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그의 여사친 중 한 명인 미도리와의 대화가 쭉 이어진다. 미도리는 기존에 자신이 만나던 남자친구와 무언가가 맞지 않았는지 결별하기로 하고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쉽게 말해 여사친에서 여친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물론 와타나베도 미도리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고, 한동안(약 2달간) 떨어져 지내면서 이래저래 외롭고 쓸쓸했던 터라 미도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던 타이밍이기도 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얼마만큼 좋냐고 물어보자 그에 대한 답으로 와타나베가 한 말인데, 표현이 좀 독특하긴 하지만 호감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명확해보인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마음 속에는 미도리 외에도 한 명의 여사친이 더 있었다. 바로 나오코다. 고교시절부터 기즈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친구이고, 이성적인 감정도 어느정도 있었던 터라 그녀를 쉽사리 떠나보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기즈키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외진 곳에서 요양 중이라 자주 만나는 것이 어려웠지만, 와타나베에게는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나오코를 버리고 미도리에게 간다는 결정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 내용이 나온 챕터의 제목이 ‘갈등의 벼랑 끝에서‘ 인데, 개인적으로는 와타나베의 내면을 아주 잘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버릴 만큼 좋아." - P375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건 무섭도록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걷고, 호흡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 P379

온갖 일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진실하다면 누구도 미궁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 자신을 가져. - P380

연애란 원래 그런거야.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것도 하나의 성실한 모습이니까. - P380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며, 은행 예금처럼 그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나갈 순 없어. - P381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넓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마. 놔둬도 만사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받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마련이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 P381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봐. 나(레이코)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고.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해봐. - P381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 - P381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며, 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었다 - P383

돈이 떨어져가면 나는 사나흘 막노동을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를 가도 뭔가 할 일거리는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하나씩 이동해갔다. 세상은 넓고, 어디를 가든 이상한 일이나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 P384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끊임없이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서,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선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하고. - P386

나는 그런 장소에서는 슬픔이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봐, 걱정하지 마, 난 여기 있잖아? 하고 나오코는 수줍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내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치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구나, 하고. 그래, 죽음이란 건 별거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 어둠에 싸인 파도 소리 사이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 P386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P387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P387

어이, 기즈키. 너는 오래전에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지. 그리고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린 거야. 때때로 난 나 자신이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 P390

고텐바(후지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관광 도시) - P392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당신 덕분이야.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곳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번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거길 나온 거야.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 P393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 P395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거지. - P399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 P404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남아 있는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어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야." - P404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느끼면 돼. 그래서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에서 뭔가 배우면 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 당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잖아.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지라고.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요양원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棺같은 전철을 타고서." - P406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당신도." - P406

"좋아,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생각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하고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 멋있었지?" - P409

"편지 같은 건 그저 종이일 뿐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 P413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P413

"내 몫과 나오코의 몫까지 합친 만큼 행복해야 돼." - P413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 P414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14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 P419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 P419

‘숲[森]‘이라는 회의문자會意文字는 분명히 나무 ‘목木‘이라는 상형문자 세 개를 조합한 것. - P419

흔들거리는 세 그루의 나무. 그것은 나무‘숲[森]‘이라는 한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으면, 나무(木) 한 그루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데 호응해서, 같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또 한 그루의 나무. 그러면 또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 한 그루도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그런 숲[森]의 나무(木) 세 그루를 조합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은 삼각관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 있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한마디로, ‘나‘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형의 ‘사랑‘ 의 갈등을 그린 것 - P420

예로부터 연애소설이란 대개 ‘삼각관계‘를 둘러싼 끝이 없는 ‘도도메구리(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사나 불당의 주위를 도는 것)‘ 라고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만남, 진전, 예상 밖의 사태, 갈등, 파국, 추억,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짜맞추는 것으로서, 하루키는 ‘순도 100퍼센트의 연애소설‘을 써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100퍼센트 삼각관계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설사 두 사람만이 마주 보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의 눈 속에 비치는 또 하나의 ‘나‘를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420

