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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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나온 '우연 여행자'는 우연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그 여자를 만났던 한 남자의 친누나가 어떤 공통적인 교집합으로 엮여있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면서, 기이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중간중간에 클래식 음악과 해당 뮤지션이 소개되어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다보면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음악 세계도 호기심을 가지고 자꾸 파고들다보면 밑도 끝도 없이 넓디넓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부담감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부담감보다는 호기심이 좀 더 강한 것 같아, 여력이 되는 선까지는 호기심을 붙잡고 가볼 생각이다.


두번째로 나온 '하나레이 해변'을 읽으면서는 책 표지에 나와있는 상어 그림이 이 이야기때문에 실려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또한 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인 '사치'라는 사람의 아들과 오버랩되는 인물들이 비슷한 설정과 상황에서 나타는 걸 보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느정도는 유형화(case)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최종 결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생사화복이라는 게 신(神)의 손아귀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비슷한 행동을 해도 누구는 죽고 다른 누군가는 살고... 뭐 인간인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결국 신(神)의 영역으로 놔두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세번째로 나온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라는 이야기에서는 '구루미자와'라는 한 남자가 실종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를 찾기 위한 화자의 노력이 쭉 나온다. 근데, 결과적으로는 화자의 노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장소에서 실종되었던 사람이 발견되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독자마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들이 각기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노력이라는 것이 매번 그에 합당한 결실이나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생각은 노력의 가치를 폄하한다거나 마냥 무시한다기보다는,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항상 정비례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좀 더 맞을 듯하다.

노력에 합당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 느낀 결론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살이가 내가 늘 마음먹은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걸 어느정도 살아오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긴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게 각자의 정신건강에 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를 받았을 때 머리는 물론이고 마음 한 구석까지도 상당히 괴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마음을 비우라고 하는 게 아닐까.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말이다.


네번째로 나온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이라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연애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중후반 부분부터 제목에 나오는 돌이 등장한다. 다소 미스테리한 소재이긴 했지만 뭔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성 있는 소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기리에와 준페이라는 두 인물이 핵심 인물인데, 후반부에 기리에의 정체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준페이가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조금씩 해결해나가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인 '시나가와 원숭이'에서는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이름을 자꾸 잊어버리는 '안도 미즈키' 라는 인물이 나온다. 미즈키는 고민끝에 공공기관에서 심리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심한다. 카운슬러(사카키 데쓰코)와 상담을 하다가 과거 고등학생 시절 있었던 이름표와 관련된 한 일화를 얘기한다. 그 일화를 여기서 자세히 얘기하긴 힘들지만 겉으로만 보면 외모도 출중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보였던 마쓰나카 유코라는 이름의 한 학생이 내면에 악성 종양처럼 뿌리내린 질투심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독자인 나는 이 얘기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었던 백세희 작가의 《바르셀로나의 유서》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그 작품에 나오는 화자도 자기 내면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질투심으로 인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겪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 작품 이후 실제로 그 책을 썼던 작가가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도 들은바 있었기에 질투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중후반부에 갑작스레 의인화된 원숭이가 한 마리 등장해서 사람의 언어로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바로 제목에 나온 시나가와 원숭이였다. 위에서 언급한 미즈키가 이름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이 원숭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기담(奇譚)이었다.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이기는 했으나 그 안에 녹아있는 메시지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다. 핵심만 간략히 언급하자면 한 사람의 이름 안에는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는데, 각자가 다 자기 이름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속된말로 다 자기 팔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기답게 살다가 가면 된다는 게 이 이야기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고싶었던 말처럼 느껴졌다.

총 5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현실성 여부를 떠나 그 속에 내재된 메시지나 교훈들을 생각해보며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책도 비교적 얇은 편이라 부담없이 읽어볼 수 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책장을 넘기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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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자의 작품들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알게 된 작품이다.

