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썼던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저자의 의도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저자가 소설을 쓰기 전에 소재가 될만한 것들을 간단히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에 저자의 책을 몇 권 완독했는데, 이 완독 덕택에 이 에세이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내용들이 좀 더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동안 읽었던 작품들 속에 숨겨져 있던 저자의 의도들을 보다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전부는 힘들더라도(마음같아서는 다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수 있기에) 몇 권은 읽고 이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해의 밀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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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밑줄친 문장 중에 ‘울면서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에 더해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했던 저자의 행동들을 보면서, 저자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창작의 고통과 인내 속에서 써내려간 글들이 결코 그냥 뚝딱하고 나온 것이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뻔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통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영어 속담(?)인 No pain, No gain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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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부분에는 저자가 자그마한 정원을 가꾸면서 썼던 일기들이 시간 순서에 맞춰 나온다. 정원을 손수 키워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법한 진솔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네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절하기 싫었어. - P52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_김광석 <나의 노래> - P53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54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 P55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 P56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 P57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 P57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 P58

함께 이별한 것 끌어안은 것
간절히 기울어져
붙잡았던 것 그러다
끝내 놓친 것
헤아릴 수 없네 - P67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 P69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 P70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 P71

나는 깨어난다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2

그러나 비명 소리 속에서
신음 속에서
울부짖음 속에서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3

희망이 있느냐고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런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 - P74

내가 나일 뿐이라면
나는 너를 만날 수 없지

너가 너일 뿐이라면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어 - P74

나는 결코 나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모든 걸 나는 살아내니까

너는 결코 너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너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너는 살아내니까 - P75

이상하지 않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두렵지 않아?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 - P75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수십억의 겹으로
부풀어 오르니까

수십억의 겹이
응축돼 단단해지니까 - P75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 P76

그런 공동주택들에서 햇빛이란 남동쪽이나 서북쪽 창을 통해 들어와서는 베란다나 거실, 방의 일부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걸치고 있다가 이내 완고한 콘크리트 벽뒤로 사라지는, 불완전한 방문을 반복하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 P93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리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 P95

매일, 매 순간, 매 계절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 - P97

매일, 매 순간 빛이 달라진다. - P105

죽지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면. 마침내 울창해진다. - P106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자라나 보다, 식물들은. (사람 아이들처럼.) - P111

거울의 빛을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거울이 반사한 빛을 한 번 더 반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빛이 비스듬히 잎들을 가로지를 때 행복한데, 이 감정은 아마 식물과 공생하도록 진화된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 P113

흙 위로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수 있다 - P115

정원을 키울 수는 없으니 내가 레고 인형처럼 작아졌다고 상상했다. 그럼 울창한 숲이겠지, 압도하는. - P116

뿌리에는 힘이 있다. - P117

크게 자랄 풀은 뽑아야 하지만 저렇게 작은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 P119

어느 쪽이든 건강하고 무성하니 그걸로 됐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 P121

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 P127

이제는 화분을 더 들이고 싶지 않다. 있는 식물들만이라도 잘 키우고 싶다. - P138

식물에 진딧물과 응애가 생기는 것이 물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듬뿍 물을 주었다. - P150

북쪽 벽을 초록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해주고 있다. - P160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 P166

충분히 살아냈어. - P166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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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맨 처음 나온 단편 소설 ‘밝아지기 전에‘ 초반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잠시 정리해보자면 일단 화자가 한 명 나오고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자의 딸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에게는 동생이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중학교 기간제 교사이고, 다른 한 명은 그냥 막내 여동생이라고 지칭된 인물이 있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여행을 갈 때 이 막내 여동생에게 자신의 자녀인 ‘윤이‘를 믿고 맡길 정도로 꽤나 신뢰가 있는 관계인듯 보인다.

한편 화자와 친한 은희 언니라는 사람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 은희 언니의 남동생은 급성 복막염으로 인해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은희 언니의 어머니는 몇 해 전 홀로 되었다고 하며 다리가 불편한 상황이다.

은희 언니는 남동생을 하늘 나라로 보낸 뒤 해외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다니다가 일 년 내내 여름인 해외의 어느 도시에 머물게 되는데, 화자인 주인공은 이런 은희 언니의 삶을 궁금해 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런 화자의 궁금증에 대한 은희 언니의 답변이다.

