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작에 뒤이어 나온 두번째 작품부터는 본문만 나오고 작가 해설 같은 것이 따로 나와있지 않아서 그냥 본문 내용만 보고 작가의 의도를 추론해야해서 약간은 난감했다.
여기 따로 밑줄 긋진 않았지만, 인도네시아 발리의 여행지인 우붓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며 있었던 얘기들이 계속 나오다가 마지막 부분에 양배추와 뱀 그림이라는 뜬금없는 소재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이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이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이라는 것을 보고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어디서 뭘 놓친게 있나 싶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아무런 관련없음을 상징하는 양배추와 뱀을 등장시켜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소통의 불가능성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어떤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지금으로써는 당장 쉽사리 명확한 이해가 잘 안되는 상황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신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2%부족한 애매함이 남아있다.

그냥 독자인 나의 직관적인 느낌으로 느껴지는 것에 입각해 추론해보자면, 양배추와 뱀이라는게 이 단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상징하는 어떤 물체(?)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향후에 이 작품에 대한 해설 같은 걸 볼 수 있다면 좀 더 명확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다.
.
.
.
뒤이어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재가 동성애 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근데 이 단편을 끝까지 읽다보니 동성애에 국한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어떤걸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 작품이었다.

밑줄쳤던 문장 중에 이해하고 배려하다가 배제되고 박탈되었다는 말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이 글을 쓴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쓴건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지만, 독자인 내 개인적으로는 뭔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 부분이었기에 신선한 충격(?) 혹은 자극이 된 문장이었던 것 같다.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려 했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또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지는 지금 현시점에서는 확실히 잘 가늠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의미가 되었든지 간에 이 부분자체가 이 단편소설 안에서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소설 속 맥락과 함께 개인적으로 좀 더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
.
.
이후에 이어지는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장난 줄로만 알았던 필름 카메라가 작동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전에 24장 혹은 36장 짜리 필름을 넣고 사용하는 카메라를 써보셨던 분이라면 잠시나마 옛 추억에 사로잡혔을 법한 장면이었을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고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부분에서, 독자인 나는 예전에 등장인물들 간에 서로 오해했던 수많은 시간들을 마치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독자인 내가 이해하고 생각한 것들이 작가의 의도와 부합하는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느정도 가능한 해석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 번째 나왔던 김병운 작가님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라는 단편 소설은 두 번째 작품으로 나왔던 강보라 작가님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보다는 내게 좀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흐름이라는게 느껴졌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두 번째 나왔던 작품은 ‘기승전‘ 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결‘ 부분이 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뭔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뭐 독자인 나의 이해가 부족했을 수도 있기에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임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이다. 다른 독자님들 중에는 내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
.
네 번째 나온 작품인 ‘자작나무 숲‘은 초반에 섬뜩하다. 마치 내가 요즘 1년 전 기록으로 공유하고 있는 기욤 뮈소 작가의 ‘안젤리크‘에서 받았던 느낌과 얼추 비슷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농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 그 일시적인 감흥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 아니겠느냐고.

자신이 보여주려 한 것은 소통의 가능성보다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에 가까운 것 같다고 부연했다.

아무런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 그림을 받았을 때 아연함보다 불쾌감이 앞섰던 이유를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누군가 그 작은 모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래도) 즐거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줄 것이다. 흑백에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넣은 사진 속에서 호경과 나는 양팔을 하늘로 쳐들고 활짝 웃는 얼굴이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르릉거리면 그것은 네거티브 필름처럼 변한다. 검은 부분이 하얘지고 하얀 부분이 검어진다.

검은 얼굴의 우리를 태우고 강물을 가르는 흰 코끼리. 화면 가득 하얗게 발광하는 그것은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있던 기괴하게 큰 코끼리 조각상을 떠오르게 한다.

집안에 어렸을 때부터 여성스러운 행동거지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삼촌이 하나 있었다는 것.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게 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삼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내가 자꾸 죽고싶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살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던 장희.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보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유심히 귀 기울여주었던 장희.

장희는 엄마에게 그 친구 분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 말했다고 했다.

그건 엄밀히 따지면 삼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엄마를 위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에 할머니가 장희를 볼 때마다 너는 계집애같이 매가리가 없는 게 꼭 진무어렸을 때랑 똑같다며 한두 마디씩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엄마는 삼촌이 집에 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삼촌이 오면 장희가 무슨 영향이라도 받을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느껴졌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 같아. 장희가 한 박자 쉬었다 말했다. 삼촌과 함께 있었지만 나는 비정상적인 것에 노출된 적이 없다고. 내가 삼촌과 비슷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은 틀린 거라고.

생각을 젓듯이 빨대를 휘휘 젓는 걸 보니 무슨 말이 이어지기는 할 것 같았다.

어떤 날들은 말해지지 않아야만 간신히 멀어질 수 있으니까.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설령 그게 우리가 죽는 건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배제되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박탈당했다.

