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친 글 중에 ‘소망은 소망일 때 아름답고 현실은 늘 이상을 배반한다‘는 문장이 굉장히 와닿게 느껴졌다.


"우리 오빠지만 이럴 때 보면 참 미련해요. 무작정 찾아간다고 돌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닐 텐데."
같은 남자이자 그 역시 한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유경호는 전적으로 여준선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미련해야죠. 여태 경 팀장님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더 미련해야죠." 그의 대답에 김현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제주 렌터카 사업은 수익 창출이 아닌 국민들의 관심과 여론을 끌어내기 위함.
그리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여론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자들이 있었다. 국내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국내 완성차 업계.
그들의 반발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

소망은 소망일 때 아름답고 현실은 늘 이상을 배반한다.
언젠가 들어본 그 말이 뼈에 사무치는 순간이었다.

"전 너무 행복해요. 하루하루가 마치 꿈만 같아요. 왜 그런줄 알아요?"

"서...... 설마 카페가 대박이 나서?"
"아니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경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냐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엔 검지손가락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손가락이정확히 내 심장을 가리켰다.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까요."

"어......."
잠깐 반칙 반칙.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기 있냐?
경하나의 조용한 목소리는 내 귀로 들어와 머리와 심장을 온통 뒤죽박죽 뒤집어 놓았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
그래서 가벼워진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과함께 그녀와 함께했던 요 며칠이 떠올랐다.

카페를 닫자는 생각도, 알바를 쓰자는 생각도 한순간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간질간질 올라오는 알 수 없는 행복이 채워나갔다.

"......그런가요? 그럼 계속해보죠 뭐. 하하."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렸다. 지금 내 얼굴 아마 많이 바보 같은 표정일 거다.

"의도된 것 같다는 그 얘기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 그런말 새어나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12월 미국 대부분의 지역이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추워진 날씨 덕에 차량 배터리소모가 늘어났다. 또한 상온에 최적화된 배터리였기에 동절기엔 가뜩이나 일정 수준의 성능 저하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귀신같이 일주일새 7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지역 중엔 춥지 않은 곳도 있었기에 그간 단 한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던 화재가 이 시기에 몰렸다는 건 누군가의 ‘의도‘를 의심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상대의 의도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섣불리 대응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의도에 말려들기 시작하면 게임은 일방적으로 불리해진다.
그리니 지금 필요한 건 정확한 조사 그리고 경영자의 결단뿐.
"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일단 화재 조사 부분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전문가를 알아봅시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요."
"전문가를요?"
"네. 어차피 벨로프 자체 조사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대응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맛에 하는 거구나.
이런 맛이구나.
아마 할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넌 그냥 운동 부족이야. 운동해. 그럼 좋아져.
"아프면 쉬어야지."
"머리는 써도 몸은 앉아서 계속 쉬기만 했잖아. 사실상 그게 쉬는 게 아니라 혹사였지만 말이지. 그래서 지금 몸이쑤시는 거야."

"그래? 그렇구나."
오정득은 길게 토를 달지 않고 바로 납득했다.
"요즘 일은 좀 어때?"
나의 물음에 녀석은 인상은 살짝 찡그리면서도 웃음을 흘렸다.
"나야 똑같지 뭐. 맨날 앉아서 숫자만 보고 있으니 지겹지. 그래도 이제 슬슬 바쁜 시즌 지나가서 좀 괜찮아."
녀석은 회계사다. 현재는 흔히 빅4라고 말하는 회계법인 중 한 곳에서 재직 중이다.

"세금은 나한테 맡겨. 내년부터 바로 복식부기 대상자가 되길 기원하마."
"복식...... 뭐?"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세금은 나한테 맡기라고."
"그래, 앞으로 네 건강은 내가 책임지마."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도 몇 년씩 혹은 평생 안 보기도 한다. 차라리 별로 안 친해도 서로 예의를 차리면 오래 가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친구 관계를 오래 이어가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친구라는 게 꼭 도움이 되고 말고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계속 옆에 남아 있으면 그게 친구지.