뭐가 됐든 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에 대해 간접적인 얘기만 듣는 것과 내가 직접 경험하면서 겪어보는 것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약간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그 밀도가 깊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소설 속 은희 언니도 독자인 나의 이런 생각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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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언니는 네팔, 인도, 미얀마 등과 같은 나라를 여행하는데,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 나온 운남성, 타클라마칸 사막, 양곤, 인레 호수, 바간의 거대한 사원 군락 등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관련된 사진들도 여러장 만나볼 수 있었는데, 자연 경관에 대한 여행 욕구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직접 가봐도 좋을 것 같다.

소설 속 이국적인 장소들을 얘기하다보니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내가 새롭게 느꼈던 점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작품들마다 결말 부분이 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 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 단편 소설의 경우는 좀 달랐다. p.37에 밑줄친 내용을 참조하면 좋은데, 부정적인 메시지를 긍정적인 메시지로 바꾸는 이 장면이 독자인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과학적인 근거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국 모든 것이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 각자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인생도 긍정적으로 잘 풀리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자꾸 안좋은 쪽으로 인생이 흘러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살다보면 객관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상황에 놓일지라도 나의 생각을 긍정적으르 바꾸고 안좋은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보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처음에는 꼬여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상황도 좋은 쪽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살다보면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을 쓰면서 ‘생각과 말(또는 글)과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한 번 봤었던 글인데, 오늘 독서를 통해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은 삼위일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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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수록된 ‘회복하는 인간‘ 이라는 단편 소설은 주인공이 발목 부분에 어떤 통증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소설의 제목처럼 이 통증이 비록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가 흘러가면 스토리가 너무 밋밋하다고 느낀건지 작가는 이 주인공이 자전거 타기를 유일하게 좋아했다는 설정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를 통해 순간순간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주인공이지만, 어느날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만 넘어져서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예전부터 만성적으로 느껴왔던 발목 부분의 통증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고 지금 느껴지는 통증만을 다시금 온 몸으로 자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다음으로는 이 소설에 나온 표현적인 측면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겠다. 일일이 나열하긴 좀 힘들지만 이 소설에서는 미래에 벌어질 어떤 일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모른다‘ 는 식의 문장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을 통해 저자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되는데, 심지어 이 죽음의 시점까지도 언제라고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끼던 자전거를 타다가 부상을 당해 죽을거라고 과연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매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살다가 때가 이르러 행복하게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면 그만한 호상이 또 어디있을까 싶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종교 쪽에도 문득 관심과 호기심이 생긴다. 관련된 책들을 만나고 읽어볼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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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온 단편 소설의 제목은 ‘에우로파‘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그리스 신화의 여성으로 유럽 대륙과 목성의 위성 유로파, 원소 유로퓸의 어원이 된 인물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 소설 속 본문을 읽다보면 목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저자는 이 ‘에우로파‘라는 단어를 목성의 위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화자인 ‘나‘와 ‘인아‘라는 인물 이렇게 둘이 주가 되어 대화가 이어지는데, 본문을 읽다보면 화자인 ‘나‘라는 인물이 외형은 남자인데, 성(性)정체성 같은 게 여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나‘와 ‘인아‘는 단순한 친구 그이상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듯 보인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표현같은 게 나와있진 않지만, 아마도 ‘나‘가 동성애 커플 가운데 남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커플들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일정 선을 넘을 수 없는 그런 좀 애매한(?) 관계가 마치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 속 결말도 뭐가 속시원하게 끝난다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게 어쩌면 ‘나‘와 ‘인아‘의 관계와도 비슷해보였다.

‘에우로파‘라는 용어는 아까 위에서 목성의 위성이라고 얘기했었는데, 여기서 위성의 본질을 잠깐 생각해보자면 위성은 행성의 근처에서 행성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지만, 행성과 결코 접하지는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가깝긴 하지만 결코 닿을 수는 없는 그런 관계를 상징하는 의미로 저자가 ‘에우로파‘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소설 속에 나온 ‘나‘와 ‘인아‘의 관계도 목성과 목성의 위성 간의 관계의 본질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나름대로 근거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생각과 비슷할지 여부를 100% 확신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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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나오는 단편 소설의 제목은 ‘훈자‘라는 것이었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이것이 ‘혼자‘라는 말의 오타 혹은 사투리 같은 것인줄 알았는데, 본문을 읽다보니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 인근에 위치한 소도시의 이름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기에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훈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참 이 소설집을 통해 생소한 지역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어떤 한 여자가 나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습관적으로 훈자를 생각하곤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훈자를 생각하게 만드는지는 독자인 나도 궁금하다. 뒷부분을 좀 더 읽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듯하다.

