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에 하는 거구나. 이런 맛이구나. 아마 할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넌 그냥 운동 부족이야. 운동해. 그럼 좋아져. "아프면 쉬어야지." "머리는 써도 몸은 앉아서 계속 쉬기만 했잖아. 사실상 그게 쉬는 게 아니라 혹사였지만 말이지. 그래서 지금 몸이쑤시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오정득은 길게 토를 달지 않고 바로 납득했다. "요즘 일은 좀 어때?" 나의 물음에 녀석은 인상은 살짝 찡그리면서도 웃음을 흘렸다. "나야 똑같지 뭐. 맨날 앉아서 숫자만 보고 있으니 지겹지. 그래도 이제 슬슬 바쁜 시즌 지나가서 좀 괜찮아." 녀석은 회계사다. 현재는 흔히 빅4라고 말하는 회계법인 중 한 곳에서 재직 중이다.
"세금은 나한테 맡겨. 내년부터 바로 복식부기 대상자가 되길 기원하마." "복식...... 뭐?"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세금은 나한테 맡기라고." "그래, 앞으로 네 건강은 내가 책임지마."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도 몇 년씩 혹은 평생 안 보기도 한다. 차라리 별로 안 친해도 서로 예의를 차리면 오래 가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친구 관계를 오래 이어가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친구라는 게 꼭 도움이 되고 말고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계속 옆에 남아 있으면 그게 친구지.
오정득은 지금껏 특별한 이유 없이도 계속 내 옆에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상부상조도 가능할 것 같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알아볼 것들이, 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나 사업하는 게 아니구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알아보고 있는 단계인데도 체력이 쭉쭉 빠졌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 일이니까. 하는 만큼 온전히 내 것이 되니까. 이 맛에 사업하는구나. 시작 전에도 이런데, 제대로 시작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대신 안 풀리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괴롭겠지만.
운명처럼 다가왔고, 현재는 내가 원해서 뛰어들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내가 전수받은 능력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까. 제대로 써먹지 않으면 도로 뺏길 수도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것 중 하나가 건강이다. 그걸 보장받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수 있고, 잘만 된다면 사욕 또한 채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차후에 또 다른 선물까지 더 받을 수도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선물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 볼 심산이었다. 해야 됐고, 하고 싶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철저하게 확인을 거듭한다고 나쁠 건 없지.
"제 노동에 대한 대가를 거래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끊겠습니다." 사장이 나를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마음을 고쳐먹은 뒤로는 가능한 트러블을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웬만하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둥글둥글하게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니, 당연한 권리인데 내가 독해져야 한다는게 웃겼다.
장문의 문자메시지였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34,094,700. 내가 사장으로부터 받을 돈이었다. "엇, 생각도 못한 금액에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사장이 입에 거품 물고 지랄할 만했다.
남들한테 10원 한 닢 쓴 것까지 생색을 내는 치사한 짠돌이가 갑자기 수천만 원을 토해내야 하니 속이 얼마나 쓰리겠는가. 아마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 개처럼 일한 보람이 있었다.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수당을 다 챙겨받았으면 지난 6년 7개월이 보다 수월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적금을 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갑자기 목돈이 생기니 소변이 마려운 듯 하반신이 간질거렸다. 삶이 정말 드라마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업자금이 생겼다.
사장이 지불해야 될 돈 전부를 입금했다. 질질 끌까 봐 마음이 쓰였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끝났다. 직원들 등쳐먹어서 손에 쥐고 있던 돈이 꽤 되니 이 정도야 바로 지불할 수 있었겠지. 워낙 사실관계가 분명해서 버텨봤자 방도가 없으니 바로 입금한 걸 테고.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것도좋았지만, 그걸 떠나서 시작이 좋다는 게 기뻤다. 운이 따르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하긴,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순간부터 운이 트였지. 나는 기쁜 마음을 내색치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가요?" "아, 그러엄."
"이걸로만 해서는 소용없거든. 뭐 구두계약도 효력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펜대를 굴려야 확실하지 않겠나?"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를 자랑하듯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확실히 할 건 해야 되는 거니까." "아, 예. 그럼요. 확실히 할겁니다. 마음 굳혔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와서 계약서 쓸 텐가?" "예.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업자까지 불러서 계약 진행하지."
"저번에 알려준 게 제일 좋은 거 아니었어?"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바뀌어서요."
"그게 바뀌기도 하나?" "병원에서도 약을 바꿔가면서 쓰잖아요? 음식도 골고루먹어야 좋고요.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정도 효과를 봤으니, 다른 방법으로 더 끌어내는 거죠." 민간요법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같은 증상이나 질병을 호전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상황에 맞는 처방이다. 같은 사람에 같은 질환이라도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게 달라질 수 있었고, 나는 그걸 진단하는게 가능했다.
내가 처방하는 민간요법은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공급하여 면역력과 자가치유력을 증진하여 호전시키는 거였다.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 "이제부터는 미나리랑 오미자차를 매일 드세요." "미나리랑 오미자차?" "예. 미나리가 지방간에 좋습니다. 속에 탈이 났을 때도 좋고 무기력증에도 좋아요."
"혈압 좀 있으시죠?" "조금. 아무래도 고지혈증이 있으니 혈관이 뭐, 썩...... "미나리가 고혈압에도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오미자차도혈액순환에 좋습니다. 기억력에도 도움을 주고, 시력을 개선하며 입 마름에도 좋죠. 그리고......" 나는 조금은 능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한테 좋습니다." "그, 그래? 얼마나?" "또 압니까? 늦둥이 보실 수 있을지." "예끼, 이 사람아!"
"몸에서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르거든요. 물론,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몸에 좋은 것을 먹는다고 나쁠 일은 드물겠죠. 하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이잖습니까?" 나는 입가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사장님이야 언제든 저 보러 오실 수 있잖습니까? 제가 그때그때 알맞게 말씀드릴게요."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진단을 해야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얼굴만봐도 병명이 딱딱 나오고, 신체 어디가 안 좋은지 훤히 보인다. 진단이라기보다는 스캔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엄청난 능력이 더 기가 막히게 됐다. 이 능력도 근육 같은 건가? 사용하면 할수록 발달하는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공력이 내게로 옮겨져 오고 이제야 자리를 잡은 건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보다 정확하고 쉽게 알 수 있는데 나쁠게 없지. 새삼 기적의 능력임을 다시 느낀다.
내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삶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변할지 기대된다. 발걸음의 가벼움은 즐거움에 비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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