오정득은 지금껏 특별한 이유 없이도 계속 내 옆에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상부상조도 가능할 것 같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알아볼 것들이, 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나 사업하는 게 아니구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알아보고 있는 단계인데도 체력이 쭉쭉 빠졌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 일이니까. 하는 만큼 온전히 내 것이 되니까.
이 맛에 사업하는구나.
시작 전에도 이런데, 제대로 시작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대신 안 풀리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괴롭겠지만.

운명처럼 다가왔고, 현재는 내가 원해서 뛰어들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내가 전수받은 능력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니까. 제대로 써먹지 않으면 도로 뺏길 수도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것 중 하나가 건강이다. 그걸 보장받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수 있고, 잘만 된다면 사욕 또한 채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차후에 또 다른 선물까지 더 받을 수도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선물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 볼 심산이었다.
해야 됐고, 하고 싶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철저하게 확인을 거듭한다고 나쁠 건 없지.

"제 노동에 대한 대가를 거래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끊겠습니다."
사장이 나를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대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마음을 고쳐먹은 뒤로는 가능한 트러블을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웬만하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둥글둥글하게 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니, 당연한 권리인데 내가 독해져야 한다는게 웃겼다.

장문의 문자메시지였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34,094,700.
내가 사장으로부터 받을 돈이었다.
"엇, 생각도 못한 금액에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사장이 입에 거품 물고 지랄할 만했다.

남들한테 10원 한 닢 쓴 것까지 생색을 내는 치사한 짠돌이가 갑자기 수천만 원을 토해내야 하니 속이 얼마나 쓰리겠는가. 아마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
개처럼 일한 보람이 있었다.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수당을 다 챙겨받았으면 지난 6년 7개월이 보다 수월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적금을 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갑자기 목돈이 생기니 소변이 마려운 듯 하반신이 간질거렸다.
삶이 정말 드라마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업자금이 생겼다.

사장이 지불해야 될 돈 전부를 입금했다. 질질 끌까 봐 마음이 쓰였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끝났다.
직원들 등쳐먹어서 손에 쥐고 있던 돈이 꽤 되니 이 정도야 바로 지불할 수 있었겠지.
워낙 사실관계가 분명해서 버텨봤자 방도가 없으니 바로 입금한 걸 테고.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것도좋았지만, 그걸 떠나서 시작이 좋다는 게 기뻤다. 운이 따르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하긴,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순간부터 운이 트였지.
나는 기쁜 마음을 내색치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은가요?"
"아, 그러엄."

"이걸로만 해서는 소용없거든. 뭐 구두계약도 효력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래도 펜대를 굴려야 확실하지 않겠나?"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를 자랑하듯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확실히 할 건 해야 되는 거니까."
"아, 예. 그럼요. 확실히 할겁니다. 마음 굳혔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와서 계약서 쓸 텐가?"
"예.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업자까지 불러서 계약 진행하지."

"저번에 알려준 게 제일 좋은 거 아니었어?"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바뀌어서요."

"그게 바뀌기도 하나?"
"병원에서도 약을 바꿔가면서 쓰잖아요? 음식도 골고루먹어야 좋고요.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정도 효과를 봤으니, 다른 방법으로 더 끌어내는 거죠."
민간요법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같은 증상이나 질병을 호전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상황에 맞는 처방이다. 같은 사람에 같은 질환이라도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게 달라질 수 있었고, 나는 그걸 진단하는게 가능했다.

내가 처방하는 민간요법은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공급하여 면역력과 자가치유력을 증진하여 호전시키는 거였다.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
"이제부터는 미나리랑 오미자차를 매일 드세요."
"미나리랑 오미자차?"
"예. 미나리가 지방간에 좋습니다. 속에 탈이 났을 때도 좋고 무기력증에도 좋아요."

"혈압 좀 있으시죠?"
"조금. 아무래도 고지혈증이 있으니 혈관이 뭐, 썩......
"미나리가 고혈압에도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오미자차도혈액순환에 좋습니다. 기억력에도 도움을 주고, 시력을 개선하며 입 마름에도 좋죠. 그리고......"
나는 조금은 능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한테 좋습니다."
"그, 그래? 얼마나?"
"또 압니까? 늦둥이 보실 수 있을지."
"예끼, 이 사람아!"