인간은 두 사람만으로는 상대를 끝까지 떠받쳐줄 수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떠받쳐주기보다는 함께 쓰러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 P421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쓰러지려는 나무를 그 양편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는 구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상실의 시대》의 기본 틀이랄까, 원형이라고 할 뼈대를 이루고 있다. - P421

두 개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 있지만, 화살 세 개가 합쳐지면 부러뜨릴 수 없다 - P421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나가사와와 하쓰미라는 이상적인 커플조차도 마지막에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둘만의 마주 보는 관계는 결국 그 어느 쪽인가를 상처 입히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22

애절함과 자살이 이 소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있어서 다름 아닌 관계의 좌절이랄까, 서로가 공유하는 환상의 차질이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그것은 ‘연애‘나 ‘성애性愛‘라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는 해결도 해소도 안 된다. 그런 두 사람의 ‘이각관계‘ 자체가 그런 마음의 병을 낳는 원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4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단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제삼자라고 할 만한 존재인 것은 본래부터 아니다. 그것은 삼각의 형태로 만들어진 사람들끼리 관계 맺는 그물코가 차례차례 이어져가는 네트워크의 일부이며, 그와 같은 삼각형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 P422

정신을 앓는 것과 자살한다는 것은, 그러한 ‘숲‘ 속에서 갑자기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삼각의 그물코가 터진 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꿰매지 않고서는 고칠 수가 없다. - P422

불완전한 삼각관계야말로 나오코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세 발 달린 솥의 발 하나가 떨어져나가게 됨으로써 솥은 기울어져 넘어져버렸던 것이다. - P424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삶‘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직선을 더듬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령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어떤 역방향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진 것이 아닐까 - P424

갖가지 모양으로 서로 얽혀있는 다양한 것이 ‘삶‘이라는 모양을 짜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이라는 다양한 무늬 속에 수많은 삼각형이 묻혀 있듯이, 서로서로 삼각형의 한 변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424

‘나‘는 마지막엔 두 사람의 죽은 자를 ‘생‘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한 변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삶과 죽음의 양쪽 세계에 걸친 삼각관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삶은 죽음을 각각 빛 속의 그늘, 그늘 속의 빛처럼 서로 엇갈리며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 P424

멋있고 예쁜 그녀라는 존재도 혼잡스런 도시 속의 희미한 반딧불이처럼 바로 사라지고 마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 P425

울창한 숲 속에서 마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고독. - P425

이 소설이 애절한 감상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애인이 죽고,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모든 애절하고 가슴을 저미는 추억이, 마치 꿈속에서 빚어진 일이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말기 때문이다. - P4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과거 친하게 지내다가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나오코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는다. 나오코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들로 인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요양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지내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시간을 내어 그곳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나오코와 함께 지내고 있는 레이코라는 사람을 새롭게 알게 된다. 와타나베는 기존에 알고 지냈던 나오코는 물론이고 레이코와도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이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결코 적지 않은 페이지(대략 100page 이상)를 차지할 정도로 나름 비중있게 다루어지는데, 이것은 그 만남의 밀도가 상당히 진했음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그 만남의 물리적인 기간은 몇 일밖에 안됐지만 이렇게 소수의 인원들과 깊이있는 교제의 시간을 나누고 일상으로 돌아온 와타나베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도시의 삶에 다시금 적응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이 예전보다 늘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와타나베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요 근래 알게 된 미도리라는 친구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평소 와타나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지난 몇 일간 학교에서 안보이던 와타나베를 다시 만나게 되자 굉장히 반가워함과 동시에 적극적인 플러팅(?)을 이어나간다.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것저것 강요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와타나베는 그런 것이 없다면서 호감을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아직 미도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오픈할 정도의 친밀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판단하고, 그녀의 플러팅을 약간은 밀어내는 듯한 뉘앙스로 말한다. 자신이 아직 미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강요하는 게 없는 것일 뿐,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게 된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를 서로 강요하면서 살아가니까." - P248

