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밑줄친 글은 이 책의 맨 앞에 인용된 시 구절인데, 뭔가 이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이 어떨지를 예상해볼 수 있게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좀처럼 오지 않는, 다소 답답한 상황이 연상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도《‘검은‘ 사슴》이다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느정도는 어두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한강 작가님의 책을 몇 권 읽다보니 전반적으로 작가님이 쓰시는 글의 분위기가 밝은 쪽 보다는 어두운 쪽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을 체감하곤 한다. 이는 작가님이 작품을 쓰실 때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이나 상처 같은 쪽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처럼 보인다.

이제 시작인데 어떤 내용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작품 속에 온전히 젖어들어보길 바라면서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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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에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임의선, 명윤, 인영 이렇게 셋인데, 여기서 인영과 명윤은 회사 선후배 관계로 나오고 임의선이라는 인물은 약간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 의선은 제약회사에서도 일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정신이 이상해진건지 알몸으로 대학로를 질주하기도 하고 광화문 지하보도를 미친듯이 뛰어다니기도 하는 등 다소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좀 더 읽다보면 상황과 장소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탄광촌이 있다는 황곡시라는 곳에 살고있는 ‘장‘과 ‘안‘이라는 사람이다. ‘장‘과 ‘안‘은 8살 차이로 장이 나이는 더 많은데, 장이 거주하던 곳이 화재가 나는 바람에 어떻게 하다보니 안이라는 사내의 거주지에 얹혀사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서 ‘안‘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장‘을 부하처럼 부리는 상황이다.

‘장‘의 본명은 장종욱인데, 이 사람은 과거 한 때 사진을 찍어서 책도 출간할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이 살던 집이 화재로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오랜 시간동안 찍어서 모아두었던 사진 필름들이 싹 다 전소되고 만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장종욱의 아내라는 사람은 장종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그를 유유히 떠나버린다.


한편 앞에서 언급했던 명윤과 인영은 취재를 위해 취재대상을 물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황곡시 탄광촌의 장종욱과 연결이 된다. 명윤과 인영은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잡지의 한 섹션을 맡아서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데 이를 위해 장종욱과 인터뷰를 하면서 황곡시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취재한다. 근데 장종욱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들과 대화하자 명윤은 조금씩 불쾌감을 느끼지만 선배인 인영은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프로답게 인터뷰를 이어가고자 애쓴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김형영,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 P5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없이 멀어져가는 허공의 푸른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 P10

부화되다 만 달걀은 일부러 찾아서 먹는 이도 있을 만큼 몸에 좋으며, 마찬가지 이치로 사람의 중절수술한 태아와 태반도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태반은 약으로 먹고 태아는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던가. - P16

케케묵은 이야기는 필요 없어. 구질구질한 얘기도 안 돼. 이제는 그런 게 안 먹혀. - P22

가족 아닌 사람의 주민등록등본이나 호적등본을 떼려면 본인의 위임장이 필요하며 주민등록증과 도장도 함께 가져가야 한다. - P25

가서 부딪쳐보는 거예요. - P29

기적이니, 좋은 예감이니 하는 따위, 그런 것들은 믿어본 적이 없어. - P29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기억력을 잃을 수 있다고 하잖아. - P42

사진이 없는 글은 별 의미가 없는 잡지라는 인영의 설명에 그는 사진을 배워보겠다고 했다. 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최민식쯤은 알고 있다면서, 그깟 풍물 사진이야 어려울 게 있겠느냐고 지레 큰소리를 쳤다. - P47

명윤은 처음 의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수정하였다. 풍만한 여체 대신 좀 전에 보았던 깡마른 육체를, 벌거벗은 여자에게 쏟아지는 은밀하고 끈적끈적한 시선 대신 경악과 연민을 입력했다. - P50

그러나 그보다 더욱 명윤을 괴롭혔던 호기심은 그녀의 불가해한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침묵, 무수한 말과 형상들로 가득찬 듯한 침묵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영의 말대로 아무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일까. - P50

정신 치료에는 예술활동이 좋다고들 하지?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 P51

잘 알지도 못하는 의선이라는 여자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명윤의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더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줄어가는 예금 잔고에 대하여, 미래라든가 삶에 대하여, 앞으로 해야 할 것과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하여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금만 그런 생각을 진행하려 하면 명치에서부터 몸을 꼬며 틀어오르는 역겹고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어둠과 비, 습기 찬 빨래만을 생각했다. - P56

그는 자신이 처음 들어와본 이 습기 차고 무더운 방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팔에 안긴 뜨겁고 끈적끈적한 육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땀인지 모르게 섞이어 젖은 자신의 손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물줄기에 부딪히는 햇빛만을 생각했다. - P66

날 삼켜버려요. - P66

......굳이 말로 써야 한다는 게 구차하고 귀찮아요.
구차하다니?
말이라는 게 원래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P71

"며칠 전부터 시작했지만 재미있어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영한사전하고 한영사전을 나란히 펴놓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처럼・・・・・・ 영한사전을 아무데나 펼쳐서 단어를 찾아보고, 그 해설로 나온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는 식으로……………" - P72

명윤이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것은 유복하게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빠져나온, 혹은 빠져나오려 하고 있는 그 구덩이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76

길에서 우는 사람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 일도 있었다. 얼마나 평소에 눈물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으면, 억지로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 P85

