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목차를 비롯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대략 훑어보았는데, 아마도 영감을 주는 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예술을 만드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예술을 만들 수밖에 없는
멋진 상태에 놓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라.
-로버트 헨리 Robert Henri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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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화자인 주인공이 13살 소녀인 유키와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보통은 이런 문장을 만나면 이야기의 어떤 맥락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려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그냥 순수하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었다.

다소 주관적인 해석일수도 있겠만, 이 문장에 대한 독자인 나의 생각을 적어보자면,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경우에는 정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또는 ‘상황에 띠라 정상의 기준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라고도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굉장히 정상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엇나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거든." - P106

"사람과 사람이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 P107

그것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스타일이라는 걸 갖고 있어. 존경은 할 수 없어도 무시할 수는 없어. - P123

천둥은 약간 시끄러운 공중의 방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P126

"나는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야. 불완전하고, 항상 실수하거든. 하지만 배워.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그래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씩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왜 그럴까? 간단해.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고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그런 때에는 역시 약간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돼. 그리고 똑같은 실수를 세 번은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지.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건 분명해." - P126

나는 문득 결혼 생활을 생각해 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생활 중에는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고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런 때에는 아내 역시 내가 말을 걸어도 몇 시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그렇게나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일까, 하고 나는 곧잘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닌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런 때에는 참을성 있게 사과하고 설명하면서 그 상처가 아물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의 관계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마 나아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 P128

그녀가 내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집을 나가 버렸다. 그때뿐이다. 결혼 생활ㅡ그건 아주 기묘한 것이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소용돌이와 같은 거야, 딕 노스가 말하는 것처럼. - P128

"용서한 건 아니야"라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야. 그건 정말로 잘못된 일이었고 나는 큰 상처를 받았어. 알겠어?" - P128

"이를테면 네가 새라고 하자"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자.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자주 날 수가 없어. 날씨나 풍향이나 계절에 따라 날 수 있을 때와 날 수 없을 때가 있거든. 하지만 날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 힘도 남아돌고 초조해져. 자신이 부당하게 깎아내려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왜 날 수 없을까 하고 화도 나고 말이야. 이런 느낌이 이해돼?"
"이해돼"라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그럼 얘기는 간단해. 그게 성욕이야." - P133

"언제나 즐거워?"
"반드시 그렇진 않아"라고 나는 말했다. "불완전한 생물 둘이 모여 하는 일이니까, 언제나 잘될 수만은 없지. 실망하는 때도 있어. 기분 좋게 날고 있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치는 수도 있어." - P133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잘될 확률이 커져가" 하고 나는 계속 설명했다. "요령을 알게 돼. 날씨와 풍향을 측정할 수 있게 되지. 하지만 대체로 그에 비례해서 성욕 자체는 서서히 감소되어 가지. 그런 거야."
"비참해" 하고 유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하고 나는 말했다. - P134

나는 원래 키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선을 따라 흐름을 추적해 왔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틈엔지 이 모양이 되어 버렸다. 기묘한 사람들이 잇달아 나타나, 모든 일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 P135

갑자기 나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해서 바짝 말라 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 버린 것이다. - P141

"무력감" 하고 그녀는 말했다. "뭔가 거대한 것에 의해 휘둘리고 있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어쩔 도리가 없는 그런 기분." - P150

무엇과 무엇이 유사하다. 무엇과 무엇이 이어져 있다. - P153

모든 게 이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나만이 그 이음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P154

"왠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제나 죽음이라는 게 내 옆에 있어. 그리고 기회가 오면, 그것이 어느 틈엔가 문득 모습을 나타내거든." - P155

"전쟁할 때보다 평화로울 때가 훨씬 더 분주해요." - P156

"혼자서 해야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 P157

"자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생각하는 거야." - P158

아메는 그대로 잠자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연기를 빨아들인 건 두세 모금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어 잔디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은 내게 시간의 유해 같은 것을 상기시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시간이 잇따라 죽어 가며 불태워져 하얀 재로 변해 가는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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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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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인생도 없다. 자기 삶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절대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인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좌절들을 겪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나갈 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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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소설의 원제이자 비틀즈의 노래 제목 중 하나인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핵심 가사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곡에서도 그렇고 돌고돌아 결국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뭐랄까... 참으로 쓸쓸하면서도 궁극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느덧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 뒷부분에 나온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있는데, 본문을 읽으며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각자가 느낀 점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nd when I awoke I was alone(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임을 알았다)." - P425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를 생각하면 저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시킨 변화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 그 당시에 아주 대단한 큰일로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하고." - P428

