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책을 읽어보고 덮는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읽어서 ...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책 많이 보시거나 컴퓨터 작업 많이 하시는 분들께 좋은 간단한 지압법이 있어 공유합니다. 밑줄만 쳐놓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저도 한 번 해봐야 겠습니다. 모두 건강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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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작가님의 ‘자작나무 숲‘이라는 소설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일종의 강박장애를 겪는 사람을 지칭하는 ‘호더(hoarder)‘라는 것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비단 이 소설 뿐만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호더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TV프로그램 중에 정리전문가와 함께 일반 가정의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하는 프로그램들을 봤던 기억도 나고, 유튜버들 중에 정리유튜버라고 해서 집안에 쓰지 않고 방치된채로 남아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유튜버들도 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작품의 메인소재가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이 소설의 주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 어떤 것을 의도하셨는지는 독자인 내가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적어도 우리 현실의 실생활에서 자주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충동적으로 구매하거나 하는 행동들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고 반성해보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의 주제와는 약간 벗어난 얘기 일 수도 있겠지만, 호더라는 소재자체에서 느껴지는 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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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작은 방주들‘이라는 작품은 신주희 작가님의 작품이다.

‘작은 방주‘라는 게 이 소설에선 회사같은 어떤 ‘조직‘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의 친구인 진주가 이직한 회사 이름이기도 하면서도, 주인공이 속해있는 회사를 상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소재들을 이것저것 볼 수 있었다. 비트코인이네 블록체인이네 하는 것들... 그리고 간단한 비유를 통해 그것의 원리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독자인 나는 잘 몰랐던 ‘우유니‘라는 소금 사막이 있는 관광지에 대한 얘기도 나왔는데, 검색해보니 관광 여행지로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있었겠지만, 아예 몰랐던 나 같은 사람에겐 뭔가 이국적이면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 잘 몰랐던 여행지를 알게 되어 유익했던 것 같다.

너 자작나무가 왜 자작나무인지는 아냐?

왠데?

자작자작 타서 자작나무란다.

너 꽝꽝나무가 왜 꽝꽝나무인 줄은 아냐?

그런 나무도 있어?

탈 때 꽝꽝 소리를 내서 꽝꽝나무란다.

자작나무는 추운 곳에서 자란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았다. 소나무만큼이나 알았다. 하얀 껍질을 종이처럼 벗겨내는 나무였다. 한 껍질을 벗기면 또 살아나서 다시 하얘지는 나무. 벗고, 벗고, 또 벗는 나무. 그래도 알몸이 되지 않는 나무.

하나도 버릴 게 없지 않니.....

할머니가 등 뒤에서 말했다. 좌절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고통이 뒤범벅되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무리 애를 써도, 이를 악물고 애를 써도 단 하나도 버릴 것을 찾을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집과 마당은 이제 물건으로 완전히 장악되어 사람은 커녕 간신히 고양이 한마리나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통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 통로를 ‘염소의 길‘*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훗날에야 알았다.

* 랜디 O 프로스트, 게일 스케티키 《잡동사니의 역습 :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의 심리》 (정병선 옮김, 윌북 2011) 에 쓰인 "산양의 오솔길(Goat Paths)"에서 차용.

종이는 뭉쳐 있으면 더는 가벼운 것도 날리는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호더가 된 이유를 나는 꿈 속에서 깨닫는다. 내가 못 가져가도록, 아무도 못 가져가도록 쓰레기를 쌓아놓은 것이다. 아주 산처럼 쌓아놓은 것이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상상하는게 많아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의 이야기속 빈틈을 채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이 꼭 윤리적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할머니는 도시 괴담을 방송하는 유튜버에 의해 발견되었다. 호더가 어찌하여 도시 괴담의 일종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바람에 괴담의 자격을 얻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빨리 모든 것을 다 치워버리는 것 뿐인듯 했다.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이 쓰레기들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거슬리다 못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저들은 쓰레기는 다 쓰레기인 줄로만 안다. 그래서 다 쑤셔넣고 다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다 묻어버리거나 다 태워버리겠지.

자작자작 태울 줄도 몰라 다 꽝꽝 태워버리겠지.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다 버려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인데, 갑자기 무슨 마음인지, 어떤 것은 남겨두라고, 그것만은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이뿌리의 신 침처럼 고였다. 그러더니 점점 다 그냥 놔두라고, 다 내거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내가 상속받은 것이라고, 내가 상속받은 쓰레기라고.

들어가면 위험해요!

아빠가 있어요, 저기에!

위험하다니까요, 할머니!

뭐라고요?

깔려 죽는다고요, 할머니!