자신의 찌푸려진 내면에서 벗어나 갑자기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때 사람의 얼굴은 저렇게 투명해지는 모양이었다. - P94

과연 그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진정으로 내 마음에 흡족했던 것이 있었던가. 그토록 분노하고 가슴 아파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던가. 어떤 과거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 의미 없는 사진들에 집착해왔던 자신을 나는 이상스러울 만큼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의선은 나의 사진들을 불태웠듯이,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태워 그 자리에 빈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 P95

열렬하게 지껄이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 빠르게 스쳐가는 여러 표정들이 불편한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 P95

어디로 간다고 해도 똑같지 않겠어요?
뭐가 달라지겠어요?
알아요. 조금 나은 정도겠죠. 하지만 어쩌면 그 조금이라는 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숨을 쉬는 게 힘이 드니까...... 이곳에서는 언제나, 앞사람이 가는 대로 벼랑 끝을 밟고 앞만 보고 가야 하니까요. - P96

하지만, 다른 곳에 가도 결국 마찬가지겠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 살해되고,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어린 여자애들이 몸을 팔고 있겠죠. 힘을 가진 큰 것들이 힘없는 작은 것들을 먹고 마시는 동안・・・・・・・ 그런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겠죠. 오히려 점점 심해지겠죠. - P96

내가 보기에 너는 단지 감상적일 뿐이야. 이제 그럴 나이도 지나지 않았니. 언제까지 젊음을 낭비하고 있을 생각이니. 현실을 직시할 수 없다면 거짓말이라도 해라. 똑바로 보는 척이라도 해. - P97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 P97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신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그 칠 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 P98

그때 이후로 나는 보는 눈뿐 아니라 기록할 수 있는 눈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백오십 분의 일 초 혹은 백이십오 분의 일 초라는 찰나를 감쪽같이 내 수중으로 훔쳐낼 수 있게 하는 사진기라는 기계에 나는 매혹되었다. 내가 훔치는 것은 피사체뿐만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시간과 빛이기도 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짧은 찰나가 영원이 되는 순간, 긴 침묵이 되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게 되는 순간의 매혹에 나는 빠져들었다. - P98

나는 사진이 좋아요.
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던 사진을 돌려주며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말이 없잖아요. 사진 속에는. - P101

언제나, 노리고 있던 ‘물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서 터져나온다. - P104

수없이 반복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인 긴장을 느꼈다. 긴장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미미한. 그러나 잘 살펴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마음의 떨림이었다. - P104

어떤 사진에건 작가가 피사체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5

떠나가는 모습을 찍으세요. - P116

남은 모습을 찍으면 되지 않습니까. - P117

희생이나 봉사는 타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P117

몸 없어지면 끝이야. 내 생각엔 그래... 아무것도 없어. - P120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무치는 일인가 - P123

일이 생겼다는 것은 핑계이리라. - P125

자신의 능력보다 쉬운 일을 하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생활을 가장 경멸해온 장이었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것은 참으로 편안한 삶의 방식이었다. - P126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집단의 세가 커지면 자신의 힘이 함께 커진다고 생각 - P129

그것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라 자수성가한 안의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종종 ‘내가‘라고 해야 할 부분을 ‘우리가‘로 대치했다.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뒤끝이 없는 스타일이거든‘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그는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안이 ‘내 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에게 적당히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한다는 점이었다. 안이 이즈음 들어 장에게 표하는 거부감은 장이 고분고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었다. - P129

명윤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따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고통이나 병이나 죽음을 알아낼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 만큼 무력한 것이 사랑이었다. 지금 의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그가 전혀 알 수 없으며, 아무런 육체적 통증도 전하여지지 않듯이. - P141

필터에 가깝게 타들어갈수록 니코틴의 함량이 높아진다 - P151

"갱내는 미끄럽소. 당신네 같은 서울내기들은 상상도 못해. 섭씨 삼십팔 도도 넘는데다 습도가 구십 프로요. 일 년 내내 그렇소. 바닥이 꼭 비누질한 것 같지. 장화 신고 장갑 끼어도 방심할 수가 없소. 가만히 있기만 해도 탄가루가 목을 팍팍 막는데, 거기서 여덟 시간 동안 막일들을 하는 거요." - P165

명윤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기회가 되어 술과 춤, 음악 소리, 부나비처럼 춤추는 젊은 애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속에 던져지면 고통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견딜수 없어하는 것은 폭발하는 쾌락의 분위기였다. 자신을 방기하며 음악 속으로 뛰어드는 한순간의 몰입을 그는 할 수 없었다. 그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몸을 흔들며 춤을 출 수 없었다. - P169

명윤이 학창 시절 공부에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연탄공장 골목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 P172

가차 없이 떠나야만 했다. 갖은 힘을 다하여 구덩이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자신의 삶의 싹이 도로 흙더미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그는 탈출을 꿈꾸었다. - P173

그러나 떠난들 어디로 가겠는가. 이 땅을 떠난다해도, 아니 세상의 끝까지 간다 해도 그의 몸뚱이는 그의 몸뚱이일 것이다. 그가 떠나려는 것은 마치 감옥처럼 옥죄어오는 기억들을 떨쳐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려 하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P174

명윤은 자신의 젊음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홀려보내고 있었다. - P174

"밤이란 원래 짧은 거니까, 그저 그동안 마지막 남은 열기를 다하는 거요."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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