돌아갈 곳 없이 홀로 외떨어진 존재들의 각개격파식 생존투쟁이 있을 뿐 - P429

"우리들은 이제 공동투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개개인의 자기 내면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한 번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자신을 이화異化시키느냐,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가느냐, 마치《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가 양을 삼킨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삼켜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P429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ㅡ그것뿐이었다." - P429

‘사랑‘을 찾아, ‘양‘을 찾아, 또는 ‘태엽 감는 새‘ 를 찾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인 ‘나‘는 어딘가 더 먼 곳으로 존재의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나‘가 찾아간 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텅 빈 세계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으로 향한 출구가 아닌 이 세계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며,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P430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어떤 시대적인 이념이나 관념의 목표를 상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자신과 혈육 그리고 친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소원과 이별, 그리고 죽음과 같은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상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머금고 길 위에 서 있는 자이다. - P430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전혀 만난 적 없는, 그러나 우리의 내면 속에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와 시대를 만나게 된다. - P430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 P431

존재를 좇는 모험은 끝없이 계속되고, 결국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같은 뫼비우스의 띠를 ‘나‘와 함께 계속 더듬어가는 것이다. 목적도 없이, 아무런 해결도 없이. 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텅 빈 세계에서 체념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재생‘과 ‘재활‘을 지향하며 다시 일어선다. 바로 그 점에 하루키 문학의 강점과 절대적인 매력이 있다 - P431

존재와 세계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길의 끝이 아니라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에게는 모험을 떠나는 여정들 그 자체가 바로 재생을 위한 작은 통과제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 P431

하루키 문학의 출발과 중심은 ‘실연失戀‘이라고 볼 수 있다 - P436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 또는 가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유). - P436

무릇 모든 ‘상처‘ 란 결국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아무리 행복한 모습으로, 또는 건강한 모습으로 남의 눈에 비치거나 비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해도, 가슴속에 응어리로 맺힌 상처는 곧 상실의 아픔이 되어 평생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 P437

타자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주고 깊이 사귄 결과로써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하루키 작품 속의 ‘나‘는, 그 이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자폐적이며 내향적인 삶을 보내면서 현실 사회에서 되도록 멀리 도망치려고 한다. - P437

흔히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라고 한다. 설사 그 ‘추억‘이 아로새겨진 체험 자체는 그 시점에서는 쓰리고 고통스런 것이었다고 해도 추억을 옛이야기로 말하게 될 때는, 지나온 시간이 여러 고통과 시련을 정화해버리고 감미로움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도 ‘나‘의 추억담으로 이야기되며, 그 추억이 형성됐던 시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이젠 먼 옛이야기로 사라져버리고 아주 달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 P438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사실로 꾸며진 이야기라고 해도 작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일은 쉽게 써질 수 없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작가의 직접 또는 간접의 체험과 사상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는 읽고 즐기는 것 이외에 그 값진 문학성이랄까 작품성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 P439

‘나‘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를 향해 묻는 것은, 결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그것은 존재의 근거에 대한 동요로서 받아들여지며, ‘나‘에게 있어 세계가 명확한 윤곽을 잃고 있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 P442

"사랑과 슬픔은 같은 길로 온다." _독일 속담 - P443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읽을 때마다 조금씩 새로운 매력이 보이는 데 있다." _《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스무 번 이상 읽은 이용성 씨 - P446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 - P447

무엇인가 결점이 있는 등장인물들이 자기 나름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하는 데 감명을 받았다. _한국에서 출간된 하루키의 작품을 열 번 이상 읽은 임선집 씨 - P448

"인생은 고통스런 일도 많지만, 사랑에 의존하면서 극복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그 소설(상실의 시대)에서 배웠다." _임선집 - P448

"아무도 타인은 남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랑과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문제에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도 하루키의 강한 메시지인데, 그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어보지 않고서는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_임선집 - P448