이것은 내 이야기인가, 할머니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소설 속 이야기인가.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어요. 왜죠?

모든 것에 다 기억이 있어서요.

어떤 기억입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숲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할머니를 버리러. 어쩌면 아빠도 버리러. 가다가 자작나무 숲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한 껍질 한 껍질 벗으면서도 맨 몸이 되지 않는 나무들의 숲. 환한 나무들의 숲. 그런 숲에 이르면 나는 마침내 물을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탔어, 뭐가 그렇게 애타게 자작자작 힘들었어, 할머니.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으므로. 그러나, 다시 궁금해진다. 죽은 사람은 과연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

플라밍고 튜브에 바람을 넣는 꿈을 꿨다.

‘No more priceless time.‘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드는 일이고, 이건 값을 따질 수 없는 priceless한 일이 아니겠냐고.

물론, 일은 늘 ‘어떤‘보다 ‘얼마‘가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값을 따지려는 걸 보니 마음이 침침해졌다. 돈이면 세상 별 게 없다는 논리가 착착 맞아들어가는 게 싫어서 억지를 부린 거였다.

‘우유니 소금 사막 초초초특가 패키지.‘

코로나가 창궐할 때 그것은 여행사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터였다.

생소한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내밀 때, 진주의 모습은 얼마나 밝고 멋져 보였나. 돌이켜보면 나는 그런 그 애의 모습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견뎠으니까.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진주였다.

그간 벌어진 일을 떠올려 볼 때, 불행이 실패 선고를 제대로 내린 것 같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AI하고도 경쟁을 해야하는 시대, 라고.

가보지도 않은 곳이 그리울 수도 있단다

언젠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봤다고 말하며 줄거리를 설명했던 게 기억났다. 체 게바라가 오토바이로 남미 대륙을 횡단하는 이야긴데, 그는 추키카마타란 광산에서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의학도의 길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 뒤부터 혁명가의 길로 나서게 됐다고.

피로를 모르는 가상세계와 달리 진주의 현실 세계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러니까 진주가 한다던 새로운 일의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어디론가 휩쓸려 가는 일처럼 보였다.

지난 일들이 시커먼 소용돌이를 만들며 머릿 속을 휘저었다.

허니쿠키는 명절에나 겨우 얼굴을 보는 제 가족이 손님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때가 되면 만나서 서로를 먹이고 입히고 마중하며 틈틈이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들.

아이러니하지만 근미래에 가족이 없을 여자들의 우정은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남겨질 때를 대비하며 두터워지는 법이었다.

우울한 미래 따위에 미련을 두지 말자, 그저 최선을 다해 오늘의 술잔을 비우자, 하는 게 주된 건배사였다.

의혹과 경계심이 묘하게 뒤섞인, 전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화르륵, 하고 애써 눌러 놓은 것들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아크가 뭐더라?

방주요.

암호화폐를 보관하기 위해 누구도 해킹할 수 없는 보안이 필요한데, 아크는 블록체인 기술을 장착한 전자지갑이라고 설명했다.

지갑을 비롯해 채굴이니, 주소니, 하드포크니 하는 말들은 몽땅 미래에서 과거로 갑자기 떨어진 말이었다.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얘기로 넘어가는 진주를 보며 나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진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애다운 설명을 덧붙였다.

자, 꽃이 있다고 치자.

그럼 벌과 나비같은 곤충들이 있겠지? 꽃과 벌은 각자의 일을 하는 거야. 꽃이 벌을 위해, 벌이 꽃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대신 각자 원하는 보상을 받지. 꽃은 번식을 하고 벌은 꿀을 얻잖아. 그런 거야, 내가 하는 일이. 프로그램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꿀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시스템을 번식시키는 거. 암호화폐의 철학이 탈중앙화거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애의 말을 되씹었다. 지배적인 중앙세력이니, 대중을 속일 수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느니.

나는 의구심을 품은 채 인터넷을 뒤적였다. 그 후에야 진주의 얘기가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 개념에 관한 비유라는 걸 알게 됐다.

뭐가 있다고 치는 것. 없는데 있다고 치는 것. 치자, 치자, 치자, 중얼거리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거짓말도 치는 거고, 사기도 치는 거고, 뒤통수도 치는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질투와 아쉬움이 역력한 허니쿠키의 얼굴을 보는데 희열이 느껴졌다. 내가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예리한 구멍을 낸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여유로운척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근면성실이 더는 성공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걸, 심지어 무능도 전략적으로 증명해야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초현실적인 형벌을 받으며 복기했다. 매 순간 뒤통수와 엉덩이가 얼얼했다. 뼈가 시릴 정도로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같은 건 잠시 어딘가에 담보로 잡혀있다 생각하고 버텼다.