직접 겪어봐야지, 말로는 설명 못 해. - P15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 P16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9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 P19

이 길이 내 숨구멍이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눈비가 내려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를 제외하면 날마다이 산책로를 걸었다. 걸으면서는 되도록 생각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떤 사람들에 관한 기억은 자주 떠올랐다. - P20

변명하고 싶다. - P21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 P21

어떤 관계에나 존재하는 오해와 환상이 그녀와 나 사이에도 있었다. - P22

처음의 인상이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 P22

관계에 시간이 밴다는 것 - P29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32

지금 내가 있는 데가 오후 세 시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뿐인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며 으스러뜨려왔다는 것을. - P33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P35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 P37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전거를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타는 일 말고는 어쩌면 어떤 일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전거를 탈 때에만, 당신의 삶이 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행복이 매 순간 당신을 따돌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도 조용히 떨쳐졌다. - P55

그 기쁨을 기억하게 될까 봐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아찔한 속력을, 하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를 힘차게 달리던 감각을 기억해낼까 봐 당신은 두렵다. - P56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P57

이제야 살아나네요. - P59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 P60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 P61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 P62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3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65

휴일 오전에 직장인을 불러내는 건 범죄 행위란 거 알지? - P70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 P76

밖에 나가고 싶다. - P78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 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올리는 선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 P82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 P84

종종 나는 눈부신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진열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색색의 에나멜 구두들, 짧거나 치렁치렁한 치마들, 자잘한 큐빅들이 박힌 화려한 머리핀과 브로치 들이 저토록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P86

저런 것들을 믿으면 안 돼, 라고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냥, 환영 속을 걷는 거라고 생각해. - P86

불면증이 좋은 점도 있어. 연습할 시간이 끝없이 생겨난다는 거지. - P89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되어서 와. - P90

그들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 P92

그때였지,
내 심장에 차디찬 불이 당겨진 건.
한 꺼풀 비늘이
내 눈에서 힘껏 벗겨진 건. - P93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 P95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 P96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98

사실, 공연보다 더 좋은 건 혼자 있는 시간이야. 아마 누구나 그럴걸 - P100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 P100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 P102

낮게 날지 마. 그러다 죽어. - P109

훈자.
그렇게 깊이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 P110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습니다. - P111

그날 퇴근길에 그 여자는 가까운 대형 서점에 들러 《론리플래닛》 파키스탄 편을 찾았다. 영문판뿐이었고, 그나마 훈자에 관한 부분은 네댓 페이지에 불과했다. - P111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P112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 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112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여자는 훈자 인근 지역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첫번째 육로의 기점인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의 성소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끈질긴 내전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지인 훈자는 변함없이 조용할 테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육로는 안전하다고만 하기 어려웠다. - P116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여자는 이따금 등화관제와 야간 폭격, 소년들의 자살 폭탄 테러에 관한 악몽을 꾸었다. - P116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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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는 글은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처음 나오는 부분에서는 저자가 이사를 위해 창고 정리를 하다가 유년 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그 일기장에 적혀있던 사랑에 대해 쓴 짧은 시가 독자인 나의 눈길을 끌었다. 누가 봐도 어린 아이가 쓴 것 같은 순수함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 밑줄친 이 문장이 이 책의 뒷표지에도 큼지막하게 적혀있어서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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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보니 그동안 작가님이 썼던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었고, 거기에서 파생된 어떤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한 작품이 나오는데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투입되며, 그 작품의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작가님의 숨겨진 노력이 어떠했는지도 엿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한강 작가님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던 게 이 에세이에서 작가님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작가님이 쓰신 다양한 작품들을 읽고 나서 각각의 작품별로 작가님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별도의 코멘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나의 기대를 지금 읽는 이 에세이가 조금이나마 충족시켜준 것 같다.