"몸에서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르거든요. 물론,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몸에 좋은 것을 먹는다고 나쁠 일은 드물겠죠. 하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이잖습니까?"
나는 입가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사장님이야 언제든 저 보러 오실 수 있잖습니까? 제가 그때그때 알맞게 말씀드릴게요."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진단을 해야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얼굴만봐도 병명이 딱딱 나오고, 신체 어디가 안 좋은지 훤히 보인다.
진단이라기보다는 스캔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엄청난 능력이 더 기가 막히게 됐다.
이 능력도 근육 같은 건가?
사용하면 할수록 발달하는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공력이 내게로 옮겨져 오고 이제야 자리를 잡은 건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보다 정확하고 쉽게 알 수 있는데 나쁠게 없지. 새삼 기적의 능력임을 다시 느낀다.

내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삶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변할지 기대된다.
발걸음의 가벼움은 즐거움에 비례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래 속에 품은 게 많은 사람은 새 출발이 어려운 겁니다."

"품은 게 많은 사람은 새 출발이 어렵다....... 그거 참 좋은 말이네요."

‘지금 난 그녀가 버린 과거일 뿐‘
힘들었던 삶을 떠나 선택했던 경하나의 긴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힘듦에 나 역시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러니 치유를 위한 여행 중에 끼어든 내가 반가울 리 없다.
그녀는 내게 떠날 것을 요구했고 난 완강히 거부했다.
늘 일에 치어 살았던 나였기에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맘대로 하세요."

불타던 땔감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어차피 당신은 또 일에 매달릴 거예요. 그럼 전 또 기다리겠죠. 언제 끝날지, 언제 돌아올지 약속도 하지 못하고 전 매일매일 말라 비틀어질 거예요."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전 이미 마음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그만해요.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 여준선 답지 않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상력과 위트가 만화의 핵심이라면, 유교의 핵심은 현실과 엄숙함이다. 둘의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유교적 가치관은 언제나 만화를 폄하하고 모함한다. 유교의 엄숙주의는 만화 자신이 지닌 두 가지 속성 때문에 일본만화를 거부한다. 하나는 일본 만화가 지닌 허풍과 경박성 때문이다. 그러나 허풍과 경박성은 뒤집어 말하면 놀라운 상상력과 위트이기도 하다. - P191

‘지브리‘, 사하라 사막의 열풍이란 뜻이다. - P192

한국사회가 일본 만화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일본 만화가갖는 폭력과 선정성에 앞서서 유교적인 엄숙주의의 가치관 때문이다. 맹자라는 사나이가 한 ‘충실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는 선언은 유교 엄숙주의의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 P192

요시로 요시타케는 『만화의 기호론』에서 만화의 미학을 이런 논조로 파헤치고 있다.
"만화는 과장과 디포르메(변형), 생략을 통해 독자의 비위를 맞춘다. 이들 만화 기호는 사람들의 소망, 의지, 이상, 실의, 악의 형체를 띠고 나타난다. 허풍 속에 마침내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바로 허풍의 미학이다." - P193

고정된 가치관을 기준으로 애니메이션이 지닌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예술적 기능,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겸허를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런 표현이 일부 싸구려 만화영화에 해당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P193

유교의 엄숙주의가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색상에 있다. 잘 알다시피 동양의 그림은 산수화로 대표된다. 그리고 산수화에는 단 2가지의 색, 흑과 백만이 용납된다. 그리고 이 흑과 백은 사고의 흑백 논리를 낳게 된다. 사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옳고 그름만을 단순하게 가른다. 퍼지적인 유연성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바로 흑과 백의 배합이다. - P194

