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맨 처음 나온 단편 소설 ‘밝아지기 전에‘ 초반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잠시 정리해보자면 일단 화자가 한 명 나오고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자의 딸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에게는 동생이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중학교 기간제 교사이고, 다른 한 명은 그냥 막내 여동생이라고 지칭된 인물이 있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여행을 갈 때 이 막내 여동생에게 자신의 자녀인 ‘윤이‘를 믿고 맡길 정도로 꽤나 신뢰가 있는 관계인듯 보인다.

한편 화자와 친한 은희 언니라는 사람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 은희 언니의 남동생은 급성 복막염으로 인해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은희 언니의 어머니는 몇 해 전 홀로 되었다고 하며 다리가 불편한 상황이다.

은희 언니는 남동생을 하늘 나라로 보낸 뒤 해외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다니다가 일 년 내내 여름인 해외의 어느 도시에 머물게 되는데, 화자인 주인공은 이런 은희 언니의 삶을 궁금해 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런 화자의 궁금증에 대한 은희 언니의 답변이다.

뭐가 됐든 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에 대해 간접적인 얘기만 듣는 것과 내가 직접 경험하면서 겪어보는 것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약간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그 밀도가 깊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소설 속 은희 언니도 독자인 나의 이런 생각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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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언니는 네팔, 인도, 미얀마 등과 같은 나라를 여행하는데,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 나온 운남성, 타클라마칸 사막, 양곤, 인레 호수, 바간의 거대한 사원 군락 등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관련된 사진들도 여러장 만나볼 수 있었는데, 자연 경관에 대한 여행 욕구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직접 가봐도 좋을 것 같다.

소설 속 이국적인 장소들을 얘기하다보니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내가 새롭게 느꼈던 점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작품들마다 결말 부분이 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 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 단편 소설의 경우는 좀 달랐다. p.37에 밑줄친 내용을 참조하면 좋은데, 부정적인 메시지를 긍정적인 메시지로 바꾸는 이 장면이 독자인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과학적인 근거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국 모든 것이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 각자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인생도 긍정적으로 잘 풀리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자꾸 안좋은 쪽으로 인생이 흘러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살다보면 객관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상황에 놓일지라도 나의 생각을 긍정적으르 바꾸고 안좋은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보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처음에는 꼬여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상황도 좋은 쪽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살다보면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을 쓰면서 ‘생각과 말(또는 글)과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한 번 봤었던 글인데, 오늘 독서를 통해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은 삼위일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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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수록된 ‘회복하는 인간‘ 이라는 단편 소설은 주인공이 발목 부분에 어떤 통증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소설의 제목처럼 이 통증이 비록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가 흘러가면 스토리가 너무 밋밋하다고 느낀건지 작가는 이 주인공이 자전거 타기를 유일하게 좋아했다는 설정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를 통해 순간순간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주인공이지만, 어느날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만 넘어져서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예전부터 만성적으로 느껴왔던 발목 부분의 통증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고 지금 느껴지는 통증만을 다시금 온 몸으로 자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다음으로는 이 소설에 나온 표현적인 측면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겠다. 일일이 나열하긴 좀 힘들지만 이 소설에서는 미래에 벌어질 어떤 일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모른다‘ 는 식의 문장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을 통해 저자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되는데, 심지어 이 죽음의 시점까지도 언제라고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끼던 자전거를 타다가 부상을 당해 죽을거라고 과연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매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살다가 때가 이르러 행복하게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면 그만한 호상이 또 어디있을까 싶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종교 쪽에도 문득 관심과 호기심이 생긴다. 관련된 책들을 만나고 읽어볼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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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온 단편 소설의 제목은 ‘에우로파‘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그리스 신화의 여성으로 유럽 대륙과 목성의 위성 유로파, 원소 유로퓸의 어원이 된 인물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 소설 속 본문을 읽다보면 목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저자는 이 ‘에우로파‘라는 단어를 목성의 위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화자인 ‘나‘와 ‘인아‘라는 인물 이렇게 둘이 주가 되어 대화가 이어지는데, 본문을 읽다보면 화자인 ‘나‘라는 인물이 외형은 남자인데, 성(性)정체성 같은 게 여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나‘와 ‘인아‘는 단순한 친구 그이상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듯 보인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표현같은 게 나와있진 않지만, 아마도 ‘나‘가 동성애 커플 가운데 남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커플들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일정 선을 넘을 수 없는 그런 좀 애매한(?) 관계가 마치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 속 결말도 뭐가 속시원하게 끝난다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게 어쩌면 ‘나‘와 ‘인아‘의 관계와도 비슷해보였다.

