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P10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 P11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 ㅡ지금도 좋아한다ㅡ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P12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ㅡ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ㅡ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 P12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P13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 P13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 P14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 P14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ㅡ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ㅡ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 P15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 P16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 P17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P18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P19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P19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 P20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 P20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 P21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소년이 온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내가 이 소설(소년이 온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소년이 온다)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 P22
이 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 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 길을 걷는 동안 소설(작별하지 않는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 P23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 P24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 P24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 P24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P25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 - P26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 P26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 P26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P28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 P29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 P29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 P29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중략)...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 P34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 들어가 내면을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 P34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 P34
우리가 이 세계에서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 P34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 P35
소설이 출간되었다.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 P39
더 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이 소설에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자유를 얻으면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늘려가지 않아도 된다. - P41
가벼워진다.
더 가벼워진다.
뼈와 가죽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 P42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이제 멀어진 사람 같은 나의 소설을,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었는데, 결사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버텨주었는데, 나만 여기 남았구나. - P42
그런데 ‘나‘는 원래 누구였던가? 예전에 나였던 사람은 이미 이 소설로 인해 변형되었으므로 이제 그 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바꿔 물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텅 빈, 헐벗어 있는 이 사람은? - P42
오후 내내 누워 음악을 듣는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도 한다. - P43
한 가지 생각ㅡ결심ㅡ이 떠오른다.
다시 쓰면 된다, 소설을. 그것만이 다시 연결될 방법이니까. - P43
어쨌든 루틴이 돌아온다. 매일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 문장들의 밀도로 다시 충전되려고.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과 걷기를 하루에 두 시간씩 한다, 다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 P44
나는 일어날 거야. 해처럼 떠오를 거야. 통증을 무릅쓰고 그걸 천 번 반복할 거야. - P45
마지막 장면에서 경하가 성냥 불꽃을 켰을 때 알았다. 이것(작별하지 않는다)이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걸. 깨어진 유리를 녹여 다시 온전한 덩어리로 만드는 불길인 걸. - P46
스스로 묻고 답하고 길을 찾으려 더듬어간 기록들이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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