무보직 대기 발령 메일을 받은 그날부터 찬찬히 되짚어보니 세 단어중 방점이 찍힌 단어는 ‘발령‘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보직‘이었다.

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고 부른 곳에 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른거리는 흰빛, 차는 빛을 그대로 밟으며 지평선 끝에 다다랐다. 정확한 대칭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과 저곳이, 안과 밖이 혹은 오늘과 내일의 구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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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탐욕을 상대방이 정확히 알고있다는...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시기, 질투한 나머지 그 사람을 흔적도 없이 제거한 뒤 마치 자신이 그 꿈꾸던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데 독자인 본인은 살짝 살벌(?)하다는 느낌이 든다 싶을 정도로 무서운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냥 글만 보면 무덤덤해 보이는데, 그 안에 내재된 섬뜩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컸다.

이런 상황에서 참된 진실을 덮고 거짓이 진실인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시켜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달콤한 열매를 먹으면서 겉보기에 호화롭게 살아가는 사람과 이러한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어느 한 사람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년 전 밑줄 쳤던 문장들 가운데 와닿았던 문장들이 많지만 특별히 p.168에 토스토옙스키가 말했던 ‘사소한 것이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는 말이 이 소설의 스토리 상에 딱 들어맞는 얘기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 속에서의 사소한 것은 어떤 사람의 시기심 혹은 질투심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이 씨앗이 되어 궁극적으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상에서는 이러한 씨앗들과 더불어 조금은 흔치 않은 상황들을 가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갔지만, 현실의 삶 속에서도 잘 살펴보면 사소한 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간혹 뉴스에 나오는 살인사건들을 보다보면 사소한 어떤 이유에서 유발된 감정(예를 들어 무시당했다는 느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교통사고의 경우 운전자든 보행자든 불문하고 단지 몇 초 더 빨리가겠다는 사소한 이유로 인해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가다가 회복하기 힘든 큰 사고를 겪게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운전자들의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을 제보 받아서 그 영상속 운전자나 보행자의 과실비율을 분석하는 프로그램들을 한 번이라도 보셨던 분들이라면 어느정도 공감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무심코 버린 담뱃불로 인해 큰 산불이 난다거나 하는 일들도 뉴스에서 종종 나왔던 사건 중 하나다. 정말 사소한 것이 마치 나비효과처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글을 쓰다가 문득 ‘소탐대실‘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말인데 위에서 말한 맥락들과 얼핏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사소한 감정이나 사소한 행동이 커다란 손실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서든 혹은 자기자신에게 속한 어떤 선택에서든 간에 사소한 것들에 대해 지혜롭게 잘 처신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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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에 뒤이어 나온 두번째 작품부터는 본문만 나오고 작가 해설 같은 것이 따로 나와있지 않아서 그냥 본문 내용만 보고 작가의 의도를 추론해야해서 약간은 난감했다.
여기 따로 밑줄 긋진 않았지만, 인도네시아 발리의 여행지인 우붓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며 있었던 얘기들이 계속 나오다가 마지막 부분에 양배추와 뱀 그림이라는 뜬금없는 소재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이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이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이라는 것을 보고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어디서 뭘 놓친게 있나 싶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아무런 관련없음을 상징하는 양배추와 뱀을 등장시켜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소통의 불가능성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어떤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지금으로써는 당장 쉽사리 명확한 이해가 잘 안되는 상황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신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2%부족한 애매함이 남아있다.

그냥 독자인 나의 직관적인 느낌으로 느껴지는 것에 입각해 추론해보자면, 양배추와 뱀이라는게 이 단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상징하는 어떤 물체(?)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향후에 이 작품에 대한 해설 같은 걸 볼 수 있다면 좀 더 명확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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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재가 동성애 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근데 이 단편을 끝까지 읽다보니 동성애에 국한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어떤걸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 작품이었다.

