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부분에선 유교사상이 지난 수백년간 우리들의 창의성을 억눌러왔음을 비판하는 저자의 의견이 인상적이었다. 유교사상 말고도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니 유교사상 쪽에 국한해서 본다면 지극히 동의되는 부분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이야기, 한자와 관련된 저자의 이야기들도 굉장히 설득력있게 느껴졌다.

핀란드의 세계적 핸드폰 회사인 노키야는 제품들을 마치 게임기처럼 만들었다. 그리고는 광고에서 세계적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런 장난기들을 순간적으로 잡아낸 뒤 이런 카피를 썼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어린아이들이 숨어 있습니다.(There is little child in all of us.)" - P195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실 어린아이들이 하나씩 숨어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때, 아이들은 13, 14세가 되면 ‘인간적인 나(에고)‘가 형성되고 그 이후로 심리적으로는 동갑이 된다. 그 동갑의 연령을 지난 후에는, 우리들이 키가 커지고 학년이 높아지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뭔가에 걸맞는 행동들을 해대느라 폼들을 잡고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숨은 미키마우스와 빨강머리 앤은 언제든 빨주노초파남보의 스펙트럼을 통해 뛰쳐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P195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바로 어른과 아이들 가슴속에 숨은 살아있는 색상들과 장난기를 효과적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유난히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빠져드는 이유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바로 한국사회 전반에 드리운 유교적 칙칙함에서 찾아낸 시각적 위안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의 스펙트럼 효과는 단순한 시각적 화사함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열과 활력과 에너지를 동반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으로 다가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195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만화가들의 끄적거림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 저층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엉겨 있는 학문적 · 문화적 콘텐츠, 즉 내용물들을 기초로 탄생한 상상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숙제는 그저 단순히 컷 몇 장을 흉내낸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건 어깨에 힘을 뺀 학문적 봉사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냉정한 ‘장사꾼 기질‘이 합쳐질 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질 예술적 하모니이기 때문이다. - P197

유교의 가치관 중, 공자가 한 말로 이런 것이 있다. "괴이하고, 억지 쓰는 것, 상황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 귀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정상적이고, 순하고, 단순하고, 인간적인 것만 말하라는 뜻이다. 물론 이 상황들은 사회를 지탱해가는 가치관의 측면에서 다시 다루어져야겠지만 이로 인해 600년(조선 500년 근현대 이상 억압된 상상력은 21세기가 다가오는 오늘날에도 터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 P198

나는 갑골문을 연구하고 있는데, 원시인들 상상력의 집합체인 갑골문의 형태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 영역 (meaningboundary)‘ 은 사실 애니메이션이 지니고 있는 만화 기호의 의미와 맥이 닿는다. 언젠가 갑골문의 고대 자형들을 본 디자이너 한 사람은 원시의 생명력이 가득 찬 그 형태들에 매료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좋아한 일이 있었다. - P199

4,000년 전의 글자들인 갑골문의 형태 속에는 원시 사회의 애니미즘과 토템의 성분이 다분히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석하면 우리는 초기 인간 사회의 다양한 정신적, 심리적,
문화적 특성들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갑골문을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기저에는 갑골문이 지닌 ‘원시적 소박함과 시각적 흥미가 깔려 있다. - P199

이 ‘원시적 소박함‘ 이 바로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과 특정 동물을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일치시켜 생각하는 토템이다. 즉 자연계와 자신을 혼돈하여 사고하는 것이 원시적 사유의 특징인데,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바로 이 원시적사유를 매우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작품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 P199

고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권위자인 발터 안드레는 토템과 미술의 관련성에 대해 이런 견해를 피력한다.
"정신적이고 신적인 세계를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세계로끌어들이기 위해, 인간은 그것을 만질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형태 속에 구체화시켜놓는다. 그것이 바로 토템 예술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마력이 단순히 현란한 테크닉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지닌 애니미즘과 토템의 정서는 사실 일본문화 저변에 깔린 애니미즘과 맥을 같이 한다. 흔히 800만 신이 있다는 일본의 무속 문화는 사실 원시 애니미즘의 연속선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아무리 작은 곳에도 신은 머문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의 혼을 강조하는 장인 의식의 모태다)는 의식과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 P200