처음부터 쭉 읽어나가다가 인상적인 문구가 눈에 띄어 밑줄을 그어보았다.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는 말의 의미를 막연하게 추상적으로는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적용하면 좋을지는 솔직히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닥 감이 오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이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앞으로 차차 살아가면서 경험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 - P31

세월은 그만큼의 몫을 분명하게 챙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 P34

"음악의 세계는 신동의 무덤이야." - P35

"물론 내게도 그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포기한 거. 당연히 실망이 컸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헛수고로 끝나는구나 하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귀가 내 손보다 훨씬 더 뛰어났어. 나보다 실력 있는 녀석들은 꽤 많았지만 나보다 귀가 예리한 녀석은 없었어. 대학 들어가고 얼마 뒤에 그걸 깨달았어.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 이류 피아니스트가 되기보다는 일류 조율사가 되는 게 나 자신을 위해서 좋겠다." - P35

"희한한 얘기지만, 조율을 전문으로 공부한 뒤부터 오히려 피아노 치는 게 즐거워졌어. 어렸을 때부터 죽을 둥 살 둥 피아노를 쳤잖아. 연습을 거듭해서 실력이 느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어. 하지만 피아노 치는 게 즐겁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것 같아. 나는 오로지 문제점을 극복할 목적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어. 건반을 잘못 짚지 않도록, 손가락이 꼬이지 않도록, 사람들을 감동시키도록.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포기한 다음부터는 음악을 연주하는 기쁨이라는 게 겨우 이해가 되더라고. 음악이라는 게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그제야 실감했어.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지. 짊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걸 짊어졌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지만." - P36

"그렇게 하면서 나는 가까스로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 자연스러운 모습의 나 자신으로." - P37

우연이 몇 가지 겹쳤어.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 P40

"그건 아마도 내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거예요." - P41

"계기가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그 도형을,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걸 목도하고는, 아아,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참 신기하네, 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나는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요. 어떻습니까, 내 생각이 지나치게 억지스러운가요?" - P42

무게를 지닌 과거는 어디론가 어이없이 사라져버렸고 미래는 아득히 머나먼 어둠침침한 곳에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그녀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이행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주저앉아 파도와 서퍼들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반복의 풍경을 그저 기계적으로 눈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구나. 그녀는 어느 시점에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 P54

나는 그냥 나로 살아갈 뿐이야. - P61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것. 둘째, 옷차림을 칭찬해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걸 많이 사줄 것. 어때, 간단하지?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된다면 얼른 포기하는 게 좋아." - P80

굳이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케이스였다. 하지만 나는 일정표를 한참동안 들여다보며 뭔가를 조정하는 척했다. 덥석 달려들듯이 일을 받으면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미심쩍게 생각할 수 있다. - P95

모든 사건은 뒤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찾아내는 게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 P101

중요한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까다로운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인내심과 주의력, 그게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그리고 물론 직관도. - P105

"때로 우리에게는 말이 필요가 없어요." 노인은 말했다. 내 인사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한편으로 말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항상 우리의 개입이 필요하지요. 우리가 없어지면 말은 존재 의미가 없어요. 그렇죠? 그건 영원히 말해지는 일이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해지는 일이 없는 말은 더는 말이 아니겠지요." - P110

"이건 수없이 되풀이해서 생각할 가치가 있는 명제올시다." - P111

나는 다시 어딘가 또 다른 장소에서 문인지 우산인지 도넛인지 코끼리인지의 모양을 한 것을 찾아다니리라.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 P120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는 여자 중에 정말로 의미 있는 여자는 세 명뿐이야.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 - P123

"상이라는 건 어차피 업계의 기대치대로 가는 거잖아." - P129

남겨진 두 명 중의 한 명일까. 2구째 스트라이크일까. 그냥 보내야 할까 아니면 스윙을 해야 할까. - P130

"다른 뭔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어. 다른 선택지는 생각도 못 했어." - P130

"누구에게나 출발점이라는 게 있어. 아직 앞날이 창창하잖아. 처음부터 완전한 건 있을 수 없어." - P130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면서 판단은 가능한 한 뒤로 미루는 게 소설가의 올바른 자세야." - P131

