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나오는 이야기(애도의 방식)에선 동주라는 사람이 승규라는 사람한테 이른바 학폭을 당하다가 본의아니게 발생한 사고(?)로 인해 학폭 피해자인 동주가 겪게 되는 각종 일들과 그에따른 심리 변화들이 서술되어 있다.

요 근래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학교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의 내면에 있는 심리 변화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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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온 이야기(너머의 세계)에선 한모라는 중학생과 연수라는 수학선생님이 나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한모와 한모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너무 괴롭히는 장면들이 나와서 요 근래 있었던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이 구구절절이 느껴졌다. 선생님을 장난감 다루듯 희롱하는 학생인 한모와 그런 한모에게 선생님이 뭐라 했다는 이유하나로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윽박지르는 한모의 엄마를 보면서 참 이게 뭔가 싶었다. 심지어 독자인 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괜히 선생님 입장에서 한모라는 캐릭터에 대한 증오심마저 들었다. 이와 더불어 선생님인 연수가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위로는 커녕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분노가 치밀었다. ‘과연 이게 맞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문제는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이 실제로 학생 인권이나 교권과 관련된 뉴스 같은 데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을 쓴 작가도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써놓진 않았지만 마치 독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부탁한다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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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나온 이야기(문장의 무게)는 이 작품집의 수상작가인 안보윤 작가님의 수상소감을 약간의 비유적인 표현을 곁들여 쓴 것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수상소감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소란한 사람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늘을 그렇게 잡수셨는데 왜 아직도 인간이 덜 됐을까.

마늘 까기에 몰두한 할머니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는다.

5백 원짜리 동전은 내 주머니에 넣는다. 이건 훔친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

승규는 지나던 길에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차내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늘 소란의 중심에 있었다.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멸시하느라 소란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건 지겨운 일이었다.

승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휘휘 걸어 자리를 벗어났다.
소란에서 멀어지기 위해 승규를 흉내 냈다.

뺨을 맞는 일. 그게 특별히 부끄럽진 않았다. 뺨이 아니라도 나는 어디든 늘 맞았으니까. 내가 죽도록 부끄러웠던 건 나의 관성이었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뺨을 맞기 위해 발설되는 나의 대답이 죽을만치 부끄러웠다.
내가 답을 하는순간 게임이 성립됐다. 승규와 나의 수직적 위계가 거기 있었다.

말하지 마. 그만해. 나는 그 말을엄마와 변호사에게서 제일 많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중에도 그들은 내팔죽지를 꽉 눌러잡고 말했다. 네게 불리할 수 있어. 말하지 마.

소란은 소문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소문을 불신하고 누군가는 소문을 맹신했다.

매일매일이 소란했다.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문득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뭐니.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다 보니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 거야.

나는 진심을 담아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사람이 잘못 알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뭔 대수라고,

그건 대수로운 일이다. 사람에 대한 말은 어떤 것이든 다 대수롭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진심이야.

나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안쪽과 바깥 쪽, 앞문과 뒷문, 훈육과 학대.

손쉽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기준점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청소 일로 연수가 받는 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누구와도 부딪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연수는 자신에게 당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것은 재물의 형태로 어떤 것은 말의 형태로 떠올랐다.

연수를 제외한 사람들이 임의로 산정한 금액과 연수만이 동의하지 못한 말들.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지불되는 사례금 50만 원과 학부모에게 머리채를 잡힌 교사에게 지불되는 위로금 50만원.

연수가 말했다.
자신에게 당도한 모든 순간에 연수는 그렇게 답변해왔다. 난 몰라요. 난 못 봤어요. 나는 정말 그런 적 없어요.

처음엔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수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않아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작은 현판이 붙은 교실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와 어지럼증이 솟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교탁 앞에서면 시야가 급격히 졸아들면서 머릿속에 암흑이 찾아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들키는 것이 있었다.

중학생이 다 그렇죠. 관심받고 싶어 하고 미숙하고 제멋대로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미숙한 한모가 연수에게 한 일은 그저 문을 닫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받을 땐 단걸 먹어줘야 돼요. 선생님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애들은 그게 재밌어서 더 짓궂게 굴거든요.

아무것도 눈치챌 필요가 없었다. 연수는 그게 좋았다.