감성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호 이해가 진일보한다. - P451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하찮은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섬세한 관심을 통해, 오늘의 젊은이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 표출하는 데 있다. 이 점이 곧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그의 마성적인 매력이 되고 있다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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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그의 여사친 중 한 명인 미도리와의 대화가 쭉 이어진다. 미도리는 기존에 자신이 만나던 남자친구와 무언가가 맞지 않았는지 결별하기로 하고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쉽게 말해 여사친에서 여친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물론 와타나베도 미도리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고, 한동안(약 2달간) 떨어져 지내면서 이래저래 외롭고 쓸쓸했던 터라 미도리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던 타이밍이기도 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얼마만큼 좋냐고 물어보자 그에 대한 답으로 와타나베가 한 말인데, 표현이 좀 독특하긴 하지만 호감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명확해보인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마음 속에는 미도리 외에도 한 명의 여사친이 더 있었다. 바로 나오코다. 고교시절부터 기즈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친구이고, 이성적인 감정도 어느정도 있었던 터라 그녀를 쉽사리 떠나보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기즈키의 예상치 못한 죽음 이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외진 곳에서 요양 중이라 자주 만나는 것이 어려웠지만, 와타나베에게는 특별한 인연이었기에 나오코를 버리고 미도리에게 간다는 결정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 내용이 나온 챕터의 제목이 ‘갈등의 벼랑 끝에서‘ 인데, 개인적으로는 와타나베의 내면을 아주 잘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버릴 만큼 좋아." - P375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건 무섭도록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걷고, 호흡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뒤흔듭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 P379

온갖 일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진실하다면 누구도 미궁속에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 자신을 가져. - P380

연애란 원래 그런거야.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자연스럽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것도 하나의 성실한 모습이니까. - P380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며, 은행 예금처럼 그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나갈 순 없어. - P381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야. 이 드넓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마. 놔둬도 만사는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받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게 마련이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 P381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 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봐. 나(레이코)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고. 정말이야, 이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해봐. - P381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 - P381

그것은 내 탓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며, 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었다 - P383

돈이 떨어져가면 나는 사나흘 막노동을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벌었다. 어디를 가도 뭔가 할 일거리는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하나씩 이동해갔다. 세상은 넓고, 어디를 가든 이상한 일이나 기묘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 P384

그녀의 이미지는 밀물처럼 끊임없이 잇따라 나에게 밀려와서,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포옹할 수도 있었다. 그 장소에선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하고. - P386

나는 그런 장소에서는 슬픔이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봐, 걱정하지 마, 난 여기 있잖아? 하고 나오코는 수줍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사소한 몸짓이 내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치유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구나, 하고. 그래, 죽음이란 건 별거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게다가 나는 여기 있으니 아주 편안해. 어둠에 싸인 파도 소리 사이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다. - P386

‘죽음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P387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P387

어이, 기즈키. 너는 오래전에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지. 그리고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린 거야. 때때로 난 나 자신이 박물관의 관리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휑뎅그렁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 P390

고텐바(후지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관광 도시) - P392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아니야."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내가 거길 나올 수 있었던 건 나오코와 당신 덕분이야. 나는 나오코가 없는 그곳에 남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었고, 도쿄로 나와 와타나베와 한번 조용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거길 나온 거야.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평생 동안 거기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 P393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 P395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거지. - P399

"그 사람들, 이제 나와는 관계를 안 갖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질 테니까.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 P404

"나는 이미 끝난 인간이야. 와타나베 눈앞에 있는 건 나 자신의 남아 있는 기억에 지나지 않아. 내 속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어버렸고, 난 그저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야." - P404

"와타나베가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아픔 같은 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남은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느끼면 돼. 그래서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에서 뭔가 배우면 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 당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잖아.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지라고. 좀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거야. 난 와타나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요양원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먼 길을, 그 관棺같은 전철을 타고서." - P406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는 거야, 나도 당신도." - P406

"좋아, 와타나베. 이젠 쓸쓸한 장례식 생각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하고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장례식만을 기억해, 멋있었지?" - P409