"널 만난 덕분에 이 세상에 약간 적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P251

"저, 와타나베,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 하고 갑자기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묻겠는데, 그런 게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지?"
"일상생활에 무슨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건 별로 없지." 하고 나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런 게 사물을 더욱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 - P256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 쓸모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쓸모 없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쓸모가 있냐 없냐는 그다음 문제야.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 P257

"그럼 난 혁명 따위는 믿지 않겠어. 나는 사랑밖에 믿지 않아." - P261

"병원이라서 그럴 거야." 하고 미도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다 그래. 냄새나 소리, 가라앉은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초조, 실망, 고통, 피로 ㅡ 그런 것들 때문이야. 이런 것들이 위를 억눌러서 식욕이 나지 않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져. 그리고 밥을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환자를 간호할 수도 없고. 정말이야.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까지 네 분의 병간호를 해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어. 무슨 일이 갑자기 생겨서 제때 밥을 먹을 수 없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돼." - P270

"다른 사람은 가끔 찾아와 동정만 하다 갈 뿐이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가래를 받아내고, 몸을 닦아주는 건 나란 말이야. 동정만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해결된다면, 난 남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 P270

"입으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 중요한 건 대소변을 받아내느냐의 여부라고." - P270

"혹시 에우리피데스를 알고 계세요? 고대 그리스 사람인데,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리고 있어요. 최후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한테 물려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죠." - P275

"그(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의 특징은 여러 사건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져서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점이에요. 아시겠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 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또 모두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죠.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리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람의 정의가 통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카오스가 닥쳐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또 아주 간단하게 풀려요. 마지막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예요. 너는 저리로 가라. 너는 이리로 와라. 너는 저 사람과 손을 잡아라. 너는 거기서 잠시 가만히 있어라. 하는 식으로 말이죠. 중재자 같은 거죠. 그러면 모든 일이 깨끗하게 해결돼요. 이걸 바로 ‘데우스엑스마키나deux ex machina‘ 라고 불러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는 언제나 이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갈라지고 있어요." - P275

"음식이 맛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 P277

2·26사건(1936년 일본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 사건) - P281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미도리.‘ - P281

사람의 죽음이란 건 작고 기묘한 추억들을 남기고 가는 모양이다 - P284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장을 청소하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서른여섯 바퀴쯤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는다. 자,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요즘 들어 곧잘 혼잣말을 하는 듯하다.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겠지. - P285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게 괴롭긴 하지만,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나의 도쿄 생활은 더 끔찍한 것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침 침대 속에서 너를 생각함으로써, 자, 태엽을 감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네가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듯이 나도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85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다. - P285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고독하다. - P285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 P287

"확실히 결정된다는 건 좋은 일이야, 어쨌든." - P289

"스페인어 시작했어요?"
"응. 외국어는 한 가지라도 더 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니까. 원래 난 그런 것에 소질이 있거든. 프랑스어도 독학이었지만 거의 완벽해. 게임과 똑같아. 룰을 하나만 제대로 알면 나머진 몇 개를 하든 모두 똑같은 거야." - P290

"세상이란 건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건 내 탓이 아냐.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 P291

"선배는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없어요?"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이봐,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 인생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도 있어. 그건 당연하잖아. 다만 나는 그런 걸 전제조건으로 인정할 수 없는 거야. 자신의 힘을 100퍼센트 발휘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는 거야. 원하는 건 가지고, 원치 않는 건 받아들이질 않아.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막히면 막힌 곳에서 다시 생각하지. 불공평한 사회란, 거꾸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지." - P292

"그렇지만 난 하늘을 올려다보고 과일이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는 건 아냐. 나는 나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어. 너보다 열 배는 더 노력하고 있지." - P292

"때때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정말 치가 떨려. 어째서 이 사람들은 노력이란 것을 하지 않을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할까 하고 말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가사와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야."
"가령 취직이 결정되어 다른 사람들은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그런 거 말인가요?"
"그래, 그런 거야. 난 봄까진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독일어·프랑스어는 이미 되었고, 이탈리아어도 대충 되어가고 있어. 이런 게 노력 없이 가능할까?" - P292