이런 애니미즘적 무속 문화는 귀신과 혼령이 흔하게 등장하게 만드는 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보편적 정서 때문에 <원령공주> 같은 애니미즘적 설정이 먹혀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무속적 애니미즘 요소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은 악마적 요소와 악마적 세계관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짧은 순간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는 있으나 인류가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사랑과 인간적 삶을 건강하고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유효기간이 선명해진다. 또 영화 전반에 양념처럼 뿌려진 일본적인 남녀 갈등이나 칼싸움 장면들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 P201

그러면 한국 애니메이션은 왜 건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상상으로 풍부한 나름의 콘텐츠를 창조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일본것을 보고 나서야 힌트(?)를 얻고 자꾸만 악마적 세계관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일까?
그건 바로 유교적 가치관이 불러온 상상력의 빈곤과 유교를벗어 던지면서 일어나는 가치관의 공백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 P201

조금은 에로틱하고 조금은 은근한 분위기의 한국과 중국의 춘화에 비해 일본의 춘화들이 유달리 폭력성을 많이 띠는 이유는 사무라이들의 폭력적 성문화 때문에다. 강간과 윤간과 엿보기 상황들은 바로 전시 성폭력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질 성문화다. 사실은 저질이 아니라 괴로울 苦(고), 고질의 성문화다. - P203

어느 사회가 특이한 형태의 행동에 심하게 기울어지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의 폭력은 일본 문화 저층에 깔린 죽음의 미화 의식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칼의 나라다. 일본 중세 전국시대에는 약 280개의 봉건 국가들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싸움, 칼싸움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늘 죽음이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공포감을 해결하는 방법 중에 합리화라는 것이 있다.
공포를 당연히 있어야 할 걸로 합리화하여 공포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공포와 타협하는 방법이다. 이 합리화가 좀더 진행되면 그것을 미화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원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템의 형성 과정이다.
즉, 주변의 동식물을 수호신 또는 조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강인한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연약함을 극복해보겠다는 심리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팀들의 동물 상징은 바로 토템의 현대화라고 풀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 P204

일본인들은 늘 존재하고 수시로 자신에게 엄습하는 공포를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죽음을 미화했다. 그래서 그들은 할복을 하고, 자살 특공대를 만드는 것이다. 죽음이 공포일 때는 두렵지만 한번 아름다운 것이 되고 난 후에는 앞을 다투어 기꺼이 그 아름다운 퍼포먼스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승화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은 죽음과 하는 슬픈 타협이다.
이건 우리 문화에도 있다. 수많은 좌절과 침략이 낳은 한의 역사, 우리는 그것을 우리 민족 고유의 에너지로 미화하고 있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노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처럼 일본인들의 죽음의 미화 역시 딱한 구석이 있긴 매한가지다. - P205

일본의 성개방 문화는 기후와 칼 때문에 빚어진 것들이다.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노출이 많고, 그 끈적거리는 일본의 여름을 지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주 씻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성적인 유혹과 접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만의 것은 아니다. 비슷한 기후대의 타이완이나 필리핀, 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성 개방 분위기들은 그것이 그 민족의 도덕성과 꼭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일본의 온천 문화도 한몫을 하는 건 사실이다.
한국인이 일본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면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보기에) 그건 인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전히 기후 탓이다. 추운데 그게………? - P206

바로 이런 문화적 배경 차이 때문에 일본의 성문화 역시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일본인들의 그런 저열한 성문화 때문에 걱정을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왜곡된 성의식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성의식을 초월할 수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만의 성문화를 우리 청소년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일본의 저질 성문화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믿는다. 답은 우리가 제시해야 한다. - P207

오타쿠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비껴나 자기만의 성취를 느끼는일종의 환자들이다. 도태를 선언받기 전에 미리 독립선언문을 낭독해버리는 꼴이다. 그들은 일종의 정신적 모라토리엄 선언자들이다. 경제적으로 지불 불능을 선언하듯이 자신들의 정신적 성장을 거부하는 행위자들이다. 애니메이션에는 바로 이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함정은 누구나 빠질 수 있다. - P210

더욱이 오타쿠들도 자신들만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측면을 놓고 본다면, 교육적, 사회적 좌절자들을 길러내고 있는 한국사회는 원하든 원하지 않는 오타쿠 성장의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청소년층의 인디 문화 정서와도 주파수가 비슷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P210

