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자정의 도서관을 읽고..

북플의 ‘n년전 오늘 남긴 독서기록‘ 기능으로 어제는 100자평을, 오늘은 리뷰를 공유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2년전 적어두었던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 생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도 받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도 다시금 얻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살다보면 나보다 나아보이는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왠지모를 열등감이나 좌절감 같은 것들을 느끼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설사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조차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는 결핍을 느끼고 거기에 아쉬워하며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이 책의 이야기들을 통해 보게 되면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100% 만족하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 참 와닿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은 물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금 현재도 유효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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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2년 전 읽었던 책임에도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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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명보는 서운하지 않았다. 수년째 비슷한 경험을 하다보니, 돈문제가 개입되면 아무리 따뜻하고 친밀하던 관계도 냉랭한 사이로 변모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터였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아. 중요한 건 자네가 보여주는 행동이니까. 성수, 자네는 정말 애국자야."

"우리가 하는 운동의 목적은 그저 멸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평행선상으로 계속 되돌아오고있다는 거 알겠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어. 내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겠네. 나는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걸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

그가 지금 이해한 것은, 세상이 그의 가족과 한 무리의 거지 소년들뿐 아니라 그곳에 서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박하리만치 어둡고 슬픈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 모두가 공유한 고통이 한 심장의 박동처럼 정호의 온몸을 울렸다.

"얘들아! 여길 떠야 해. 지금 당장!"

야마다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교전 중에는 그 어떤 사람이건 고유의 인간성을 빼앗기고 구분할 수 없는 익명의 집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그 남자는 이미 익숙해 있었다. 모든 전투는 똑같았다. 이쪽에는 내 편이 있고, 맞은편에는 적들이 있다, 그뿐이었다.

총영사 앞에서 발표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의 개입을 불러오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고요한 침묵이 폭발 후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았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죽음 앞에서 반드시 같은 행동을 보인다. 언제나 악착같은 미련을 보이며 매달리고, 언제나 죽음보다 고통을 선택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일이었다. 총탄이 자기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순간이 오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못한다. 사실 죽음이야말로 어느 때가 됐든 그 누구라도 맞이할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도 말이다.

"가라." 이토는 말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그의 온몸이 피로감에 쑤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잘해냈으니, 이제는 휴식이 필요했다.

"월향이를 따뜻하게 덮어주고 계속 물을 마시게해!"

옥희는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정호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너 원하는 거 다 가져가."
"나 음식 얻어 가려고 그런 거 아니야." 정호가 당황하고 실망하여 말했다. "그냥 너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옥희는 지금까지 살아온 열한 해의 삶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밝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호는 다가올 그 미래 속 옥희의 모습까지도 미리 넘겨다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값진 물건이 정확하게 그 주인을 찾아가는 걸 볼 때만큼 만족스러운 경우가 없지.

시간은 겨울 안개처럼 흘러갔다. 흐릿하고, 형태도 없으며, 명보의 존재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승객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홀로 지나갔다.

시간의 세계 밖에 남겨진다는 것은 ‘넌 아무 의미도 없어‘라는 말을 몸에 새겨놓는 듯한특별한 종류의 고문이었다. 수염이 얼마나 자랐는지 새삼스레 실감하는 것만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사랑이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가 결국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오를 때 과연 누구와 손을 잡고 있고 싶은지를 고르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명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현우에게" 그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강한 자 앞에서 용기 있고 약한 자 앞에서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절박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두 가지 행동 방식 중 하나를 택해 능숙하게 활용하곤 했다. 그 하나는 극단적으로 은유적이며 섬세한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정호의 경우에는 둘 중 어떤 태도를 보일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는 일부러 냉랭한 태도를 보일 때 쓰곤하는 공손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호랑이 사냥을 한 번 간 적이 있어." 야마다가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가 평생 볼 수 있을 야수들 중 가장 강하고 영리한 짐승이야."

최근 몇 년 동안 야마다 대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자신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 종종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혹시나 그게 자신을 방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취약점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는 스스로의 의지력을 시험하고자 내심 가장 하고싶지 않은 일을 의도적으로 해나가는 습관을 들였다.

그렇게 일부러 감방 근무에 지원해, 거칠고 힘든 훈련만이 결국 자신을 강하게 만들 것이라 믿으며 격렬하게 노력하는 운동선수의 신념을 가지고, 가장 악명 높은 반란군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곤 했다.

정호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옥희가 그처럼 스스럼없이 자유로운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정호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그의 팔은 스치듯 잡는 것도 그저 순수하고 사심없는 애정 표현일 뿐이었다.

그건 옥희가 다른 남자들과 있을 때 의도적으로 내비치곤 하는 유혹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옥희에게 남자로 보이기 위해, 정호는 부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처럼 옥희의 시간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옥희의 존중을 얻기 위해서 였다.

이 생각은 하나의 커다란 계시처럼 다가왔다. 지금껏 정호는 오직 살아남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아늑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충분히 먹고살 만한 식량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 이상의 돈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인정과 검증을 갈망해서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단순히 말하자면, 둘 중 어느 쪽이 우리한테 더 돈을 많이 쳐줄 건지 알아낸 다음 거기다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일을 돕는거지."

