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그 상황을 스스로 변화시킬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냥 순응하며 살아가는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힘들더라도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면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면 되는 것이고, 만약 그 댓가를 치를 자신이 없다면 마음 한구석에 불만의 씨앗을 잠재운 상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 두 시나리오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사람들마다 우선순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노력과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눈앞의 상황을 ‘원래 그런 것‘으로 무조건 수용하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거부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포로를 취하지 않기로 합의한 전쟁과도 같다. - P157

우리는 한 장 한 장의 음반을 면밀히 채점했지만, 물론 그런 순위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건 덤으로 따라오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 주고받는 심도 있는 대화, 열의를 품을 수 있는 무언가를 거의 목적 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 P166

"이 작품(슈만의《사육제》)은 어찌 보면 환락의 극치에 있는 음악이지만, 말하자면, 환락이 있기에 비로소 정신의 밑바닥에 생식生息하는 사악한 것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거야. 그들은 암흑 속에 있다가 환락의 음색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지." - P169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ㅡ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 P169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 수 없어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 P170

"하지만 설령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아래 또다른 민낯이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고."
그녀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게 보이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걸. 분명 어딘가에 있어." - P170

"하지만 그런 것을 볼 수 있었던 로베르트 슈만은, 결국 행복해지지 못했어. 매독과 분열증과 악령들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환상적인 음악을 남겼잖아. 다른 사람들은 쓸 수 없을, 비범한 곡을 썼어."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크고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양쪽 손가락 관절을 하나하나 꺾었다. "매독과 분열증과 악령들 덕분에. 행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 P171

‘슈만은 미치기까지 했는데, 내가 다 소용없게 만들어버렸다‘ _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P171

내가 그녀와 자지 않았던 것은ㅡ실제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ㅡ그 가면의 미추(美醜)보다는 오히려 그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두려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악령의 얼굴이건, 천사의 얼굴이건. - P172

많은 사람은 어째서인지 진부한 거짓말에 이끌린다. 혹은 거꾸로 그 진부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사기꾼이 끊이지 않고, 사기에 걸려드는 사람 또한 끊이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패널들이 뭐라고 설명하건, 누구를 비판하건, 그것은 조수간만의 차처럼 명백한 사실이다. - P175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낮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 P178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원이란 매우 긴 시간이다. - P181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 P181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읇는다. - P191

정확한 사실의 반복이야말로 진정한 예지로 가는 길이라고 - P191

"다른 원숭이들과는ㅡ물론 그들은 제 소중한 동포이긴 하지만ㅡ뭔가 잘 통하지 않았어요. 공통된 화제도 없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요. ‘네 녀석 발성은 좀 이상하다‘면서 놀리기도 하고 따돌리기도 했어요. 암컷 원숭이들은 저를 보면 자기들끼리 쿡쿡 웃었고요. 원숭이는 작은 차이에도 무척 민감합니다. 그들 눈에는 제 거동에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혹은 불쾌감이나 짜증을 유발하는 부분이 비쳤겠지요. 그런저런 연유로 점점 같이 있기 거북해져서, 어느새 무리에서 벗어나 따로 생활하게 됐습니다. 이른바 ‘외톨이 원숭이‘입니다." - P196

"혼자 어떻게든 식량을 확보해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일 괴로운 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원숭이와도, 사람과도 얘기할수 없어요. 고독하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 P196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내 것으로 삼는다ㅡ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분명 성적 욕망이 깔린 악행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깨끗하고 플라토닉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있는 그 이름을 그저 남몰래 혼자 사랑할 뿐입니다. 마치 부드러운 바람이 초원을 가만히 훑고 지나가듯이." - P201

"그것은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고독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인 셈이지요. 그 둘은 꼭 달라붙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 P202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ㅡ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ㅡ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安寧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저는 이렇게 이 마음에 (라고 말하면서 원숭이는 털투성이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한때 연모했던 아름다운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 나름의 소소한 연료삼아, 추운 밤이면 근근이 몸을 덥히면서,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볼 생각입니다." - P203

