 질질 끌고 가게 된다. 아무리 나아가도 모든 사물이 엉거주춤한 모양의 어두컴컴한 그림자에 물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상으로 삼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다. - P197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알고 있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어떤 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는 당황해서 움직일 필요는 없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 무슨 일이 다가온다. 가만히 응시하면서, 어스름 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를 배웠다.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움직인다. 만일 필요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움직인다.
좋아, 천천히 기다리자. - P198

"공상에는 예산이라는 게 없거든. 중산층들이나 하는 걱정은 아예 집어치우는 게 좋아. 자질구레한 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멋지게 해보자고." - P199

무엇이든 경비로 처리되는 것이다. 감동적인 세계다. - P204

"호텔은 호텔이고, 너는 너야." - P207

"알고 있어, 그쯤은. 하지만 이따금 혼란에 빠져.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돼. 나라는 존재나 감각, 사생활 따위가 호텔이라는 우주 속에 끌려 들어가 사라져 버리는 거야."
"누구나 그래. 모두들 어디엔가 끌려 들어가 경계선이 보이지 않게 되지. 너뿐만이 아냐.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나는 말했다. - P207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어. 하지만 그릇된 것, 잘못된 것, 일그러진 것이야. 그 속에 있으면 굉장히 답답해. 굉장히 공기가 무거워. 마치 납 상자 속에 처넣어져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어."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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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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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인생도 없다. 자기 삶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절대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인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좌절들을 겪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나갈 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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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소설의 원제이자 비틀즈의 노래 제목 중 하나인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핵심 가사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곡에서도 그렇고 돌고돌아 결국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뭐랄까...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궁극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느덧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 뒷부분에 나온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있는데, 본문을 읽으며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각자가 느낀 점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nd when I awoke I was alone(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임을 알았다)." - P425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를 생각하면 저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시킨 변화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 그 당시에 아주 대단한 큰일로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하고." - P428

돌아갈 곳 없이 홀로 외떨어진 존재들의 각개격파식 생존투쟁이 있을 뿐 - P429

"우리들은 이제 공동투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개개인의 자기 내면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한 번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자신을 이화異化시키느냐,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가느냐, 마치《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가 양을 삼킨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삼켜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P429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ㅡ그것뿐이었다." - P429

‘사랑‘을 찾아, ‘양‘을 찾아, 또는 ‘태엽 감는 새‘ 를 찾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인 ‘나‘는 어딘가 더 먼 곳으로 존재의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나‘가 찾아간 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텅 빈 세계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으로 향한 출구가 아닌 이 세계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며,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P430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어떤 시대적인 이념이나 관념의 목표를 상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자신과 혈육 그리고 친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소원과 이별, 그리고 죽음과 같은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상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머금고 길 위에 서 있는 자이다. - P430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전혀 만난 적 없는, 그러나 우리의 내면 속에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와 시대를 만나게 된다. - P430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 P431

존재를 좇는 모험은 끝없이 계속되고, 결국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같은 뫼비우스의 띠를 ‘나‘와 함께 계속 더듬어가는 것이다. 목적도 없이, 아무런 해결도 없이. 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텅 빈 세계에서 체념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재생‘과 ‘재활‘을 지향하며 다시 일어선다. 바로 그 점에 하루키 문학의 강점과 절대적인 매력이 있다 - P431

존재와 세계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길의 끝이 아니라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에게는 모험을 떠나는 여정들 그 자체가 바로 재생을 위한 작은 통과제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 P431

하루키 문학의 출발과 중심은 ‘실연失戀‘이라고 볼 수 있다 - P436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 또는 가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유). - P436

무릇 모든 ‘상처‘ 란 결국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아무리 행복한 모습으로, 또는 건강한 모습으로 남의 눈에 비치거나 비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해도, 가슴속에 응어리로 맺힌 상처는 곧 상실의 아픔이 되어 평생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 P437

타자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주고 깊이 사귄 결과로써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하루키 작품 속의 ‘나‘는, 그 이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자폐적이며 내향적인 삶을 보내면서 현실 사회에서 되도록 멀리 도망치려고 한다. - P437