유교의 정신적 억압이 만든 빈약한 상상력과 새로운 대체 윤리를 마련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공허감,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본애니메이션 콘텐츠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
유교의 스승관이 만든 왜곡된 교실에서 양산되는 수많은 좌절청소년들, 그들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배들이다.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밖에 없다. 뭔가를 찾던 중 일본미디어들의 폭력성에 감염되고 있는 것이다.
성의 문화 역시 같은 동기, 같은 이유로 왜곡되고 있다. 건강한성 의식과 부부의 아름다운 성이 자랑스러운 문화를 우리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건 꼭 일본의 성문화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무너지게 마련이다. 왜곡된 성이 일본적인 자극이 없다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겠는가? 결국 문제는 한마디로 허약한 우리 문화의 저항력에 있다. - P211

장사꾼은 장사해서 이문을 남기면 그만이다. 왜 거기서 ‘민족‘이나오는가? ‘민족‘과 ‘문화‘는 강자만이 말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중국인들은 정치를 잘하는 지도자보다는 상치를 잘하는 인물을 영도자로 흠모하고 따른다. 떵시아오핑의 시장경제 도입.
현 국가주석인 짱저민의 외자유치, 농업경제학 박사인 타이완의 리명회이 총통 등은 모두 감각적인 상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홍콩의 초대 특구장 동씨엔화 역시 상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결국 지역은 다르지만 거대한 중국을 유기적으로 통치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장사꾼 기질이다. 우리는 그들은 너무 정치적으로만 관찰하고 있다. 게다가 민족 정서까지 곁들여 그들과 마주앉으니 답답한 일의 연속이다. - P213

정주영을 보라. 남북 대화의 물꼬는 정치학자들의 이론이나정치인들의 잔머리로 트인 것이 아니다. 무식해보이기까지 한 장사꾼의 아이디어로 열렸다. 나는 그를 ‘전위 예술가‘ 라고까지 표현한 일이 있다. - P214

중국인과의 대화는 철저하게 장사꾼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야한다. 이 법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름대로 관찰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이든 판다‘이다. - P214

서양인들을 만나보면 한국에 대해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리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유산 중에는 상품성이 있는 것이 무척 많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잘 팔리도록 잘 포장하여 내놓을 수 있는 의식과 아이디어가 부족하다. 문화의 상품화 전략이 부족한 것이다. - P215

문화의 상품화 전략은 한국인들이 중국 시장을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한국 문화 상품을 팔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이건 절대 못해‘ 로 못 박아놓았던 존재들까지도 상품화하겠다는 마인드의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상품화 전략은 세부적 아이템에 대한 어드바이스가 아니다. 세종대왕의 친필이라도 팔 수만 있으면 팔아야 한다는 장사꾼 기질을 기르라는 뜻이다. 그래야 중국인들의 장사꾼 기질과 싸워 이길 수 있다. - P215

우아한 비즈니스라는 말은 중국인의 뇌리 속에는 없다. - P217

흔히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한자교육을 통해 유교적 가치관을 재교육하고 싶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버릇없는 요즘 젊은것들(?)에게 도덕을 심어주겠노라며 명심보감 따위를 새로 읽게 만드는 해프닝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별 볼일 없는 상품을 조금 괜찮은 물건과 함께 파는 일종의 ‘유교 끼워 팔기‘
형식으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 P219

결론부터 말하면, 한자는 아시아에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받아들여 사용하면 되는 것일 뿐, 한자를 한글에 섞어쓸 필요는 없다. 또 학교에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가르칠 필요도 없다. 효과적인 프로그램만 있다면 한자 문제는 아주 간단하고 쉽게 해결할수 있기 때문이다. - P221

국한문을 혼용하자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 전통 문화의 계승을 생각해도 그렇고, 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영향력을 고려해봐도 그렇고 한자는 필요하다. 그러니, 일본처럼 아예 한자를 한글 사이에 넣어 함께 사용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한자 문화권에 자연스레 편입되면, 중국, 일본 등과 의사소통을 할 때 편리하다는 현실적 고려도 있긴 하지만, 어차피 중국 문화권의 영향 안에 있으니 적당히 묻어 살자는 변형된 사대주의적 심리도 들어 있다.
지금도 토씨 빼고는 거의 한자를 섞어 쓰는 변형된 사대주의자들은 의외로 많다. 관공서의 공문, 군대 용어, 법원의 용어 등에는 한자로 먹고사는 내가 봐도 알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그런 글자들을 쓰면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한자를 모르는 세대나 사람들로부터 은근히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왜곡된 심리가 숨어 있다. - P222