주제? 그런 게 있을라고. - P207

아무리 선명한 기억도 시간의 힘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한다. - P208

뭐,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장고 라인하르트가 코드를 틀리게 잡는 밤도 있고, 니키 라우다가 기어를 넣다가 실수하는 오후도 있다(아마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더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P221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는 결과론 - P221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P223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 P223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 P224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왜일까? 나는 아마 두려웠던 것이리라.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어떤 여자ㅡ아마 내가 모르는 누군가ㅡ에게 저지른 고약한 짓의 내용이 밝혀지는 것을. 그리고 또한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이 관지關知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녀에 의해 눈에 보이는 장소로 끌려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런 꼴을 당하느니 묵묵히 스툴에서 내려와, 이유 없는(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호된 비난을 달게 받으면서 자리를 뜨기를 나는 선택한 것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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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나본 팝송은 The Jimi Hendrix Experience 라는 뮤지션이 부른 Fire 라는 곡인데, 처음 밑줄친 문장은 뭔가 정신적인 영역을 확장시키라는 메시지가 담겨서 철학적인 혹은 이성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두번째로 밑줄친 문장은 뭔가 본능적인 냄새를 더 강하게 풍긴다. Fire라는 제목처럼 뭔가 불꽃튀는 열정을 표현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몇 일 전에 올렸던 포스팅에서 토마스 하디의 작품인《테스》를 언급하면서 ‘본능이 이성을 이긴다‘는 말을 했었는데, 어쩌면 오늘 올린 이 포스팅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본능을 상징하는 것이 뜨거운 불이라고 한다면 이성을 상징하는 것은 뭔가 차가운 얼음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반적으로 불과 얼음이 함께 있으면 불이 얼음을 녹여버리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본능을 상징하는 불이 이성을 상징하는 얼음을 이긴다는 말(본능이 이성을 이긴다)은 예외가 아예 없다고 섣불리 단정할 순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외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능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참 힘이 쎈 듯하다.

‘의식 상태를 깨우고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소통하고, 자신을 분리시켜라(turn on, tune in, drop out)‘ - P206

"I have only one burning desire / Let me stand next to your fire(내 안에 타오르는 욕망은 단지 하나뿐 / 네 불 옆에 있게 해줘)" - P206

"저기요. 인생에선 말이에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돼요.
당신의 정신과 환상을 무한히 자유롭게 흐르고 또 흐르게 해야죠."
지미 헨드릭스, 1968 - P202

환각성 약물이 낳는 환각 작용에 대한 짓궂은 감상을 담은 "White Rabbit"은 루이스 캐롤의 오디세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끌어왔다. 캐롤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앨리스, 쐐기 벌레, 붉은 여왕, 겨울잠 쥐)들을 언급함과 동시에, "Feed your head!"라는 외침과 그녀 세대를 위한 유행어를 고안했다. 그러나 슬릭은 "거기엔 뇌에게도 밥을 먹여야 한다는 의미도 있어요"라고 주장했다. - P201

"nothing is real, and nothing to get hung about" - P200

"All wrapped up in foil(은박에 온통 싸여 있는)." - P196

"Who thinks she‘s some man‘s son(대단한 이의 아들인줄 아는)." - P196

"Here they come now / See them run now... Chelsea Girls(여기 그들이 온다네 / 그들이 뛰는 것을 보기 위해 ・・・ 첼시의 소녀들)." - P196

"When I put a spike into my vein / Then I tell you, things aren‘t quite the same / When I‘m rushing on my run / And I feel just like Jesus‘ son(내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을 때 있잖아, 모든 게 달라 보여 / 약에 흥분할 때면 / 내가 마치 예수의 아들인 것처럼 느껴져)." - P196

보사 노바("새로운 트렌드"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 P195

("Turn off your mind, relax and float downstream (생각을 멈추고 긴장을 풀고 흘러 내려가)"). - P194

"Was it real, was it in my dreams? I need to know what it all means (생시인가 꿈인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난 알아야만 해)." - P193

차트는 차트일 뿐이다. - P193

"And there ain‘t nothin‘ I can do about it(내가 어쩔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 P193

"There‘s a crack up in the ceiling / And the kitchen sink is leaking / Out of job and got no money / A Sunday joint of bread and honey (천장에 틈이 있어 / 부엌싱크대는 새고 있지 / 직장도 돈도 없고 / 내 일요일 만찬은 빵과 꿀)." - P186

"전 로큰롤의 진정한 기준이 상스러움이라는 걸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레스터 맹스가 이렇게 적었다. 그는 이 개라지 록 앤섬에서 영감을 얻어다 자신의 저서 「Psychotic Reactions and Carburetor Dung」을 완성했다. - P185

리드 싱어 아서는 처음에 다른 러브 멤버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선셋 대로의 콜로니얼 아파트 화장실에서 밥딜런 스타일의 포크송으로 이 곡(7 and 7 is)을 고안했다. "제 곡들은 새벽이 오기 바로 직전에 떠오르곤 했죠." 그가 후에 작가 필 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꿈속에서 노래를 들어요." - P183

"In my lonely room I‘d sit, my mind in an ice-cream cone(난 외로이 방에 앉아 있곤 했지 아이스크림 콘에 머리를 담고)" - P183

"ice-cream cone"은 체벌용 바보 모자를 비유적으로 한 말이다. - P183

‘나자빠지는(wipe out)‘ 스타일 - P183

"El muerto vivo "(살아 있는 죽은 자들) - P179

"Mas que nada" (‘뭐야. 말도 안 돼‘ 정도의 뜻) - P178

카리오카(리오데자네이루 태생 주민) - P178

역사는 60년대가 낳은 위대한 밴드 중 하나에 관대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외모를 따진다. - P178

이것("God Only Knows")은 사랑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없을 때 느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대해 노래했다. - P176

"I may not always love you(너를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몰라)" - P176

"But long as there are stars above you / You‘ll never need to doubt it (하지만 당신 위에 별이 뜨는 한 / 그건 단 한시도 의심하지 않아도 돼)" - P176