이 에세이는 한강 작가님이 그동안 쓰셨던 작품들을 전부 다는 힘들더라도 대표작들을 몇 개 읽어본 뒤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작품들에서 작가님이 의도했던 바를 훨씬 더 깊이있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작가님이 코멘트한 작품들 중에 개인적으로는 《작별하지 않는다》외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다 완독을 한 상태에서 이 에세이를 접했기에 보다 심도있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작별하지 않는다》의 경우 초반부만 일부 읽다가 한동안 읽지 못했는데, 이 에세이를 통해 동기부여가 되어 쭉쭉 읽어나가볼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솔직한 마음같아서는 이 에세이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작별하지 않는다》를 완독하고 난 뒤 다시 이 에세이를 읽는 게 최선일 것 같긴 한데, 개인적으로 얼마전까지 작가님의 심도있는 작품을 5권정도 읽었더니 지금 시점에서는 잠시 쉬어가는 느낌으로 가볍게 읽고 싶다는 마음이 좀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이 에세이를 쭉 읽어나가는 게 비록 최선은 아닐지라도 현실적인 나의 상태에서 그나마 타협할 수 있는 차선책 정도는 될 것 같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P10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 P11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 ㅡ지금도 좋아한다ㅡ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P12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ㅡ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ㅡ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 P12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P13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 P13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 P14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 P14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ㅡ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ㅡ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 P15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 P16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 P17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P18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P19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P19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 P20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 P20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 P21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소년이 온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내가 이 소설(소년이 온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소년이 온다)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 P22

이 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 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 길을 걷는 동안 소설(작별하지 않는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 P23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 P24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 P24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 P24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P25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 - P26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 P26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 P26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P28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 P29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 P29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 P29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중략)...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 P34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 들어가 내면을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 P34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 P34

우리가 이 세계에서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 P34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 P35

소설이 출간되었다.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 P39

더 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이 소설에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자유를 얻으면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늘려가지 않아도 된다. - P41

가벼워진다.

더 가벼워진다.

뼈와 가죽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 P42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이제 멀어진 사람 같은 나의 소설을,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었는데, 결사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버텨주었는데, 나만 여기 남았구나. - P42

그런데 ‘나‘는 원래 누구였던가?
예전에 나였던 사람은 이미 이 소설로 인해 변형되었으므로 이제 그 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바꿔 물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텅 빈, 헐벗어 있는 이 사람은? - P42

오후 내내 누워 음악을 듣는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도 한다. - P43

한 가지 생각ㅡ결심ㅡ이 떠오른다.

다시 쓰면 된다, 소설을.
그것만이 다시 연결될 방법이니까. - P43

어쨌든 루틴이 돌아온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 P44

나는 더 이상 얼고 싶지 않다. - P45

나는 일어날 거야.
해처럼 떠오를 거야.
통증을 무릅쓰고
그걸 천 번 반복할 거야. - P45

소설을 써갈수록 점점 살게 되었다 - P46

마지막 장면에서 경하가 성냥 불꽃을 켰을 때 알았다. 이것(작별하지 않는다)이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걸. 깨어진 유리를 녹여 다시 온전한 덩어리로 만드는 불길인 걸. - P46

스스로 묻고 답하고 길을 찾으려 더듬어간 기록들이다. - P46

기도.
치고 들어오는 세계.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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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포장지를 뜯었을 때 느껴지는 향이 강렬합니다. 이후 뜨거운 물에 내려서 마셔보니 겉표지에 써있는 레몬티 향이 느껴져서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는 건지 그냥 커피맛 나는 레몬티를 마시는 건지 잠시 헷갈릴 정도 였습니다. 커피가 좀 식은 뒤에는 얼음을 넣어 아이스로도 마셔봤는데, 이때 은은한 살구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겉봉 마지막에 써있는 캐러멜 향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많이 느끼진 못했지만 레몬향과 살구향을 커피에서 함께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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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밑줄친 글은 이 책의 맨 앞에 인용된 시 구절인데, 뭔가 이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이 어떨지를 예상해볼 수 있게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 다소 답답한 상황이 연상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도《‘검은‘ 사슴》이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느정도는 어두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한강 작가님의 책을 몇 권 읽다보니 전반적으로 작가님이 쓰시는 글의 분위기가 밝은 쪽 보다는 어두운 쪽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체감하곤 한다. 이는 작가님이 작품을 쓰실 때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이나 상처 같은 쪽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처럼 보인다.

이제 시작인데 어떤 내용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작품 속에 온전히 젖어들어보길 바라면서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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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에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임의선, 명윤, 인영 이렇게 셋인데, 여기서 인영과 명윤은 회사 선후배 관계로 나오고 임의선이라는 인물은 약간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 의선은 제약회사에서도 일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정신이 이상해진건지 알몸으로 대학로를 질주하기도 하고 광화문 지하보도를 미친듯이 뛰어다니기도 하는 등 다소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좀 더 읽다보면 상황과 장소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탄광촌이 있다는 황곡시라는 곳에 살고있는 ‘장‘과 ‘안‘이라는 사람이다. ‘장‘과 ‘안‘은 8살 차이로 장이 나이는 더 많은데, 장이 거주하던 곳이 화재가 나는 바람에 어떻게 하다보니 안이라는 사내의 거주지에 얹혀사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안‘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장‘을 부하처럼 부리는 상황이다.