"내가 왜 긴장하겠냐? 이 남자가 얼마나 더럽게 부자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너나 나처럼 밥 처먹고 똥 싸는 인간인 건 똑같은데." 언제나처럼 그의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칠게 튀어나왔다. 늘상 있는 힘껏 때릴 줄만 알았지 부드럽게 주먹을 날리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그는 부드러운 말을 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건 배고픔이지, 사람 자체는 절대 악하지 않습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동안 명보는 어떤 이들에겐 돈이나 지위보다도 권력의 쟁취 그 자체가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미국영사가 영사관 앞에 모인 사람들 앞에 나와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종종 그들 대부분이 사실 돈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해요."

"그들은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게 자신의 최종 목표라고 말하는데, 그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인정하는 것보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젊은이는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에는 누구의 눈에든 명백히 드러나 보일 자신의 어린 나이와 미숙함 때문에 그랬다면, 이번에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둔 비밀이 이처럼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명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대와 그대의 벗들이 저와 제가 품은 대의를 위해 일해준다면, 비록 그대들이 부자가 될 거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대들이 실제로 행복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돈으로는 살 수 있는게 아니죠."

명보의 마지막 말을 듣는 정호의 눈앞에 다시 옥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 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받은 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한철은 옥희를 향한 걱정 때문에 속이 찢어질 듯 상하는 한편, 그렇게 옥희를 염려하는 자신의 마음에 오히려 어느 환희를 겪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자신을 더 진정한 인간처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철은 감정 같은 것은 고사하고, 그저 이 고된 삶에서 살아남고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골몰했을 뿐이었다. 오직 옥희를 걱정하는 순간만이, 고통과 그에 달라붙는 이처럼 달콤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불만 꺼지면 남자들이란 게 다 똑같다고. 일본 놈이든,
한국 놈이든, 다 나쁜 놈들이야."

"난 그 남자를 혐오해."
옥희가 대번에 격렬한 노기를 띠며 말했다.

"자기가 어떤 여자든 가질 수 있고, 여자에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놈이라고. 권세도 있고 돈도 많고 얼굴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니까, 여자들도 그런 그놈의 생각을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옥희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흑백으로 딱 잘라 나눌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남자는 연화를 쓱 올려다보더니 변명하듯 이렇게 얼버무릴 뿐이었다. "물론 연화 양의 노래 실력이 더 출중하다는건 나도 알죠. 하지만 사진발이 더 잘 받는 건 옥희 양인걸!" 연화를 진정 화나게 하는 건, 노래 실력으로 따지면 그저 평범한 수준인 옥희가 밤마다 무대에 올라 관객 앞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연화는 옥희를 사랑했지만, 친구를 향한 다정함과는 별개로 매일 밤 가슴속에서 치미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납을 가열하면 겉에 하얀 가루가 돋아나는데 이를 ‘납꽃‘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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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8 (완결) 기적의 민간요법 치료사 8
아피로 / KW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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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몰랐던 건강관련 상식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서 유익했고, 특별히 8권에서는 해외에서 김밥사업을 하는 이야기들이 주로 나오는데, 국내에서 사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진상손님과의 언쟁 같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는 걸 보면서 국내든 해외든 사람사는데는 별반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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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가 아치 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옥희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고양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거라고.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거라.

별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년은 서서히 땅을 덥히는 태양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넌 몇 살이나 먹었냐, 이 버릇없는 새끼야?" 정호가 말했다. "맞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지?" 정호는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향 마을의 거친 아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골격은 작지만 강단 있고 몸놀림이 잽싼 데다, 맞을 때의 고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를 얼마나 많이 때릴 수 있는지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기에, 그는 저보다 훨씬 더 몸집이 크고 나이가 많은 소년들도 이길 수 있었다.

하늘의 모습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고, 아버지가 약속했던 것처럼 별다른 용기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저 하늘 어딘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음을, 자신이 이 세계에 홀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님을 상기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들자마자, 그는 영구의 머리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양쪽 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는 키가 큰 쪽의 신체적 강점이 모두 사라지고, 몸집 차이가 어떻든 상대 위에 올라타 꼼짝달싹 못 하게 누르는 쪽이 무조건 이긴다는 것을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도야. 그렇지만 사람은 이틀에 한 번만 먹어도 살 수 있대.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이야."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경멸하는 집단 중에서도 단 한 사람만을 골라 의외의 우정을 쌓게 되기 마련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자 자신이 속한 위치가 있는데 말이다.

개화의 계절이 끝나도 동백은 다른 꽃들처럼 갈변하거나 꽃잎 한 장씩 떠나보내며 힘없이 져버리지않는다. 흠 하나 없이 온전한 채로, 심장처럼 붉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꽃 한 송이 전체가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동백은 땅에 떨어지더라도 처음 피어났던 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함없이 아름답다.