한자는 아시아인들 모두가 만들어낸 공동의 문화적 유산이다. 한글이 세종대왕의 개인 재산이 아니듯이 수천 년 전 여러 종족이 함께 교류하며 만들어낸 공동의 발명품이다. - P224

몇 가지 예를 들어 한자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다.
귀신 鬼(귀)의 경우, 갑골문을 보면 이것은 얼굴에 가면을  쓴 이방 민족의 모습이다. 고대의 부족들은 사회적 분업 측면에서 각자 나름의 역할과 직업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토기를 잘 만드는 부족, 마차를 잘 만드는 부족 등으로. 가면을 쓴 귀 부족은 장례를 전문적으로 치러주는 종족이었다. 때문에 사람의 혼백을 뜻하는 鬼가 된 것이다. - P227

또 가장 오해가 많은 글자로 글씨 文(문)이 있다. 모두들 잘못 알고 있는 이 문자는 사람의 몸에 심장을 그려넣은 모습이다. 즉 文(문)은 사람의 몸에 주술적 그림을 그려넣었던 문화를 알게 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가슴에 심장을 그려넣음으로써 부활을 기원하는 의식의 한 과정이었다.
즉 우리가 지금 말하는 글자로서의 기록이 아닌 주술적 그림이라는 뜻이다. 당사자들의 모든 감정과 애원과 느낌이 듬뿍 담긴 그림으로 후일 인간의 모든 기록을 상징하게 된다. 그 기록 중에서도 감성이 담긴 기록을 말하는 학문이 바로 文學(문학)인 것이다. - P228

자신들도 잘 모르면서 학생들에게 잘못된 지식을 ‘권위있게‘ 전달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각 한자가 지니고 있는 배경 지식에 관한 오해와 억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공연히 한자를 가르치면서 어설픈 문화 풀이를 곁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건 문화적 이해도 아니고 전통의 계승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걸 통해서 아시아의 커뮤니케이션 문화 속으로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전통으로서의 가치도,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기능도 모두 배우지 못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 P229

전통 계승과 커뮤니케이션의 두 단층 사이에 걸터앉은 채 국가적으로 엄청난 경비와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방법이 전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보다 새로운 감각과 시각을 가지고, 동아시아 문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 도구인 한자의 가치와 내면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한족의 언어라는 의미로 굳어진 한자라는 이름 대신에 21세기 미래 동양의 시그널을 상징하는 아시아 사인 (Asia Sign)이라는 명칭을 쓰고싶다.
한국의 미래 세대는 다가올 아시아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자리하기 위해 이 아시아 사인을 마스터해야 한다. 이 아시아 사인은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 모두가 필히 갖추어야 할 문화적 패스포드일지도 모른다. - P229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현재 중국이 일상의 기초 용어로 규정한 한자의 수는 2,205자다. 반면에 일본이 상용 한자로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수는 1,945자, 그 중에서 기초로 가르치고 있는 교육한자는 996자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현대 한자어들을 집어넣고 공통 집합을 내보면 약 1,500여 자 정도를 얻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기본 부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갈래를토대로 보다 기본적인 글자들을 추리고 추리게 되면 약 1,000자 내외가 된다.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한국 신문들과 방송, 일본NHK, 『아사히신문』, 중국의 CCTV, 『인민일보』,『베이징 청년보』 등을 참고했다.) - P231

이 1,000여 자의 글자는 다시 약 10종류의 부수 군, 5개의 문화적 분류를 통해 좀더 세밀하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는 다시 문자합성 요소의 단순성과 복합성을 고려해 차례로 나열한 후, 마지막으로 흥미 있는 설명을 더해서 교재로 완성된다. (중국 간체자와 일본식 약자의 경우, 그 자형을 정확하게 맞출 경우, 공통 집합의 수는100자 내외로 줄어들고 만다. 그렇게 되면 공통 문자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똑같은 자형은 아니지만 자형의 유사성과 내부적연관을 근거로 1,000여 자의 숫자를 뽑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형이 다소 차이가 나기는 해도, 가장 기본적인 부수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나는 이 1,000여 자의 글자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칠 계획이다. 중국어와 일어의 공통 분모가 되는 이들 글자들은, 이것을 익힌 학생들이 중국어와 일어를 익히고 싶을 때, 또 개인적으로 한자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려고 할 때, 훌륭한 기초의 역할을 할 수있을 것이다. - P231