신은 창조하는 만큼 파멸시킨다 - P176

("Back of my neck all dirty and gritty. Doesn‘t seem to be a shadow in the city (내 목 뒤는 온통 더럽고 까칠해. 이 도시엔 그림자조차 없는 듯 보여)") ...(중략)... "But at night it‘s a different world(하지만 밤엔 완전히 다른 세상)!" - P176

"한 싱글에서 다른 싱글로 넘어갈 때마다 완전히 전혀 다른 사운드를 선보이는 게 저희가 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죠." - P176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my darkness goes(난 내 안의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돌려야만 해)") - P175

"Tune on, Turn in, and drop out(흥분하라, 함께하라, 그리고 이탈하라)" - P174

("Nowhere is there warmth to be found / Among those afraid of losing their ground(어디서도 온기를 찾을 수 없네 / 뒤쳐질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 P173

"I look all white but my dad was black(난 온통 하얀 피부지만 우리 아빠는 흑인이었어)" - P172

"I try going forward but my feet walk back(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내 발은 뒷걸음치네)" - P172

("We outran our own shadows(우린 우리의 그림자보다 더 빨리 달렸지)") - P171

"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나는 나이 들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어)" - P169

"Why don‘t you all f-fade away (너희들 모두 다 사, 사라져버리지 그래)" - P169

"말썽쟁이들이 손잡이를 훔쳐가서 물펌프를 쓸 수가 없어 ㅡThe pump don‘t work ‘Cause the vandals stole the handleㅡ평생 이 구절을 사랑할 겁니다."
로저 워터스, 1987 - P166

딜런은 자신의 우상 우디 거스리로부터 음악 재료를 훔쳐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거스리와 피트 시거의 "Taking It Easy"에서 가사들을 슬쩍해 와("Mom was in the kitchen preparing to eat / Sis was in the pantry looking for some yeast(엄마는 부엌에서 밥 먹을 준비를 하고 / 누이는 식료품 창고에서 이스트를 찾고 있어)"), 그만의 것으로 탄생시켰다. - P166

딜런의 가사이기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정말 뚫어져라 샅샅이 곡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요 구절들은 도무지 의미를 모를 말들의 뒤범벅이며, 그 예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 "You don‘t need a weatherman / To know which way the wind blows (꼭 기상예보관이 필요한 건 아니야 /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나를 아는 데에는)"가 있다. - P166

("I don‘t want your botheration, get away, leave me (네가 귀찮게 하는 게 싫어! 저리가. 날 내버려둬)!") - P166

그런지가 출현하기 훨씬 전, 미국 태평양 연안 북서부는 생산직 육체노동자적 로큰롤을 만드는 것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찬란하도록 근본에 충실했고 로스앤젤레스나 뉴욕과 같은 요란한 음악 업계 핵심지와는 거리를 두었다. 동족 업계 또래들과는 다르게, 이 지역밴드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덕에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착실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대규모 스튜디오를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탓에 자신들만의 알아서 하기(D.I.Y.) 노동관을 고수해야 했다. 이것은 훗날 도래할 펑크 신의 시초였다. - P163

기차에 탑승할 수 없는 유일한 이는 바로 "모든 인류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만 챙기려는 구제 불가능한 죄인" 뿐 이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밥 말리의 이목을 끈다. - P162

"Rolling Stone‘은 제가 쓴 곡 중 최고입니다."
밥 딜런, 1965 - P160

밥 딜런의 곡 중 최고를 꼽는 것은 반 고흐의 최고 명작을 뽑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딜런 팬들은 이미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대부분 "Like a Rolling Stone"을 선택했다. - P160

("You used to ride on the chrome horse with your diplomat / Who carried on his shoulder a Siamese cat(넌 네 외교가와 함께 크롬 말을 타곤 했지 / 어깨에 샴고양이를 얹은 그 외교가)") - P160

"노래 한 곡 한 곡은 모두 어떤 생각을 담고 있어야 하고, 이야기를 전해야 하며, 무언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  _베리 고디 - P158

키스 리처즈(Keith Richards)는 자리를 잡고 앉아 부지런히 노래를 억지로 쓰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노래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인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아무리 그런 리처즈라고는 하지만, "(I Can‘t Get No) Satisfaction"(1965)의 성공은 진정 (신성 개입이 아닌) ‘신성 만취‘다. - P156

(화음에 변화를 주지 않고 단일 코드에 초점을 맞춰 끌어가는 ‘드론(drone)‘을 도입부에 사용하는 수법은 마사 앤 더 반델라스의 "Dancing in the Street"과 같은 모타운 히트작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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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바로 딱 와닿지가 않아서 그 의미를 곱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각자 성향에 따라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반대로 사람들한테 상처받는 것이 싫다든가 이외 여러 이유들로 인해 의도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뭐가 옳고 그른지를 언급하고 싶진 않다. 단지 성향과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 인물이 언급한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라는 워딩이 좀 마음에 걸렸다. ‘사람 좋아하는 게 정신질환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할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소설 속 인물이 이렇게 언급한 데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본문을 좀 더 읽어나가면서 알아봐야 할 듯하다. 의문은 계속 유지한 채로 말이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 P15