그러니까 단이도 결국 자신의 감정보다는 돈을 택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바없이 약삭빠른 속물이었다는 말이다. 단이도 결국 환상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옥희는 날카롭게 가슴을 꿰뚫는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시와 춤이 모두 같은 곳, 어느 불가해한 지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춤을 자신만의 독특한 것으로 새롭게 표현해 냈다. 거의 감지할 수 없는 그 미세한 차이로 인해 다른 여자아이들이 그저 춤을 추는 동안 옥희는 한 마리의 고고한 학이 되고, 전설 속 주인공이 되고, 하나의 계절이 되고,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 되었다.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단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실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옥희를 바라보았다. 그게 승인의 표시인지 혹은 불만의 표출인지 옥희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옥희의 머리에 처음으로 은비녀를 꽂았다. 새신부의 상징이었다. 올림머리는, 옥희가 신체적으로는 동정을 간직하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상 더는 혼인 이전의 상태가 아님을 의미했다.

옥희는 이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어린아이였지만, 이제 기생이 되어 그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틀렸다는 말을 바로 앞에서 듣고 난 지금,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핵심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가장 좋은 점은 그것을 이미 지나쳐 왔다는 것이다.

"소위 구경은 해도 만져볼 수는 없다는 거지. 좋은 것들은 다 그런 식이라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는 각자의 진심을 잘도 감춘채, 그 어떤 원망이나 씁쓸함의 기색도 없이 기쁘게 덕담을 주고 받았다. 굳이 서로를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다른 아이들과 얘기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받은 적은 없지만, 단이가 직접 말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권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단이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력하게 일어났다.

옥희는 그 짐승이 힘이 세고 몸집이 큰 만큼 우리 안에서 겪는 고통도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이건만,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나니 배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메슥거림이 느껴졌다.

"그 코끼리 말이야." 옥희가 입을 열었다. "온종일 그렇게 고요하게 꼼짝 않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알겠니?"

"아니야, 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지? 걔가 어디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렇게 덩치가 큰데도, 그 해자를 건너갈 수가 없는 게 분명해. 코끼리는 멀리뛰기를 할 수 없나 봐. 하지만 어떻게든 걔가 탈출할 방법이있을 것 같지 않아?"

"새로 사귄 친구가 동물원에 데려가 줬어.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봤어! 이상한 건, 난 그걸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까 슬퍼지더라."

단단히 얼어붙은 호수위에도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금이 생겨나듯이, 연화와 자신의 우정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는 생각을 옥희는 애써 떨쳐버리려 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걸 너한테 갖다줄 거야."

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둔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단이가 살면서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단순히 바쁘게 지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상당한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투영할 수 있는 여러 ‘과제‘를 기획하고 이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가는 일을 즐기는 데 있었다.

높은 신분의 남자들이 후계자에게 자기 평생의 업적과 유산을 남겨주듯, 단이 또한 적절하고 가치 있는 계승자를 골라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단이라고 못할 게 뭐 있겠는가?

따뜻한 음료가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동시에 정신을 날카롭게 만드는 익숙한 효과를 발휘하며, 오래전에 마음속 깊이 묻었던 심상들을 다시 꺼내주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일지언정, 그 순간들을 회상하는 추억 자체는 달콤 쌉싸래하니 감미로움마저 느껴졌다.

‘내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는 것조차 그 남자에겐 과분해. 그를 무시하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존엄한 선택이야.‘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는 날씨가 훨씬 차갑군요. 상해는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로만 서늘해질 뿐이고,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요."

"하지만 어디서 당신 본심이 나오는지 알아? 그건 성수 씨 목소리야. 전혀 유감스럽게 들리지 않거든."

남자가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이에게 미칠 듯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타인을 유혹할 수 있다는 능력을 스스로 인지할 때 찾아오는 환희스럽고 또렷한 쾌감이 성수를 온통 휘감아 황홀하게 도취시켰다.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그러한 감정이 사랑에 가장 가깝게 여겨지곤 한다.

소중한 순간들이 늘 그렇듯, 그 시간은 단이가 미처 준비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성수와 명보는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단이는 정신없이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외쳤다. "두 분은 어떻게 서로 아세요?"

소주의 독한 기운이 몸을 한 바퀴 얼근하게 돌자, 그들의 굳었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망 소식이 아니라, 당장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는 뜻이다.

각각 삶의 다른 영역에 확고하고 순결하게 속해 있어야 마땅할 특별한 지인들이 사실은 저희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이며,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친밀한 관계일 수 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심 이러한 씁쓸함을 삼키고 있는 건 셋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성수는 이 상황을 모욕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타고난 교양과 예의범절, 그리고 연신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소주의 진정 효과만이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의 감정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이번에는 명보가 술병을 건네받아 직접 단이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자작(自酌)은 술자리의 금기이니만큼 이런 행동은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안에 내포된 특별한 친밀감을 감지한 성수의 마음은 분노로 넘실거렸다.

무엇보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명보의 모습이 지금 그가 내심 성수를 질투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그사실 때문에 단어는 자꾸만 차오르는 은밀한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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