한 번만 더 고민하면 쉽고 경제적인 방법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해보지 않는 것일까?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왜 온 나라가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들여가며 고민을 하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 학습의 부담을 전가하려 할까? 의미도 불분명하고, 논리도 없는 상태에서 왕창 가르쳐놓고 알아서 하라는 것이 어떻게 교육일 수 있는가?
한자 교육이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우려하는 차원이 아닌한문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 차원에서 맴돌거나, 보수주의자들의 ‘신세대 길들이기‘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시아적 가능성 운운은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가 될 뿐이다.
그런 무책임이 국가적으로 신세대들에게 저질러지고 있다는것은 너무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천년 묵은 낡은 방법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강요하면서 그들을 좌절의 악순환 속으로 빠뜨리는 우리는 많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 P233

이제 우리는 좁은 한국이 아닌, 아시아를 이야기하고 아시아 무대에 익숙해져야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더 나아가서 아시아를 이해하고 아시아의 한 부분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할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갖추는 데 한자는, 아니 아시아 사인은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오랜 세월 권위를 누려온 우리 사회의 한자에 대한 잘못된 교육관과 풀이 문화를 7월의 소낙비처럼 씻어버리고 싶다. - P234

학부모들이 원하는 공부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읽거나 써야 한다. 또 적당한 체크를 위해 주로 쓰기를 강요한다. 체크하기 편하고, 써놔야 학습이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더욱이 논술이 대학입시에 들어오면서 ‘쓰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는 큰 실수를 하고 있다. - P237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공부해라‘ 지만 가장 효과 없는 주문 역시 ‘공부해라‘일 것이다. - P237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정보가 어디에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 당면한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를 감지하고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 P239

이제 공부를 위한 공부는 끝나야 한다. 그것을 끝내지 못하면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박는 공부가 아닌 숨은 능력을 끌어내는 지혜를 이야기해야 한다. - P240

나는 한국의 영어 교육이 실패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반드시 써먹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데 있다고 본다. 선생과 학생 모두가 써먹겠다는 의지와 필요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관문 통과‘를 위해 필요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늘 골치만 아프다. 또 교과서를 만들 때도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겠다는 유교적 ‘훈수‘의 가치관이 바닥에 깔려 있다. - P241

"영어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영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어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고 고생깨나 해본 사람은 위의 표현이 감춘 외국어 학습의 키포인트를 찾아냈을 것이다. 바로 그거다. ‘공부‘와 ‘사용‘은 전혀 별개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학생들에게 ‘공부‘ 만 강조했기 때문에 ‘사용‘할 수가 없다. 학습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수반되는 결과다. - P241

내가 중국어를 마스터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영어 공부에 그대로 적용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방법은 간단하다. ‘사용‘ 하는 것이다. 그것도 철저히 소리로만 그리고 모든 쪽팔림에서 초연해지는 것이다. - P242

나는 매년 중문학과 1학년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들 4년 동안 중국어 ‘공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중국어못한다. 단 한 달이라도 ‘사용‘ 해야 중국어를 할 수 있다. 쯔따오마? (알겠습니까?)" - P242

나는 처음 한달 정도는 학생들에게 외국어 학습에 필요한 기본 태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을 한다. 그것은 이제까지 학교에서 해온 영어 ‘공부‘의 녹슨 방법을 철저히 버리도록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 세 가지를 먼저 주문한다.
첫째, 반드시 써먹겠다고 결심하라. 둘째, 글자를 버리고 소리로만 익혀라. 셋째,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생각나면 일단 내뱉어라. - P242

아무리 멍청이라도 한 1년 소리만 듣고 동작을 익히다보면 웬만한 말은 알아듣고 할 줄안다. - P243

내 프로그램으로 가르친 아이와 기존의 전통적인 방법(글씨 쓰고, 따라 읽고, 문법시험 보고)으로 공부한 아이와는 6개월만 지나면 능력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이렇게 했을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효과는 중국어 구사력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신감이다. 자신감이야말로 존재의 이유‘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 2, 3년 더 지도하면 중국어는 대충 마스터가 된다. 실제로 학생들 중에는 4학년 때 통역을 나가는 아이들이 있다. 아무 탈 없이 잘 해낸다. - P243