‘에우로파‘라는 용어는 아까 위에서 목성의 위성이라고 얘기했었는데, 여기서 위성의 본질을 잠깐 생각해보자면 위성은 행성의 근처에서 행성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지만, 행성과 결코 접하지는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가깝긴 하지만 결코 닿을 수는 없는 그런 관계를 상징하는 의미로 저자가 ‘에우로파‘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소설 속에 나온 ‘나‘와 ‘인아‘의 관계도 목성과 목성의 위성 간의 관계의 본질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나름대로 근거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생각과 비슷할지 여부를 100% 확신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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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나오는 단편 소설의 제목은 ‘훈자‘라는 것이었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이것이 ‘혼자‘라는 말의 오타 혹은 사투리 같은 것인줄 알았는데, 본문을 읽다보니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 인근에 위치한 소도시의 이름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기에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훈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참 이 소설집을 통해 생소한 지역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어떤 한 여자가 나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습관적으로 훈자를 생각하곤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훈자를 생각하게 만드는지는 독자인 나도 궁금하다. 뒷부분을 좀 더 읽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듯하다.

직접 겪어봐야지, 말로는 설명 못 해. - P15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 P16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9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 P19

이 길이 내 숨구멍이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눈비가 내려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를 제외하면 날마다이 산책로를 걸었다. 걸으면서는 되도록 생각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떤 사람들에 관한 기억은 자주 떠올랐다. - P20

변명하고 싶다. - P21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 P21

어떤 관계에나 존재하는 오해와 환상이 그녀와 나 사이에도 있었다. - P22

처음의 인상이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 P22

관계에 시간이 밴다는 것 - P29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32

지금 내가 있는 데가 오후 세 시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뿐인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며 으스러뜨려왔다는 것을. - P33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P35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 P37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전거를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타는 일 말고는 어쩌면 어떤 일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전거를 탈 때에만, 당신의 삶이 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행복이 매 순간 당신을 따돌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도 조용히 떨쳐졌다. - P55

그 기쁨을 기억하게 될까 봐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아찔한 속력을, 하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를 힘차게 달리던 감각을 기억해낼까 봐 당신은 두렵다. - P56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P57

이제야 살아나네요. - P59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 P60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 P61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 P62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3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65

휴일 오전에 직장인을 불러내는 건 범죄 행위란 거 알지? - P70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 P76

밖에 나가고 싶다. - P78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 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올리는 선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 P82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 P84

종종 나는 눈부신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진열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색색의 에나멜 구두들, 짧거나 치렁치렁한 치마들, 자잘한 큐빅들이 박힌 화려한 머리핀과 브로치 들이 저토록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P86

저런 것들을 믿으면 안 돼, 라고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냥, 환영 속을 걷는 거라고 생각해. - P86

불면증이 좋은 점도 있어. 연습할 시간이 끝없이 생겨난다는 거지. - P89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되어서 와. - P90

그들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 P92

그때였지,
내 심장에 차디찬 불이 당겨진 건.
한 꺼풀 비늘이
내 눈에서 힘껏 벗겨진 건. - P93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 P95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 P96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98

사실, 공연보다 더 좋은 건 혼자 있는 시간이야. 아마 누구나 그럴걸 - P100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 P100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 P102

낮게 날지 마. 그러다 죽어. - P109

훈자.
그렇게 깊이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 P110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습니다. - P111

그날 퇴근길에 그 여자는 가까운 대형 서점에 들러 《론리플래닛》 파키스탄 편을 찾았다. 영문판뿐이었고, 그나마 훈자에 관한 부분은 네댓 페이지에 불과했다. - P111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P112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 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112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여자는 훈자 인근 지역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첫번째 육로의 기점인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의 성소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끈질긴 내전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지인 훈자는 변함없이 조용할 테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육로는 안전하다고만 하기 어려웠다. - P116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여자는 이따금 등화관제와 야간 폭격, 소년들의 자살 폭탄 테러에 관한 악몽을 꾸었다. - P116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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