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썼던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저자의 의도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저자가 소설을 쓰기 전에 소재가 될만한 것들을 간단히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에 저자의 책을 몇 권 완독했는데, 이 완독 덕택에 이 에세이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내용들이 좀 더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동안 읽었던 작품들 속에 숨겨져 있던 저자의 의도들을 보다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전부는 힘들더라도(마음같아서는 다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수 있기에) 몇 권은 읽고 이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해의 밀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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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밑줄친 문장 중에 ‘울면서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에 더해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했던 저자의 행동들을 보면서, 저자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창작의 고통과 인내 속에서 써내려간 글들이 결코 그냥 뚝딱하고 나온 것이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뻔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통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영어 속담(?)인 No pain, No gain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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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부분에는 저자가 자그마한 정원을 가꾸면서 썼던 일기들이 시간 순서에 맞춰 나온다. 정원을 손수 키워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법한 진솔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네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절하기 싫었어. - P52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_김광석 <나의 노래> - P53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54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 P55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 P56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 P57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 P57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 P58
함께 이별한 것 끌어안은 것 간절히 기울어져 붙잡았던 것 그러다 끝내 놓친 것 헤아릴 수 없네 - P67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 P69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 P71
나는 깨어난다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2
그러나 비명 소리 속에서 신음 속에서 울부짖음 속에서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3
희망이 있느냐고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런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 - P74
내가 나일 뿐이라면 나는 너를 만날 수 없지
너가 너일 뿐이라면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어 - P74
나는 결코 나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모든 걸 나는 살아내니까
너는 결코 너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너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너는 살아내니까 - P75
이상하지 않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두렵지 않아?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 - P75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수십억의 겹으로 부풀어 오르니까
수십억의 겹이 응축돼 단단해지니까 - P75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 P76
그런 공동주택들에서 햇빛이란 남동쪽이나 서북쪽 창을 통해 들어와서는 베란다나 거실, 방의 일부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걸치고 있다가 이내 완고한 콘크리트 벽뒤로 사라지는, 불완전한 방문을 반복하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 P93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리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 P95
매일, 매 순간, 매 계절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 - P97
죽지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면. 마침내 울창해진다. - P106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자라나 보다, 식물들은. (사람 아이들처럼.) - P111
거울의 빛을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거울이 반사한 빛을 한 번 더 반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빛이 비스듬히 잎들을 가로지를 때 행복한데, 이 감정은 아마 식물과 공생하도록 진화된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 P113
흙 위로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수 있다 - P115
정원을 키울 수는 없으니 내가 레고 인형처럼 작아졌다고 상상했다. 그럼 울창한 숲이겠지, 압도하는. - P116
크게 자랄 풀은 뽑아야 하지만 저렇게 작은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 P119
어느 쪽이든 건강하고 무성하니 그걸로 됐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 P121
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 P127
이제는 화분을 더 들이고 싶지 않다. 있는 식물들만이라도 잘 키우고 싶다. - P138
식물에 진딧물과 응애가 생기는 것이 물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듬뿍 물을 주었다. - P150
북쪽 벽을 초록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해주고 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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