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상조 맞습니다. 하지만 시기상조라는 건 언젠가는가야 할 길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패도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실패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겁니다."
"솔직하게 얘기해 볼까요? 사주는 회사의 미래 따윈 관심없습니다. 골병이 들어도 제값만 받으면 되고 썩어 문드러져도 팔기 전까지만 버텨주면 되니까요."
"그 결정 결국 회사의 고혈을 짜 사주의 배를 채워주기위함 아닙니까?"
".......지금 뭐라고?" 김강현의 입에서 마침내 노성이 터졌다. "감히! 일개 팀장 따위가!" 쿠당탕!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선 김강현. 그 기세에 의자가 넘어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나를! 이 김강현이를 음해하려 들어?" 난 알고 있다. 의도치 않은 순간 진심을 들킨 사람은 당황한다.
특히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이 진심을 찔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역겨운 진심을 찔렸을 때 역설적인 분노를 터뜨린다. 그래서 난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잔잔한 파도처럼 고요한 눈빛으로 끊임없이 진실을 고백하는 김강현을 바라보았다.
오전 임원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은 다 한 번씩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물론 날 향해 각자 제각각의 조언들을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너무 심했다. 하지만 정말 후련했다.‘
"뭐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아뇨, 맞는 말이죠. 처맞는말." 난 씩 웃었다.
"사주만 주인인가요? 전 직원도 회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요." "아, 예." "PAI가 경영을 했나요? 아니죠. 결국 이 회사는 직원들이 피땀으로 일군 회사란 말이에요."
"지금 와서 사주가 회사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막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런데 팀장님 한방에 자를 수 있는게 사주예요, 그건 생각 안 해요?" 경하나가 밥숟가락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나서요. 나 팀장님 다른 회사 가는 거 싫어요!"
"궁지에 몰린 사냥감은 사냥개도 문답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물어보려고요. 김강현이라는 사냥개 말이에요."
"많이 다칠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모두가 더 심한 일을 겪게 될 겁니다."
"매각에 차질이 생기면 급해지는 건 사주 쪽입니다. 매각 불발이 계속되면 저 말도 안 되는 매각 금액도 점점 낮아질 겁니다."
"이 위기가 바로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잡으려면 힘을 모을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내 하나 물어보지. 자네 말다 맞는 말인데 딱 한 가지가 이해가 안 돼." "네?" "자네 이 회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 회사란 일을 하는 공간일 뿐. 회사와 개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보통은 개인을 선택한다. 그러니 유제국도 경하나도 임원들도 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갈 수있는 길이 많은데 파도 앞에 곧 가라앉을 것 같은 회사에서 떠날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래, 알겠네. 내 기꺼이 우리 여 팀장의 장기 말이 되도록 하지." 난 놀란 눈으로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큰일 날 농담을 하십니까?" 유제국의 얼굴에 아주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진심이야. 여 팀장이 서라고 하는 자리면 나 죽을 곳이라도 기꺼이 설 생각이거든."
지난 직원들과의 비밀스러운 모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거론된 카드 중 하나가 바로 파업이었다. 하지만 난 목소리를 드높여 파업이라는 선택지를 찢어버렸다.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피해를 받는 건 사주보다 회사이기에 난 그 방향을 선택할 수 없었다. 유제국에게 말했듯 파업을 배제하고도 내겐 쓸 수 있는 수많은 카드가 있다. 하나하나의 카드들이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는 알 수 없지만.
단 하나,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이긴다.‘
김강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똑똑하고 일 잘하는 부하보다, 멍청해도 주인을 무서워할줄 아는 부하가 훨씬 믿음직하다는 걸.
"동출아?" 김강현의 입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서슬 퍼런 검을 쥐여줬지만 함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저 어리숙함마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임은 다 내가 지는 거야. 넌 그냥 지시에 따르면 되는거고. 문제 될 게 있나?" "아...... 아닙니다." 무능하고 물러터졌지만 김강현은 알고 있다. 이놈은 결코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걸. "너랑 나랑 이대로 쭉 가는거야. 넌 잘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러니까 이번 매각 성사되면 우리가 받을 거만 생각해."
김강현은 만족스레 웃었다. 서동출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녀석은 자신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더러운 꼬리를 덮어줄 놈이었다.
"....이거." 호영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이 놀라고 당황하면 정말 목구멍이 턱 막힐 수도 있다는 걸 지금 깨닫는 중이었다.
아무리 직원들이 뜻이 모였다곤 하지만 상대는 직원들의 목줄을 쥔 자들. 위협적으로 다가올 인사 조치 앞에 초연한 월급쟁이는 없다.
여준선의 저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 누구도 기울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균형추가 급격히 이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뭐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에 보통은 이렇게까지는 안 하걸랑요?" 남자가 쓰게 웃었다. "어쩌다가 그 살벌한 대통령 인수위 심기를 거스르셨을까? 우리 김강현 씨가?"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떨리는 김강현의 눈동자는 보았다. 미소 속에 감춰진 악랄한 비웃음을. 그리고 무력화된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표정을.
