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가 아치 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옥희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고양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거라고.
별들이 잠자리에 들 무렵, 소년은 서서히 땅을 덥히는 태양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넌 몇 살이나 먹었냐, 이 버릇없는 새끼야?" 정호가 말했다. "맞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지?" 정호는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향 마을의 거친 아이들 사이에서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골격은 작지만 강단 있고 몸놀림이 잽싼 데다, 맞을 때의 고통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를 얼마나 많이 때릴 수 있는지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기에, 그는 저보다 훨씬 더 몸집이 크고 나이가 많은 소년들도 이길 수 있었다.
하늘의 모습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했고, 아버지가 약속했던 것처럼 별다른 용기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저 하늘 어딘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음을, 자신이 이 세계에 홀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님을 상기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들자마자, 그는 영구의 머리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양쪽 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는 키가 큰 쪽의 신체적 강점이 모두 사라지고, 몸집 차이가 어떻든 상대 위에 올라타 꼼짝달싹 못 하게 누르는 쪽이 무조건 이긴다는 것을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도야. 그렇지만 사람은 이틀에 한 번만 먹어도 살 수 있대.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이야."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경멸하는 집단 중에서도 단 한 사람만을 골라 의외의 우정을 쌓게 되기 마련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자 자신이 속한 위치가 있는데 말이다.
개화의 계절이 끝나도 동백은 다른 꽃들처럼 갈변하거나 꽃잎 한 장씩 떠나보내며 힘없이 져버리지않는다. 흠 하나 없이 온전한 채로, 심장처럼 붉고 벨벳처럼 부드러운 꽃 한 송이 전체가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동백은 땅에 떨어지더라도 처음 피어났던 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함없이 아름답다.
그러니까 단이도 결국 자신의 감정보다는 돈을 택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바없이 약삭빠른 속물이었다는 말이다. 단이도 결국 환상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옥희는 날카롭게 가슴을 꿰뚫는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시와 춤이 모두 같은 곳, 어느 불가해한 지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춤을 자신만의 독특한 것으로 새롭게 표현해 냈다. 거의 감지할 수 없는 그 미세한 차이로 인해 다른 여자아이들이 그저 춤을 추는 동안 옥희는 한 마리의 고고한 학이 되고, 전설 속 주인공이 되고, 하나의 계절이 되고,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 되었다.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단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실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옥희를 바라보았다. 그게 승인의 표시인지 혹은 불만의 표출인지 옥희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옥희의 머리에 처음으로 은비녀를 꽂았다. 새신부의 상징이었다. 올림머리는, 옥희가 신체적으로는 동정을 간직하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상 더는 혼인 이전의 상태가 아님을 의미했다.
옥희는 이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어린아이였지만, 이제 기생이 되어 그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틀렸다는 말을 바로 앞에서 듣고 난 지금, 그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핵심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가장 좋은 점은 그것을 이미 지나쳐 왔다는 것이다.
"소위 구경은 해도 만져볼 수는 없다는 거지. 좋은 것들은 다 그런 식이라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는 각자의 진심을 잘도 감춘채, 그 어떤 원망이나 씁쓸함의 기색도 없이 기쁘게 덕담을 주고 받았다. 굳이 서로를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다른 아이들과 얘기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받은 적은 없지만, 단이가 직접 말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권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단이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력하게 일어났다.
옥희는 그 짐승이 힘이 세고 몸집이 큰 만큼 우리 안에서 겪는 고통도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이건만,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나니 배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메슥거림이 느껴졌다.
"그 코끼리 말이야." 옥희가 입을 열었다. "온종일 그렇게 고요하게 꼼짝 않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알겠니?"
"아니야, 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지? 걔가 어디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렇게 덩치가 큰데도, 그 해자를 건너갈 수가 없는 게 분명해. 코끼리는 멀리뛰기를 할 수 없나 봐. 하지만 어떻게든 걔가 탈출할 방법이있을 것 같지 않아?"
"새로 사귄 친구가 동물원에 데려가 줬어.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봤어! 이상한 건, 난 그걸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까 슬퍼지더라."
단단히 얼어붙은 호수위에도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금이 생겨나듯이, 연화와 자신의 우정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는 생각을 옥희는 애써 떨쳐버리려 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걸 너한테 갖다줄 거야."
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둔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단이가 살면서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단순히 바쁘게 지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상당한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투영할 수 있는 여러 ‘과제‘를 기획하고 이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가는 일을 즐기는 데 있었다.
높은 신분의 남자들이 후계자에게 자기 평생의 업적과 유산을 남겨주듯, 단이 또한 적절하고 가치 있는 계승자를 골라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면 재미있으리라 생각했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단이라고 못할 게 뭐 있겠는가?
따뜻한 음료가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동시에 정신을 날카롭게 만드는 익숙한 효과를 발휘하며, 오래전에 마음속 깊이 묻었던 심상들을 다시 꺼내주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일지언정, 그 순간들을 회상하는 추억 자체는 달콤 쌉싸래하니 감미로움마저 느껴졌다.
‘내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는 것조차 그 남자에겐 과분해. 그를 무시하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존엄한 선택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는 날씨가 훨씬 차갑군요. 상해는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로만 서늘해질 뿐이고,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요."
"하지만 어디서 당신 본심이 나오는지 알아? 그건 성수 씨 목소리야. 전혀 유감스럽게 들리지 않거든."
남자가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이에게 미칠 듯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타인을 유혹할 수 있다는 능력을 스스로 인지할 때 찾아오는 환희스럽고 또렷한 쾌감이 성수를 온통 휘감아 황홀하게 도취시켰다.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그러한 감정이 사랑에 가장 가깝게 여겨지곤 한다.
소중한 순간들이 늘 그렇듯, 그 시간은 단이가 미처 준비도 하기 전에 끝나버렸다 -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성수와 명보는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단이는 정신없이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외쳤다. "두 분은 어떻게 서로 아세요?"
소주의 독한 기운이 몸을 한 바퀴 얼근하게 돌자, 그들의 굳었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망 소식이 아니라, 당장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는 뜻이다.
각각 삶의 다른 영역에 확고하고 순결하게 속해 있어야 마땅할 특별한 지인들이 사실은 저희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이며,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친밀한 관계일 수 있음을 깨닫는 건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심 이러한 씁쓸함을 삼키고 있는 건 셋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성수는 이 상황을 모욕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타고난 교양과 예의범절, 그리고 연신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소주의 진정 효과만이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의 감정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주는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이번에는 명보가 술병을 건네받아 직접 단이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자작(自酌)은 술자리의 금기이니만큼 이런 행동은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안에 내포된 특별한 친밀감을 감지한 성수의 마음은 분노로 넘실거렸다.
무엇보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명보의 모습이 지금 그가 내심 성수를 질투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그사실 때문에 단어는 자꾸만 차오르는 은밀한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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