그 시절 장희는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느냐며 나를 한심해했지만, 사실 나는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가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믿으라면 믿는 그런 충직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당신들 못지않게, 아니 당신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며 무해하므로 내게도 자격이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기꺼이 참고 견뎠던 것이다. 오직 내가 원했던 단 한 자리, P의 곁에 있기 위해서. P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는 어떻게 되었나?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면, 그 방법이 유효했다면 어째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나무 쪼가리에다 P의 안위를 빌고 용서를 구하며 살고 있나. 어째서 그토록 끊어내고자 했던 원가족의 품으로 P를 돌려보내야 했으며, 어째서 죽어도 거기는 싫다고 사정했던 그 선산에 P를 가두어야 했나.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다 P를 잃었니까. 중죄를 지은 듯이 자책하고 선처를 바라듯이 관용을 구걸하다 P를 빼앗겼으니까.

그때 장희가 말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안할래.

뭐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고.
이해를 거부할 거라고.

안전을 바라는 마음? 보호해야 한다는 믿음? 그거 혐오였어. 헷갈릴 것도 없고 선해할 것도 없어.

그래서 동성애 하라는 거야? 아니잖아. 남자랑 섹스하라는 거야? 아니잖아.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그 마음을 사랑이랍시고 놓지를 못했던 거야. 그게 나를 어떻게 좀먹는지도 모르고, 나를 반쯤 죽여서 딱 반만 살게 하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던 거야. 나는 그랬던 거야.

복받치는 감정을 어떻게든 제압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게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린 듯이 울었다.

그래, 두통이 심했지. 항상 게보린을 달고 살았고.
맞아요, 그놈의 게보린.

두 사람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분명히 고장났다 그랬는데?

속았지 뭐.

또 속은 건가.

막 믿고 그러지 말라니까.

장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빠진 얼굴로 카메라를 만지작 거렸다. 렌즈 커버를 여닫으며 뷰파인더를 확인했고, 이내 렌즈의 방향을 내쪽으로 맞추더니 셔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한 번 더 눌렀을 때 카메라에서 우웅하는 작은 진동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고장인가 싶어 멈칫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고, 안에 들어있던 필름이 자동으로 감기는 소리였다. 24장짜리 필름이었는지 카운터가 24부터 거꾸로 돌았다. 24, 23, 22, 21.....

우리는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리고 카운터가 0을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에, 한 시절의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눈을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장희가 먼저 웃으며 말했고 내가 따라 웃으며 들었다.

그런 수식어들은 쓰레기처럼 의미에 냄새를 입힐 뿐이다.

그런 숲에서는 할머니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고 자작나무 숲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이르렀으므로.

할머니, 자작나무 숲이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할머니는 지금 내 차 안에 죽어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다시 궁금해진다. 죽은 사람은 과연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

할머니는 아흔 살까지 호더로 살았고, 아흔 한 살인 그때까지도 호더로 살고 있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쓰레기와 죽은 쥐와 산 쥐와 죽은 벌레와 산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집.

*호더(hoarder) :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일종의 강박장애를 겪는 사람

당연히 할머니가 그토록 오래 살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불결한 환경에서는 누구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심지어는 쥐와 벌레들 조차도 자기들 똥으로 뒤덮인 그 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끔찍한 집은 그러나 평생동안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것. 그러므로 할머니의 집은 어쨌든 내게 상속되리라는 것. 쓰레기가 아니라 집과 땅 말이다.

호더인 할머니의 유일한 미덕은 무조건 쌓아놓기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집의 어느 한 구석도 나 모르게 처분된 것이 없으리란 건 분명했고, 실제로 등기부등본을 떼어볼 때마다 그 집은 언제나 무사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빈 몸에 고통과 슬픔이 넘쳐흐른다. 할머니는 다시 채우기 시작했고, 다시 쥐들이 돌아왔고, 다시 벌레들이 알을 깠다.

금싸라기 땅의 쓰레기 집.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할머니에게서 돈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부자였다는 할머니에게는 어떻게든 돈이 있었고, 그 돈이 내게 정기적으로 전해졌다.

버는 것은 없고, 쓰레기도 주울 줄 모르는 엄마에게 그 돈이 얼마나 갈급한 것인지는 어린 나도 알았다.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나를 할머니 집에 보낼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그게 실은 한 달 내내였으니까.

그러나 나로서는 할머니 집에 가는 것이 죽도록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가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나를 할머니네 집에 내다버린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보다 더 마땅한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네 집에 가면 나 역시 쓰레기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엄마와 살던 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어쩌면 할머니 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가 쓰레기가 아니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쓰레기와 쓰레기 사이에서의 무차별성. 그건 쥐와 벌레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똥과 오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도대체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무엇이든 주워 들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저렇게까지 됐나 몰라.

이건 가게 주인의 말이었고, 엄마는 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어쩌다 저렇게까지 미쳤나 몰라.

할머니의 집을 상속받는 것이 내 유일한 꿈이 된 것은 아마도 엄마의 꿈이 유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죽기 전 유일한 꿈 역시 할머니의 집이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오래된 관계는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손이 발에 익숙해지고 발이 손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가는 일이 평생 계속되지는 않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