흔히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라고 한다. 설사 그 ‘추억‘이 아로새겨진 체험 자체는 그 시점에서는 쓰리고 고통스런 것이었다고 해도 추억을 옛이야기로 말하게 될 때는, 지나온 시간이 여러 고통과 시련을 정화해버리고 감미로움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도 ‘나‘의 추억담으로 이야기되며, 그 추억이 형성됐던 시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이젠 먼 옛이야기로 사라져버리고 아주 달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 P438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사실로 꾸며진 이야기라고 해도 작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일은 쉽게 써질 수 없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작가의 직접 또는 간접의 체험과 사상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는 읽고 즐기는 것 이외에 그 값진 문학성이랄까 작품성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 P439

‘나‘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를 향해 묻는 것은, 결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그것은 존재의 근거에 대한 동요로서 받아들여지며, ‘나‘에게 있어 세계가 명확한 윤곽을 잃고 있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 P442

"사랑과 슬픔은 같은 길로 온다." _독일 속담 - P443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읽을 때마다 조금씩 새로운 매력이 보이는 데 있다." _《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스무 번 이상 읽은 이용성 씨 - P446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 - P447

무엇인가 결점이 있는 등장인물들이 자기 나름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하는 데 감명을 받았다. _한국에서 출간된 하루키의 작품을 열 번 이상 읽은 임선집 씨 - P448

"인생은 고통스런 일도 많지만, 사랑에 의존하면서 극복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그 소설(상실의 시대)에서 배웠다." _임선집 - P448

"아무도 타인은 남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랑과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문제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도 하루키의 강한 메시지인데, 그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어보지 않고서는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_임선집 - P448

감성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호 이해가 진일보한다. - P451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하찮은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섬세한 관심을 통해, 오늘의 젊은이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 표출하는 데 있다. 이 점이 곧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그의 마성적인 매력이 되고 있다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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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그의 여사친 중 한 명인 미도리와의 대화가 쭉 이어진다. 미도리는 기존에 자신이 만나던 남자친구와 무언가가 맞지 않았는지 결별하기로 하고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쉽게 말해 여사친에서 여친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물론 와타나베도 미도리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고, 한동안(약 2달간) 떨어져 지내면서 이래저래 외롭고 쓸쓸했던 터라 미도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던 타이밍이기도 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얼마만큼 좋냐고 물어보자 그에 대한 답으로 와타나베가 한 말인데, 표현이 좀 독특하긴 하지만 호감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명확해보인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마음 속에는 미도리 외에도 한 명의 여사친이 더 있었다. 바로 나오코다. 고교시절부터 기즈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친구이고, 이성적인 감정도 어느정도 있었던 터라 그녀를 쉽사리 떠나보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기즈키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외진 곳에서 요양 중이라 자주 만나는 것이 어려웠지만, 와타나베에게는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나오코를 버리고 미도리에게 간다는 결정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 내용이 나온 챕터의 제목이 ‘갈등의 벼랑 끝에서‘ 인데, 개인적으로는 와타나베의 내면을 아주 잘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버릴 만큼 좋아." - P375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건 무섭도록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걷고, 호흡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 P379

온갖 일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진실하다면 누구도 미궁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 자신을 가져. - P380

연애란 원래 그런거야.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것도 하나의 성실한 모습이니까. - P380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며, 은행 예금처럼 그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나갈 순 없어. - P381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넓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마. 놔둬도 만사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받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마련이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 P381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봐. 나(레이코)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고.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해봐. - P381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 - P381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며, 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었다 - P383

돈이 떨어져가면 나는 사나흘 막노동을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를 가도 뭔가 할 일거리는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하나씩 이동해갔다. 세상은 넓고, 어디를 가든 이상한 일이나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 P384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끊임없이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서,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선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하고. - P386

나는 그런 장소에서는 슬픔이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봐, 걱정하지 마, 난 여기 있잖아? 하고 나오코는 수줍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내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치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구나, 하고. 그래, 죽음이란 건 별거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 어둠에 싸인 파도 소리 사이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 P386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P387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P387

어이, 기즈키. 너는 오래전에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지. 그리고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린 거야. 때때로 난 나 자신이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 P390