전통적으로 유교는 말에 대해서는 억제하는 태도를 가졌고, 시나 문장 등의 글 다루기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다보니 외국어 학습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의사소통은 무시되고 글 다루기 능력 위주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또 선생님들은 그것을 가지고 역시 의사소통과는 관련이 없는 단어 스펠링이나 문법 등만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과서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나 가르쳤던 사람들 중에 영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적으로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가? 연습장이 새까맣게 되도록 단어를 외웠건만 ‘하이, 굿모닝‘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 P244

조기 교육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만만치않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지만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부모들의 상황을 보면, 조기 찬성론자는 대부분 ‘여유 있는‘ 계층들이고, 반대론자는 대부분 ‘여유 없는‘ 계층들이다. 사실 이들 반대론자들은 구체적인 데이터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식들과의 민망한 상황을 조금 해소해보려는 의도에서 ‘전문가 의견‘을 뉴스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 P2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밑줄 친 글 중에 ‘소망은 소망일 때 아름답고 현실은 늘 이상을 배반한다‘는 문장이 굉장히 와닿게 느껴졌다.


"우리 오빠지만 이럴 때 보면 참 미련해요. 무작정 찾아간다고 돌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닐 텐데."
같은 남자이자 그 역시 한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유경호는 전적으로 여준선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미련해야죠. 여태 경 팀장님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더 미련해야죠." 그의 대답에 김현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제주 렌터카 사업은 수익 창출이 아닌 국민들의 관심과 여론을 끌어내기 위함.
그리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여론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자들이 있었다. 국내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국내 완성차 업계.
그들의 반발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

소망은 소망일 때 아름답고 현실은 늘 이상을 배반한다.
언젠가 들어본 그 말이 뼈에 사무치는 순간이었다.

"전 너무 행복해요. 하루하루가 마치 꿈만 같아요. 왜 그런줄 알아요?"

"서...... 설마 카페가 대박이 나서?"
"아니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경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냐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엔 검지손가락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손가락이정확히 내 심장을 가리켰다.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까요."

"어......."
잠깐 반칙 반칙.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기 있냐?
경하나의 조용한 목소리는 내 귀로 들어와 머리와 심장을 온통 뒤죽박죽 뒤집어 놓았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
그래서 가벼워진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과함께 그녀와 함께했던 요 며칠이 떠올랐다.

카페를 닫자는 생각도, 알바를 쓰자는 생각도 한순간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간질간질 올라오는 알 수 없는 행복이 채워나갔다.

"......그런가요? 그럼 계속해보죠 뭐. 하하."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렸다. 지금 내 얼굴 아마 많이 바보 같은 표정일 거다.

"의도된 것 같다는 그 얘기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 그런말 새어나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12월 미국 대부분의 지역이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추워진 날씨 덕에 차량 배터리소모가 늘어났다. 또한 상온에 최적화된 배터리였기에 동절기엔 가뜩이나 일정 수준의 성능 저하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귀신같이 일주일새 7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지역 중엔 춥지 않은 곳도 있었기에 그간 단 한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던 화재가 이 시기에 몰렸다는 건 누군가의 ‘의도‘를 의심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상대의 의도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섣불리 대응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의도에 말려들기 시작하면 게임은 일방적으로 불리해진다.
그리니 지금 필요한 건 정확한 조사 그리고 경영자의 결단뿐.
"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일단 화재 조사 부분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전문가를 알아봅시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요."
"전문가를요?"
"네. 어차피 벨로프 자체 조사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대응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맛에 하는 거구나.
이런 맛이구나.
아마 할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넌 그냥 운동 부족이야. 운동해. 그럼 좋아져.
"아프면 쉬어야지."
"머리는 써도 몸은 앉아서 계속 쉬기만 했잖아. 사실상 그게 쉬는 게 아니라 혹사였지만 말이지. 그래서 지금 몸이쑤시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오정득은 길게 토를 달지 않고 바로 납득했다.
"요즘 일은 좀 어때?"
나의 물음에 녀석은 인상은 살짝 찡그리면서도 웃음을 흘렸다.
"나야 똑같지 뭐. 맨날 앉아서 숫자만 보고 있으니 지겹지. 그래도 이제 슬슬 바쁜 시즌 지나가서 좀 괜찮아."
녀석은 회계사다. 현재는 흔히 빅4라고 말하는 회계법인 중 한 곳에서 재직 중이다.