테린(닭이나 생선을 얇게 썰어 단지에 넣고 익힌 음식) - P295

"방황하지 않고, 상처 받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 - P300

"농어가 정말 맛있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동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것 같았다. - P300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 P301

"정말 같은 거야. 늦은 아침식사와 이른 점심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어. 먹는 것도 같고 먹는 시간도 같은데, 다만 부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 P301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 P301

하쓰미라는 여성 속에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녀 스스로 강한 힘을 내어 상대를 뒤흔드는게 아니었다. 그녀가 발산하는 힘은 적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P303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흔들어놓은 것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자신의 일부‘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이지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 P304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P313

"몇 번을 봐도 똑같은 것밖에 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할 수 없잖아, 우리도 줄곧 같은 걸 하고 있는데 뭘."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 P324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몸을 움직이니까 왠지 정신도 해방되는 것 같아." - P326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붙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워." - P331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긴 했지만 잠들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 P332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하고 그(나가사와)가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 P343

봄이라는 계절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 - P344

내겐 어려서부터 그런 점이 있었다. 뭔가에 열중하면 그 밖의 주변 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 P346

"여행 같은 건 하나도 재미없어. 일을 하는 게 훨씬 좋지." - P348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뭘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고, 그럼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 P351

나는 그런 새로운 상황에 나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물론 내가 강해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 사기를 북돋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 P353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제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이란 걸 느낀다. 이봐, 기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고. 그리고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 P354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중략)...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 P357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야.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거지.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니까.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동안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이야. - P367

마치 편지를 씀으로써 산산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생활을 간신히 지탱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P367

"나로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온갖 문제가 엉켜 있는 데다 그게 오래 지속되어왔기 때문에, 사실 어떤 마음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 나도 그 여자도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책임 같은 거야. 그래서 난 그걸 저버릴 수가 없어.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느끼고 있어. 설사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해도." - P373

"나를 가질 때는 나만을 가져야 해. 그리고 나를 안을 때는 나만을 생각해야 해." - P3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드립백 에티오피아 G1 시다모 보나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일단 포장을 뜯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향이 너무 좋아서 드립백을 꺼낸 뒤에 포장지 속 잔향까지 맡아볼 정도였으니 뭐 말 다했다. 그리고 최근 몇 일간 날이 다소 더웠던 관계로 아이스로 해서 마셨는데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제 상권을 완독했고 오늘은 하권을 읽는다. 상권 마지막 부분에서 유키의 아버지인 마키무라 히라쿠는 자기 가족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주인공인 화자에게 유키를 정기적으로 만나며 돌봐줄 것을 요청하지만 화자는 그 부탁을 거절한다. 사람을 의무적으로 만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키가 필요로 할 때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화자 본인도 양 사나이와 관련된 다소 비밀스런 얘기를 유키와 나눌 수 있는데다, 그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인간적인 친밀감도 어느정도 쌓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에서 화자는 이제 갓 열세살인 유키가 몇 년 후에 어떻게 성장해있을지를 조심스레 상상해보다가 문득 인간의 최고 전성기(절정기)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 이와 관련된 것인데, 이건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얘기로 보인다. 여기서의 핵심은 어떤 시기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인생에서 절정기가 반드시 있으며 그 고점을 찍고 나면 거기서 조금씩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든 생각은 자기 인생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좌절해있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금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기 인생에 전성기가 왔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기묘하게도 인간에게는 각기 절정기라는 게 있다. 거기에 올라서 버리면, 다음에는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기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분수령이 닥쳐온다.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열두살 때 절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별로 시원찮은 인생을 보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올라간다. 어떤 사람은 절정에서 죽는다. 많은 시인이나 작곡가들이 질풍처럼 살다가 너무 급격히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든 살이 넘어서도 힘찬 그림을 계속 그리다가 그대로 편안히 죽었다. 이것만큼은 끝이 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이다. - P12