기울기 시작한 여론은 밑그림이었을 뿐이다. 이제 그 위에 멋진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수사기관이 먼저 움직였다. 난 잘 알고 있다. 수사기관은 충분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히 들끓는 여론만으론 김강현을 저런 식으로 끌고 갈리가 없다.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의 해답은 서동출에게 있었다. "그 사람들한테 자료 다 넘겼어요. 동원 엔진에서 김강현에게 흘러 들어간 뒷돈, 그리고 PAI와 약속한 부당 리베이트까지요." 그랬다. 김강현은 결국 가장 믿었던 서동출에 의해 파멸을 맞이했다.
여론을 주도하고 방송을 내보내고 내부 고발자에 의해 대표가 구속되고. 게다가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유니콘 매각 과정을 지켜보고 있음을 먹었다가는 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진까지 탈탈 털릴 수도 있는 뜨거운 감자를 함부로 삼키려는 자는 없었다.
길고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금액을 올리려는 쪽과 내리려는 쪽. 작은 결정, 생각 없이 튀어 나간 한마디에 수십억이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도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필요한 건 투자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삼전으로서는 상당히 흥미로울 만한 투자죠." "투자라..."
즉 담보를 내건다면 천억원 융통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투자수익에 목마른 금융사든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는 자산가든 부족한 매각 대금을 댈 상대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삼전의 유중호, 유경호. 태어나자마자 다이아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이들이자 어느 집단에서나 중심에 서왔던 인물들.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들이자 일거수일투족에 수천 수백의 밥그릇이 오락가락하는 자들이지만. 이 자리는 투자를 논하는 자리. 즉 지금 여기서 나와 그들은 대등하다.
난 현대사회 귀족 중 귀족을 손에 쥔 기분에 가슴 한구석에서 호승심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애써 억눌렀다. 굳어가려는 표정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큰일을 협의하는 대등한 자리에서 불필요한 감정을 내세우는 건 아주 멍청한 짓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 전 오만석이 보여주었던 그 큼직한 모터,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떨어뜨려 망가뜨릴 뻔했던 그 녀석. 그 정도 크기와 출력이 가전제품에는 굳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얼마 전 오만석에게 최종 확인을 받았다. 그 큼직한 MSO 모터를 베이스로 전기차의 핵심인 강력한 전기 모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자동차에 미련을 가졌지만 엔진 기반 자동차 시장엔 진출할 수 없는 삼전. 전기차의 핵심인 강력한 모터기술을 가진 유니콘. 그리고 근시일 내 유망 산업이 될 전기차. 세 가지 사실은 오직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건 모양새일 뿐. 하지만 우린 MSO 모터의 기술을 삼전에 팔 생각이 없다. 삼전 단독으로 전기차를 개발해 엄청난 이익 중 극히 일부만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1차 투자금은 계약금의 성격으로 회사 매입에 쓸 계획입니다만 본 투자는 유니콘이 아닌 다른 곳에 하시게 될 겁니다." "다른 곳이요?" 난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어내 유중호를 바라보았다. "양사의 공동 투자를 통해 합자회사를 만들 생각이거든요." 말을 마치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오만석에게 받은 후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던 목걸이. 아주 작고 귀여운 MSO 목걸이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전기차의 핵심이 될 혁신적인 모터입니다. 강력하고 조용하며 내구성이 압도적인 물건이죠. 이건 그 모터를 아주 작게 줄여놓은 겁니다." 유중호가 손을 뻗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자기 손에 달린 MSO 모터를 살폈다.
"삼전의 이름이 남아 있는 이상 자동차로 성공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두 형제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프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삼전의 첫 번째 자동차 사업은 모두의 관심과 기대를 한꺼번에 모았지만. 그들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실패가 IMF의 영향이건 기존 업체의 단단한 입지 때문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한 번의 실패로 인해 삼전의 이름에 달라붙어 버린 부정적 인식이다. "삼전 같은 대기업일수록 사람들의 인식은 고착됩니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겠죠. 따라서 삼전의 이름으로 다시 자동차를 시작한다면 절대 성공하지못합니다."
"하지만 합자회사라면 다르죠. 게다가 혁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쌓아온 유니콘이 파트너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엔진 기반의 자동차 회사는 대기업의 전유물이지만 전기차는 다르다. 전기차는 미래를 선도할 산업이기에 중요한 건 기업 규모가 아닌 기술력과 혁신성. 그러니 강력한 대기업이 독점해놓은 시장이라도 두 가지만 있다면 시장에 파고들 수 있다.
도움과 투자.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르다. 삼전으로부터 받아낼 것이 둘 중 무엇인가에 따라 앞으로 관계가 결정되고 미래가 완전히 뒤바뀐다. 특히나 삼전과의 의사소통을 하는 채널이 유경호였기에 그는 이런 단어 선택에 특히 신경을 써야 했다.
삼전 입장에서 천억 원은 큰 무리가 없는 돈. 리스크보다는 기회를 보고 걸어볼 만한 금액이었으니까.
금수저답지 않게 소탈하고, 적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으며, 그렇게 알게 된 상대를 위해 제법 날카로운 지적까지 할줄 아는 녀석. 고작 가전 분야의 마케팅팀장이라는 직함에 충실하며모든 결정에 항상 자신의 형을 떠올리는 심성 착한 녀석. 그것이 내가 아는 유경호의 본모습이었다. 그런 녀석이라면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녀석은 가전 분야에 묶여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결정했다. 이 녀석을 파트너로 키워보기로. 그 첫 포석이 전기차 합작의 키를 녀석에게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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