때로는 이름 몇 글자가 사람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버리기도 한다. - P16

지금이란 때 / 때가 지금이라면 / 이 지금을 꿈쩍없는 / 지금으로 만들 수밖에 - P21

우리는 교차하는 두 줄의 직선처럼, 한 지점에서 잠깐 만났다가 그대로 멀어진 것이다. - P23

매우 신기하게도(어쩌면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늙어버린다. 우리의 육체는 돌이킬 수 없이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많은 것이 이미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강한 밤바람에 휩쓸려, 그것들은ㅡ확실한 이름이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ㅡ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뒤에 남는 것은 사소한 기억뿐이다. 아니, 기억조차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우리 몸에 그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런 것을 누가 명확히 단언할 수 있으랴? - P24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이 많다. - P32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남의 마음을 짓밟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내거나, 불쾌감을 안겨주거나 한다. - P40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 P42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노인이 이맛살을 한층 더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 - P43

"정말로 중요한 건 학교같은 데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거든." - P44

"그런 원은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누구의 눈에나 보이지는 않지." - P44

"알겠나. 자네는 혼자 힘으로 상상해야 돼. 정신 차리고 지혜를 쥐어짜서 떠올려보라고.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그렇게 진지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게 어떤 것인지 보이거든." - P44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 ...(중략)...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 P44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중략)...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ㅡ그게 ‘크렘 드 라 크렘‘이야. 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 P45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가는 시기니까." - P45

"나도 물론 그때는 무척 신경쓰였어." 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곱씹어보았지. 상처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 P48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 P49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ㅡ어디까지나 나의 막연한 추론일 뿐이지만. - P50

세상 사람들에게 유머감각이 결여된 건지, 아니면 내 유머감각이 워낙에 비뚤어진 건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 P56

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ㅡ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 P67

"물론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 버드가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완만한 것이기도 해. 자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프레이즈와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시에, 한없이 잡아 늘일 수도 있지. 동쪽 해안에서 서쪽 해안만큼 길게ㅡ혹은 영원에 다다를 만큼 길게. 시간이란 관념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어. 그런 의미로 보면, 나는 하루하루 살면서 죽어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실제로 맞는 진짜 죽음은 철저하게 무거워. 그전까지 존재했던 것이 갑자기 통째로 사라져버리지. 완전히 무無가 되어버려. 그리고 내 경우, 그 존재는 나 자신이었어." - P68

"죽을 때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 버드가 말했다.
"내 머릿속에 있었던 건 그저 하나의 멜로디였어. 그걸 도돌이표처럼 언제까지고 머릿속으로 흥얼거렸지. 그 멜로디가 도무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거든. 왜 가끔 그럴 때 있잖아? 멜로디 하나가 머릿속에 달라붙어버리는 거. 그게 뭔고 하니,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1번, 3악장의 한 소절이었어. 이런 멜로디야."
버드가 작게 허밍으로 그 멜로디를 읇조렸다. 나도 아는 멜로디였다. 피아노 솔로 파트다. - P69

"베토벤이 쓴 멜로디 중에서 최고의 스윙이라 할 수 있는 소절이야." 버드가 말했다. "나는 그 1번 콘체르토를 옛날부터 좋아했어. 셀 수 없이 들었지. 슈나벨이 연주한 SP 레코드로, 그래도 희한한 일이지. 이 찰리 파커가 죽을 때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흥얼거린 것이 하필이면 베토벤의 멜로디라니. 그러고는 어둠이 찾아왔어. 막이 내리듯이." 버드는 쉰 목소리로 작게 웃었다. - P69

당신은 이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믿는 게 좋다. 어쨌거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 P71

한때 소녀였던 이들이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내가 소년 시절 품었던 꿈 같은 것이 이제 효력을 잃었음을 새삼 인정해야 해서일 것이다. 꿈이 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실제 생명이 소멸하는 것보다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매우 공정하지 못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 P76

그곳에 있었을 중요한 메시지는 모든 꿈의 핵심들과 마찬가지로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 P77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큼직한 외투 주머니에 가만히 잠재워둔 따뜻한 새끼고양이처럼. - P79

그곳에는 음악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것은 음악을 포함하면서도 음악을 넘어선, 더욱 커다란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 P83

귀기울이면 거의 언제나 그들의 곡이 들려왔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비틀스의 음악은 우리 주위를 구석구석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꼼꼼하게 바른 벽지처럼. - P86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 P87

거창한 오해에 거창한 화해가 뒤잇고, 몇 가지 장애물이 안개 걷히듯 해소되고, - P88

"질투심이 많으면 가끔은 무척 힘들어." - P89

‘의미 없는 질문‘이란 답의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판정하기 힘든(혹은 판정할 수 없는) 질문을 말한다. 작품을 쓴 작가 본인조차 과연 판정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들이다. - P97