‘장‘의 본명은 장종욱인데, 이 사람은 과거 한 때 사진을 찍어서 책도 출간할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이 살던 집이 화재로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오랜 시간동안 찍어서 모아두었던 사진 필름들이 싹 다 전소되고 만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장종욱의 아내라는 사람은 장종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그를 유유히 떠나버린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던 명윤과 인영은 취재를 위해 취재대상을 물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황곡시 탄광촌의 장종욱과 연결이 된다. 명윤과 인영은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잡지의 한 섹션을 맡아서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데 이를 위해 장종욱과 인터뷰를 하면서 황곡시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취재한다. 근데 장종욱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들과 대화하자 명윤은 조금씩 불쾌감을 느끼지만 선배인 인영은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프로답게 인터뷰를 이어가고자 애쓴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 P5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없이 멀어져가는 허공의 푸른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 P10

부화되다 만 달걀은 일부러 찾아서 먹는 이도 있을 만큼 몸에 좋으며,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의 중절수술한 태아와 태반도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태반은 약으로 먹고 태아는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던가. - P16

케케묵은 이야기는 필요 없어. 구질구질한 얘기도 안 돼. 이제는 그런 게 안 먹혀. - P22

가족 아닌 사람의 주민등록등본이나 호적등본을 떼려면 본인의 위임장이 필요하며 주민등록증과 도장도 함께 가져가야 한다. - P25

가서 부딪쳐보는 거예요. - P29

기적이니, 좋은 예감이니 하는 따위, 그런 것들은 믿어본 적이 없어. - P29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잃을 수 있다고 하잖아. - P42

사진이 없는 글은 별 의미가 없는 잡지라는 인영의 설명에 그는 사진을 배워보겠다고 했다. 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최민식쯤은 알고 있다면서, 그깟 풍물 사진이야 어려울 게 있겠느냐고 지레 큰소리를 쳤다. - P47

명윤은 처음 의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수정하였다. 풍만한 여체 대신 좀 전에 보았던 깡마른 육체를, 벌거벗은 여자에게 쏟아지는 은밀하고 끈적끈적한 시선 대신 경악과 연민을 입력했다. - P50

그러나 그보다 더욱 명윤을 괴롭혔던 호기심은 그녀의 불가해한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침묵, 무수한 말과 형상들로 가득찬 듯한 침묵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영의 말대로 아무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일까. - P50

정신 치료에는 예술활동이 좋다고들 하지?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 P51

잘 알지도 못하는 의선이라는 여자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명윤의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더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줄어가는 예금 잔고에 대하여, 미래라든가 삶에 대하여, 앞으로 해야 할 것과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하여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금만 그런 생각을 진행하려 하면 명치에서부터 몸을 꼬며 틀어오르는 역겹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어둠과 비, 습기 찬 빨래만을 생각했다. - P56

그는 자신이 처음 들어와본 이 습기 차고 무더운 방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팔에 안긴 뜨겁고 끈적끈적한 육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땀인지 모르게 섞이어 젖은 자신의 손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물줄기에 부딪히는 햇빛만을 생각했다. - P66

날 삼켜버려요. - P66

......굳이 말로 써야 한다는 게 구차하고 귀찮아요.
구차하다니?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P71

"며칠 전부터 시작했지만 재미있어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영한사전하고 한영사전을 나란히 펴놓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영한사전을 아무데나 펼쳐서 단어를 찾아보고, 그 해설로 나온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는 식으로……………" - P72

명윤이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유복하게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빠져나온, 혹은 빠져나오려 하고 있는 그 구덩이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76

길에서 우는 사람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 일도 있었다. 얼마나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으면, 억지로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 P85

자신의 찌푸려진 내면에서 벗어나 갑자기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때 사람의 얼굴은 저렇게 투명해지는 모양이었다. - P94

과연 그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진정으로 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 있었던가. 그토록 분노하고 가슴 아파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던가. 어떤 과거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 의미 없는 사진들에 집착해왔던 자신을 나는 이상스러울 만큼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의선은 나의 사진들을 불태웠듯이,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태워 그 자리에 빈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 P95

열렬하게 지껄이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 빠르게 스쳐가는 여러 표정들이 불편한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 P95