당신이 행복해지지 못할지도 몰라, 하고 양 사나이가 말했다. 춤을 추는 수밖에 없어. 모두가 감탄할 만큼 잘 추는 거지. - P13

"사람은 불합리한 사랑에 빠지는 때가 있어. 더 좋아하는 상대를 고를 수 없을 때도 있고.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 P15

"어른의 세계에서는 모두들 서로 농담을 하고 웃거든. 어쩌면 시시한 농담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해." - P15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 - P16

혼자서 지내는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능력을 익히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 P24

"모두들 나이를 먹어. 세상도 변해. 신화라는 건 모두 언젠가는 죽어버려. 영원히 존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P27

"그런 때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러면 모든 게 지나가. 시간문제야." - P35

"모든 사람들이 룰을 존중하며 지켜 주는 건 아니니까. 상대를 잘못 선택하면 지독한 꼴을 당하게 돼." - P37

"모두들 각기 원하는 방식이 달라. 그래서 이따금 엇갈림이나 오해가 생겨나지. 그리고 사람이 죽는 수도 있어." - P38

"죽은 사람에 관한 일이면 급히 생각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 어차피 죽었으니까. 좀 더 기운을 차린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도 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어차피 죽은 거야, 아주, 완전히, 죽었어. 해부되고 냉동된 상태로 있단 말이야. 네가 책임을 느끼든, 어쩌든 간에 되살아나지 않아." - P38

"여행이란 건 그런거야. 생각이 나면 바로 떠나는 거지. 그게 요령이라고.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어. 시베리아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 모자라면 저쪽에서 사면 돼. 저쪽에도 무엇이든 팔고 있으니까." - P45

"사람에겐 각기 나름대로의 능력이라는 게 있는 거야." - P45

"긴장을 푸는 거야. 몸의 힘을 빼는 거야. 그뿐이야." - P46

"뭐든 경비로 처리되는군." - P49

나는 고개를 저으며, 메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다음에 언젠가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무거운 화제다. 너무 무겁고 너무 뜨겁다. - P51

틀림없이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방법을 떠올렸다. 잘될지 어떨지 여부를 떠나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 P51

세상에는 가지각색의 이름들이 있다. - P53

"세상이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고 있어. 자신이 가난뱅이인지 부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물건은 풍부하게 있는데, 갖고 싶은 게 없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정말로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쓸 수 없어." - P54

"우리 집은 좀 구식이라 그런 식으로 가르쳤어. 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숫자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분수에 맞게 살면 되는 거라고 말이야.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통 크게 힘차게 살아가라고 말이야. 그건 하나의 사고방식일 수는 있어.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지. 하지만 분수에 맞도록 살아간다는 관념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런 사고방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래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말았지. 통 크게 굴지 않게 되고, 자질구레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만 남았어. 최악의 상태야.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나는 통 알 수가 없어." - P55

"일하는 건 좋아해,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정말 답답해. 이따금 두려워질 때가 있어." - P55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생이 있지"라고 나는 말했다. "사람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Different strokes for different folks." - P56

같은 세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확실히 여러 가지 종류의 수고를 덜게 된다. - P56

"감추고 있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기가 귀찮았을 뿐이야. 무슨 글자냐, 그런 이름이 흔한 거냐, 어느 곳 출신이냐 같은 것만 물으니까.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남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번거로운 일이야.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하니까." - P57

"그 어둠은 사악한 게 아니고, 네게 악의를 품고 있지도 않아. 그러니 두려워할 건 없어. 거기에 어떤 것이 살고는 있지만ㅡ너도 그 발소리를 들었지ㅡ결코 너를 해치지는 않아. 무슨 상처를 입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만일 또 그 어둠과 마주치면, 가만히 눈을 감고, 거기서 엘리베이터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돼. 알겠어?" - P61