문학에서 비교적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P98

"불은 불로 다스린다. 뭐 그런 말도 있잖아." - P101

‘너는 굿바이라 말하고, 나는 헬로라 말하네.‘ - P114

내가 도쿄에서 만났던 한 여자는 그 종을 확실히 울려주었다. 그것은 논리나 이론을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 혹은 영혼의 훨씬 깊은 곳에서 멋대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뿐,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 P117

"자네가 그때 읽어준 아쿠타가와의 「톱니바퀴」에, 비행사는 고공의 공기만 마시기에 갈수록 지상의 공기를 견딜 수 없어진다…………… 뭐 그런 말이 나왔었잖아. 비행기병이라던가. 그런 병이 정말로 있는지는 몰라도, 그 문장이 지금도 기억나." - P118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다. - P129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 P131

세상일 알 수 없다. - P135

반쯤 어이없는 듯, 반쯤 감탄한 듯. - P137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ㅡ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P147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 P148

자, 팀이 이기기를 빌어보자. 그리고 동시에 (남몰래) 지는 것에 대비해보자. - P148

추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P153

관찰한 바에 따르면, 내가 아는 아름다운 여자 중 많은 이는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ㅡ인간의 신체 환경에는 반드시 그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ㅡ이 불만스럽거나 거슬리는 탓에 항상 심적으로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소한 단점도, 잘 보이지도 않는 흠결 하나조차 그녀들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속앓이까지 했다. - P153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ㅡ혹은 못생겼다는 것을ㅡ나름대로 즐길 줄 아는 여자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아름다운 여자에게도 어딘가 보기 싫은 구석이 있듯이, 어떤 못생긴 여자에게도 어딘가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아름다운 여자들과는 달리 그런 부분을 기탄없이 즐기는 듯했다. 대체도 없거니와, 비유도 없다. - P154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종종 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뒤바뀐다. 빛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림자가 빛이 되고, 빛이 그림자가 된다. 양이 음이 되고, 음이 양이 된다. 그런 작용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본질인지 혹은 그저 시각적 착각인지는 내가 판단하기 버거운 문제다. - P154

혼자 콘서트를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는 보통 소소한 연대감 같은 것이 생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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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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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읽었던《양을 쫓는 모험》이후 읽을거리를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양을 쫓는 모험》의 등장인물 중에 양 모양으로 만들어진 털옷을 입은 ‘양 사나이‘가 있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한《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의 제목과 오버랩이 되면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본문 내용에 대해 잠시 언급해보자면, 양 사나이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 사내로부터 양의 조상님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성(聖) 양 어르신에게 바칠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다. 양 사나이는 평소에는 도넛 가게에서 일을 하느라 작곡할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그가 거주하는 하숙집 아주머니는 시끄럽다며 피아노도 못치게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점점 다가오는데 딱히 작곡해놓은 건 없고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양 박사가 홀연히 등장하여 양 사나이의 고민을 듣더니 도움의 손길을 슬그머니 내민다. (참고로 ‘양 박사‘도 ‘양 사나이‘와 마찬가지로《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 작품에서 ‘양 박사‘는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양과 관련하여 어떤 저주같은 것을 받아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저주‘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등장한다.)

양 사나이는 양 박사가 도와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자신이 먹던 도넛까지 건네며 도움을 요청한다. 근데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양 박사는 양 사나이에게 작곡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어떤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주에 관한 상세한 자초지종은 직접 본문을 통해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어쨌든 그러면서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양 박사가 시키는대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이후 양 사나이는 양 박사가 말한 저주를 풀기 위해 순진해보일정도로 양 박사의 말을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사이즈의 구덩이를 파기도 하고, 특정시간에 맞춰서 그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난생 처음보는 꽈배기처럼 생긴 ‘꼬불탱이‘도 보게 된다. 그리고 가까스로 구덩이에서 탈출한 이후에는 저자의 다른 소설(1973년의 핀볼)에 나왔던 쌍둥이 자매(208, 209)도 만나게 된다.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해매던 양 사나이는 이후 ‘바다까마귀 부인‘을 만나 저주를 풀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는데 또 거기서 앞서 만난 ‘꼬불탱이‘와 생김새는 똑같지만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는 ‘또다른 꼬불탱이‘를 만난다. (앞에 나온 꼬불탱이가 형 꼬불탱이였고 뒤에 나온 꼬불탱이는 동생 꼬불탱이였다고 한다) 이 끝을 알 수 없는 저주 풀기 모험의 마지막 지점에서는 ‘부끄럼쟁이‘라고 지칭되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캐릭터가 지시한 행동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길고 길었던 ‘저주를 풀기 위한 모험‘이 끝난다.