한모가 몸을 밀어붙여 올때의 불쾌감을 참는 것과 교실에서 추방당하는 모멸감을 참는 것 중어느 쪽이 그나마 견딜 만할까. 연수는 진지하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연수는 모든 게 다 지겹고 피로해 견딜수가 없었다. 연수는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단순한 일상속에 있고 싶었다. 그 당연한 일이 연수에게는 왜 그렇게 힘들었나.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

자음과 모음을 낱낱이 풀어 손에 쥐고 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석으로 되어 어디든 착착 붙던 한글 놀이 자석 세트 였는데,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손안에서 조몰락대던 그 글자들이 언제든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요.

동시에 그때 이미 알게된 것도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가게 될 글자들의 세계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선명한지에 대해서요.

한글 남자들을 연이어 붙이면 글자가 되고, 그 글자들을 소리 내 읽으면 세계가 시작됩니다.

말과 소리를 수줍게 싸서 누군가에게 건네면 관계가 시작되고, 주렁주렁 얽힌 무수한 타래를 박제시키면 역사가 됩니다. 글자를 몇 개 조합하는 것만으로 와락 일어서는 세계란 얼마나 매혹적인지요.

그러나 그세계는 끈질기게 이어 붙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붕괴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멋대로 기괴해지고 손쉽게 부정당하고 누군가를 틀림없이 상처 입힙니다.

어쩌자고 이런 무서운 것을, 어린 시절엔 굴리며 놀수 있었을까요. 입에 넣고 우물거리거나 냉장고 따위에 철썩 붙여둘 수 있었던 걸까요.

낱자를 더듬어 붙이던 어린 시절처럼 저는 여전히 글자들을 골라내고 있습니다. 활자를 조판하듯 백지 위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올립니다.

어떤 글자들은 몰래 손바닥에 써서 삼켜버리기도 하고, 어떤 글자들은 담벼락에 휘갈긴 뒤 도망치기도 합니다. 누군가 읽어버릴까봐, 혹은 아무도 읽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하면서요.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그 글자들의 무게를 떠올렸습니다.

정확히는 글자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소설 속 세계의 무게에 대해서입니다.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쌓아올린 세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고민해보겠습니다.

아이는 쏟아지는 질문들과 상반된 요구 속에 놓이게 되었다. 엄마와 변호사는 이렇게 경고했다. "말하지마. 그만해.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들도 그랬다. "네게 불리할 수 있어. 말하지 마."

그러나 죽은 아이의 엄마는 불쑥불쑥 찾아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요구를 했다.
"진실을 말해줘." 이 소란의 중심에 있는 아이가 바로  <애도의 방식>의 주인공 나(=동주)‘이다.

소란하다. 나는 소란한 것을 좋아하고 소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이미 소란한 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소란해지기 시작한 곳에서는 대부분 내가 그 중심에 있다.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멸시하느라 소란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건 지겹다. 나는 소란한 곳이 좋다. 타인에 의해 한껏 소란해진 상태라면 더더욱 좋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는 소문과 억측에 시달려야 했다.

종종 찾아오는 죽은 승규의 엄마는 ‘나‘를 둘러싼 소문이 잦아들 틈을 주지 않았다. 승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를 소란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마을을 떠나려 했으나, 먼 여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의 작은 찻집에 머물게 된다. 부산한 대합실에 ‘나‘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않을 만큼의 소란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나‘의 진실을 억압하고 있는 이가 승규 엄마뿐 아니라, 엄마와 변호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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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전쟁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좀 난해했지만, 굵직한 역사적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게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과 더불어 풍수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에 좀 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소설이었다. 또한 실제로 최근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도 녹아들어가 있어 좀 더 실감나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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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그렇게 곤란해지기를 무릅쓰는 게 복수지.˝