밑줄쳤던 문장 중에 이해하고 배려하다가 배제되고 박탈되었다는 말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이 글을 쓴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쓴건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지만, 독자인 내 개인적으로는 뭔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부분이었기에 신선한 충격(?) 혹은 자극이 된 문장이었던 것 같다.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려 했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또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지는 지금 현시점에서는 확실히 잘 가늠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의미가 되었든지 간에 이 부분자체가 이 단편소설 안에서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소설 속 맥락과 함께 개인적으로 좀 더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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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이어지는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장난 줄로만 알았던 필름 카메라가 작동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전에 24장 혹은 36장 짜리 필름을 넣고 사용하는 카메라를 써보셨던 분이라면 잠시나마 옛 추억에 사로잡혔을 법한 장면이었을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고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부분에서, 독자인 나는 예전에 등장인물들 간에 서로 오해했던 수많은 시간들을 마치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독자인 내가 이해하고 생각한 것들이 작가의 의도와 부합하는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느정도 가능한 해석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 번째 나왔던 김병운 작가님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라는 단편 소설은 두 번째 작품으로 나왔던 강보라 작가님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보다는 내게 좀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흐름이라는게 느껴졌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두 번째 나왔던 작품은 ‘기승전‘ 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결‘ 부분이 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뭔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뭐 독자인 나의 이해가 부족했을 수도 있기에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임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이다. 다른 독자님들 중에는 내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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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나온 작품인 ‘자작나무 숲‘은 초반에 섬뜩하다. 마치 내가 요즘 1년 전 기록으로 공유하고 있는 기욤 뮈소 작가의 ‘안젤리크‘에서 받았던 느낌과 얼추 비슷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농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 그 일시적인 감흥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 아니겠느냐고.

자신이 보여주려 한 것은 소통의 가능성보다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에 가까운 것 같다고 부연했다.

아무런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 그림을 받았을 때 아연함보다 불쾌감이 앞섰던 이유를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누군가 그 작은 모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래도) 즐거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줄 것이다. 흑백에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넣은 사진 속에서 호경과 나는 양팔을 하늘로 쳐들고 활짝 웃는 얼굴이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르릉거리면 그것은 네거티브 필름처럼 변한다. 검은 부분이 하얘지고 하얀 부분이 검어진다.

검은 얼굴의 우리를 태우고 강물을 가르는 흰 코끼리. 화면 가득 하얗게 발광하는 그것은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있던 기괴하게 큰 코끼리 조각상을 떠오르게 한다.

집안에 어렸을 때부터 여성스러운 행동거지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삼촌이 하나 있었다는 것.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게 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삼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내가 자꾸 죽고싶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살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던 장희.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보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유심히 귀 기울여주었던 장희.

장희는 엄마에게 그 친구 분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 말했다고 했다.

그건 엄밀히 따지면 삼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엄마를 위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에 할머니가 장희를 볼 때마다 너는 계집애같이 매가리가 없는 게 꼭 진무어렸을 때랑 똑같다며 한두 마디씩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엄마는 삼촌이 집에 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삼촌이 오면 장희가 무슨 영향이라도 받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느껴졌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 같아. 장희가 한 박자 쉬었다 말했다. 삼촌과 함께 있었지만 나는 비정상적인 것에 노출된 적이 없다고. 내가 삼촌과 비슷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은 틀린 거라고.

생각을 젓듯이 빨대를 휘휘 젓는 걸 보니 무슨 말이 이어지기는 할 것 같았다.

어떤 날들은 말해지지 않아야만 간신히 멀어질 수 있으니까.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설령 그게 우리가 죽는 건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배제되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박탈당했다.

그 시절 장희는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느냐며 나를 한심해했지만, 사실 나는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가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믿으라면 믿는 그런 충직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당신들 못지않게, 아니 당신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며 무해하므로 내게도 자격이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기꺼이 참고 견뎠던 것이다. 오직 내가 원했던 단 한 자리, P의 곁에 있기 위해서. P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어떻게 되었나?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면, 그 방법이 유효했다면 어째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나무 쪼가리에다 P의 안위를 빌고 용서를 구하며 살고 있나. 어째서 그토록 끊어내고자 했던 원가족의 품으로 P를 돌려보내야 했으며, 어째서 죽어도 거기는 싫다고 사정했던 그 선산에 P를 가두어야 했나.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다 P를 잃었니까. 중죄를 지은 듯이 자책하고 선처를 바라듯이 관용을 구걸하다 P를 빼앗겼으니까.

그때 장희가 말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안할래.

뭐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고.
이해를 거부할 거라고.

안전을 바라는 마음? 보호해야 한다는 믿음? 그거 혐오였어. 헷갈릴 것도 없고 선해할 것도 없어.

그래서 동성애 하라는 거야? 아니잖아. 남자랑 섹스하라는 거야? 아니잖아.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그 마음을 사랑이랍시고 놓지를 못했던 거야. 그게 나를 어떻게 좀먹는지도 모르고, 나를 반쯤 죽여서 딱 반만 살게 하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던 거야. 나는 그랬던 거야.

복받치는 감정을 어떻게든 제압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게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린 듯이 울었다.