고텐바(후지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관광 도시) - P392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당신 덕분이야.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곳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번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거길 나온 거야.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 P393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 P395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거지. - P399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 P404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남아 있는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어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야." - P404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느끼면 돼. 그래서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에서 뭔가 배우면 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 당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잖아.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지라고.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요양원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棺같은 전철을 타고서." - P406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당신도." - P406

"좋아,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생각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하고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 멋있었지?" - P409

"편지 같은 건 그저 종이일 뿐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 P413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P413

"내 몫과 나오코의 몫까지 합친 만큼 행복해야 돼." - P413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 P414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14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 P419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 P419

‘숲[森]‘이라는 회의문자會意文字는 분명히 나무 ‘목木‘이라는 상형문자 세 개를 조합한 것. - P419

흔들거리는 세 그루의 나무. 그것은 나무‘숲[森]‘이라는 한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으면, 나무(木) 한 그루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데 호응해서, 같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또 한 그루의 나무. 그러면 또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 한 그루도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그런 숲[森]의 나무(木) 세 그루를 조합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은 삼각관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 있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한마디로, ‘나‘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형의 ‘사랑‘ 의 갈등을 그린 것 - P420

예로부터 연애소설이란 대개 ‘삼각관계‘를 둘러싼 끝이 없는 ‘도도메구리(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사나 불당의 주위를 도는 것)‘ 라고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만남, 진전, 예상 밖의 사태, 갈등, 파국, 추억,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짜맞추는 것으로서, 하루키는 ‘순도 100퍼센트의 연애소설‘을 써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100퍼센트 삼각관계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설사 두 사람만이 마주 보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의 눈 속에 비치는 또 하나의 ‘나‘를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420

인간은 두 사람만으로는 상대를 끝까지 떠받쳐줄 수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떠받쳐주기보다는 함께 쓰러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 P421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쓰러지려는 나무를 그 양편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는 구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상실의 시대》의 기본 틀이랄까, 원형이라고 할 뼈대를 이루고 있다. - P421

두 개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 있지만, 화살 세 개가 합쳐지면 부러뜨릴 수 없다 - P421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나가사와와 하쓰미라는 이상적인 커플조차도 마지막에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둘만의 마주 보는 관계는 결국 그 어느 쪽인가를 상처 입히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22

애절함과 자살이 이 소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있어서 다름 아닌 관계의 좌절이랄까, 서로가 공유하는 환상의 차질이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그것은 ‘연애‘나 ‘성애性愛‘라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는 해결도 해소도 안 된다. 그런 두 사람의 ‘이각관계‘ 자체가 그런 마음의 병을 낳는 원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4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단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제삼자라고 할 만한 존재인 것은 본래부터 아니다. 그것은 삼각의 형태로 만들어진 사람들끼리 관계 맺는 그물코가 차례차례 이어져가는 네트워크의 일부이며, 그와 같은 삼각형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 P422

정신을 앓는 것과 자살한다는 것은, 그러한 ‘숲‘ 속에서 갑자기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삼각의 그물코가 터진 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꿰매지 않고서는 고칠 수가 없다. - P422

불완전한 삼각관계야말로 나오코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세 발 달린 솥의 발 하나가 떨어져나가게 됨으로써 솥은 기울어져 넘어져버렸던 것이다. - P424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삶‘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직선을 더듬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령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어떤 역방향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진 것이 아닐까 - P424

갖가지 모양으로 서로 얽혀있는 다양한 것이 ‘삶‘이라는 모양을 짜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이라는 다양한 무늬 속에 수많은 삼각형이 묻혀 있듯이, 서로서로 삼각형의 한 변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424

‘나‘는 마지막엔 두 사람의 죽은 자를 ‘생‘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한 변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삶과 죽음의 양쪽 세계에 걸친 삼각관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삶은 죽음을 각각 빛 속의 그늘, 그늘 속의 빛처럼 서로 엇갈리며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 P424

멋있고 예쁜 그녀라는 존재도 혼잡스런 도시 속의 희미한 반딧불이처럼 바로 사라지고 마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 P425

울창한 숲 속에서 마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고독. - P425

이 소설이 애절한 감상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애인이 죽고,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모든 애절하고 가슴을 저미는 추억이, 마치 꿈속에서 빚어진 일이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말기 때문이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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