"작은 비밀이라는 건 매우 소중한 거야." - P132

"직업이라는 것은 본래 사랑의 행위여야 해. 편의상 하는 결혼 같은 게 아니라." - P133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 P138

일단 말로 입 밖에 내버리면 어떤 종류의 일들은 아침이슬처럼 가뭇없이 사라진다. 언어의 미묘한 차이는 얄팍한 묘사로 변해버린다. 비밀은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 P141

"정답이 꼭 필요할 때는 정답을 내려주기로 했어." - P141

"준페이,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은 의지를 갖고 있어." - P144

이 돌은 외부에서 온 물체가 아니구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이에 준페이는 그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내부에 있는 뭔가였다. 그녀 안의 뭔가가 콩팥 모양의 검은 돌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원했다. 그러기 위한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밤마다 자리를 바꿔 이동하는 방식으로. - P147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다음 이야기를 쓰는 것은 비교적 수월했다. - P148

"무엇보다 멋진 것은 그곳에 있으면 나라는 인간이 변화한다는거예요." 그녀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아니, 그보다 변화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높은 곳에 올라서면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나와 바람뿐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바람이 나를 감싸고, 나를 뒤흔들어요. 그렇게 바람이 나라는 존재를 이해합니다. 동시에 나는 바람을 이해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거예요. 나와 바람뿐, 그밖에 다른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죠. 아뇨, 공포감은 없어요. 일단 높은 곳에 발을 내딛고 그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공포감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친밀한 공백 속에 함께 존재해요. 나는 그런 순간이 세상 무엇보다 좋은 거예요." - P154

투 스트라이크, 이제 남은 건 한 명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이제 공포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카운트다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누군가 한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다, 라고 그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하는 것이다. - P156

같은 무렵, 여의사의 책상 위에서는 콩팥 모양의 검은 돌이 자취를 감춘다. 그녀는 어느 날 아침, 그 돌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걸 안다. - P157

우선 실제적으로 불편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가는 것,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 P172

"질투의 마음이란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건 따위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다른 누군가를 질투하지 않는다든가,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니라서 질투를 한다든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그건 몸속의 종양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제멋대로 생겨나 이론 따위와는 상관없이 마구 퍼져가는 것이죠. 행복한 사람에게는 종양이 생기지 않는다든가 불행한 사람에게는 종양이 생기기 쉽다든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 P182

"질투의 감정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는건 무척 어려워요.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감정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것은 실제로, 작은 지옥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아요. 미즈키 선배가 그런 감정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그건 크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P183

"물론 나보다 좋은 조건을 타고난 사람들은 아주 많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딱히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사람이란 저마다 다른 거니까………." - P189

"아무튼 그런 게 가벼운 단계의 질투, 즉 시샘이에요. 하지만 심각한 단계에 이르면 얘기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아요. 마치 기생충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털썩 자리를 잡아버리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ㅡ당신의 후배가 말했듯이ㅡ 종양처럼 영혼을 깊숙이 파먹어요. 그렇게 해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죠. 그건 어떻게도 억제되지 않는 거라서 본인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 P189

흔히 하는 얘기가 있죠, 인생은 세 걸음 나아가고 두 걸음 물러서는 거라고. - P193

"네, 괜찮아요. 내 이름만 찾으면 그걸로 됐어요. 나는 거기에 담겨진 것들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거예요. 그게 내 이름이고 내 인생이니까요." - P211

"괜찮아. 나도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어. 언젠가는 내가 정면으로 마주했어야 할 일이야." - P212

"당신은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도 충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그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걸 모른 척해왔지요. 그런 사실에서 눈을 돌려버리고, 마음속의 작은 어둠 안에 쑤셔넣고 뚜껑을 닫아버린 채, 괴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안 좋은 일은 쳐다보지 않도록 하면서 살아왔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꾹꾹 억누른 채, 그리고 그런 방어적인 자세는 당신이라는 인간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당신은 누군가를 진지하게, 무조건적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 P209

