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명보는 서운하지 않았다. 수년째 비슷한 경험을 하다보니, 돈문제가 개입되면 아무리 따뜻하고 친밀하던 관계도 냉랭한 사이로 변모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터였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개의치 않아. 중요한 건 자네가 보여주는 행동이니까. 성수, 자네는 정말 애국자야."

"우리가 하는 운동의 목적은 그저 멸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평행선상으로 계속 되돌아오고있다는 거 알겠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어. 내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겠네. 나는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걸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

그가 지금 이해한 것은, 세상이 그의 가족과 한 무리의 거지 소년들뿐 아니라 그곳에 서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박하리만치 어둡고 슬픈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 모두가 공유한 고통이 한 심장의 박동처럼 정호의 온몸을 울렸다.

"얘들아! 여길 떠야 해. 지금 당장!"

야마다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교전 중에는 그 어떤 사람이건 고유의 인간성을 빼앗기고 구분할 수 없는 익명의 집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그 남자는 이미 익숙해 있었다. 모든 전투는 똑같았다. 이쪽에는 내 편이 있고, 맞은편에는 적들이 있다, 그뿐이었다.

총영사 앞에서 발표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의 개입을 불러오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고요한 침묵이 폭발 후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았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죽음 앞에서 반드시 같은 행동을 보인다. 언제나 악착같은 미련을 보이며 매달리고, 언제나 죽음보다 고통을 선택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일이었다. 총탄이 자기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순간이 오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못한다. 사실 죽음이야말로 어느 때가 됐든 그 누구라도 맞이할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도 말이다.

"가라." 이토는 말했다.
정말 긴 하루였다. 그의 온몸이 피로감에 쑤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잘해냈으니, 이제는 휴식이 필요했다.

"월향이를 따뜻하게 덮어주고 계속 물을 마시게해!"

옥희는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정호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너 원하는 거 다 가져가."
"나 음식 얻어 가려고 그런 거 아니야." 정호가 당황하고 실망하여 말했다. "그냥 너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데."

옥희는 지금까지 살아온 열한 해의 삶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밝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호는 다가올 그 미래 속 옥희의 모습까지도 미리 넘겨다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값진 물건이 정확하게 그 주인을 찾아가는 걸 볼 때만큼 만족스러운 경우가 없지.

시간은 겨울 안개처럼 흘러갔다. 흐릿하고, 형태도 없으며, 명보의 존재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승객 없이 항해하는 배처럼 홀로 지나갔다.

시간의 세계 밖에 남겨진다는 것은 ‘넌 아무 의미도 없어‘라는 말을 몸에 새겨놓는 듯한특별한 종류의 고문이었다. 수염이 얼마나 자랐는지 새삼스레 실감하는 것만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사랑이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가 결국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셈이다.

이는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오를 때 과연 누구와 손을 잡고 있고 싶은지를 고르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명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현우에게" 그는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강한 자 앞에서 용기 있고 약한 자 앞에서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절박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두 가지 행동 방식 중 하나를 택해 능숙하게 활용하곤 했다. 그 하나는 극단적으로 은유적이며 섬세한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정호의 경우에는 둘 중 어떤 태도를 보일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는 일부러 냉랭한 태도를 보일 때 쓰곤하는 공손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호랑이 사냥을 한 번 간 적이 있어." 야마다가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가 평생 볼 수 있을 야수들 중 가장 강하고 영리한 짐승이야."

최근 몇 년 동안 야마다 대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자신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 종종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혹시나 그게 자신을 방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취약점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는 스스로의 의지력을 시험하고자 내심 가장 하고싶지 않은 일을 의도적으로 해나가는 습관을 들였다.

그렇게 일부러 감방 근무에 지원해, 거칠고 힘든 훈련만이 결국 자신을 강하게 만들 것이라 믿으며 격렬하게 노력하는 운동선수의 신념을 가지고, 가장 악명 높은 반란군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곤 했다.

정호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옥희가 그처럼 스스럼없이 자유로운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정호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그의 팔은 스치듯 잡는 것도 그저 순수하고 사심없는 애정 표현일 뿐이었다.

그건 옥희가 다른 남자들과 있을 때 의도적으로 내비치곤 하는 유혹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옥희에게 남자로 보이기 위해, 정호는 부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처럼 옥희의 시간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옥희의 존중을 얻기 위해서 였다.

이 생각은 하나의 커다란 계시처럼 다가왔다. 지금껏 정호는 오직 살아남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아늑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충분히 먹고살 만한 식량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 이상의 돈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인정과 검증을 갈망해서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단순히 말하자면, 둘 중 어느 쪽이 우리한테 더 돈을 많이 쳐줄 건지 알아낸 다음 거기다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일을 돕는거지."

"내가 왜 긴장하겠냐? 이 남자가 얼마나 더럽게 부자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너나 나처럼 밥 처먹고 똥 싸는 인간인 건 똑같은데." 언제나처럼 그의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칠게 튀어나왔다. 늘상 있는 힘껏 때릴 줄만 알았지 부드럽게 주먹을 날리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그는 부드러운 말을 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다.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건 배고픔이지, 사람 자체는 절대 악하지 않습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동안 명보는 어떤 이들에겐 돈이나 지위보다도 권력의 쟁취 그 자체가 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미국영사가 영사관 앞에 모인 사람들 앞에 나와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종종 그들 대부분이 사실 돈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해요."

"그들은 돈 많은 부자가 되는 게 자신의 최종 목표라고 말하는데, 그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인정하는 것보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젊은이는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에는 누구의 눈에든 명백히 드러나 보일 자신의 어린 나이와 미숙함 때문에 그랬다면, 이번에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둔 비밀이 이처럼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명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대와 그대의 벗들이 저와 제가 품은 대의를 위해 일해준다면, 비록 그대들이 부자가 될 거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대들이 실제로 행복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돈으로는 살 수 있는게 아니죠."

명보의 마지막 말을 듣는 정호의 눈앞에 다시 옥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 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받은 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한철은 옥희를 향한 걱정 때문에 속이 찢어질 듯 상하는 한편, 그렇게 옥희를 염려하는 자신의 마음에 오히려 어느 환희를 겪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자신을 더 진정한 인간처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철은 감정 같은 것은 고사하고, 그저 이 고된 삶에서 살아남고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골몰했을 뿐이었다. 오직 옥희를 걱정하는 순간만이, 고통과 그에 달라붙는 이처럼 달콤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불만 꺼지면 남자들이란 게 다 똑같다고. 일본 놈이든,
한국 놈이든, 다 나쁜 놈들이야."

"난 그 남자를 혐오해."
옥희가 대번에 격렬한 노기를 띠며 말했다.

"자기가 어떤 여자든 가질 수 있고, 여자에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놈이라고. 권세도 있고 돈도 많고 얼굴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니까, 여자들도 그런 그놈의 생각을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옥희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흑백으로 딱 잘라 나눌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남자는 연화를 쓱 올려다보더니 변명하듯 이렇게 얼버무릴 뿐이었다. "물론 연화 양의 노래 실력이 더 출중하다는건 나도 알죠. 하지만 사진발이 더 잘 받는 건 옥희 양인걸!" 연화를 진정 화나게 하는 건, 노래 실력으로 따지면 그저 평범한 수준인 옥희가 밤마다 무대에 올라 관객 앞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연화는 옥희를 사랑했지만, 친구를 향한 다정함과는 별개로 매일 밤 가슴속에서 치미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납을 가열하면 겉에 하얀 가루가 돋아나는데 이를 ‘납꽃‘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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