"세금은 나한테 맡겨. 내년부터 바로 복식부기 대상자가 되길 기원하마."
"복식...... 뭐?"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세금은 나한테 맡기라고."
"그래, 앞으로 네 건강은 내가 책임지마."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도 몇 년씩 혹은 평생 안 보기도 한다. 차라리 별로 안 친해도 서로 예의를 차리면 오래 가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친구 관계를 오래 이어가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친구라는 게 꼭 도움이 되고 말고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계속 옆에 남아 있으면 그게 친구지.

오정득은 지금껏 특별한 이유 없이도 계속 내 옆에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상부상조도 가능할 것 같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알아볼 것들이, 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나 사업하는 게 아니구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알아보고 있는 단계인데도 체력이 쭉쭉 빠졌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 일이니까. 하는 만큼 온전히 내 것이 되니까.
이 맛에 사업하는구나.
시작 전에도 이런데, 제대로 시작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대신 안 풀리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괴롭겠지만.

운명처럼 다가왔고, 현재는 내가 원해서 뛰어들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내가 전수받은 능력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까. 제대로 써먹지 않으면 도로 뺏길 수도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것 중 하나가 건강이다. 그걸 보장받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수 있고, 잘만 된다면 사욕 또한 채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차후에 또 다른 선물까지 더 받을 수도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선물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 볼 심산이었다.
해야 됐고, 하고 싶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철저하게 확인을 거듭한다고 나쁠 건 없지.

"제 노동에 대한 대가를 거래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끊겠습니다."
사장이 나를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마음을 고쳐먹은 뒤로는 가능한 트러블을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웬만하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둥글둥글하게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니, 당연한 권리인데 내가 독해져야 한다는게 웃겼다.

장문의 문자메시지였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34,094,700.
내가 사장으로부터 받을 돈이었다.
"엇, 생각도 못한 금액에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사장이 입에 거품 물고 지랄할 만했다.

남들한테 10원 한 닢 쓴 것까지 생색을 내는 치사한 짠돌이가 갑자기 수천만 원을 토해내야 하니 속이 얼마나 쓰리겠는가. 아마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
개처럼 일한 보람이 있었다.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수당을 다 챙겨받았으면 지난 6년 7개월이 보다 수월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적금을 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갑자기 목돈이 생기니 소변이 마려운 듯 하반신이 간질거렸다.
삶이 정말 드라마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업자금이 생겼다.

사장이 지불해야 될 돈 전부를 입금했다. 질질 끌까 봐 마음이 쓰였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끝났다.
직원들 등쳐먹어서 손에 쥐고 있던 돈이 꽤 되니 이 정도야 바로 지불할 수 있었겠지.
워낙 사실관계가 분명해서 버텨봤자 방도가 없으니 바로 입금한 걸 테고.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것도좋았지만, 그걸 떠나서 시작이 좋다는 게 기뻤다. 운이 따르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하긴,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순간부터 운이 트였지.
나는 기쁜 마음을 내색치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가요?"
"아, 그러엄."

"이걸로만 해서는 소용없거든. 뭐 구두계약도 효력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펜대를 굴려야 확실하지 않겠나?"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를 자랑하듯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확실히 할 건 해야 되는 거니까."
"아, 예. 그럼요. 확실히 할겁니다. 마음 굳혔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와서 계약서 쓸 텐가?"
"예.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업자까지 불러서 계약 진행하지."

"저번에 알려준 게 제일 좋은 거 아니었어?"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바뀌어서요."

"그게 바뀌기도 하나?"
"병원에서도 약을 바꿔가면서 쓰잖아요? 음식도 골고루먹어야 좋고요.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정도 효과를 봤으니, 다른 방법으로 더 끌어내는 거죠."
민간요법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같은 증상이나 질병을 호전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상황에 맞는 처방이다. 같은 사람에 같은 질환이라도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게 달라질 수 있었고, 나는 그걸 진단하는게 가능했다.

내가 처방하는 민간요법은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공급하여 면역력과 자가치유력을 증진하여 호전시키는 거였다.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
"이제부터는 미나리랑 오미자차를 매일 드세요."
"미나리랑 오미자차?"
"예. 미나리가 지방간에 좋습니다. 속에 탈이 났을 때도 좋고 무기력증에도 좋아요."

"혈압 좀 있으시죠?"
"조금. 아무래도 고지혈증이 있으니 혈관이 뭐, 썩......
"미나리가 고혈압에도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오미자차도혈액순환에 좋습니다. 기억력에도 도움을 주고, 시력을 개선하며 입 마름에도 좋죠. 그리고......"
나는 조금은 능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한테 좋습니다."
"그, 그래? 얼마나?"
"또 압니까? 늦둥이 보실 수 있을지."
"예끼, 이 사람아!"