"무엇보다 나 스스로 먼저 생각해봐야 할 일인 것 같아요." - P213

집에 돌아오자 미즈키는 원숭이에게서 되찾아온 ‘오자와 미즈키‘라는 낡은 이름표와 ‘안도(오자와) 미즈키‘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팔찌를 갈색 서류봉투에 넣어 테이프로 밀봉하고 벽장 안의 종이박스에 넣었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손 안에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다시 그 이름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일이 잘 풀릴수도 있고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게 바로 그녀의 이름이고 그밖에 다른 이름은 없는 것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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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는 상업도 물론 발달했지만 종교(기독교)의 영향력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듯하다. 상거래를 보다 효과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하기 위한 복식부기 회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종교를 가지고 있던 상인들은 신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부채를 별도로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 부채를 갚는 것을 속죄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나온다.

회계가 단순히 상거래를 기록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개개인이 신 앞에서 거짓없이 솔직해지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나름대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상거래와 종교적인 신앙이 서로 양립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나의 막연한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 때문인듯하다.

근데 또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나의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이 다소 올드(Old)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종교인 또는 성직자들도 엄밀히 말하면 사람인데 솔직히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의 목사든 절의 승려든 성당의 신부든 혹은 뭐 여타 다른 종교 또는 심지어 사이비 종교 교주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종교를 불문하고 헌금 많이 하는 성도나 신도를 보면 해당 종교의 종교인들도 그 사람을 보는 눈빛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여기서 추가로 더 얘기하다가는 얘기가 산으로 자꾸 갈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

복식부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회계는 도덕적 계산을 기록하는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삶의 본질이었다. - P56

종교는 계약을 토대로 한다. 인간은 신에게 조공을 해야 하며, 그것을 잊거나 게을리하면 심판의 순간에 벌을 받을 것이다. 이 심판에서 주어지는 상은 이익이 아니라 이승에서의 삶과 영혼의 영생이다. - P56

율법과 그것을 담은 복잡한 법전은 도덕적 계산의 모델이었다. 신봉자들은 도덕적·영적 계산을 통해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파악해야 했다. 탈무드 율법에는 모든 행동에 상응하는 도덕적 부채가 있다. - P57

그러나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장부 기록에 힘써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정리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그들을 위해 장부를 기록하고 있으니 무의미한 일일까? 생명의 책에는 의인의 이름을, 죽음의 책에는 하느님의 적들을 기록하는 건 결국 하느님이 아니시던가.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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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하나의 소제목당 분량을 정확히 3페이지로 끊어놓아서 부담없이 가볍게 읽어볼 수 있었다. 또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거나 느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있다.

간혹 독자에 따라서는 본문에 나온 이야기들이 다소 시시콜콜한(?) 얘기들이다보니 '이런 글을 굳이 뭣하러 시간내서 읽나' 등과 같은 회의적인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같은 것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크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쓴 다른 책들에도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본문을 읽다보면 간혹 작가가 좋아하는 뮤지션들과 더불어 그들과 관련된 노래제목들이 소개되는데, 이런 것들을 유튜브같은 곳에 검색해서 찾아들어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이런 노래들을 무심결에 들어보다가 내 취향에도 얼추 맞다 싶으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었다가 두고두고 들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간 몰랐던 즐거움들을 새롭게 아는 데서 오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음악관련 얘기 외에도 저자가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나 그 작가들에 대한 얘기들도 만나볼 수 있었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을 다 읽고나서 '왜 제목이《무라카미 라디오》일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독자인 내가 과거에 라디오를 들어봤던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자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사연들을 듣고 그에 대한 생각을 진행자가 코멘트해주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러한 라디오 프로그램 스타일로 이 책을 기획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사연들은 저자 한 사람이 일생동안 경험했던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가 비록 짧긴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들어가 있기에 그 속성이 라디오 방송과도 얼추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책 제목이 무라카미 라디오가 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보게 되었다. 책 후기에는 저자가 1년 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해서 발표했다고 나와있는데, 잡지에 연재하는 행위나 라디오로 주기적으로 방송하는 행위나 근본적인 속성은 비슷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아님 말고. 어쨌든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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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이 어릴적 포켓 트랜지스터(일종의 소형 라디오)를 활용하여 즐겨들었던 다양한 음악들에 관해 얘기한다. 팝송,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겁게 감상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이란 어떤 것인지 독자들에게 말해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도 머리를 식히거나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신나는 음악을 들었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실제로 나는 요근래에 팝송이 많이 수록된 책 한 권을 구해서 그 책에 소개된 팝송들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몇 곡씩 들어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 중 잠시라도 리프레시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기존에 하던 일이나 공부 등의 능률이 조금이나마 더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것이 과학적 근거 같은 게 전혀 없는 단지 기분 탓일수도 있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내가 느끼는 느낌이 중요한 걸.