그럼 다음 뉴스 - P63

될 대로 되라지, 라는 것이다. 점을 따라 선을 그어 갔더니, 이렇게 됐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다. 나는 춤을 잘 추고 있는 것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의 사태 진행을 차례로 더듬어보고, 그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을 하나하나 체크해 봤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썩 좋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한 번 더 똑같은 입장에 놓인다 할지라도, 나는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게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일단 발은 움직이고 있다. 스텝을 계속 밟고 있다. - P64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물결처럼 몰려왔다 몰려가곤 했다. 이따금 그 소리에 섞여 내 심장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역시 지구의 거대한 영역 중의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 P67

이상한 일이지만, 여자의 목덜미는 나이테처럼 차례차례 나이를 먹어 간다. 왠지 알 수 없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소녀는 소녀와 같은 목덜미를 하고 있고, 성숙한 여인은 성숙한 목덜미를 하고 있다. - P69

"괜찮아, 또 내일이 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내일이 지나면 또 모레가 있어" - P70

너희는 너희끼리 하면 돼. 나는 나대로 해나간다고. 나는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세계가 좋단 말이야. - P73

주문을 받으면 무엇이든 씁니다. 요컨대 눈 치우기와 같은 거죠 - P79

마치 히치콕의 영화 장면 같다고 나는 느꼈다. 점점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간다. 무엇이 정상이며 무엇이 뒤틀려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게 되어 간다. - P83

"식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당신은 언제나 그래. 일이 잘되어 가면 식욕도 생겨." - P83

"훈련하면 됩니다." - P90

"그녀의 사진은 뭐라고 할까, 시라는 것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언어를 고르고 골라 뼈를 깎듯이 자아낸 것이, 그녀의 사진에서는 한순간에 구현되어 있는 겁니다. 구현(enbodiment). 그녀는 공기 속에서, 빛 속에서, 시간의 틈에서 그것을 날쌔게 잡아내서,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심적 정경을 구현하는 거예요." - P91

"무엇이 탁 갈라지며 튀어 오르는 듯한 느낌. 아무런 예감도 없이 갑자기 세계가 튕겨 나가면서 갈라지는 거예요. 시간이나 빛 따위가 dissilient 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천재예요." - P92

"천재는 매우 희귀한 존재입니다. 일류 재능이라는 건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에요. 천재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은, 천재를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겠죠. 그러나ㅡ"라고 그는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는 것처럼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혹독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자아를 바늘처럼 찌릅니다." - P92

"나는 알게 됐어요. 이는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이런 만남은 일생에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 건 알 수 있어요, 확실히.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하면 아마 나는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 P93

"마음의 평온은 손에 넣기 어려운 거예요." - P94

소용돌이든 맹렬한 회오리든 모래바람이든 간에 스스로 선택한 이상은 어떻게든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 P94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았단 말인가? - P95

나는 너무 냉정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든, 둘 다 온전하게 갖고 있든, 시인이든 시인이 아니든 간에, 여기는 거칠고 힘든 세계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른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적어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상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너무 냉정하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지만. - P96

"친구란 제삼자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발적인 관계입니다. 내 기억이 틀림이 없다면." - P98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중간한 친구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세계입니다. 우선 그것을 분명히 알아 둬야 해요." - P98

나이를 먹으면 암시의 암시성이라는 것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암시성이 현실의 형태를 띠기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 있게 된다.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 P100

"난 어떻게 해야 해?"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라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 가는 거야. 옛날부터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 P102

"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 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구나?"
"그 이상은 운이야"라고 나는 말했다. - P104

"틀림없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겠다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어." - P105

"천천히 그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돼. 무엇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사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지켜보면 돼.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히 알 수 있게 돼. 하지만 모두들 너무 분주해. 재능이 넘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공평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거든."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댄스 댄스 댄스 -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앞부분을 읽다보면 저자의 전작인 《양을 쫓는 모험》에 나왔던 내용과 소재들이 적잖이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1973년의 핀볼》에서 봤던 얘기도 일부 등장한다. 그러므로 가급적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을 먼저 읽어보시고 이 《댄스 댄스 댄스》를 읽어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이렇게 하셔야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재미나 교훈들도 더 많이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