p.295에 밑줄쳤던 문장을 보면서 예전에 종합병원에 잠깐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간단한 검진차 갔었는데 대기하면서 마주치거나 지나쳤던 수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보면서, 그나마 사지 멀쩡하고 어디 크게 아픈데 없이 몸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집안에 몸이 불편하거나 어디가 아픈 환자가 있거나 한 경우 그 당사자도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 사람 주위에 있는 가족들 혹은 보호자 역시 여러모로 힘들 수 밖에 없다. 시간적인 것이든 금전적인 것이든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하지만 기타 부수적으로 감당해야하는 것들이 굉장히 크다고 알고 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이런 거 가지고 무슨 감사하기까지 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종합병원에 직접 가서 거기에 계신 수많은 환자분들을 보고나면 건강이라는게 결코 그냥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게 누군가에겐 당연한게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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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는 학교다닐 때 시험본다고 열심히 교과서를 읽어본 이후로 성인이 되서는 따로 깊이 있게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굵직굵직한 사건 외에 각종 풍수 관련된 각종 설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역사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 초중반에는 이게 무슨 얘긴가 싶은 것들도 있었지만, 오늘 읽었던 막판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잘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고,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회신령집단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중얼거리듯 여덟글자를 뱉어놓고 숨을 고른 그는 곧 또렷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다이아치 백 년 저주를 풀어낸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오."

"본래 후대의 누구도 해내기는커녕 짐작할 수조차 없었을 일이거늘 젊은 사람이 수월하게 풀었으니 이 기미히토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오."
"우연입니다."

"이 기미히토가 평생 수련을 하고도 닿지 못한 일을 우연이라 여기면 이 사람의 삶을 너무 보잘것없이 만드는 것이오!"

이어 기미히토는 법장을 내려놓고 일어서 테이블 옆으로 한 걸음 비켜 물러서더니 급기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사방의 관심이 쏠릴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바라보는 이 하나 없었고 형연 또한 제지하지 않고 가볍게 합장하며 마주 고요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예, 막혔던 물꼬에 불과합니다. 터져서 새 물길을 만들면 다시 흐르다, 다시 막히면 어떻게든 터지고, 또다시 흐르고."

"물길이 되어 흘러가게 두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흐르든 막히면 또 차고 넘치겠지요."

"사과를 받아 주시오. 이제는 두 나라가 은원을 풀고 함께 할 때도 되었잖소."

"반성, 화해."

모자를 쓰고 탑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고 있는 남자, 좋지않은 화질이나마 크게 당겨서 보여주는 체격과 얼굴은 틀림없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요녕성의 철령과 신고산의 철령이 번갈아 올라오며 역사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문구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전부 다 너였어. 어떻게."

오만 감정에 몸서리치던 은하수는급히 핸드폰을 꺼내 형연의 번호를 눌렀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답이 들려옴에도 아무 이유 없이 또, 또. 거듭 네다섯 번을 연달아 전화를 걸었던 그녀는 팽개치듯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팔에 머리를 묻었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네가." 속았다는 배신감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한 의구심도 아니었다.

그만한 범죄들을 저지르고 잠적해 버렸다는 걱정, 당분간 보지 못할거라고 말하던 목소리, 거기서 오던 이상한 불안감.

머리를 팔에 묻은 채 쥐어뜯던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뭐라도 해야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라도 있을 거야.

"저를 납치한 그 납치범은 이 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그 어느 교육자보다도, 이 나라 역사를 탐구하는 어느 학자보다도, 애국과 조국의 번영을 외치는 그 어느 정치인보다도! 진실되이 이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야 이 개자식아! 이 미친놈아!"
음식 그릇이 아무렇게나 엎어진 가운데 일어선 은하수의 입에서는 욕설이 흘러나왔지만 문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자와 경찰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예, 예?"
"지금 막,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려는 참입니다."

메가폰 소리가 깨울 때까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그는 과거 일본 전쟁의 상징 아래에서 무의식의 표면에 그저 부유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이형연. 한국인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상황을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는 방송국들이나 경찰의 비상 데스크를 당연하게 내놓은 극렬 테러리스트라는 예상과 달리 과거 일본의 침략을 꾸짖는 이야기나, 반성을 촉구하는 등의 강경한 어조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옛날이야기들. 조선 철령의 이야기, 다이이치의 이야기, 왜덕산이나 코 무덤이총의 이야기 등.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히 걸터앉은 채로 흥미롭게 짜낸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었다.

그간의 이야기에 더해 한국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선동하던 관동대지진의 이야기나, 여러 다른 풍수와 미신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이상한 이야기지요?"
형연은 웃었다.

"말 몇 마디, 글자 몇 개로 실제 있었던 일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그 때문에 의식이 바뀌고. 믿기 어렵겠지만 여러분 조국은 그렇게 한국을 지배했습니다. 잔재, 일제강점기의 잔재. 아마 잔재라는 말을 한국보다 많이 쓰는 나라는 세계에 또 없을 거예요."