음악이란 좋은 것이다. 음악에는 항상 이치와 윤리를 초월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와 함께 엮여진 깊고 아름다운 개인적인 정경(情景)이 있다. 이 세상에 음악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인생은(즉 언제 백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우리의 인생은) 더욱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 P108

해외 여행에는 뭔가 좀더 축제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 P109

한번 그런 식으로 내가 마음을 열고 나면, 잃어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에게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두렵지 않고, 특별히 화도 나지 않는다. 연못에 빠져 옷이 다 젖었는데, 누가 물을 또 뿌려 봐야 차갑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 P140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사람을 깊이 다치게 할까. 그것은 잘못된 칭찬을 받는 것이리라. 그런 칭찬을 받아 잘못되어 간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인간이란 타인에게 칭찬을 받으면, 거기에 맞추려고 무리를 하는 법, 그래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 버린 케이스가 적지 않다. - P141

버드나무는 날씬하고 우아하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눈(雪)에 부러지는 일이 없다‘는 말이 있다. 괜히 겉보기가 탄탄해 보이는 나무보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버드나무 쪽이 의외로 터프하다는 말이다. - P142

어째서 버드나무는 누군가를 위해서 울어 주지 않으면 안 될까? 영어권에서는 ‘버드나무‘는 weeping willow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weep이라는 말에는 ‘흐느껴 울다‘라는 본래의 의미말고 나뭇가지 같은 것이 늘어져 있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영미권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보면, ‘아아, 버드나무가 흐느껴 우는구나‘ 하는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버드나무라고 하면 이내 머리 푼 귀신을 연상하게 된다. 문화에 따라서 사물의 이미지는 상당히 달라진다. - P143

옛날 중국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살며시 건네주었다고 한다. 가지는 부드럽지만 좀처럼 부러지지 않기 때문에, 그 가지에 ‘돌아오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것 참 로맨틱하다. - P144

인간이라는 것은 아마 뭔가가 있어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여러 가지 것들이 쌓여 가면서 죽어 가는 것일 것이다. - P155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 속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 P154

챈들러 씨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좀 늘어 놓자면, ‘안녕‘을 말한 직후의 죽음은 실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 잠시 죽는 것은 자신이 ‘안녕‘을 말했다는 사실을 몸 한가운데에서 직면했을 때다. 이별을 말했다는 사실의 무게를 자기 자신의 일로서 실감했을 때, 그러나 대개의 경우,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주위를 한 바퀴 돌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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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6-08-04 0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
“To say goodbye is to die a little.”
― Raymond Chandler, <The Long Goodbye>

즐라탄이즐라탄탄 2026-08-04 06:39   좋아요 1 | URL
제가 독서력이 짧은지라 Raymond Chandler를 이 에세이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근데 에세이에서 이 유명하다는 대사의 출처를 별도로 알려주지 않아서 도대체 저 말이 어디 나온 말인가 하는 작은 궁금증이 있었는데, Jeremy님 덕분에 《The Long Goodbye(기나긴 이별)》이라는 작품에 나왔던 말이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