"몸에서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르거든요. 물론,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몸에 좋은 것을 먹는다고 나쁠 일은 드물겠죠. 하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이잖습니까?"
나는 입가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사장님이야 언제든 저 보러 오실 수 있잖습니까? 제가 그때그때 알맞게 말씀드릴게요."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진단을 해야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얼굴만봐도 병명이 딱딱 나오고, 신체 어디가 안 좋은지 훤히 보인다.
진단이라기보다는 스캔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엄청난 능력이 더 기가 막히게 됐다.
이 능력도 근육 같은 건가?
사용하면 할수록 발달하는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공력이 내게로 옮겨져 오고 이제야 자리를 잡은 건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보다 정확하고 쉽게 알 수 있는데 나쁠게 없지. 새삼 기적의 능력임을 다시 느낀다.

내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삶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변할지 기대된다.
발걸음의 가벼움은 즐거움에 비례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래 속에 품은 게 많은 사람은 새 출발이 어려운 겁니다."

"품은 게 많은 사람은 새 출발이 어렵다....... 그거 참 좋은 말이네요."

‘지금 난 그녀가 버린 과거일 뿐‘
힘들었던 삶을 떠나 선택했던 경하나의 긴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힘듦에 나 역시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러니 치유를 위한 여행 중에 끼어든 내가 반가울 리 없다.
그녀는 내게 떠날 것을 요구했고 난 완강히 거부했다.
늘 일에 치어 살았던 나였기에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맘대로 하세요."

불타던 땔감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어차피 당신은 또 일에 매달릴 거예요. 그럼 전 또 기다리겠죠. 언제 끝날지, 언제 돌아올지 약속도 하지 못하고 전 매일매일 말라 비틀어질 거예요."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전 이미 마음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그만해요.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 여준선 답지 않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상력과 위트가 만화의 핵심이라면, 유교의 핵심은 현실과 엄숙함이다. 둘의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유교적 가치관은 언제나 만화를 폄하하고 모함한다. 유교의 엄숙주의는 만화 자신이 지닌 두 가지 속성 때문에 일본만화를 거부한다. 하나는 일본 만화가 지닌 허풍과 경박성 때문이다. 그러나 허풍과 경박성은 뒤집어 말하면 놀라운 상상력과 위트이기도 하다. - P191

‘지브리‘, 사하라 사막의 열풍이란 뜻이다. - P192

한국사회가 일본 만화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일본 만화가갖는 폭력과 선정성에 앞서서 유교적인 엄숙주의의 가치관 때문이다. 맹자라는 사나이가 한 ‘충실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은 유교 엄숙주의의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 P192

요시로 요시타케는 『만화의 기호론』에서 만화의 미학을 이런 논조로 파헤치고 있다.
"만화는 과장과 디포르메(변형), 생략을 통해 독자의 비위를 맞춘다. 이들 만화 기호는 사람들의 소망, 의지, 이상, 실의, 악의 형체를 띠고 나타난다. 허풍 속에 마침내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바로 허풍의 미학이다." - P193

고정된 가치관을 기준으로 애니메이션이 지닌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예술적 기능,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겸허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런 표현이 일부 싸구려 만화영화에 해당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P193

유교의 엄숙주의가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색상에 있다. 잘 알다시피 동양의 그림은 산수화로 대표된다. 그리고 산수화에는 단 2가지의 색, 흑과 백만이 용납된다. 그리고 이 흑과 백은 사고의 흑백 논리를 낳게 된다. 사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옳고 그름만을 단순하게 가른다. 퍼지적인 유연성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바로 흑과 백의 배합이다. - P194

물론 이 흑과 백은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다. 먹이 주도하는 검정은 사실 단순한 무채색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색채를 포용하는 종합색이다. 빛이 하나의 색처럼 보이지만 프리즘을 통해 볼 때 다양한 색상으로 나뉘는 것처럼 먹의 색 역시 다양함의 융합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색채의 범주 안에 들지 않는 색이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존재 아닌 존재다.
백색은 빛을 의미한다. 동양화에서 백색은 여백을 통해 표현된다. 그런데 이 여백은 단순히 먹이 닿지 않는 나머지의 공간만은 아니다. 먹의 흑색과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빛의 공간이며 조물주의 공간이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