그래, 두통이 심했지. 항상 게보린을 달고 살았고.
맞아요, 그놈의 게보린.

두 사람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분명히 고장났다 그랬는데?

속았지 뭐.

또 속은 건가.

막 믿고 그러지 말라니까.

장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빠진 얼굴로 카메라를 만지작 거렸다. 렌즈 커버를 여닫으며 뷰파인더를 확인했고, 이내 렌즈의 방향을 내쪽으로 맞추더니 셔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한 번 더 눌렀을 때 카메라에서 우웅하는 작은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고장인가 싶어 멈칫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고, 안에 들어있던 필름이 자동으로 감기는 소리였다. 24장짜리 필름이었는지 카운터가 24부터 거꾸로 돌았다. 24, 23, 22, 21.....

우리는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리고 카운터가 0을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에,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장희가 먼저 웃으며 말했고 내가 따라 웃으며 들었다.

그런 수식어들은 쓰레기처럼 의미에 냄새를 입힐 뿐이다.

그런 숲에서는 할머니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고 자작나무 숲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이르렀으므로.

할머니, 자작나무 숲이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할머니는 지금 내 차 안에 죽어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다시 궁금해진다. 죽은 사람은 과연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

할머니는 아흔 살까지 호더로 살았고, 아흔 한 살인 그때까지도 호더로 살고 있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쓰레기와 죽은 쥐와 산 쥐와 죽은 벌레와 산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집.

*호더(hoarder) :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일종의 강박장애를 겪는 사람

당연히 할머니가 그토록 오래 살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불결한 환경에서는 누구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심지어는 쥐와 벌레들 조차도 자기들 똥으로 뒤덮인 그 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끔찍한 집은 그러나 평생동안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것. 그러므로 할머니의 집은 어쨌든 내게 상속되리라는 것. 쓰레기가 아니라 집과 땅 말이다.

호더인 할머니의 유일한 미덕은 무조건 쌓아놓기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집의 어느 한 구석도 나 모르게 처분된 것이 없으리란 건 분명했고, 실제로 등기부등본을 떼어볼 때마다 그 집은 언제나 무사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빈 몸에 고통과 슬픔이 넘쳐흐른다. 할머니는 다시 채우기 시작했고, 다시 쥐들이 돌아왔고, 다시 벌레들이 알을 깠다.

금싸라기 땅의 쓰레기 집.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할머니에게서 돈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부자였다는 할머니에게는 어떻게든 돈이 있었고, 그 돈이 내게 정기적으로 전해졌다.

버는 것은 없고, 쓰레기도 주울 줄 모르는 엄마에게 그 돈이 얼마나 갈급한 것인지는 어린 나도 알았다.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나를 할머니 집에 보낼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그게 실은 한 달 내내였으니까.

그러나 나로서는 할머니 집에 가는 것이 죽도록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나를 할머니네 집에 내다버린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보다 더 마땅한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네 집에 가면 나 역시 쓰레기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엄마와 살던 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어쩌면 할머니 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가 쓰레기가 아니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쓰레기와 쓰레기 사이에서의 무차별성. 그건 쥐와 벌레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똥과 오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도대체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무엇이든 주워 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저렇게까지 됐나 몰라.

이건 가게 주인의 말이었고, 엄마는 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어쩌다 저렇게까지 미쳤나 몰라.

할머니의 집을 상속받는 것이 내 유일한 꿈이 된 것은 아마도 엄마의 꿈이 유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죽기 전 유일한 꿈 역시 할머니의 집이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오래된 관계는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손이 발에 익숙해지고 발이 손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가는 일이 평생 계속되지는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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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오늘의 한문장] 아침형 인간 (20주년 특별판)

자율신경의 균형을 좋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여 밑줄을 쳐놨었는데 읽을 때만 밑줄 쳐놓고 따라해보지 않았었다. 스스로 반성했다. 그리하여 한 번 이 요가 자세를 줄글에서 알려주는대로 따라해봤는데 처음엔 안하던 동작을 하다보니 몸이 어색해하는게 느껴졌다. 특별히 두번째 동작을 유지하는게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동작을 몇 번 하다보니 맨 처음 할 때보다는 좀 더 수월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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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닭 2024-01-08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가 뿐만아니라 운동과는 거리가 먼 1인인데 친절한 설명에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8 11:43   좋아요 1 | URL
저도 안하다가 해본거라 뭐라 특별히 말씀드릴 입장은 못되지만, 기상직후나 취침전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따라해보니 그나마 좀 따라할만 한 것 같습니다. 책에서 자율신경의 균형을 좋게한다고 하니 그 말에 끌려서 해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