우여곡절 끝에 모험이 끝나고 양 사나이는 드디어 성(聖) 양 어르신을 만나게 된다. 앞에서 별도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험이 시작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었는데, 모험이 끝나고 나니 어느덧 하루가 지났는지 성 양 어르신이 그간 모험에서 나왔던 캐릭터들과 함께 양 사나이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하여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위에서 언급했던 성 양 어르신에게 바칠 음악은 양 사나이가 파티장에 있던 피아노로 즉석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보다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에 나왔던 캐릭터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물론 기존 작품에 나왔던 것과 이《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에 나왔던 캐릭터들이 가진 특징이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씩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기존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봤던 분들이라면 과거 자신이 읽었던 작품들을 회상해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나왔던 캐릭터 중에 개인적으로 ‘꼬불탱이‘와 ‘바다까마귀 부인‘ 그리고 ‘부끄럼쟁이‘ 의 경우 독자인 내가 개인적으로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동저자의 작품들에 나왔던 캐릭터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저자가 썼던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거기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전반적으로 책 자체가 굉장히 얇기도 하고 중간중간 스토리와 관련된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어서 순식간에 읽어볼 수 있었다. 특별히 그림 중에 옆으로 그리고 아래로 지면을 펼칠 수 있는 것들은 물론이고 도넛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 부분도 있었는데, 기존 책 지면의 한계를 뛰어넘어 특정한 상황을 실감나게 나타냈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혀있던 글처럼 언제나 평화롭고 행복하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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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해 기존의 곤고하던 지위가 흔들리는 집단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새로운 집단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선 본문에서 알파고 출현 이후 바둑업계에서 활약하는 프로기사들의 얘기들을 다양하게 들어볼 수 있었는데,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멘붕이 왔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업계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인공지능이라는 변화의 물결에 과감하게 올라타서 비주류였던 사람이 새로운 주류로 거듭나는 사례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업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이러한 지각변동은 분야를 막론하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인데, 이러한 지각변동이 어느정도 안정되어 땅이 평평해지게 되면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식으로 기존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공평해진다는 말로 표현한 듯하다.

추가로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인공지능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용어라고 느껴졌다. 아마도 민주화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듯하다.

‘평평해짐‘은 곧 ‘공평해짐‘을 의미한다. - P106

일단 나오면 그게 없었던 시절로 세상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 ...(중략)... 경쟁에서 유리해지는 그룹이 그걸 포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 P106

인공지능처럼 쓸모 있고 강력한 기술은 마치 야수와 같다. 일단 거리에 뛰쳐나오면 붙잡아 우리에 가두는 것이 매우 어렵다. ...(중략)... 사실상 그 야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아직 거리에 나오기 전뿐이라고 봐야 한다. - P107

챗GPT가 등장한 뒤로 ‘수준급의 실력을 지닌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나오면 당신도 이용할 거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그 질문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은 수준급의 소설 쓰는 인공지능을 쓰는 일을 내가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전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괜찮은 인공지능이 나와서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하면, 내게 선택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걸 써야만 한다. - P107

개발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AI-환경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할지 예측할 수 없다. - P110

인공지능은 스마트폰이나 소셜미디어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아니, 이 말은 부정확하다. 인공지능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집어삼킬 것이다. 인공지능은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뒤에 나올 다른 여러 기기, 그리고 소셜미디어와 그 뒤에 나올 다른 여러 미디어와 결합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 무언가는 사실상 우리가 살아야 하는 환경 그 자체일 것이다. - P113

한국기원의 바둑용어 사전은 기풍(棋風)을 "바둑을 두는 데 있어서 나타나는 각 개인 특유의 방식이나 개성"이라고 설명한다. - P115

바둑에는 ‘류(流)‘라는 것이 있다. 기사마다 바둑을 두는 기풍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각자의 성격과 추구하는 바가 나타난다. (...) 바둑기사에게 자신만의 ‘류‘는 일종의 자아다. 바둑을 어떤 식으로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다. 그래서 거장들의 바둑 대결은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충돌처럼 다가온다. 바둑이 무려 4천 년을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관과 삶의 철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_조훈현 9단 자서전 - P117

"바둑에서 기풍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감정이 사라지고 이성만 남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_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 P118

기풍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기사들이 자유로웠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어떤 기사가 두는 방식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가 없었고 두는 사람들은 그게 가능한 포석이라고 생각했던 거고요. 그리고 그게 솔직히 재미있기도 했죠. - P119

"기풍은 어떤 기사가 본인을 증명하는 방법이죠. 그런데 그런 캐릭터나 퍼스낼리티라는 건 승부에 비하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도 해설을 하지만 저는 바둑의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바둑이 아름답고 어떤 바둑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지요? 최선을 다한 바둑에는 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_이희성 9단 - P120

"기풍이라는 건 포석에서 드러나는 부분도 좀 있지만,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기풍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인공지능이 도입되면서 바둑이 굉장히 복잡해졌어요. 예전에는 어떤 틀에 의해서, 돌의 모양을 중시했는데 요즘은 그런 틀이 무너졌고 난전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어렵고 두는 사람도 어려워지는 상황이죠." - P121

‘포석은 기풍이 아니다‘ _유창혁 9단 - P121

"기풍이라는 건, 바둑에서 자기 성격이 나오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성격이 차분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있든 없든 차분하게 가는 거고, 성격이 전투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계속 적극적으로 가는 거고요. 그건 별로 바뀐 것 같지 않아요." - P121