잠시 말을 멈춘 형연의 눈길이 흘깃 야스쿠니의 전경을 훑었다. 전쟁에 나가 죽은 말, 개, 하다못해 비둘기까지 동상으로 만들어져 늘어선 침략 전쟁의 기념.
그리고 거기 아무렇지도 않게 선량한 소원을 비는 쪽지들이 붙은 에마라는 이름의 목판.

전범을 기리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위에 덧씌워지는 초상들이 있었다. 철령의 저주를 펼치는 다이이치, 조선사를 써 내려가는 이케다, 관동의 조선인들을 학살하라 외치는 승려들, 왜덕산을 파헤치는 이케마츠.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정신과 의식의 세계에서 한국을 찢고 부수려는 전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다.

"이웃한 두 나라의 역사에 전쟁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많은 일을 겪고도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한국에 일본은 끊임없이 저주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반드시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 시대에."

형연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것은 한국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겪어도 줄곧 잊고, 용서한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 용서했다 믿고,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당하지 않은 척 체면치레를 하며 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온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내가 야스쿠니를 불태우러온 까닭입니다. 일방향으로만 흐르는 두 나라의 관계가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정신과 의식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국이 다만 비겁하여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자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일본이 이 광경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의 나라에 내리는 저주입니다."

툭.
손을 떠난 초가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질끈 눈을 감아버린 형연은 한마디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한 점 아쉬움이 없었을까? 물어오던 다소 촉촉했던 목소리.

감로사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내민 얼굴. 그 말을 해 오던 목소리도, 순간의 감정도, 그 감정을 갖도록 살아온 삶도, 나아가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본질의 모든 것도 온전히 떠올렸다. 이렇게, 영원토록 기억 속에 남아 있잖아. 그때 그는 그렇게 답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길은 오직 형연의 주위만을 일렁이며 야스쿠니의 목조에 옮겨붙지 않은 채 고요하게 춤을 추었다. 불꽃 속 가부좌를 튼 그림자는 당당하게 등을 곧추세운 채 미동도 없었고 지켜보던 모두는 어느순간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있었다.

어째서.
야스쿠니를 불태우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운 이유가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민손을 거두지 않은 한국을 기억하라는 것일까. 그 양심의 빚을 기억하고 살아가라는 이 저주일까. 정신나간 테러리스트의 소행일까, 소신공양燒身供養 으로 화해를 기원하는 공덕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저 야스쿠니의 방화에 실패한 것뿐일까.

수많은 추측이 겹쳐가는 가운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본인은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수사나 추리의 결말도 논리적 귀결도 아닌 그저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말로만 수없이 회자되던 용서라는 단어, 나아가 화해라는 단어. 이총, 왜덕산, 관동대지진, 야스쿠니, 그런 거북하고 괴로운 키워드들이 모여 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에 혼자 조용히 불타오르던 형연의 모습이 올라 있었다.

마치 모든 은원을 사그라 트리듯, 세상에 흩뿌려진 저주와 귀신을 한데 모아 불태워 버리듯, 모든 것이 불로 정화된 정토를 거기 비추어내듯.

야스쿠니에서 불타오르던 한 사람의 모습은 그렇게 세상에 새겨졌다.

나는 이렇게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누군가,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나라는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더 남기고 싶다.
너와 함께 있었던 증거를 조금 더 남기고 싶다.

"야! 나랑 친구하자 - !"
메아리가 울릴리 없는 곳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 사이사이 그녀를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이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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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인간이 하늘한테 받은 몇 안 되는 선물이 망각인데, ...

처음에 책을 읽을 때 와닿았던 문장들에 밑줄긋기 해놓았던걸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북플에서 알려주는 1년 전 독서기록들을 보면서, 아 내가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쳤었었나 싶을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들도 다시금 보게 되고 한편으로는 와 이 문장 진짜 공감된다 싶은 것들도 다시금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뭐 새해라고 해서 특별할 거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더 나은 오늘이 날마다 쌓여가는 올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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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1-0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서곡 2024-01-01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앗 죄송합니다 위에 인사 남기면서 제가 성함을 잘 못 썼었어요 ㄷㄷㄷ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1 17:23   좋아요 1 | URL
아 괜찮습니다 ㅎㅎ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신걸요 서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