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겪어봐야지, 말로는 설명 못 해. - P15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 P16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9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 P19
이 길이 내 숨구멍이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눈비가 내려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를 제외하면 날마다이 산책로를 걸었다. 걸으면서는 되도록 생각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떤 사람들에 관한 기억은 자주 떠올랐다. - P20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 P21
어떤 관계에나 존재하는 오해와 환상이 그녀와 나 사이에도 있었다. - P22
처음의 인상이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 P22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32
지금 내가 있는 데가 오후 세 시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뿐인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며 으스러뜨려왔다는 것을. - P33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P35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 P37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전거를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타는 일 말고는 어쩌면 어떤 일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전거를 탈 때에만, 당신의 삶이 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행복이 매 순간 당신을 따돌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도 조용히 떨쳐졌다. - P55
그 기쁨을 기억하게 될까 봐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아찔한 속력을, 하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를 힘차게 달리던 감각을 기억해낼까 봐 당신은 두렵다. - P56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P57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 P60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 P61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 P62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3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65
휴일 오전에 직장인을 불러내는 건 범죄 행위란 거 알지? - P70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 P76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 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올리는 선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 P82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 P84
종종 나는 눈부신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진열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색색의 에나멜 구두들, 짧거나 치렁치렁한 치마들, 자잘한 큐빅들이 박힌 화려한 머리핀과 브로치 들이 저토록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P86
저런 것들을 믿으면 안 돼, 라고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냥, 환영 속을 걷는 거라고 생각해. - P86
불면증이 좋은 점도 있어. 연습할 시간이 끝없이 생겨난다는 거지. - P89
그들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 P92
그때였지, 내 심장에 차디찬 불이 당겨진 건. 한 꺼풀 비늘이 내 눈에서 힘껏 벗겨진 건. - P93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 P95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 P96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98
사실, 공연보다 더 좋은 건 혼자 있는 시간이야. 아마 누구나 그럴걸 - P100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 P100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 P102
훈자. 그렇게 깊이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 P110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습니다. - P111
그날 퇴근길에 그 여자는 가까운 대형 서점에 들러 《론리플래닛》 파키스탄 편을 찾았다. 영문판뿐이었고, 그나마 훈자에 관한 부분은 네댓 페이지에 불과했다. - P111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P112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 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112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여자는 훈자 인근 지역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첫번째 육로의 기점인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의 성소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끈질긴 내전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지인 훈자는 변함없이 조용할 테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육로는 안전하다고만 하기 어려웠다. - P116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여자는 이따금 등화관제와 야간 폭격, 소년들의 자살 폭탄 테러에 관한 악몽을 꾸었다. - P116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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