"인공지능 1.0 시대는 AI 수법을 빨리빨리 받아들여서 이걸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시기입니다. 그러면 성적이 많이 올라갔죠. 이제 AI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간에 격차가 있다는건 모두 인정하고, 다들 AI를 씁니다. 그래서 최근에 2.0 시대가 열렸어요. 자신만의 생각과 AI 수법을 결합하는 시대예요. 예를 들어 어떤 기사가 생각하는 수가 AI 분석으로 이길 확률이 50퍼센트 아래라면 그건 포기해요. 하지만 이길 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인 수 중에서는 가장 수치가 높은 수를 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를 택하는 거예요. AI가 이길 확률이 63퍼센트, 58퍼센트,
51퍼센트, 47퍼센트인 수를 제시하면 47퍼센트인 수는 버리지만 51퍼센트인 수는 고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의 개성을 뽑아내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기풍이라는 게 은근히 있어요." _김만수 8단 - P123

"어차피 따라 두는 사람은 따라 두고요, 자기 뜻대로 두는 사람은 본인이 두고 싶은 대로 둬요." _김지석 9단 - P124

어떤 프로기사들에게 기풍은 그저 개성의 다른 말이다. 포석은 개성적일 수 있지만, 포석이 비슷해지더라도 한 기사의 개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바둑 한 판을 두는 과정에서 그의 성격과 개성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 P124

프로기사들의 추측이기는 하나, 인공지능의 ‘기풍‘은 아마도 그저 초기 설정에 달린 문제인 듯하다. - P125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AI들도 스타일이 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쉬운 예를 들자면 상대를 작은 차이로라도 확실하게 이기는 확률을 높이느냐, 아니면 큰 차이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대요. 그리고 크게 이기는 걸 목표로 설정한 AI일수록 사람하고 비슷하게 둔대요. 알파고는 최대한 안전하게 이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생각에 좀 유리하다 싶으면 인간 기사들이 보기에는 최선이 아닌 것 같은 수도 두는 거예요." _이하진 4단 - P125

"인공지능이 두는 바둑에는 기풍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생각의 흐름으로 연결되어서 나오는 수가 아니니까요. 단순히 그때그때의 확률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거니까요."
_정두호 4단 - P126

"기풍은 (경향성이 아니라) 초반 구상을 의미한다" _안성문 바둑전문기자 - P126

"바둑이 중반에 들어가면 이미 그때는 오로지 최선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칼싸움 같은 거예요. 구상은 50수, 길게 보면 80수 안에 있는 거죠. 한 기사가 자기 스타일대로 초반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풍이 나오는 거죠. 중반에 들어가면 치고받을 때 선택의 문제는 있겠지만 그건 기풍이 아니에요." _안성문 바둑전문기자 - P126

결국 바둑계에서 사용해 온 ‘기풍‘이라는 단어는 현실 세계의 특정한 현상에 대한 모호한 비유였다. 따지고 보면 ‘성격‘이나 ‘철학‘이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인간은 그런 개념어와 비유에 기대어 세계를 파악한다. 언어는 도구다.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를 비로소 제대로 묻게 된다. - P128

바둑계에서 흔히 썼던 ‘기세‘라는 용어에 관한 얘기다. 한국기원의 바둑용어 사전은 "대국에서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앞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의기가 강한 형세. 또는 상대가 두려워할 만한 힘. 보통 국면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다툴 때 나타난다"라고 설명한다. 모호한 개념을 다른 모호한 개념(제압, 의기, 형세, 두려움, 주도권)으로 설명하는 좋은 예다. - P128

인공지능이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세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인간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 P129

어떻게 보면 바둑 전문가들이 가장 딱한 신세였다. 알파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들이 가진 설명 도구라고는 인간의 언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의적이라든가 수비적이라든가 배짱이 대단하다든가 뒷맛을 고려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알파고의 바둑을 평했다. 인격이 없는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인간의 언어였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물을 의인화하고, 상상의 감정이나 성격을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이입한다. - P131

바둑계에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좋은 수나 나쁜 수가 될지 모르겠다는 잠재력을 표현하는 ‘뒷맛‘이라는 용어가 있다. 당연히 알파고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다. 알파고의 모든 수는 계산의 결과다. - P131

지능을 정의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는데, 어쩌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지능을 정의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대단한 상업적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다. 지능을 정의하기보다는 만들어 내는 편이 더 쉽고, 더 유혹적이다. - P132

블랙박스인 인간의 뇌는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른 인간의 뇌에 전파하기 위해, 즉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언어를 쓴다. 그런 교육의 언어 역시 상당수는 모호한 개념이나 비유다. 바둑계에서는 수많은 바둑 격언이 그런 언어를 사용한다. 매우 추상적인 차원의 조언도 있고, 그보다는 실제적인 차원의 요령도 있다. - P132

‘위기십결(圍碁十訣)‘이라고 하는 열 가지 격언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조언은 ‘부득탐승(不得貪勝)‘인데 승리를 탐하면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모순된 표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짐작한다. - P132