"편지 같은 건 그저 종이일 뿐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 P413

우리는 살아 있었고, 계속 살아가는 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P413

"내 몫과 나오코의 몫까지 합친 만큼 행복해야 돼." - P413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 P414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P414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 P419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 P419

‘숲[森]‘이라는 회의문자會意文字는 분명히 나무 ‘목木‘이라는 상형문자 세 개를 조합한 것. - P419

흔들거리는 세 그루의 나무. 그것은 나무‘숲[森]‘이라는 한자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으면, 나무(木) 한 그루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흔들리며 움직이는 데 호응해서, 같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또 한 그루의 나무. 그러면 또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 한 그루도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그런 숲[森]의 나무(木) 세 그루를 조합해서 세워놓은 것과 같은 삼각관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 있다. - P419

《상실의 시대》는 한마디로, ‘나‘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형의 ‘사랑‘ 의 갈등을 그린 것 - P420

예로부터 연애소설이란 대개 ‘삼각관계‘를 둘러싼 끝이 없는 ‘도도메구리(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사나 불당의 주위를 도는 것)‘ 라고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만남, 진전, 예상 밖의 사태, 갈등, 파국, 추억,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짜맞추는 것으로서, 하루키는 ‘순도 100퍼센트의 연애소설‘을 써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100퍼센트 삼각관계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설사 두 사람만이 마주 보는 관계라고 해도, 상대의 눈 속에 비치는 또 하나의 ‘나‘를 거기에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420

인간은 두 사람만으로는 상대를 끝까지 떠받쳐줄 수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떠받쳐주기보다는 함께 쓰러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 P421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쓰러지려는 나무를 그 양편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준다는 구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상실의 시대》의 기본 틀이랄까, 원형이라고 할 뼈대를 이루고 있다. - P421

두 개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 있지만, 화살 세 개가 합쳐지면 부러뜨릴 수 없다 - P421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나가사와와 하쓰미라는 이상적인 커플조차도 마지막에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둘만의 마주 보는 관계는 결국 그 어느 쪽인가를 상처 입히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22

애절함과 자살이 이 소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있어서 다름 아닌 관계의 좌절이랄까, 서로가 공유하는 환상의 차질이라고 할 만하다. 때문에 그것은 ‘연애‘나 ‘성애性愛‘라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는 해결도 해소도 안 된다. 그런 두 사람의 ‘이각관계‘ 자체가 그런 마음의 병을 낳는 원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P42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단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제삼자라고 할 만한 존재인 것은 본래부터 아니다. 그것은 삼각의 형태로 만들어진 사람들끼리 관계 맺는 그물코가 차례차례 이어져가는 네트워크의 일부이며, 그와 같은 삼각형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 P422

정신을 앓는 것과 자살한다는 것은, 그러한 ‘숲‘ 속에서 갑자기 한 그루의 고독한 ‘나무‘로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삼각의 그물코가 터진 데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꿰매지 않고서는 고칠 수가 없다. - P422

불완전한 삼각관계야말로 나오코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세 발 달린 솥의 발 하나가 떨어져나가게 됨으로써 솥은 기울어져 넘어져버렸던 것이다. - P424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삶‘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직선을 더듬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가령 죽음이라면 죽음이라는 어떤 역방향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진 것이 아닐까 - P424

갖가지 모양으로 서로 얽혀있는 다양한 것이 ‘삶‘이라는 모양을 짜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이라는 다양한 무늬 속에 수많은 삼각형이 묻혀 있듯이, 서로서로 삼각형의 한 변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P424

‘나‘는 마지막엔 두 사람의 죽은 자를 ‘생‘의 측면에서 떠받치는 한 변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삶과 죽음의 양쪽 세계에 걸친 삼각관계에서는 죽음은 삶을, 삶은 죽음을 각각 빛 속의 그늘, 그늘 속의 빛처럼 서로 엇갈리며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 P424

멋있고 예쁜 그녀라는 존재도 혼잡스런 도시 속의 희미한 반딧불이처럼 바로 사라지고 마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 P425

울창한 숲 속에서 마치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는 것과 다름없는 고독. - P425

이 소설이 애절한 감상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애인이 죽고,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모든 애절하고 가슴을 저미는 추억이, 마치 꿈속에서 빚어진 일이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말기 때문이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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