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그 상황을 스스로 변화시킬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냥 순응하며 살아가는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힘들더라도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면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면 되는 것이고, 만약 그 댓가를 치를 자신이 없다면 마음 한구석에 불만의 씨앗을 잠재운 상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 두 시나리오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사람들마다 우선순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의미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노력과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눈앞의 상황을 ‘원래 그런 것‘으로 무조건 수용하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거부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포로를 취하지 않기로 합의한 전쟁과도 같다. - P157

우리는 한 장 한 장의 음반을 면밀히 채점했지만, 물론 그런 순위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건 덤으로 따라오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 주고받는 심도 있는 대화, 열의를 품을 수 있는 무언가를 거의 목적 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 P166

"이 작품(슈만의《사육제》)은 어찌 보면 환락의 극치에 있는 음악이지만, 말하자면, 환락이 있기에 비로소 정신의 밑바닥에 생식生息하는 사악한 것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거야. 그들은 암흑 속에 있다가 환락의 음색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지." - P169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ㅡ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 P169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뗄 수 없어진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 - P170

"하지만 설령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 아래 또다른 민낯이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고."
그녀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게 보이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걸. 분명 어딘가에 있어." - P170

"하지만 그런 것을 볼 수 있었던 로베르트 슈만은, 결국 행복해지지 못했어. 매독과 분열증과 악령들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환상적인 음악을 남겼잖아. 다른 사람들은 쓸 수 없을, 비범한 곡을 썼어."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크고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양쪽 손가락 관절을 하나하나 꺾었다. "매독과 분열증과 악령들 덕분에. 행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 P171

‘슈만은 미치기까지 했는데, 내가 다 소용없게 만들어버렸다‘ _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P171

내가 그녀와 자지 않았던 것은ㅡ실제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ㅡ그 가면의 미추(美醜)보다는 오히려 그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두려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악령의 얼굴이건, 천사의 얼굴이건. - P172

많은 사람은 어째서인지 진부한 거짓말에 이끌린다. 혹은 거꾸로 그 진부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사기꾼이 끊이지 않고, 사기에 걸려드는 사람 또한 끊이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패널들이 뭐라고 설명하건, 누구를 비판하건, 그것은 조수간만의 차처럼 명백한 사실이다. - P175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낮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 P178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원이란 매우 긴 시간이다. - P181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 P181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읇는다. - P191

정확한 사실의 반복이야말로 진정한 예지로 가는 길이라고 - P191

"다른 원숭이들과는ㅡ물론 그들은 제 소중한 동포이긴 하지만ㅡ뭔가 잘 통하지 않았어요. 공통된 화제도 없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요. ‘네 녀석 발성은 좀 이상하다‘면서 놀리기도 하고 따돌리기도 했어요. 암컷 원숭이들은 저를 보면 자기들끼리 쿡쿡 웃었고요. 원숭이는 작은 차이에도 무척 민감합니다. 그들 눈에는 제 거동에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혹은 불쾌감이나 짜증을 유발하는 부분이 비쳤겠지요. 그런저런 연유로 점점 같이 있기 거북해져서, 어느새 무리에서 벗어나 따로 생활하게 됐습니다. 이른바 ‘외톨이 원숭이‘입니다." - P196

"혼자 어떻게든 식량을 확보해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일 괴로운 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원숭이와도, 사람과도 얘기할수 없어요. 고독하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 P196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내 것으로 삼는다ㅡ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분명 성적 욕망이 깔린 악행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깨끗하고 플라토닉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있는 그 이름을 그저 남몰래 혼자 사랑할 뿐입니다. 마치 부드러운 바람이 초원을 가만히 훑고 지나가듯이." - P201

"그것은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고독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인 셈이지요. 그 둘은 꼭 달라붙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 P202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ㅡ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ㅡ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安寧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저는 이렇게 이 마음에 (라고 말하면서 원숭이는 털투성이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한때 연모했던 아름다운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 나름의 소소한 연료삼아, 추운 밤이면 근근이 몸을 덥히면서,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볼 생각입니다." - P203

주제? 그런 게 있을라고. - P207

아무리 선명한 기억도 시간의 힘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한다. - P208

뭐,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장고 라인하르트가 코드를 틀리게 잡는 밤도 있고, 니키 라우다가 기어를 넣다가 실수하는 오후도 있다(아마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더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P221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는 결과론 - P221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 P223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 P223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 P224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왜일까? 나는 아마 두려웠던 것이리라.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어떤 여자ㅡ아마 내가 모르는 누군가ㅡ에게 저지른 고약한 짓의 내용이 밝혀지는 것을. 그리고 또한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이 관지關知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녀에 의해 눈에 보이는 장소로 끌려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런 꼴을 당하느니 묵묵히 스툴에서 내려와, 이유 없는(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호된 비난을 달게 받으면서 자리를 뜨기를 나는 선택한 것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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