"우리가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는 것들이 정말 많구나 ...(중략)... 적당히 편의적인 정의를 내려서 적당히 쓰고 있는 것들이 엄청 많아요." _바둑 AI 개발 전문가 김찬우 7단 - P133

"바둑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칠 것" ...(중략)...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_서봉수 9단 - P133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나는 믿는다." _스티븐 킹 - P133

작곡과에서 예비 작곡가들에게 가르치는 음악 이론과 요령 역시 그런 추상적인 개념과 비유로 가득 차 있다. - P134

그런데 가끔 부사가 뭔지, 화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멋진 소설을 쓰고 뛰어난 곡을 작곡하기도 한다. 멋진 소설을 쓰고 뛰어난 곡을 쓰는 데 분명 어떤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는 작법 이론, 음악 이론과 무관하다. 사실 작법 이론과 음악 이론이 미래의 창작에 도움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반대로 과거에 이미 일어난 창작 과정을 언어로 설명할 때 유용하다. - P134

인공지능이라는 블랙박스가 지켜야 할 규칙과 내야 할 결과물을 명확히 규정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시도를 거듭할 때마다 점점 성장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 P135

목표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바둑의 경우에는 간명한 목표가 있었다. ‘이겨라‘라는 것이었다. - P135

‘감동적인 소설을 써라, 의미 있는 논픽션을 써라‘ 같은 목표를 인공지능에게 직접 입력하지는 못한다. ‘감동‘이라든가 ‘의미‘ 같은 인간의 언어를 보다 구체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 써야 한다. 아마 ‘소설‘과 ‘논픽션‘에 대해서도 비슷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 P135

어떤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소비자의 반응이라는 피드백을 얻는다. 판매량이나 조회수 같은 구체적인 수치로 그 피드백을 규정할 수 있다. - P136

인공지능이 혼자 음악을 만드느냐, 인간의 도움을 받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인공지능이 이 전체 피드백 루프를 관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 루프 중 어떤 부분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이기만 하면 된다. - P137

약인공지능은 인간이 언어로 만들어 놓은 추상적 구조물들을 밑바닥에서부터 분해하고, 그 구조물의 어떤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 같다. 인간은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이해하고 그 아래 있는 듯한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개념어와 비유를 동원해 설명을 만들었다. 그 설명에 의존해 행동 규칙을 세웠고, 그에 따라 일한다. 예술 분야에서뿐만 아니다. 경영 이론, 경제 이론, 사회 이론, 정치 이론, 교육 이론 같은 것들이 다 거기에 해당한다. - P141

좋은 바둑과 이기는 바둑은 다르다고 말하는 프로기사들에게는 큰 약점이 있다. 좋은 바둑이 뭔지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항상 막연하게, 경험에 기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 P144

하지만 막연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삶, 좋은 부모, 좋은 언론, 좋은 공동체 같은 개념도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 P145

"한 판의 바둑 내용이 만들어지고, 그걸 누군가가 기보로 접하고, 그걸 봤을 때 물론 승패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작품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바둑이 예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_박정상 9단 - P146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 중요하다‘ _후지사와 슈코 9단 - P146

"피아노 연주를 해도 피아니스트마다 느낌이 다르고 소설을 써도 작가마다 다 다르죠. 저는 기사들이 가진 재주와 능력에, 살아온 환경과 생각의 차이가 바둑에 다 녹아든다고 봐요. 제가 바둑을 두면 저만의 바둑을 둬요. 다른 기사들의 바둑과 똑같지 않아요. 팬들이 그런 걸 보면서 박수를 치고 즐기는 거죠." _양재호 9단 - P146

"저는 언젠가부터 제 목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바둑을 두는 것이라고 대답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AI한테는 실력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제 저보다 강한 기사들도 많죠. 그래도 제 바둑을 보는 분들이 ‘이 사람은 뭔가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바둑을 두는구나,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바둑을 두고 싶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_목진석 9단 - P146

‘좋은 바둑과 이기는 바둑은 다르다‘라는 생각은 ‘바둑은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 P147

"승부에서는 졌지만 과정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철학이 있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바둑에서 궁극적 가치가 그런 걸 보여주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둑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어쨌든 상대에게 반집 차이로라도 이기는 것이고, 이길 수 있는 수를 찾아내는 과정이 아름다운 거예요. 이길 수 있는 수가 있는데 갑자기 철학을 하겠다면서 다른 짓을 하는 건 바둑이 아니라고 봅니다. 철학을 가지고 이기면 정말 아름답겠지만 졌을 때 철학을 핑계로 대는 건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_명지대 바둑학과 남치형 교수 - P150

"그런 게 있다(바둑에 철학이 있다)고 주장했던 과거 모습이 더 ‘손발 오그라드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가치 있는 존재야‘ 하고 계속 얘기해야 하는 상태라면 이미 자존감이 없는 거죠. 그렇게 치면 축구든 수영이든 피겨스케이팅이든 어떤 분야에서건 철학과 통찰은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_명지대 바둑학과 남치형 교수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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