어디로 간다고 해도 똑같지 않겠어요?
뭐가 달라지겠어요?
알아요. 조금 나은 정도겠죠. 하지만 어쩌면 그 조금이라는 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숨을 쉬는 게 힘이 드니까...... 이곳에서는 언제나, 앞사람이 가는 대로 벼랑 끝을 밟고 앞만 보고 가야 하니까요. - P96

하지만, 다른 곳에 가도 결국 마찬가지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 살해되고,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어린 여자애들이 몸을 팔고 있겠죠. 힘을 가진 큰 것들이 힘없는 작은 것들을 먹고 마시는 동안・・・・・・・ 그런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겠죠. 오히려 점점 심해지겠죠. - P96

내가 보기에 너는 단지 감상적일 뿐이야.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나지 않았니. 언제까지 젊음을 낭비하고 있을 생각이니.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면 거짓말이라도 해라. 똑바로 보는 척이라도 해. - P97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 P97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신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그 칠 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 P98

그때 이후로 나는 보는 눈뿐 아니라 기록할 수 있는 눈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백오십 분의 일 초 혹은 백이십오 분의 일 초라는 찰나를 감쪽같이 내 수중으로 훔쳐낼 수 있게 하는 사진기라는 기계에 나는 매혹되었다. 내가 훔치는 것은 피사체뿐만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시간과 빛이기도 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짧은 찰나가 영원이 되는 순간, 긴 침묵이 되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게 되는 순간의 매혹에 나는 빠져들었다. - P98

나는 사진이 좋아요.
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던 사진을 돌려주며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말이 없잖아요. 사진 속에는. - P101

언제나, 노리고 있던 ‘물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서 터져나온다. - P104

수없이 반복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인 긴장을 느꼈다. 긴장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미미한. 그러나 잘 살펴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마음의 떨림이었다. - P104

어떤 사진에건 작가가 피사체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5

떠나가는 모습을 찍으세요. - P116

남은 모습을 찍으면 되지 않습니까. - P117

희생이나 봉사는 타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P117

몸 없어지면 끝이야. 내 생각엔 그래... 아무것도 없어. - P120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무치는 일인가 - P123

일이 생겼다는 것은 핑계이리라. - P125

자신의 능력보다 쉬운 일을 하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생활을 가장 경멸해온 장이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것은 참으로 편안한 삶의 방식이었다. - P126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집단의 세가 커지면 자신의 힘이 함께 커진다고 생각 - P129

그것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라 자수성가한 안의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종종 ‘내가‘라고 해야 할 부분을 ‘우리가‘로 대치했다.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뒤끝이 없는 스타일이거든‘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그는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안이 ‘내 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에게 적당히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한다는 점이었다. 안이 이즈음 들어 장에게 표하는 거부감은 장이 고분고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었다. - P129

명윤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고통이나 병이나 죽음을 알아낼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 만큼 무력한 것이 사랑이었다. 지금 의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그가 전혀 알 수 없으며, 아무런 육체적 통증도 전하여지지 않듯이. - P141

필터에 가깝게 타들어갈수록 니코틴의 함량이 높아진다 - P151

"갱내는 미끄럽소. 당신네 같은 서울내기들은 상상도 못해. 섭씨 삼십팔 도도 넘는데다 습도가 구십 프로요. 일 년 내내 그렇소. 바닥이 꼭 비누질한 것 같지. 장화 신고 장갑 끼어도 방심할 수가 없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탄가루가 목을 팍팍 막는데, 거기서 여덟 시간 동안 막일들을 하는 거요." - P165

명윤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기회가 되어 술과 춤, 음악 소리, 부나비처럼 춤추는 젊은 애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속에 던져지면 고통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견딜수 없어하는 것은 폭발하는 쾌락의 분위기였다. 자신을 방기하며 음악 속으로 뛰어드는 한순간의 몰입을 그는 할 수 없었다. 그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몸을 흔들며 춤을 출 수 없었다. - P169

명윤이 학창 시절 공부에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연탄공장 골목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 P172

가차 없이 떠나야만 했다. 갖은 힘을 다하여 구덩이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자신의 삶의 싹이 도로 흙더미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그는 탈출을 꿈꾸었다. - P173

그러나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 땅을 떠난다해도, 아니 세상의 끝까지 간다 해도 그의 몸뚱이는 그의 몸뚱이일 것이다. 그가 떠나려는 것은 마치 감옥처럼 옥죄어오는 기억들을 떨쳐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려 하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174

명윤은 자신의 젊음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홀려보내고 있었다. - P174

"밤이란 원래 짧은 거니까, 그저 그동안 마지막 남은 열기를 다하는 거요."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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