물론 이 흑과 백은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다. 먹이 주도하는 검정은 사실 단순한 무채색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색채를 포용하는 종합색이다. 빛이 하나의 색처럼 보이지만 프리즘을 통해 볼 때 다양한 색상으로 나뉘는 것처럼 먹의 색 역시 다양함의 융합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색채의 범주 안에 들지 않는 색이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존재 아닌 존재다.
백색은 빛을 의미한다. 동양화에서 백색은 여백을 통해 표현된다. 그런데 이 여백은 단순히 먹이 닿지 않는 나머지의 공간만은 아니다. 먹의 흑색과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빛의 공간이며 조물주의 공간이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밑줄친 문장 중에 ‘삶이라는 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노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회사에서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험을 들어놨다.
야근을 할 때면 꼭 사진이나 동영상 따위를 찍었다. 누가 내 밥그릇을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머리가 굵어질 즈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 6년 7개월 동안 입사했다가 뭐 같다며 그만둔 사람들의 연락처도 알고 있다.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는 못해도 사이는 괜찮다. 누군가 얼마나 가깝냐고 묻는다면, 내 근무시간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만큼은 가깝다.

지방간에 좋은 것들과 고지혈증에 좋은 것들이 수십 가지가 떠올랐다. 떠오르는 것들 모두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다.

"일단 식초를 드시면 좋으실 겁니다."

"아무 식초나 드시면 되는게 아니고, 사과식초여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유기농 천연발효식초로 드세요. 점심 저녁으로 식전에 한 숟가락씩 드시는데, 그냥 드시기는 힘드니까 미지근한 물에 타서 드세요."

"한 가지 더요. 쐐기풀이랑 질경이를 같이 넣어서 차로 우려서 드세요."
"쐐기랑 질경이를?"
"예. 신체 내의 항염에도 좋고, 대사기능을 자극하여 지방간에도 도움을 줍니다. 식후에 한 잔씩 드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쐐기랑 질경이는 얼마나 넣으면 되지?"
"한 잔에 각각 4그램에서 6그램 사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술 드시면 안 됩니다. 당분간 가능하면 붉은 고기도 좀 자제하시고요. 아무리 좋은 치료법을 써도 근본적인 게 안 고쳐지면 아무 소용없어요."
"아, 알았어. 노력해 볼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력해 보시는 게 아니라,
술은 무조건 끊으셔야 합니다.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끊으세요. 그리고 나아지시면 조금씩, 가끔만 드시는 거고요. 일단 건강 챙기셔야죠."
"알았어. 거, 우리 집 마나님처럼 잔소리하네."

"잠도 푹 주무시고요. 그럼 고지혈증이랑 지방간 둘 다 좋아질 겁니다."
"그래, 고마워."

당장 건강원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아주 얇디얇아 판자 정도에 불과했고, 마그마처럼 솟아오르는 설렘이 더 컸다.
능력 같은 것들 떠나서 새로운 시작 자체에 큰 의미를 가졌다. 평생 남 밑에서만 오지게 굴렀는데, 처음으로 사장이 되는 거였으니까.

나는 건강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 특유의 약 달이는 냄새와 후끈한 열기가 싫었다.

-건강원이 뭔데?
-강아지랑 염소, 개구리, 달팽이, 토끼, 자라, 고양이 같은 거 죽여서 먹는 데야.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계속 놀림감이 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당하게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처음 얘기를 꺼낸 녀석의 가슴팍을 밀치면서 성질을 냈다. 그러자 녀석이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을 건드렸다.
-엄마도 없는 새끼가!
그 말에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녀석이 눈으로 투명한 즙을 짜고, 코에서는 포도즙을 콸콸 쏟아낼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팼다.

할머니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말들을 곱씹고, 할아버지가 강조했던 게 무엇인지를 되새긴다.
삶이라는 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노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혈색도 좋고, 피부도 깨끗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만 본다고 해서 전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 다른 부위를 살펴야되기도 했고, 특정 증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더욱 정확한 진단이 가능했다. 그러다 노무사의 오른쪽 귀밑, 턱뼈 뒤쪽이 살짝 부어 있는 게 보였다.
침샘염 혹은 침샘비대증.
운이 나쁘다면 결석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종양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귀아래가 좀 부으신 거 같은데."
"아, 이거요."
노무사는 부은 쪽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요즘 계속 피곤해서 임파선이 좀 부은 거 같아요."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예? 의료 계통 종사자는 아니시잖아요?"
"의사는 아닌데, 이쪽으로 조금 알아서요."
"예, 뭐...... 그러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